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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비평/음악

바흐의 실망스러운 점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교회음악사에 빛나는 명사의 한 명입니다. 동시에 세속음악계에서도 명실공히 바로크의 최고 거장으로 누구에게나 인정 받습니다.

그는 평생 독실한 루터교인이었지요. 같은 바로크 시대의 같은 루터교인인 핸델처럼 기복 많은 삶을 살지 않았고, 그저 교회 중심으로, 교회의식에 맞춘 작곡을 주로 하면서 부수적으로 귀족층을 위한 세속음악도 썼습니다.  

그에겐 본 받을 점들이 퍽 많습니다. 특히 웬만한 작품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SDG)이란 문구(하기야 구교 신자였던 하이든도 그랬음) 또는 'JJ'(예수님, 도우소서)란 약자를 기입해 넣곤 했습니다. 다분히 모범적인 교회음악인이었지요.
당대 최고의 오르가니스트,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에게 한 수 배우러 아른슈타트에서 북쪽 뤼벸까지 320km 거리를 마다 않고 도보로 오간 것도 대단한 정성과 인내였다고 아니할 수 없지요.

그래도 사람인지라..바흐에게도 단점과 약점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비성경적인 것들을 들춰 가며 우리의 교훈으로 삼으렵니다.




바흐의 주된 특징들


바흐의 전반적인 생애와 작품들에 관해서는 워낙 자료가 많고 또 널리 알려졌으니 참조하시고요.
다만 여기서 바흐의 몇몇 특징을 간추려 본다면..

우선 그가 평생 쓴 수많은 기악/성악곡들가운데 200여 교회용 칸타타가 두드러지지요. 세속 칸타타들도 더러 있으며..칸타타들 다수는 아깝게도 분실됐습니다. 목록이나 흔적이 있는 그의 300여 칸타타들의 약 5분의 2가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그나마 이 수많은 칸타타들 중 바흐의 생시에 출판돼 나온 교회 칸타타는 단 1편 뿐이었습니다.

바흐의 기악곡들 중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이 유명하지만, 칸타타들의 신포니아(서곡)도 이 협주곡에 맞먹거나 버금갈 정도로 작품성이 훌륭합니다. 특히 코랄 칸타타 '같은 날, 안식일 저녁에'[각주:1](BWV 42번)의 긴 서곡 '신포니아'는 바흐의 최상급 기악곡의 하나입니다(연주 예: http://www.youtube.com/watch?v=Hu3XS_D6HVc ). 참고로..바흐의 작품들은 'BWV'[각주:2] 약칭과 이어지는 번호로 표시됩니다.)

바흐의 죽음과 함께 잊혀졌던 그의 명작들이 그나마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은, 약 1세기가 지날 무렵 -그러니까 고전파 시대도 지나고 이미 낭만파기로 접어든 멘델스존 때였지요. 유대계였던 멘델스존 역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바흐는 당대의 세속 가락들과 남의 작품들도 서슴치 않고 갖다 활용했으니, '카피' 정신이 농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례로, 그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의 끝 곡인 합창곡으로도 쓰인, (우리 찬송가의) '오 거룩하신 주님, 그 상하신 머리' 가락은 17세기 작곡가 하슬러의 세속 작품입니다.

바흐는 특히 루터 등의 코랄이나 찬송가 가락들을 애용했습니다. 예컨대 우리가 늘 자주 듣는 '예수, 인간의 소망의 기쁨'(연주 예: http://www.youtube.com/watch?v=d9EN27Zh_vg&feature=related )의, 셋잇단음표(삼연음부/triplets)의 아름답고 화려한 궁형(弓形='아치형') 반주곡은 바흐 자신의 것이지만[각주:3], 합창곡 멜로디 자체는 요한 쇼프(Johann Schopp)의 것입니다[각주:4]. 바흐는 이 멜로디를 수많은 다른 성악/기악 작품에서도 활용했고[각주:5] 바흐 말고도 파켈벨, 요한 마테존, 텔레만, 요한 곹프리드 봘터, 요한 크리스토프 올레이 등이 같은 가락을 응용했습니다. 
근대/현대에도 쓰였고요. 참고로 알아 두실 것은 우리가 현재 아는 대로의 합창곡 가사 원문은 바흐의 다른 편곡에서 딴 것입니다.  

