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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모세오경

[창 26:6-11] 이삭의 삶의 도전과 번영(2)


이짜크의 삶의 도전과 번영 (2)
-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려면


바탕본문: 창세기 26장 6-11절


사람은 살아가면서 누구나 도전을 받습니다.
도전 없는 삶은 너무나 평범할 것입니다. 
도전을 통해 사람은 강해집니다.

동물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강한 동물일수록 어미가 새끼를 거세게 훈련시키며, 그런 도전에 응하지 않는 새끼는 낙오되고 버림 받아 죽기 마련입니다. 또 일정한 공간에서 전혀 아무런 걱정 없이 안락하게 살아가는 동물보다는 잡혀 먹힐까 봐 약간이라도 쫓겨 다니는 동물이 더 건강하다는 과학실험 결과도 있습니다. 물론 지나친 스트레스를 받는 예도 있습니다만.

크리스천들은 더구나 날마다 세상에서 큰 도전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신자는 세상에서 박해와 도전을 받기 위해 난 존재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응당 미움 받을 존재라면서, 산상보훈에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욕과 박해와 거짓과 폭언을 기꺼이 달갑게 받을 때, 하늘에서 우리의 상이 크다고 말씀하십니다(마태복음서 5:10-12).

그러므로 세상에서 미움과 박해 대신 찬사와 존중을 한 몸에 받는 교계 명사들은 제대로 도전 받는 사람들이 아니지요. 그들은 이미 세상과 마귀한데 무장해제 당한 사람이나 다름 없습니다.
마귀는 신자로 하여금 세상과 타협하여 칭찬 받게 함으로써 무력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신자인데도 혹 세상에서 칭찬을 주로 받는다면, 성경에 비춰 보아 뭔가 잘못돼 있음을 발견하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도전적 상황을 허용하십니다.
특히 세상의 온갖 유혹이 그렇습니다.

크리스천들은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아닙니다.
성자이신 주님께서도 세상에서 유혹을 받으셨거든 하물며 우리들이겠습니까.
유혹을 받는 것 자체는 나쁜 게 아니지요. 다만 유혹에 빠져 넘어갈 때가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유혹을 받아도 넘어가지 말고 그것을 이겨 승리를 거둬야 합니다.
세상에서 도전 받되 거기 지지 말고 극복해야 합니다.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만.

우리가 세상의 도전과 유혹을 극복하고 견디지 못할 때, 어떻게 우리의 차세대인 자녀들에게 이기고 견디라고 교훈하고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니, 이짜크는 (시리즈 지난 회에서) 비록 흉년과 가뭄을 만났어도 풍요로운 남쪽 나라, 미쯔라임으로 가고 싶은 유혹은 이겼습니다만, 그 대신 현재 머문 땅 게라르(그랄)에서 제2의 도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지방 사람들이 자신의 예쁜 아내 리브카를 탐낸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러자 이짜크는 아내라고 밝혔다간 혹 자신이 죽임을 당하고 그녀를 뺏길까 두려워, 그녀를 자기 '누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허용하신 상황을 마귀가 최대한 악용하는 길입니다.
자, 우리는 도전과 유혹을 받아도, 슬기롭게 잘 받아쳐야 합니다.
세상 도전 앞에서 비둘기처럼 순결하게, 뱀처럼 슬기롭게 대처해야지요.


돌아 보면..히브리 족인 아브라함 집안에 이런 일은 번번히 발생합니다.
지난 회에서도 언급했듯, 이짜크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미쯔라임(에짚트)에 내려갔다가 아내 사라에게 자기 누이라고 말하라고 하여 그 말을 믿은 백성들이 사라를 그만 파라오의 왕비로 그냥 바칠 뻔 하지 않았나요.

그 다음 아브라함 부부가 게라르에 살 때도 아브라함은 다시 한 번 사라를 '내 누이'라고 속여, 또 다시 펠레쉩 족의 왕 아비멜렠의 왕비로 앗길 뻔 했다가, 역시 하나님의 중재로 간신히 아내의 정절을 지키게 됩니다.


역사는 흔히 악순환으로 반복됩니다.
과연 누가 이딴 짓을 합니까?
마귀-바로 그 자이지요!  

