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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모세오경

[신 5:16] 어버이 섬김은 복의 지름길!



너희 어버이를 잘 받들어 섬겨라!
주/야웨 너희 하나님이 명하신 바이다.
그러면 너희의 날수가 길 터이요

주/야웨 너희 하나님이 너희에게 준 그 땅에서
너희가
잘 될 것이다.
 
(구약 신명기 5:16 사역)  

어버이를 잘 섬기라는 말씀은 구/신약 성경이 공히 강조해 주는 중대 교훈입니다. 부모 공경을 강조하는 말씀은 모쉐 5경[각주:1]으로부터 사도 서신까지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특정 절기에만 묶일 게 아닌, 매일/평생 임무이겠지요.

하나님은 부모 공경을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삶의 원리로 삼고 계십니다. 인류의 태초는 한 부모로부터 시작됐기 때문이지요. 그 최초의 부모는 그들의 참 아버지이신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됐고요.
그러므로 어버이 없는 나란, 존재할 수조차 없습니다.  

부모를 제대로 섬기지 못하면, 하나님도 제대로 섬기지 못한다는 말일 수 있습니다.
사도 파울은 어버이 섬김은 "약속이 딸린 첫 계명"이라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 '약속'이란 땅에서 잘 되고 오래 산다는 것이지요. 대단한 약속입니다!
사실 믿음 안에서 부모를 잘 섬기고도 잘 되지 못하는 사람은 별로 없음을 우리는 주변에서 봅니다.

주요 말세 현상의 하나는 어버이를 거역하거나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개인 중심, 남녀 친구 중심, 컴퓨터 중심의 단세포적인 삶을 살면서 문득문득 느끼는 것은 그만큼 부모를 잊고, 무시하고, 거역하고, 심지어 속이고 저버리기 쉽다는 것이지요. 구약성경엔 부모를 제대로 섬기지 않는 사람의 눈알은 가마귀 밥, 독수리 밥이 되어 마땅하다는 극적인 표현도 있습니다(잠언 30:17).

한국을 비롯한 동양권에서는 부모 공경의 표본 같은 것 중의 하나가 부모 사후에 기일/제일을 꼬박꼬박 지켜 기제사(忌祭祀)를 치르는 것을 가리킨다는데, 이것은 사실 가장 잘못된 표본입니다. 부모공경은 어버이가 살아 계실 때 하는 것이지 세상 뜨고 나면 그만입니다!

어버이 살아신 제 섬기기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 이 뿐인가 하노라.

위와 같은 정철의 시조마저도 기제사의 무용성을 웅변해 주고 있지요. 그런데도 엄청난 돈과 에너지, 정성과 시간을 바쳐서 죽은 부모에게 제삿상을 차리는 것은 복 받는 데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부모는 죽으면 그 뿐,그 제삿상을 대신 "받아 먹는" 영적 존재들이 따로 있지요.
그렇게 바라는 복은 (신자들의) 부모가 살아 계실 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권에서 해마다 반복하는 '추모일'도 사실 유족들이 위로 받기 위한 것일 뿐, 효도로선 전혀 아무 효험 없는 것입니다! 후손이 얼마나 죽은 부모를 사랑하냐라는 외식적인 과시일 뿐입니다. 효도는 오직 부모님의 생시에 하는 것입니다.
유족들이 위로 받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매년 되풀이 하면 고인을 흉내 내는 친숙령이 끼는 등 좋지 않은 영적 영향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순교자 추모 행습도 잘못된 전통입니다. 다만 고인의 믿음만 본 받을 뿐.  

죽은 사람에 대한 기제사나 죽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 더 나아가 죽은 사람과의 친교 또는 그 시도 같은 것은 하나님이 엄금하신 사항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 특히 유교권 사람들이 기제사를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을 "애비에미도 모르는, 막 돼 먹은, 천벌을 받아 마땅한" 불효 자식들로 매도하는 것은 이런 영적인 원리를 잘 몰라섭니다. 성경이 부모공경을 얼마나 역설하는 지를 아는 사람은 그런 무식한 말을 하지 않지요.  

