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서구권에서는, 온갖 예술 분야에 스며 있는 동성애적 요소에 관한 진단과 논의들이 잦다.
이것은 첫째로, 예술계에 동성애자들이 유난히 많은 때문이고, 둘째로는 20세기말 발달한 인터넷 쌍방향 통신 덕택에 그동안 사회 뒤안길 내지 언저리에 숨어 있던 동성애 관련 정보가 왕창 늘어난 때문이며, 셋째로는 동성애 그룹들의 권리가 대폭 확보되다 보니 자기네 저변 확대와 자리매김 차원에서 지난 역사 속 '동료'들의 흔적을 발굴해 내어 동일화(identify)함으로써 자신들도 감정이입을 할 뿐더러, 사회에다 알려 폭 넓은 공감층을 얻고 싶은 탓이다. 동성애자들은 아직도 사회의 소수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미국 연방의회에서는 지난 해 동성애에 대한 공적인 거부감을 표시하는 사람을 수사/기소할 수 있게 하는 법안이 상정될 정도로 동성애 권리 확보운동은 급물살을 타고 있다. 동성애자들의 숫자는 계속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여서 앞으로 전세계적으로 동성애자 권리가 점점 더 강화될 전망임은 물론이다. ]
그런가 하면, 또한 전통 가정 가치관을 중시하는 나머지 동성애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 또는 성경적 분별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역사와 예술문화 속에 숨어 있는 동성애적 성향과 영향을 검증하는 차원에서 그러하다.
우리는 지난 날 종교도덕 아래 동성애가 "억눌린" 시대에 숨은 동성애 감정을 갖고 예술 문화 작품 속에 어떤 암시나 시사를 담은 사례들을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분별의식은 지녀야 한다고 본다. 까닭은 그런 사람들의 작품을 아무 생각이나 사전 지식 없이 무심코 즐기다가 모종의 원치 않던 '감정이입'이나 영적 피해를 입을 가능성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음악/미술/문학/종합예술 등은 단지 정서적 카타르시스 내지 표현 배출 도구일 뿐더러 더 깊고 진지하고 민감한 감정이입 도구일 수 있다. 예술을 통하여 악령들이 침투할 기회도 많다. 그래서 예컨대 음악감상 등 예술 취미활동과 창의성 작업에도 분별과 검증이 필요하며, 더구나 음악명상, 뉴에이지성 음악치유 등 정신과 밀접한 연계가 있는 활동은 우리가 매우 조심해야 할 사안이다.
성경을 보면, 싸탄/헬렐(루키페르)은 본래 천상 영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이었고, 하나님을 섬기던 케룹 천사의 하나, 대천사 겸 음악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자고하고 타락하여 자신이 포섭한 따르미 천사들과 함께 셋째 하늘에서 추방됐다. 싸탄은 그후 미와 관련된 예술 부문을 통하여 추악한 음모를 해 왔다. 그 대표적인 예가 타락한 세속음악이나 선정적인 예술 작품들이다.
인간의 정서를 직접 다루고 어르는 음악을 비롯한 예술 분야는 싸탄이 인간을 철저히 타락시키고 궁극적으로 멸망시키기 위해 영/혼/육 3차원으로 침투하며, 가장 많이, 가장 간교하게 이용하는 범주의 하나다. 동성애 작곡가들도 그 희생물이라고 할 수 있다. 동성애자들이야 인정하든 않든.
물론 하나님은 수많은 동성애자들의 영혼도 사랑하신다! 많은 동성애자/비동성애자들의 착각과는 달리, 하나님은 '동성애자 미우미'가 아니시다. 죄는 미워하셔도.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동성애자들을 있는 그대로를 모두 받아 주시는 건 아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류를 사랑하시기에 동성애까지도 자동으로 다 사랑해 주실 것이라는 생각은 너무 원시적이고 나이브하다. 만약 그러시다면 왜 소돔/고모라가 하루 저녁에 망해 버렸겠는가? 그 분은 거룩하고 의로우시기에 그 앞에는 동성애는 물론 모든 성적 범죄와 죄악이 설 자리가 없다!
우리는 욕심에 따라 자기 입장만 내세우고 고집할 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입장도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동성애자가 그 분의 사랑을 받으려면 회개(뉘우치고 고치고 돌아섬)해야 한다.
'성의 아인슈타인', 막누스 헐쉬펠트
글머리가 길어졌는데 이제 본론에 들어가 보자.
최근 미디어의 신간도서난들을 보면, 동성애 관련 도서들이 부지기수로 늘고 있다. 그 가운데는 물론 친동성애 계열, 반동성애 계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계열 등의 책이 골고루 있다.