마귀가 왜 이럽니까?
언약의 백성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의 정절 즉 택한 선민의 씨를 더럽혀 메시아의 선대부터 어지럽으로써 하나님의 계획을 망치려고 한 것입니다.
마귀가 하는 만사는, 이렇게 더럽고 사악하고 파괴적입니다(요한복음서 10:10).

 
자, 마귀는 어떤 작전을 폈습니까?

    첫째로는, 외부적인 접근입니다. 게라르 사람들로 하여금 사라의 미모에 사뭇 탄복하게 합니다.
    그래서 왕에게 넘겨 주려고. 

    둘째로는 그에 대한 반응으로 두려움의 씨를 심습니다. 겁을 주는 거죠.

    셋째로는, 그래서 위기를 모면할 방법으로서 거짓말을 하도록 유혹합니다.


이처럼 3단계 작전을 썼습니다.
알고 보면 너무나 뻔~하고 빤~한 방법이고 상투적인 수작인데도 큰 도전이지요. 큰 유혹입니다.
아브라함은 마귀의 이 빤한 '3단계 작전'에 두 번이나 "홀라당" 넘어가고 말았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 때 얻은 교훈을 잊어버렸는지, 부끄러워서 자식에게 전혀 말을 해 주지 않은 탓인지는 몰라도, 이짜크 역시 마귀의 똑 같은 술책에 그만 넘어갑니다.

아브라함 때나 이짜크 때나 겁과 두려움 속에서 거짓말로 적당히 위기를 때워 넘기려고 했는데, 결과는 반대로 나타납니다.
얄팍한 거짓말로 자기보호는 됐을지 몰라도..아내 보호가 안 되는 겁니다.

이짜크의 이 거짓말은 알고 보면 그럴싸 합니다. 
아브라함-사라의 관계 역시 실로 이복 오누이 관계였기에 '누이'라고 둘러댄 거짓말이 말짱 거짓말은 아니었지요.
마찬가지로, 이짜크에게도 리브카는 사촌 간이기에 친척 누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러나 그럴싸한 거짓말도 거짓말이라는 것..이것이 문제입니다. 
더욱이 그 거짓말이 두려움에서 왔다는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사람이 살아갈 때, 때로는 선의의 거짓말을 할 때가 없지 않습니다.
가령 김삼이 늙어 보여도 "아유, 젊으시네요." 하면..곧이 곧대로 "어구, 팍삭 늙어 뵈시네요" 하는 것보다, 김삼의 기분이 적어도, 과히 더 나빠지진 않습니다.
실제로 늙었으니, 젊다는 말은 뻔한 거짓말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성경의 예를 보더라도 미쯔라임에서 갓난 히브리족 사내아기들이 강제로 학살될 때,
히브리인 산파들이 거짓말로 살려 내자 하나님의 복을 받았습니다. 거짓말로 복 받은 사례입니다(미쯔라임출국기=출애굽기 1:15-21).

그런가 하면, 카나안 정복시대 때 예리코(여리고)의 기생 라합은 거짓말로 이스라엘 정탐꾼을 살려 준 대가로 자신과 일가의 목숨을 살려 받습니다.

이처럼 어느 모로 보든 결과가 정의로운 거짓말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경우에 걸맞은 말이라고 할까요.


그러나 아브라함이나 이짜크가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것은 비겁한 거짓말이었습니다.
아내야 어떻게 되든 일단 자기가 죽음을 면하고 보겠다는 속셈이었던 탓이지요.
마귀는 신자들을 겁주어 이런 비겁한 거짓말을 짜내는 전문가이니, 치사하고 더럽고 간특한 존재입니다.

결국 이짜크는 이 거짓말 덕분에 리브카를 뺏길 뻔 합니다.

    "아내가 아니고 누이라고? 아하, 그럼 왕께 이 예쁜 각시를 데려가 중매할까.."

일이 이렇게 꼬이게 된 겁니다.

두려움으로 인한 이 겁과 거짓말이란 게 올무가 됩니다.