한국 교계가 최근 추석 같은 때, 고인의 묘 가꾸기 성묘나 일반인들의 기제사를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듯한 움직임은 교회가 성도에 대한 힘을 잃어 버린,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입니다. 고인은 죽으면 그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되길 머뭇거리며 고인의 장례를 중시하는 사람들에게 죽은 사람들로 죽은 사람의 장례를 치르게 하라는 말씀까지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그 분들을 기쁘게 하고 최대한 공경해야 마땅합니다. 그래야 약속 있는 첫 계명이 보장하는 대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어버이가 살아계실 때는 영 엉망으로 대우하다 돌아가신 뒤에야 뒤늦게 울고불고 "이제라도 할 수 있는 뭔가를.." 하는 것은 다 형식이고 가식이며 허사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무조건 자식에게 공경과 대접을 받기만 하겠다는 생각도 잘못입니다. 부모 공경에 대한 성경교훈을 보면 으레 자식 사랑도 겸하고 있습니다. 많은 성구들이 그렇게 선후 순서가 잡힙니다.

또 아버지 하나님이 계명들을 통하여 사람들의 사랑과 섬김을 바리시는 만큼 하나님이 앞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바탕이 있지요. 사람 어버이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가 성숙해서 좋은 짝을 얻어 출가하게 되면, 아버지는 딸을, 어머니는 아들을 기꺼이 놓아/떠나 보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어버이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좋지만, 지나치게 끼고 돌면서 안달복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태초에 이 점을 명시해 놓으셨습니다(창세기 2:24).

출가한 자녀의 가정을 부모가 교훈을 할 수 있어도 '내리사랑'을 핑계로 이리저리 내정(內政)을 간섭하고 특히 조정/조종하려 드는 것은 미래 어버이로서의 자녀의 성숙을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기도 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출가한 자녀가 부모를 적당히 가볍게 대하고 더 나아가 마구/함부로 불경하게 구는 것은 금물입니다. 어버이를 괴롭히고 부모 마음 속에 괘씸하단 생각까지 불러 일으키는 것은 자녀가 땅에서 잘 되고 오래 살긴커녕 잘 되지 못할 '조짐'입니다. 
이런 불행을 자초하지 않기 위해 부모는 자녀가 어릴 때 슬기롭게 잘 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부모공경 로봍'으로 삼아선 안 됩니다. 슬기롭게 잘 공경하도록 훈련시키되, 부모가 자녀에게 섬김과 대접만 받으려고, 나중에 크면 부모의 모든 수고를 다 보상 받겠다는 식의, 이른 바 "뽕 빼기" 심산과 방향으로 길러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어린 자녀의 마음은 도화지와도 같습니다. 그 도화지에 어떤 그림을 그려 줄 것인가의 주된 책임은 학교나 교회의 교사가 아닌 부모에게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가 충분히 자랄 때 까지는 세상 교육이나 교회교육을 믿고 거기에다 짐과 책임을 맡겨선 결코 안됩니다. 일차적인 책임과 동시에 주된 책임은 어디까지나 부모의 것입니다. 

어린아기 때부터 성경이야기를 열심히 재미나게 들려 주고 어린 자녀에게 성경책 등 다양한 양서를 읽히는 습관을 길러 주는 것도 부모의 책임입니다. 자녀가 다른 모든 세상 책을 즐기면서 성경책을 멀리 한다면 그것은 남들의 실패가 아닌 부모의 실패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실, 어버이 섬김은 책임성 있는 부모가 강조할 무엇이며, 책임성 있고 민감하고 슬기로운 부모가 바랄 만한 무엇입니다. 그 책임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바로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올바로 섬김에서 비롯됩니다. 그 밖엔 딴 길이 없지요.

그러므로 부모 공경은 참된 자녀 사랑과 떼 놓으려야 떼 놓을 수 없고, 이원론적으로 나눠 생각하기 어려운 주제요 과제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버리기 앞서 오늘날 부모가 자녀를 버리는 현상은 낙태로부터 시작됩니다. 해마다 한국/미국 등을 비롯한 온 세계에서 수백만 아기들이 목숨을 잃습니다. 살인광은 흘러간 역사 속 히틀러만은 아닙니다. 마귀가 부리는 살인의 영은 젊은 부모들을 통해 현재-지금 바로-역사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라서도 부모에게 버림 받은 고아들도 흔합니다. 귀찮고 삶이 어렵다는 핑계로.

그러므로 부모 공경을 강조하기 앞서 참된 자녀 사랑이 전제돼야 합니다. "윗물이 맑아야.."라는 격언을 구태여 들지 않더라도 부모가 부모다울 때 자녀도 자녀다울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성경 교훈을 따라 부모가 부모답기, 자녀가 자녀답기 캠페인이라도 필요한 때입니다.