주딭 앤 퍼레이노는 근작 '사이렌 듣기: ..동성애 정체성의 음악적 테크놀로지'란 책에서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동성애 작곡가들의 면모를 다뤘다. 퍼레이노는 이 책에서 특히 19-20세기에 활동한 콜베르크(현 폴란드 코웝쳌) 출신의 독일 성학자(sexologist)이자 정신연구학자, 막누스 헐쉬펠트를 집중 소개했다.
자신이 동성애자로 적극적인 동성애권리/여성권리 옹호자였고 오스트리아의 직문트 프로이트처럼 유대계 정신분석학자였던 헐쉬펠트는 동성애와 음악가들과의 관계를 본격 연구한 사람으로, '성의 아인슈타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는 음악을 깊이 이해했기에, 음악에 이렇다 할 소양이 없던 프로이트보다 이 방면에 훨씬 더 유리한 입장에 서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헐쉬펠트는 그의 '남성과 여성의 동성애 기질'(1914년)에서 동성애자들의 전형적인 미학적 선택에 관해 탐구한 뒤, "위대한 작곡가들"이 '여성성'과 '남성성'의 혼합성(Einschlag)을 지녔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그는 낭만기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이 쾌활하고 남성적인 '플로레스탄'과 부드럽고도 여성적인 '에우제비우스'(=유세비우스)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나름 파악했다.
사실 헐쉬펠트의 이 발상은..슈만의 모음곡 작품 '사육제'(Carnaval, Op.9)의 일부에서 유추해 낸 것으로, 억지스럽고 신빙성이 적다. 낭만파 답게 표제음악/묘사음악 기법에 뛰어났던 슈만은 카니발의 가면무도회처럼 이 작품에서 이야기의 캐맄터(예: 하를레퀸/콜롬비네)나 실제 인물들(예: 쇼팽/파가니니/키아리나) 등을 가면 뒤의 주인공들처럼 묘사하고 있다. 1
사육제의 한 소곡으로 소개된 '플로리스탄'(악상: 파쇼나토)이라는 캐맄터는 슈만의 낭만적이고 쾌활한 성품을, '에우제비우스'(속도: 아다지오)는 슈만의 조용하고 내성적/명상적이고 절제된 면모를 대표하고 있다. 그밖에도 자연주의적인 '라로'라는 캐맄터도 있다. 모음곡 '어린이의 정경'에서 나타나는 유(類)일 것이다.
그러므로 플로리스탄을 남성적, 에우제비우스를 여성적이라고 딱 잡아 분류한 것은 너무 단정적이며, 더구나 슈만 속의 '양성적' 기질을 입증해 주지 못한다. 슈만은 24세 때 얻은 매독이 불행히도 평생 치료되지 않고 뇌에까지 영향을 미쳐 정신불안/자살기도 등 문제가 없진 않았으나 아내 클라라와 서로 깊이 사랑하는 사이였다.
헐쉬펠트의 견해는 좋게 말하면, 낭만주의적 사고다. 그는, 남성 천재들이 근본적으로 양성적(androgynous)이어서, 내적인 감수성과 직관, 정서라는 여성성과 박력 있고 정력적인 남성성을 겸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예로서 전기한 슈만과 리히하르트 봐그너, 파가니니 등을 대표적인 '양성 보유자'로 꼽고 있다. 물론 작곡자/예술인들 가운데 동성애자들이 흔하긴 하다. 그러나 그런 사실이 곧 "위대한" 작곡가나 음악인들이 필수적으로 양성적이거나 동성애자들일 당위성을 설명/입증해 주는 건 아니다.
헐쉬펠트는 한 발 더 나아가 동성애자들이 음악에 끌리는 이유는 감성적 기질(seelische Konstitution) 때문이라고 말한다. 동성애자 작곡가/연주가/청중은 흔히 프로그램 뮤짘이나 오페라 등 '혼합스타일'(Stilvermengung)-특히 봐그너 이후 시대 작품을 즐긴다. 헐쉬펠트는 동성애자들에겐 번쩍이는 상상력/아이디어/창조성 등은 있지만, 대체로 훌륭한 음악을 만들어 낼 남성다운 수완과 에너지, 활동성이 결여됐다고 파악했다. 예를 들면 낭만기였던 19세기 독일의 프란츠 폰 홀슈타인은 동성애자로, 대가는 아니었으나 오페라를 여러 편 썼다.