물론 바흐가 워낙 명장이다 보니, 이런 것은 단점으로 쳐 지지도 않고요.
정작 그의 문제점은 깊은 영적 분별이 없는, 좀 미묘한 부분들입니다.


바흐의 열정-아펰텐(Affekten)

바흐는 교회와 신앙을 중시하면서도 자신의 교회 작품보다는 세속 작품에 더 깊고 많은 열정을 들인 것 같습니다. 물론 그의 교회음악 작품에도 이른 바 '아펰텐'(Affekten=passions) 즉 당대풍의 열정을 담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정작 그의 순수열정은 세속음악에 더 부어졌다고 할 수 있지요.

바로크 교회음악들을 보면, 아펰텐은 낭만파 시대 이후에야 비로소 나타나는 개인 나름의 뜨거운 주관적 신앙 열정이기보다 슬픔/놀라움/미움/사랑/기쁨/바람 등에 대한, 일종의 격식화된 객관적 '열정'이었다고 보면 쉽습니다. 예를 들면, 슬픔은 으레 느린 속도의 단조 곡으로 표현되지요. 따라서 바흐의 이러한 아펰텐 수사(修辭)와 서술을 제대로 느끼려면, 특히 바흐 칸타타의 가사를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그의 교회음악들은 대체로 교회력에 맞춘 매주 '스케줄'에 따라 작곡됐기에, 그의 세속음악에 비해 주관적/즉흥적인 생동감은 상대적으로 모자랍니다. 음악적인 영감은 오히려 세속음악에 더 발휘된 셈이지요. 비평가들은 바흐 교회음악의 약점을 바로 이것으로 봅니다.
바흐의 교회음악은 많은 부분들이 세속음악이 적당히 가사만 바뀐 채 '패러디' 되어 있습니다. '마태 수난곡'처럼 영감이 풍부해야 할 작품에도 레오폴트 폰 안할트 쾨텐을 위해 썼던 세속곡(트라워무짘)이 기용됐습니다.

이런 패러디는 오늘날 다른 클래싴 성가곡들에서도 자주 발견됩니다. 예를 들면, 엄연히 카톨맄 종교음악가인 세자르 프랑크의 성체성사곡 '파니스 안겔리쿠스'는 가사가 적당히 바뀌어 '생명의 양식'이라는 이름으로 신교 곡에 가깝게 둔갑해 있지요. 

더군다나, 바흐가 죽기까지 머문 라이프치히에서는 "교회음악에 극적인 요소는 삼가 달라"는 지도층의 압박이 생동감을 줄이는 요인이었습니다. 바흐의 음악은 보수적이면서도 화려한 색채 화음 등 남 다른 데가 많았기에 이질감을 갖는 사람들도 많았고..자연히 충돌이 잦았습니다.

밥 먹고 살아야 하는 가난한 음악인으로서 필연적 이해 관계가 그의 작품세계에 미친 영향이랄까요. 바흐는 비록 귀족층들을 상대로 음악으로 섬겼지만, 평생 검소하고 소박하고 가난했습니다. 화려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지요.   
그래서 돈벌이도 신통찮고 재미도 적은 라이프치히에 그럭저럭 말뚝 박고 눌러 지내면서 교회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했기에, 그런 결과가 생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나마 라이프치히의 삶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은 신앙도 신앙이지만, 첫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를 여읜 뒤 재혼한 안나 막달레나의 조력의 힘이 컸고, 20명에 가까운 그의 자녀들과 아내를 비롯한 주변 친척들이 거의 모두 한결 같이 뛰어나거나 괜찮은 음악인들이어서 큰 힘이 됐지요.


피칸더와 바흐

그밖에도 바흐의 큰 도움은..자작 가사를 거의 쓰지 않던 바흐를 돕는 시인/대본작가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필명 '피칸더'(Picander), 본명은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헨리치"(Christian Friedrich Henrici 1700-1764)였습니다.
헨리치(이하 '피칸더'로 표기)는 본래 비텐베르크에서 법학을 공부하면서 에로팈한 풍자시와 대본 등을 쓰다가 나중 기존 세속시와 함께 교회음악용 시로도 눈길을 돌린 사람이었습니다. 라이프치히 시 우정국장을, 훗날엔 주류 세무관,  포도주 검사관 등을 맡기도 했지요.