이짜크-리브카 부부는 한 동안을 게라르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펠레쉩 동네 사람들의 뇌리엔, "저 예쁜 각시가 그의 누이라니 언젠가는 누가 장가 들어도 되겠구나..음 저 여인이 정말 탐나는데.."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고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립니다. 리브카가 오늘날로 말하면 워낙 '얼짱'이어서였습니다.

아마도 게라르의 노인들은 아브라함의 전례를 기억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게라르 왕 아비멜렠이나 궁중 사람들도 아브라함 당대보다야 훨씬 후기 사람이겠지만, 자기 또는 자기 선대 왕이 히브리 족의 아내인 사라를 데려다 왕비를 삼으려다 혼났다는 불과 몇 십 년전의 옛 얘기를 듣고 기억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리브카를 왕비로 삼으려 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비멜렠은 왕궁의 창문 밖으로 멀리, 이짜크가 리브카를 껴안고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엉? 저 자가 자기 누이라더니 왜 껴안고 있는 거지? 흠, 누이가 아닌 아내인가 봐."

들통 난 이짜크는 펠레쉩 왕궁으로 불려가 왕에게 심문을 받습니다.
이 때 이짜크의 말을 보세요.

    "그녀 떄문에 내가 죽게 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소."
 
그제서야 아비멜렠은 지난 날 악몽 같던 아브라함 당시 사건을 떠올리며,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그리고 주변 백성에게 이짜크 부부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단단히 경고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든 이짜크이든 (비록 얄팍하고 비겁한 '목숨땜질용' 거짓말을 하긴 했지만) 미쯔라임으로 내려가지 않고 카나안에 머문 한, 속전속결로 또는 미리 지켜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이짜크의 경우, 하나님의 직접적인 중재를 우리가 눈으로 보지 못해도 하님이 아비멜렠의 두려움을 통해 간여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아비멜렠이 창밖으로 이짜크 부부의 포옹 모습을 발견한 게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주민들이 부부를 범할 가능성을 예방할 수 있었기 떄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은 어떤 방법과 계기로든 보호해 주십니다.

우리가 형통과 번영의 과정과 노정의 일부로,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잘 되는 '꼴'을 눈이 시어 그냥은 못 보는 마귀가 우리를 늘 삼키려고 입 벌리고 달려 들기 때문이지요.

마귀는 우리에게서 빼앗고 훔치고 멸망시키고 파괴시키고 죽이려고 오지만..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더 풍요롭게 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양인 우리는 목자의 보호와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 분의 보호가 절대로 필요합니다.

잘 되기 위해선 먼저 안전해야 합니다.
안전 확보가 안되고서야 어찌 맘 놓고 번영과 형통을 누리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돈 벌기에 눈이 멀어 돈이 옆구리로 새어 나가는 것도 모르고 삽니다.
엄청난 일확천금을 하고서도 돈이 삽시간에 썰물처럼 돈줄이 빠져나가 버립니다.
흰개미떼가 쓸고 지나가듯 탕진해 버리게 됩니다.
반대로 번 돈을 쓰지 않으려고 너무 인색하게 발버둥쳐도 죽으면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즐기지 못하고 남에게 죄다 넘겨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래 댐에다 물을 그득 채워 봐야 여기저리 구멍이 나면 물이 솔솔 다 새어 나가고 맙니다.
 
이래서 안전보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에겐 선한 목자 주님의 든든한 안전보장이 있습니다.
안전보장, 이것이 관건입니다.
 
그리고..참된 안전보장을 받으려면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얄팍한 거짓말이나 핑계, 기교나 수단, 말재주 대신 주님을 더 의지해야 합니다.
담대히 믿음으로 서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책임지고 지켜 주십니다.

참된 번영와 형통의 지름길은 주님의 안전보장-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안전보장!
그것은 곡물이 가득한 거대한 곳간의 문빗장, 보물상자의 단단한 자물쇠와도 같다고 하겠습니다.  


티엘티의 독자 성도는
주님의 복과 번영을 지키기 위한
주님의 보호 안전보장을
믿음으로 확보하고 누리시길~

주 예수님의 전능한 이름으로..
아멘



필자는 외래어를 원음에 가깝게 표기하자는 생각입니다. 
이 점, 독자의 양해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