프로이트와 함께 20세기 3명의 대표적인 성 연구가들 중, 헐쉬펠트와 헤이벌롴 엘리스(Haverlock Ellis)는 음악과 음악성은 잠정적으로 개인의 섹슈앨리티의 방향과 잘못된 방향을 노출시켜 준다고 봤지만, 프로이트는 음악이 아무 것도 특별히 말해 주는 게 없다고 주장했다. 그도 그럴 것이, 프로이트는 음악 자체에 별 흥미도, 지식도 없어서 음악의 정신분석학적 의미성을 아예 다룰 수가 없었다. 프로이트는 다만, 전체 예술이 성적인 에너지를 승화시키는 한 방도로서 보다 더 관습적인 사회적 표현으로부터 그것을 딴 방향으로 돌리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후기 프로이트 학파는 성과 음악의 관계에 적극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마이클 월랰과 캐롤 그린버그는 여성 및 재즈와 관련, 음악이 '상징적인 성적 자극제 (또는 흥분제)'라면서 "음악은..성적 자극/흥분을 표현하는 간접적이고 보충적인 표현방도"라고 주장했다. 특히 둘은 프로이트적인 분석에 따른 여성들의 스토리 분석 결과와 여론조사를 연결시킨 결과 1. 음악청취의 한 기능은 성적 충동의 상징적인 표현을 허용하는 것이고, 2. 그런 표현의 가장 강한 충동은 사회에서 소극적인 사람들에게 일어난다고 간파한다.
여성의 경우, 특히 미혼녀들은 문화적 성적 표현의 사회적 금기로 인하여 억눌린 성적 표현 감정이 미혼남성보다 더욱 음악에 반응해 대리자극 욕구를 더 느낀다고 한다. 오늘날 젊은이들의 랔앤롤은 더더구나 성적 표현과 직결된 상황이다. '랔앤롤'(흔들고 구르다)이란 말 자체가 성적 암시라는 설이 유력하다.
역사 속의 동성애 작곡가들
본 섹션에서는, 음악사에서 중세/르네상스기/바로크기/고전기/낭만기/20세기 이후 등으로 클래싴 음악(classical music) 분야의 동성애적 성향을 다루련다.
중세/르네상스기
천주교가 '성녀'/'복녀'로 추켜 주는 12세기의 베네딕토회 수녀장(일설에 '수녀원장') 힐데가르트 폰 빙엔은 작곡가였다. 그녀의 작품 '오르도 비르투툼'은 초기 전례극(liturgical drama)의 하나다. 참고: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e/ee/Hildegard.jpg
동료 수녀들에게 '스승'(magistra)으로도 떠받들리기도 했다. 루페르체베르크(1150년), 아이빙엔(1165)에 각각 수도원을 세웠다. 힐데가르트는 아울러 저술가/신비가/상담가/어학자/철학자/과학자/의사/약초수집가/시인/영매(!)/비저너리(환상가)/관상가(觀想家)이기도 했다. 그녀와 그녀의 수제자/보좌수녀였던 리하르디스 폰 슈타데와의 사이에는 동성애 감정이 의혹시돼 왔다. 리하르디스가 다른 수도원장이 되어 떠날 때 아쉬워서 강력 반대하기도 했다.
'라인강 지방의 여대언자'라도 불린 힐데가르트의 성당 전례연가 모음 '심포니아'는 동정녀 마리아를 향한 영적/신체적 갈망을 표현한, 호모에로팈한 음악이었다고 흔히 간주된다. 그런데도 자신의 글에서는 동성애 특히 여성애를 강력 단죄한 모순성이 엿뵈는 것은 교회 상부의 입장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3세기 중세 오키탕(남부 프랑스, 스페인 등을 비롯한 유렆 남서부 지역)의 트로바이리츠(여성 음유시인)였던 비에리스 드 로망스는 현존하는 초기 여동성애 연가 '나 마리아 프레츠 에 피나 발로르'(여주 마리아님, 님의 공로와 영예로써. 성경의 '성모' 마리아라는 설과 아니라는 설이 대치됨)의 작자로 알려져 있다. 또 이 노래가 본인의 '남성적' 감정을 대비한 작품이라는 설, 어느 남성을 대신해 썼다는 설, 동성애자가 아니었다는 설 등 많은 논란도 있어 왔다. 안겔리카 리거 교수(독일 RWTH 아헨 대학교/낭만문학)는 비에리스의 동성애자 여부에 관한 논문을 쓴 바 있다.
그런가 하면 16세기의 작곡가/사제, 니콜라스 공베르는 신성로마의 황제를 섬기는 한 소년을 "건드린" 뒤, 험한 바다에서 배의 노를 저으며 한동안 귀양살이를 해야 했다. 또 투르네 성당 사제 자격을 잃었다. 그밖에 동성애 성향 의혹을 받아 온 작곡가로는 귀욤 뒤파이, 오를란도 라소, 마달레나 카술라나 등이 있다.