피칸더와 바흐는 먼저 세속 작품으로 서로 친분을 맺었습니다. 피칸더는 1726년 바흐의 세속 칸타타(BWV 249a, 205) 대본을 썼지만, 바흐는 3년 전 이미 교회칸타타 하나(BWV 148)를 피칸더의 연시에 기초해 쓴 바 있습니다. 이 작품들은 1724-1725년 피칸더의 단시모음에 실려 프란츠 안톤 슈포르크 백작에게 헌정됐는데, 슈포르크는 바흐와도 친분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슈포르크가 둘 사이에 공식적인 다리를 놓았을 가능성이 높지요.

피칸더의 칸타타용 시집 한 권의 머릿글을 보면, 거기 실린 시 전체를 바흐가 1729년 한 해에 모두 칸타타로 옮길 정도로 피칸더의 시풍에 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칸타타들 중 단지 9개 작품만 현존합니다. 바흐는 1724년 발간된 피칸더의 '(에른스트-쉐르츠하프테) 풍자시집' 1-5권에 실린 작품 모두에 곡을 붙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시집은 현존합니다.

바흐의 라이프치히 시기 주요작인 칸타타들은 물론, '마태 수난곡'(BWV 244, 1727), '마르코스 수난곡'(분실),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BWV 248, 1734), 세속작 '커피칸타타'(BWV 211, 1732–1734) 등 수많은 명작들의 가사도 피칸더의 것입니다. 그러니, 피칸더는 가히 '바흐의 제넨즈'(='메시아' 등 핸델의 주요 오라토리오 가사 편집자였던 찰즈 제넨즈)라고 할 만 하죠.
하지만 피칸더는 이처럼 바흐의 결정적인 조력자이면서도 동시에 그의 작품에 "암적 요소"로 작용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까닭은 바로 평소 에로팈한 예술감정 표출의 '끼'가 있는 피칸더의 "야하고" 끈끈한 세속성 탓이지요. 피칸더의 이 '에로티카' 습성은 심지어 바흐의 교회음악 구석구석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피칸더의 문학적 에로티시즘은..바흐의 명장다운 미묘한 음악적 표현력과 맞물려 사뭇 효율적으로 발휘됐다는 평가가 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바흐의 여러 교회 악곡 가사에 '노래들의노래'(아가) 시가 자주 원용됩니다. 누구나 느끼는 바이지만, '노래..'엔 성경에서는 가장 "야한", 선정성 낱말과 문구나 표현들이 잦습니다. 그것도 성경의 일부이기에 늘 합법적인 딱지를 달고서입니다. 피칸더는 바로 이 점을 노려 '노래'를 그의 가사에 적극 활용했고, 바흐는 그 가사에 걸맞게 최대한 음악적으로 표현하느라 애썼습니다. 둘이서 '반죽'이 잘 맞은 셈이지요.

바흐의 아펰텐은 더욱이 칸타타 등에서 마지막 부분 또는 크리스토의 신비적 합일 같은 절정에서 유달리 강화됩니다. 이것은 당대 루터교에서도 '정통' 노선이 아닌 경건주의자들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지요. 특히 형이상학적인 크리스토의 죽음과 교회와의 신비적 합일이라는 개념에 강렬한 아펰텐이 주입됩니다.


시기별 창작 상황

바흐는 1700년대 전반기부터 1750년까지 약 50년간에 걸쳐 창작활동 시기를 가졌지만, 실제로 교회음악에 투입된 기간은 전체에 비해 짧은 편입니다. 그의 칸타타 작품 다수는 새 임무나 또는 경력 제고를 위해 작곡되곤 했습니다. 또 좋은 작시자가 있을 때 수가 증가했습니다.

1714년 악장(콘체르트마이스터)으로 임명되고 나서 월1편 씩의 칸타타를 쓰게 됐습니다. 그러던 1716년 카펠마이스터였던 요한 자무엘 드레세의 후임자로 물망에 오른 한 때 바흐는 칸타타 창작열을 불태웠지만, 기대가 어긋나자 한동안 칸타타 작곡을 멈춥니다.