그리고 부모가 부모다우려면 먼저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하고 섬길 줄 알아야겠지요.
성령님의 도움 없이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기가 불가능하듯, 부모는 자기 힘으로 부모답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절대 필요합니다.
자녀가 자녀답기도 마찬가지로, 성령님의 도움이 필수적이지요.  


제 개인 얘기를 해서 좀 그렇지만..살아오면서 가장 아름답던 순간들의 하나가 어머니와 함께 단 둘이 방언기도를 하던 추억입니다. 교회에서 직분자로 오래 섬겨 온 저의 아버지/어머니는 늘그막에 비로소 저를 통하여 방언을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부족한 저를 도구로 사용하셨지요.
어머니는 때때로 아름다운 방언노래를 하면서 주님 안에서 황홀해 하셨습니다. 그 목청은 가히 천상의 소리처럼, 너무도 아름다웠습니다! 그런 순간들이 부모와 자녀가 성령님 안에서 영적으로 하나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주곤 합니다.    

성령님의 도움 없이 내 힘만으로 결코 참된 부모 공경, 참된 자녀 사랑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주님의 지엄하고도 사랑에 가득 찬, 정다운 계명 안에는 성령의 도움 없이는 지킬 수 없음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 맡겨 헌신할 때 참된 부모사랑, 자녀사랑이 가능해 집니다.

1년에 한 번 붉은 카네이션, 하얀 카네이션 달기가 어버이 사랑의 표본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시간이 지나면 잊어 버리는 한낱 형식에 불과하지요. 연중행사가 교훈실천의 표본이 아닙니다! 부모 사랑은 성령님의 도움 안에서 오늘/지금 그리고 날마다 이뤄져야 할 약속 딸린 계명입니다. 약속 성취를 받기 위해선 실천이 따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지도자/교사/사역자/설교자/목회자/교사들은 어버이 섬김에 약속이 딸려 있다는 진리를 강조해야 마땅합니다. 그저 유교 식으로 목 터지게 부모 공경만 강조하는 교육은 반 쪽 짜리에 불과합니다. 어버이를 잘 섬기면,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리라는 이 복된 약속을 동시에 강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언필칭 '기복주의'를 드높이 부르짖어 규탄하는 사람들은 부모공경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점검 받아야 마땅합니다. 부모 공경엔 잘 되기와 오래 살기의 복이 딸렸기 때문이지요!
기복주의라는 명목으로 복 받기를 겁내면서 복을 싫어 하고(?) 아울러 남이 복 받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 부모공경을 제대로 잘 할 리가-성경에 따르면-없습니다. 알고 보면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도 잘 안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자녀들은 복을 받아 땅에서 잘 되고 오래 살기 위해서라도 부모를 잘 공경해야 합니다. 교회는 그렇게 가르쳐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기 위해 그 누구-어느 대상보다 하나님, 주님을 먼저 잘 섬겨야만 합니다. 부모를 하나님보다 높이고 더 사랑하는 사람도 주님께는 합당치 않습니다.

주님 말씀을 볼까요..?

누구든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걸맞지 않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겐 걸맞지 않소. (마태복음서 10:37)

나를 위하여 집, 형제와 자매, 부모와 자녀, 그리고 밭을 버.리.는. 사람은 몇 배로 보상을 받을 것이며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오. (마태 19:29. 방점은 필자의 것)

주님을 올바로 섬기고 따르는 데는 부모/자녀 "버리기"도 포함됩니다.
이 버리기를 우리는 오해할 게 아니라 잘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부모를 섬기되 바로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 자신 어릴 적부터 부모를 잘 따르고 공경했지만..어머니와 가족이 주님을 오해했을 때는 어머니보다 말씀을 듣기에 열중하는 신자들을 더 중시하셨습니다(마르코스복음서/맑 3:21,31-25, 루카복음서/눅 11:27,28). 