바로크 기
오라토리오 '메시아'로 유명한 조지 프레드맄 핸델은 평생 결혼을 안 했고 여성 관계를 맺은 적이 없다. 한 군주가 "여성이랑 교제는 안하오?" 물으니까 "시간이 없어서요"라고 대답했다고 해서 동성애 의혹이 일곤 한다. 사실 핸델 주변 특히 귀족층에는 많은 동성애자들이 오갔으나 그가 동성애에 개입된 결정적인 증거는 아무 것도 없다. 필맆 브렡, 엘리저벹 우드, 게리 토머스 등이 공저한 동성애 관련 도서는 초기 핸델 전기작가들이 문제의 이슈를 적극 피하여 간 점이 곧 역설적인 '증거'라고 결론 짓기도 했다. 특히 토머스는 핸델이 18세기판 '게이 바' 격인 몰리하우스 출입을 하고도 무사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역시 같은 시대의 작곡가 아르칸젤로 코렐리에 관해 게리 토머스는 로마 추기경의 '감춰진 소년'이었기가 쉽다고 주장했다. 그밖에도 장 바티스트 륄리, 요한 로젠뮐러(필자의 글 '바흐의 실망스러운 점' 참조) 등이 동성애 또는 남색에 개입됐을 가능성이 있다.
17세기의 종교/세속 음악 성악가이자 작곡가였던 프란체스카 카시니는 흔히 여성으로서는 최초의 오페라 작곡가로 쳐 진다. 페미니스트로 여성 중심의 삶을 살았다. 그녀의 피렌체 궁정 스타일의 오페라 '라 리베라치오네 디 루기에로 달 이솔라 달치나'는 강한 여성중심 취향을 보였다.
고전기/낭만기
음악 이론가이자 낭만기 작곡가였던 슈만 자신이 대조하였듯이, 고전기의 베토벤 음악이 '남성적'이었다면 그를 열렬히 존중했으면서 낭만파를 열었던 프란츠 슈베르트의 음악은 매우 '여성적'이었다는 평가가 있어 왔다.
베토벤이 입양한 조카를 끔찍히 신경 쓴 데 대해 야릇한 추정을 하는 사람들도 있어 왔다.
전통적인 속(딸림)화음-으뜸화음 위주의 고전적인 화성 처리로부터 3도화음 등으로 변용한 슈베르트의 종지법 등 다양한 형식상의 특징을 세심히 관찰한 음악사가들은 그의 성향을 "심약한 여성형" 작곡가로 보기도 한다. 특히 그가 남성적인 베토벤을 숭모하던 나머지 자신이 여성 취향이 되지 않았겠냐는 추정도 있다.
슈베르트 자신의 편지나 친구들의 증언 등을 보면, 평생 장가도 가지 않고 여성 상대 연애 감정도 별로 보이지 않던 그에게 다소 동성 편향적인 면모가 없진 않다. 그의 친구들 중에 결혼한 사람도 거의 없다. 또 가까운 친구들이 동성애 문제로 투옥되곤 했다. 하지만 정작 슈베르트 자신에게서 결정적인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슈만과 브람스 사이를 의혹하는 눈길도 있어 왔다. 브람스는 슈만의 사후 그의 아내 클라라를 장기간 소위 '플라토닠 러브'로 흠모하기도 했다. 클라라는 남편에게서 옮은 매독을 지니고 살았다. 당시는 아무런 매독 치료법이 없었다.
'피아노의 시인' 프레데맄 쇼팽은 양성애자였다는 유력설이 있다.
'가장 위대한 동성애 작곡가', 차이콮스키와 생상
낭만파 후기의 대표적 거장인 표트르 일리이치 차이코프스키와 샤를 카뮤 생상은 거의 결정적인 동성애자들이었다. 특히 차이코프스키는 동성애자 작곡가로서는 최고의 대가로 꼽힌다. 서양음악사상 가장 널리 알려진 동성애자다.
어릴 적부터 여성에게 관심이 거의 없던 차이코프스키는 일설에 따르면, 말년에 러시아 궁정의 한 이류 귀족 남성과의 관계가 폭로되려던 위기에 빠진 나머지 자살 충동을 느꼈다고도 한다. 그래선지 차이코프스키는 반동성애 사회로부터는 야유와 경멸을, 동성애 사회에서는 열렬히 애호 받는 인물이다. 마치 모차르트가 프리메이슨들의 '신'이 됐듯.
죽음 거의 직후부터 여러 전기와 음악(특히 교향악) 비평을 통해 성적 암시에 대한 분석이 이뤄져 왔다. 그의 교향악은 흔히, 독일 교향곡에 비해 깊이가 없고, '야만성'이나 '경박성'이 두드러진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비평가/분석가들에 따르면, 죽기 전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고백한 차이코프스키의 마지막 3개 교향곡들은 그의 "병리학적 심리의 음악적 전개"로 비유된다. 당시 동성애자는 시베리아 유형감이었다!
차이코프스키에겐 거의 한평생 동성애 기질에 관한 루머가 따랐다. 1876-77년의 비극적 결혼 '시도'도 잠시 루머를 잠재운 기간일 뿐이었다. 반면 당시 유렆 상류층과 러시아 귀족사회의 상당수 인사들도 동성애자들이었으나 사회가 눈 감아 주었다는 점에서 그는 일종의 피해자였다.