바흐는 훗날 자기 생애에 "가장 행복했던 때"로 쾨텐 시기(1717-1723)를 꼽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칸타타를 의무적으로 쓸 필요가 없었고, 다만 몇 개의 헌정용/행사용 칸타타를 썼을 뿐이며, 주로 세속음악인 건반악곡과 기악곡 작곡에 몰두했습니다. 의무감/부담감에 따른 교회음악 작곡을 싫어했음을 체감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바흐가 가장 많은 교회음악을 작곡한 때는 라이프치히 시기(1723-1750년)입니다. 첫 5년간은 칸타타만 주로 썼습니다. 원칙적으로는 교회력 주기(사이클)에 따라 연간 59편씩 5년간 총 약 300편을 써야 했던 것으로 추산됩니다. 1724-25년 기간 동안 그는 거의 매주 1편씩 썼습니다. 당시 바흐는 크리스티아네 마리아네 폰 지글러 등 여러 시인들의 가사를 썼습니다. 그러던 1720년대 중반부터는 본격적으로, 전술한 피칸더의 시를 쓰기 시작합니다.

1720년대는 바흐 뿐 아니라 당대 독일 작곡가들의 창작열이 대폭발한 때였습니다. 오늘날도 작품이 널리 연주되는 게오르그 필맆 텔레만의 경우, 하루 1편의 칸타타를 쓸 수 있었고, 8성부 모테트 합창곡을 "편지 쓰듯" 썼다고 하는군요. 텔레만은 40편의 오페라, 44편의 수난곡, 12년 교회력 주기 칸타타를 썼으니 대단한 창작열입니다.
시기는 좀 앞섰지만, 바흐의 라이프치히 선임자 요한 쿠나우는 14년간 매년 교회력 주기 칸타타를 썼고, 요한 필맆 크리거(1649-1725)는 약 2000편의 칸타타를 썼으니 숫자로선 바흐를 압도하지만, 이들의 오리지낼리티는 바흐의 칸타타보다 훨씬 떨어집니다. 그 주된 요인의 하나는 상례적인 교회력 스케줄과 의무감에 의해 썼기 때문입니다.
라이프치히 시기에도 바흐가 모든 음악보다 칸타타를 중시했던 때는 고작 1723-29년의 짧은 기간이었습니다.

1740년대에 바흐는 라이프치히의 찌들린 삶이 지겨워, 돈과 영달을 위해 여느 세속 작곡가들과 다름 없이 더 높은 귀족의 총애를 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포츠담의 프레데맄 대제의 은총을 호소했습니다. 그것도 평시민으로가 아니라 방금 제2차 슐레지안 전쟁에서 프러시아에 패망한 잨센 선제후의 궁정 작곡가로서.
과거엔 선제후의 온 가족을 위한 많은 작품을 쓰면서 겸허하게 은총을 구했었습니다. 실로 기회주의적 행동이 아닐 수 없지요. 물론 핸델도 대동소이한 때가 있었습니다만. 또 모차르트도 때로는 아부심에서, 때로는 가난 속에서 돈을 바라며 명작을 썼듯이. 

그러나 당대의 많은 작곡가들처럼 바흐 역시 동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종교적 감정, 탁월한 재능, 행복스런 정서의 순간, 그리고 시기적 우연에 따라 수많은 명작들을 남긴 것은 틀림 없습니다.


바흐 음악에 숨은 선정성

아무튼 바흐 음악엔 주로 피칸더의 가사에 자극 받은 선정성이 여기저기 스며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교회용 칸타타 '깨어라, 파수꾼의 소리가 외친다'(Wachet auf, ruft uns die Stimme BWV 140)에서 이중창은 노래들의노래에서 따온 것으로 남/녀가 주고받는 대화 형식입니다. 물론 실제 연주에서는 소년 소프라노와 베이스 사이의 교창 형식이지요.  

피칸더-바흐 팀은 이런 작품에다 크리스토와 신자와의 관계를 애인 내지 부부 사이로 설정, 애틋한 연정 같은 것을 최대한 맘 놓고 표현했습니다. 합법적으로.

알고 보면, 사실 노래들의노래는 신약에서 전혀 인용된 적이 없는 구약 권서들의 하나지요. 심지어 부부 사이를 크리스토님과 교회 사이로 비유한 파울조차도 이 성경을 인용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그 정도로 센슈얼하달까요. '노래'는 우선 쉽게 말해서, 그야말로 한 편의 남녀 간의 로맨팈 드라마입니다.  