그런데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 공경 개념을 좀 오해합니다. 하나님을 받들어 경배와 찬양과 헌신만 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 공경의 전부로 생각하지요. 물론 그것도 하나님 경외의 일부입니다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지름길은 바로 믿음입니다(히브리서 11:6)! 그리고 하나님은 그 분이 살아 계심과 그 분을 찾는 사람들의 보상자(報償者, 대가를 주는 고용주)이심을 믿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곧, 하나님을 참 기쁘시게 해 드리는 주된 방법 한 가지가 믿음으로 그 분의 복을 바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인들은 하나님의 복과 상관 없이 하나님께 자기가 바치는 것으로 만족하는 묘한 착각의 버릇이 있지요. 그래서 그들은 복을 바라지도 십일조를 바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흔히 하나님께 "달라", "달라"하는 것이 잘못돼 있다고 지성적으로(?) 지적하곤 합니다.
그들은 헌금도 본인이 자발적으로 알아서 내는 것이 가장 모범적인 헌금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받기보다는 오히려 그 분에게 베풀고 있다는 착각을 하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과연 그런 것이 참된 믿음이고 참된 섬김인지는 본인보다 하나님이 더 잘 아시겠지요.

올바른 경배와 섬김의 모습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무엇을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분이 계심을 믿을 뿐더러 그 분에게 뭔가를 바라고 요청하길 고대하시는 분이십니다!
오죽하면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4, 15, 16장에 걸쳐 over and over and over again 그분의 이름-예수 이름-으로 무엇이나 무엇이든 무엇이든지 바라고 구하라고 강조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을 성경 대로 실감하고 실천하는 신자들을 본 적이 저는 극히 드뭅니다. 

이 하나님의 바라심에 걸맞게 응한 사람들을 볼까요?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복을 바란 사람들입니다.

에놐/노아../욥/아브라함/롵/이짜크/야콥/..요셒/모쉐/예수아(여호수아)/칼렙/라합/옽니엘/데보라/기데온/예프타(입다)/삼손..뤁/보아즈/한나/슈무엘/다빋/바르질래/슐로모/아사/예호샤팥/엘리야/오바디야/엘리샤/나아만/수넴여인/요아쉬/요나/호세아/히즈키야/미카/이사야/요시야/제파니아/아모스/예레미야/에제키엘/다니엘/하바쿡/에즈라/네헤미야/제룹바벨/요엘/오바디야/나훔/제카리아/말라키..기타 복음전파시대 사람들 및 신약인들 다수.

그런데 요즘은 어떻게 된 게 하나님께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복을 빌지도 않는 것이 가장 잘 믿고 잘 섬기는 모범적인 신자로 둔갑해 가는 실정입니다.

앞에서도 비쳤듯, '기복주의' 퇴치라는 미명 아래 복 개념도 아예 거부하고 반십일조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현상이지요. 알고 보면 그들은..구원만 받으면 그 뿐, 하나님께 바랄 것도 받을 것도 없다는 입장입니다. 사실 그들이야 말로 '천국행 티킽'만 따 놓고 아무 것도 하지도 바라지도 않는 "하릴 없는", 불행한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표면 상 "하나님, 주시려면 주십시오. 근데 안 주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제가 알아서 하니까요. 아시지요?"라는 점잖은 타잎/스타일의 '신사'족(?)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교회 안의 불신자들이지요!

성경엔 엄청난 약속들과 잘 되리란 보장이 있는데도 한사코 안 믿는 것입니다.
과연 그런 태도로 복의 하나님께 "자동으로" 복 받을 길이 있을까요..? 미안하지만 없습니다! 

복이나 장수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 과연 성경이 말한 대로 부모를 제대로 공경할 지도 의문입니다. 물론 그들 나름의 부모 공경 표준과 판단이 따로 있을 테지만.

성경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의 복을 참으로 기대하는 사람들이 진정 부모를 제대로 공경할 테니까요. 그러므로 하나님을 성경 대로 제대로 믿고, 그 분께 바랄 것을 제대로 바라고 찾을 것을 제대로 찾는 사람이 어버이 섬김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제 말이 아니라 성경이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어버이를 섬기되, 성경 말씀대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고, 자녀 사랑을 올바로 할 때, 부모 공경의 교훈도 올바릅니다.

하나님을 공경합시다.
그 분이 계심을 믿고 그 분의 복을 갈망합시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부모를 올바로 섬깁시다.
그리고 자녀를 사랑합시다.


티엘티 독자들은 모두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을 찾고
그 분의 복을 바라서
그 분을 올바로 섬김으로써 
부모공경과
자녀사랑도 아울러 잘 하길~!

존귀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1. 창세기, 미쯔라임 출국(출애굽)기, 레빝서(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