비평가들은 차이코프스키의 최후작인 제6교향곡 '비창'의 피날레인 '아다지오 라멘토조'(= 느린 애가조로)를 그의 자살과 연루시킨다. 그는 자신의 성적인 병리성과, 조카 블라디미르 '봅' 다비도프에 대한 동성애 감정으로 인한 절망감 탓에 자살했다는 설이 있어 왔다. 이 마지막 교향곡 '비창'을 다름 아닌 다비도프에게 헌정했다.
역사적으로 '비창' 연주회나 관련 인사들에게 숱한 의문의 '사건'들이 터져 "저주 받은 음악"이라는 풍문도 있어 왔다. 러시아에서 애가는 고인의 영을 결혼식과 장례식에 불러와 친교하는 기능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차이코프스키는 콜레라로 죽었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
'동물 사육제', 제3교향곡(오르간), 오페라 '삼손과 델릴라' 등으로 유명한 생상은 '남색꾼'으로 자처했다시피 북아프리카에서 자주 시간을 보내면서 아랍계 소년들을 탐했고, 이국적인 정황의 '무대'에서 '영감'을 얻곤 했다. 생상은 개브리엘 위어방 포레, 앙드레 메사제, 유진 지구 등 후진들에게 다대한 음악적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 천재적인 연주가로 성당 오르가니스트와 동시에 피아니스트/지휘자 등으로 맹활약한 그는 40세에 19살 여성과 결혼하여 자식을 낳기도 했으나, 출발부터 불행했다. 1878년엔 6개월 안에 두 아들이 잇달아 죽고 나서 1881년 아내를 버렸다.
생상은 갑자기 몇 주 동안 사라지는 등 은밀하고 사적인 생활을 즐겼고, 파리 자택에 친지들을 모아 놓고 하는 연주 파티에서는 샤를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에 나오는 여성 소프라노 마르그리트를 상징하는 여장을 하고 연주하거나 차이코프스키를 위한 자선연주에서 발레리나로 분장하고 춤을 추는 등 묘한 취향을 지녔었다.
그는 주변을 의식한 듯 자신을 동성애자 대신 '남색꾼'으로 알아 달라고 주문했는데도, 전기작가 스티븐 스터드는 생상을 정상적인 '이성애자'로 봐 주기도 했다. 생상은 당시 프랑스령인 알제리아에서 주로 휴가철에 현지의 사춘기 '꽃미남'들과의 교제를 즐기던 프랑스 휴가족들처럼, 알지르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거기서 죽었다.
그래도 생상의 시편곡 등은 교계에서 비교적 자주 연주된다.
그밖에도 낭만파 작곡가들 중 레이날도 한(Hahn), 여성 작곡가 에텔 스밑 등이 동성애 의혹을 받았다. 특히 후자는 그녀의 편지와 일기에서 그런 성향이 발견되며, 그녀의 '해돋이 노래들'은 호전적인 여권주의자 에멜린 판쿠르스트를 향한 연정을 바탕 삼은 것으로 추정된다.
또 '포엠 드 라무르 에 드 라 메르'(=사랑과 바다의 시)로 유명한 에르네스트 쇼송, '전시회 그림들'과 '민둥산의 하룻밤'의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 등에게 동성애 의혹이 따른다.
에드워드 엘가와 존 뉴먼 신부의 숨은 호모에로티시즘
재클린 뒤프레, 요요마 등의 연주로 인기 높은 첼로 협주곡(E단조)을 쓴, 영국의 대표적 낭만파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
그는 결혼도 했고 천주교인이었지만, 자신의 '에니그마 변주곡'(각 변주곡이 정체미상의 캐맄터를 묘사했다는 점에서 슈만의 '카르나발'과 일맥상통한다.) 가운데 '님로드' 변주곡(No.9)을 헌정한 대상인, 독일 출신 이민자요 음악비평가이자 음악출판 자문인 아우구스트 예거와 모종의 '관계'였거나 연정을 품은 것으로 일각에서 추정돼 왔다. 2
엘가는 1897-1908년의 약 10년 어간 예거에게 보낸 편지 '님로드에게 쓴 편지들'에서, "넘친 사랑으로..언제나 님의 것인 엘가'(Much love..Yours ever, Elgar) 등 각별한 끝말을 붙이기도 했다.