그런데도 교회사를 장식한 수많은 주석가들이 '노래'에다 일방적으로 헤비한 "거룩한" 의미만 담고 거의 억지풀이를 하다시피 무리한 풍유 해석을 해 왔습니다. 그들 자신의 말로, 풍유 해석은 가장 위험한 성경해석법의 하나로 쳐 집니다. 비록 주님 자신의 비유와 풍유해석이 있긴 있지만. 오리게네스의 풍유해석을 비난하는 사람들 자신이 '노래'는 기막힌 풍유법을 적용하는 모순을 발휘합니다. 

과연 '노래'엔, 오늘날 설교가들이 쑥스럼도 없이 맘 놓고 강단에서 외칠 수 있고, 사춘기 남녀들에게도 별 자극이 없게 "거룩한 의미"로만 차고 넘치고, 성적인 선정성은 전혀 없는 걸까요?

실은 그래서, 성경의 일부인 '노래'를 인용, 해석한다는 미명 아래 에로티시즘도 합법적으로(?) 암암리에 교회 안에 스며든 것도 사실이고, 피칸더의 가사를 합법적으로 활용한 바흐 교회음악에도 여실히 나타나 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바흐의 교회음악을 듣는 신자들은 각자 듣기에 따라 느낌이 다르겠지만, 적어도 당시 상황 설정은 그랬다는 겁니다.  


바흐 음악에 나타난 동성애 정서


뭐, 그건 그렇더라도..
피칸더의 가사 작업과 관련된 바흐의 결정적인 약점은 그의 세속음악에서 발견됩니다.

우선 바흐의 세속 칸타타 '푀부스와 판의 경쟁'(Der Streit zwischen Phoebus und Pan BWV201)이 그렇습니다. 줄거리는 올림포스의 신이자 현악기 '키타라'의 발명가인 푀부스 아폴로와 소위 '판 피리'로 불리는 관악기를 발명한 동네 목신 판과의 경쟁에 관한 것입니다. 
바흐의 신화적 세속 칸타타 다수는 으레 당대의 귀족들에게 헌정용으로 작곡된 것입니다. 이 작품은 1729년 봄 '칼레기움 무지쿰' 악장일 당시 쓴 것 같습니다. 그 후 여러 번 연주를 거치면서 훗날 가사가 개작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푀부스와 판 사이의 갈등은 미학적이고 진지한 스타일과 가볍고 경쾌한 스타일 사이에 바흐 자신의 갈등을 시사한다는 설도 있습니다.

여기서 피칸더가 시로 읊은 문제의 노래 '푀부스의 아리아'는 이렇게 진전됩니다.
연주는 다음 참조:
http://www.youtube.com/watch?v=3vOU-oOSD50&feature=youtube_gdata


    그리움을 지니고서
    난 네 보드라운 두 뺨을 지긋이 누르고 싶단다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휘아신트여.
    그리고 네 두 눈에 입맞추고 싶다
    그것들은 나의 새벽별
    또 내 영혼의 태양이란다. (사역)


언뜻 보기에 딱 남녀의 연애시처럼 보이는 이 노래는 사실상, 미소년 휘아킨토스(영어: 히아신트)에 대한 푀부스의 동성연애 감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바흐는 악기 편성에서 현악기와 함께 효과를 위해 플루트/오보(=오보에 다모레)를 가미했습니다. 1865년 바흐 전기 작가 칼 헤르만 비터는 이 노래에 대하여 "작곡가가 신중히 다뤄, 최상의 멜로디로서의 매력을 풍긴다"며 노래 뿐 아니라 반주로서도 태양신의 애정을 최대한 표현하길 원했다고 주장했다.
 
동성애와 미동(美童) 상대의 남색은 성경에서 엄격한 범죄로 다뤘습니다만, 바흐는 개의치 않고 여기 매우 아름다운(?) 음악들을 효과 있게 덧붙였지요. 그러니까 피칸더는 마치 성경 얘기나 성구를 활용하듯 신화를 활용해서 동성애를 아름다운 지고의 사랑인 양 표현했는데, 바흐는 자진해서 거기 말려 든 셈입니다.