예거가 죽던 1909년 5월 18일의 다음 달인 6월 중순, 여행 중이던 이탈리아에서 아내와 급거 귀국한 엘가는 '현악을 위한 비가'(Op.58)를 작곡해 마지막으로 예거의 영전에 바친다. 석 달 후인 8월 19일 일기의 노트엔 "8월 19일, 에드워드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위한 악상에 사로잡히다."라고 적혀 있다.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고쳐 쓰기로 한 것. 3
퍼시 영이 편집한 엘가 서한집에 따르면, 엘가는 이 '애정'을, 보통 사람으로서는 당혹스럽고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괴이하고 농(弄)스럽게 표현하기도 했다. 영은 서문에서 이에 관해 "순전히 사적인 이슈이며, 철없어 뵈더라도 우리가 관여할 바 아니다"고 썼다. 또 엘가의 대작 상당수에 대한 자극 일부는 아내로부터, 일부는 예거로부터 왔단다. 엘가는 자신이 병을 앓을 때도 예거를 더 염려하기도 했다.
엘가의 본격적인 첫 "성숙 오라토리오" 작품인 '게론티우스의 꿈'의 가사는 성공회에서 천주교로 개종한 존 헨리 뉴먼 신부(훗날 추기경)의 서사시로, 엘가 전기작가 대니얼 그림리와 줄리언 러쉬톤에 따르면, 뉴먼은 이 시에다 리히하르트 봐그너의 '팔지파르'에서도 풍기는 (천주교와 "수도원적 냄새가 나는") 짙은 호모에로티시즘을 가미했고, 엘가 역시 이 감정을 십분 살렸으며, 이 작품에 원용된 봐그너의 '라이트모티프'와 기타 봐그너적 요소는 다름 아닌 예거의 자극 결과였다. 4
그러나 '게론티우스..'의 초연은 실패였고, 이후 모든 불행과 자신의 불행감을 '하느님 탓'으로 돌린 엘가는 유신론과 천주교 교리에 대한 신심 일체를 내버렸다. 임종 시 시신 처리도 교리에 따른 매장을 거부하고 화장해서 뼛가루를 강물에다 뿌려 달라고 유언했다. 내세도 전혀 안 믿어서 죽음을 "완전한 무의식 상태일 뿐"이라고 스스로 결론 짓는다. 그러나 모르핀의 과용 결과 코마 상태가 되자, 딸의 청원에 따라 사제가 와서 '종부성사'를 치른 뒤 결국 매장됐다.
엘가는 생시에 예거에게 말했다: "내가 늘 말했듯, 하느님은 예술을 적대하오. 난 아직도 그렇게 믿소."
그런데도 여러 비평가들이 동의하는(!) 뉴먼의 "에로팈"한 표현을 담은 찬송시들은 신교권에서도 자주 애송된다. 오스카 와일드는 뉴먼의 에로티시즘을 갖고 미래적이라고 찬사를 보내곤 했는데, 바로 그 점이 훗날 카톨맄적 프랑스를 지배할 '데카당스(퇴폐주의) 운동'을 내다보게 했다.
뉴먼과 함께 1845년 천주교로 동시 개종한 성공회 사제 암브로스 세인트 존은 1875년 죽는 날까지 30년간 뉴먼의 '단짝'이었다. 세인트 존이 죽자, 뉴먼은 "그는 첫날부터 헤아릴 수 없는 깊이의 사랑으로 날 사랑했다"라고 고백했다. 개종 2년 뒤인 1847년에 둘이 로마를 방문했을 당시 로마 시민들은 세인트 존을 뉴먼의 '수호천사'라고 말했단다. '게론티우스..'에 등장하는 수호천사의 모델이 바로 세인트 존이었다! 1890년 뉴먼이 죽자, 천주교회는 그를 예상과 달리 교회 귀족으로서 버밍엄 대성당에 묻지 않고 바로 세인트 존과 함께 합장한다.
뉴먼의 시는 중세의 신비관상가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한 호모에로팈한 표현들을 반영하기도 했다. 엘가는 뉴먼의 무의식적인 [카톨맄주의+호모에로티시즘]을 십분 활용해 수호천사를 '그 분'(him)으로 남성화 하면서 동시에 성부는 메조소프라노로 택해 양성화한다. 또한 수호천사와 게론티우스의 이중창 부분에다 호모에로티시즘을 최대한 배가시켜 주입한다. 이같은 호모에로팈 긴장은 소년 소프라노와 베이스가 서로 멜로디로 화답하는 바흐의 '깨어라, 파수꾼이여..'에서도 발견된다.
아이러닠하게도 엘가는 이 곡을 비롯, '사도들', '그 왕국' 등 3개의 "성숙한" 오라토리오 작품을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Ad maiorem Dei gloriam, AMDG) 헌정했지만서도..이 AMDG는 카톨맄 '예수회' 창설자 이냐시오 로욜라가 만든 문구로, 예수회의 대표적인 표어이기도 하다!
길버트 & 설리번 파트너 설
찬송가 '전진하라, 기독 군사들!'(=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 성가합창곡 '잃어버린 화음'의 작곡가인 아터 시머 설리번 경은 낭만기에 속하며, 프리메이슨 명사로 널리 알려졌다. '믿는 사람들'은 설리번의 기존 곡('성 거트루드')에다 배링-굴드 성공회 신부가 가사를 붙였다. 작시자 배링-굴드는 자기보다 수십년 젊은 하녀를 아내로 삼는가 하면, 민요채집과 함께 '늑대인간' 등을 연구한 묘한 취향의 사람이기도 했다.
설리번은 수많은 교회음악을 썼으나 메이슨이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경악시킨다. 그는 대본작가 윌리엄 길버트 경과 함께 '사보이 오페라' 등 여러 편의 다양한 희극 오페라/오페레타를 썼는데, 둘 사이는 '동성애 파트너'였다는 설이 끈질기게 사라지지 않는다. 설리번은 평생 독신/총각으로 지냈고, 길버트는 결혼을 했으나 자녀가 없었다는 점은 둘에 관한 근래의 영화 '탚시-터비'에서도 밝혀져 있다.
둘의 오페라 작품 다수는 경박하고 난잡하다. 천주교인인 영국 하원의 노먼 세인트존-스티배스 의원의 주장에 따르면, 그 중 소광대극 '남색꾼의 오페라'(the Sod's Opera, 'sod'는 sodomite/소돔인의 준말)엔 토스토프 백작(남근 상징), 볼록스 형제(고환 상징), 주름살 투성이의 늙은 가신 '스크로텀'(음낭을 상징) 등 노골적인 성적 암시가 나타났단다. 그러나 "세인트 제임스 궁의 경비실"에 보관돼 있었다는 이 광대악극의 구체적인 흔적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20세기
20세기는 그동안 숨어 있던 작곡가들의 동성애가 한꺼번에 개화라도 하듯 "활짝 핀" 때다.
영국의 벤저민 브리튼과 동시대의 영국 작곡가/지휘자 마이클 티펱 경, 미국의 대표적인 유대계 현대음악 작곡가 애런 코플랜드, '현악을 위한 아다지오'로 가장 유명한 새뮤얼 바버, 바버의 '연인'이었던 이탈리아계 미국인 작곡가 지안 카를로 메노티, 수많은 성가도 썼던 버질 탐슨, 역시 유대계 작곡가/지휘자로 유명했던 레너드 번스틴 등이 동성애자였다. 5
또 폴란드계 러시아인으로서 스위스로 망명한 작곡가 카롤 지마높스키, 프랑스의 대가 프란시스 풀렝, 스페인의 마누엘 데파야, '타임'매거진이 "세계최고의 현대 예술가곡 작곡가"로 극찬한 미국 작곡가/작가 넫 로렘, 독일 좌파였다가 동성애 탓에 이탈리아로 망명한 뒤 호치민과 게바라 등을 찬양하는 음악을 쓴 열성적인 공산주의 작곡가 한스 베르너 헨체, 뉴욬 출신의 유대계 작곡가로 다년간 줄리어드 음대 교수였던 데이빋 다이어먼드 등이 모두 동성애자였다고 알려진다.
물론 수많은 연주가들도 그랬다.
앞서도 비쳤듯, 바버와 30년간 동거한 '연인' 사이였던 메노티의 '아말과 야간 방문객들' 등 다수가 신교권에서 아무 검증 없이 빈번히 연주된다.
음악비평가/작곡가 버질 탐슨은 레즈비언/작가 거트루드 스타인과 오페라 '3막의 4 성자들'을 쓴 동성애자였으나 1983년 케네디센터 문화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었다. '애팔래치아의 봄'과 '로데오' 등으로 명성을 떨친 애런 코플랜드는 결혼도 하고 자녀도 두기도 했지만, 대표적인 공개적 동성애자였다.
유대계 작곡가/지휘자로, 특이한 지휘대 쇼맨슆을 발하면서 유렆 연주에서도 탁월한 베토벤 해석가로 인정 받은 레너드 번스틴은 뉴욬필하모닠 악단을 최고수준으로 올려 놓았고, '웨스트사이드스토리' 무대음악 등으로 사후에도 여전히 인기가 높은 미국과 뉴욬의 대표적인 음악인이지만, 결혼하고 자녀를 두고도 "삼삼한 젊은 애인"들을 끼고 다니던 반(半) 공개적인 동성애자였다.
흥미롭게도, 이들의 작품 다수가 단지 성경에서 땄거나 기독교 주제를 땄다고 해서 교계에서 자주 연주된다. 예를 들면 번스틴의 예전적 미사곡/'성가'들이 신교의 몇몇 현대적/에큐메니컬한 찬송가에 버젓이 실려 있다. 넌센스요, 신 모독적이다.
'전쟁 레퀴엠' 등 성공회와 연루된 수많은 음악도 작곡한 영국 작곡가 벤저민 브리튼도 공개적인 동성애자였다. 그는 동성애 파트너 '페어즈'와 동거했다. 음악은 숨은 동성애 감정을 적절히 '포장'하는 데도 사용돼 온 것으로 이해된다. 자신이 동성애자인 필맆 브렡은 역시 동성애자였던 브리튼의 삶과 작품을 모델로, 그런 파악을 했다.
브리튼은 그의 1961년 대작-'전쟁 레퀴엠(진혼곡)' 중 봉헌송 '쿠암 올림 아브라하이(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의 긴 푸가(fugue) 부분에서 한 (성공회) 송가의 가락을 주제로 사용한다. 이 푸가는 윌프렏 오웬의 시 '노인과 젊은이의 비유'의 세팅을 바탕으로 했는데, 이 시는 창세기 스토리를 뒤집어 (전쟁에 미친 국가 지도자들을 상징하는) 아브라함이 (유럽 후손들인) 이짜크를 죽이는 것으로 묘사됐다.
이 곡에서 브리튼은, 청소년이 한 성인 남성에게 '성'을 허용하는 동성애 내지 아동성애를 표현한 것으로 이해돼 왔다. 그는 특히 이 음악에서 동성애자들에 대한 사회의 '냉담'과 유대-기독교적 스토리와 이미지에 "숨겨진" 근친간/학대-피학대성욕/아동성애 등에 관한 사회문화적 위선을 풍자한 것으로 보인다. 허먼 멜빌의 '빌리 벋'을 작곡할 때도 브리튼은 벋의 운명을 자신의 것과 혼동하기도 했다.
브리튼 전기작가 험프리 카펜터는 아브라함과 이짜크 모멘트들을 '자기 패러디적인 멜로드라마'라고 일컫는다. 그의 음악 속에는 영리함과 진지함/감성 등 반대적 요소가 대치되는데 이것은 동성애에 대한 그의 숨김과 열림을 아울러 암시한다고 학자들은 파악한다.
'스와니 강', '오 수재너', '아름다운 꿈장이' 등을 쓴 미국의 19세기 민요 작곡가, 스티븐 포스터는 동성애자라는 설이 유력하다. 콜 포터 역시 1919년 린다 토머스와 장기간 결혼생활을 했지만 동성애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수많은 남성연인들 가운데는 재클린 케네디의 아버지였던 존 버논 부비어 3세도 있었다.
여타 동성애 작곡가들은 다음과 같다.
폴 보울즈 (작가/작곡가)
존 케이지 (현대음악가, 게이 댄서/안무가 머스 커닝엄과 55년간 협력/동거),
빌리 스트레이혼 (흑인작곡가),
루 해리슨 (한국음악 등 동양음악에도 밝았던 시인/작곡가/운동가/호사가, 윌리엄 볼긱과 30년 동거)
스티븐 손드하임 (브로드웨이 뮤지컬 작곡가/작사가/작가. 1993년 케네디센터 문화예술상 수상)
제리 허먼 (브로드웨이 쇼 작곡가/작사가)
데이빋 델 트레디시 (퓰리처 상 수상 작곡가, 줄리어드 음대 교수)
잔 코릴리애노 (오페라 '베르사이유의 유령들' 작곡. 줄리어드 음대 교수)
하워드 애쉬먼 (뮤지컬 대본작가/감독/디즈니애니메이션영화음악 다수 작곡)
프렏 헐쉬 (재즈 작곡가/피아니스트)
마크 샤이먼 (영화/TV음악작곡가)
로라 카프먼 (레즈비언 작곡가).
오늘날 예술계는 물론 교계까지 빠르게 '무지갯빛' 동성애 물결로 물들어 가는 이유는..이런 대상들에 대한 성도의 무분별/무검증 탓이라고 보면 너무 억측일까?
싸탄은 크리스천의 그런 무분별/무검증을 물론 백 번 좋아 한다. 결국 동성애를 만든 장본인은 하나님이 아닌 그다. 싸탄 자신이 흔히 남성도 여성도 아닌 양성/중성적 존재로 부각된다. 루키페르를 상징한다는 성전기사단의 우상 '바포맽'의 모습도 이를 반영한다. 아무튼, 동성애는 성경 창세기에 그 기원이 있지 않고 악령들에게 있다.
날이 갈수록 동성애가 세를 과시하는 세태 속에서 우리는 이런 진리를 바로 분별해야겠다.
'문화예술비평 > 음악'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다림의 여인 솔베이지 (6) | 2010.08.08 |
---|---|
파가니니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나? (김삼) (23) | 2010.03.22 |
바흐의 실망스러운 점 (29) | 2009.12.30 |
G단조 아다지오의 허실 (2) | 2009.12.06 |
찬송가 '나는 예수님이 더 좋아'-분석과 배경 (11) | 2009.1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