이 시에 비록 서정시 같은 면도 없지는 않지만, 동성애 감정인 것은 틀림 없습니다. 이를테면, 이 곡은 음악사상 최초의 명백한 동성연애시입니다! 그런데 바흐는 여기에다 애틋한 감정을 담아 작곡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전통적으로 알려져온 바흐의 보수적 이미지와는 매우 다른 모습이 아닐 수 없지요.

바흐 당대의 벤야민 헤더리히가 쓴 '완벽신화대사전'(1721년)에 따르면, 휘아킨토스는 매우 핸섬한 미소년으로 타뮈리스/아폴로/제퓌로스(서풍신) 등 여러 신들이 발견 즉시 사랑에 빠졌답니다. 그러나 휘아킨토스가 아폴로를 더 높이 쳐 주자 이를 질투한 제퓌로스는 어느 날 원반 던지기 연습을 하던 중 아폴로의 원반이 높이 떴을 때 그걸 훅 불어 휘아킨토스의 이마를 맞춰 휘아킨토스가 쓰러져 숨지자 아폴로는 그를 슬퍼하며 한 포기 꽃(히아신트)으로 만들었다는 줄거리입니다. 

바흐는 이 작품을 최소한 두 번 연주했는데 과연 당대인들이 이 동성애 아리아를 어떻게 생각했을지 궁금하지만, 따로 전해져 오는 정보가 없습니다. 당대에는 지금보다 더 호모에로티시즘에 대한 반발이 강했는데도 바흐와 피칸더가 도전 받을 만한 아무 저항이 없었음은 놀랍습니다. 


문제의 추적

사람들은 혹시 작시자 피칸더가 동성애자가 아니었을까 묻기도 합니다. 바흐와 피칸더는 비슷한 길이의 60여년 삶을 살았지만, 서로 매우 달랐습니다. 바흐는 상처한 뒤 재혼해서 수많은 자녀를 뒀지만, 피칸더는 36세 때까지 결혼한 흔적이 없고 첫 아내의 죽음 후 두 번째 결혼했지만 두 번 다 자녀는 전혀 없었습니다.

피칸더의 시작품들은 단지 바흐 음악 때문에 '불후의 명작'이 됐지만, 그의 시 자체는 당대나 이후에 냉소적 대우를 받습니다. 선정적인 표현을 서슴없이 해 "가장 불쾌하고 값싼 프린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심지어 라이프치히 시의회가 몇몇 작품을 압수하기도 했습니다.

19세기 전기작가에 따르면, 피칸더의 평소 언어생활도, 시쳇말로 "별 영양가 없이" 시시하고 무례하고 지저분한 농담을 일삼았고 시 속에 때로는 다분히 외설스런 암시도 담기곤 했답니다. 바흐의 오르간 작품을 즐겨 연주했던 의사/신학자/음악인이었던 알버트 슈바이처조차도 1908년, "그런 명장(바흐)이 그런 버릇없고 한심한 사람에게 끌렸다니 의아하다"고 개탄한 바 있습니다. 슈바이처는 그러나 '푀부스의 아리아' 내용을 문제 삼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바흐는 피칸더와 친분이 깊어 1737년엔 피칸더의 아내가 바흐의 딸 요한나 카롤리나의 유아세례 때 대모 노릇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피칸더로서, 아리아에서 두 남성의 성애를 표현한다는 것, 과히 놀랄 일은 아닙니다만..사실 이 작품과 연관지을 만한 숨은 스토리가 없지 않습니다.

이 작품이 연주되기 약 75년전, 바로 이곳 라이프치히에서 작곡가 요한 로젠뮐러의 추문이 있었습니다. 즉 라이프치히 시의회가 선정한 '토마너' 악장인, 바흐의 오래 전 선임자였던 것이지요. 그는 토마스 슐레(학교)의 학생인 소년들을 성추행했다는 혐의를 받고 처벌이 무서워 함부르크로, 그 후 베네치아로 도망갔다가 1682년 되돌아와 안톤 울리히 공작의 악장이 됐습니다. 그런데도 로젠뮐러는 그의 창작성에 있어 쉬츠/바흐/북스테후데/파켈벨 등 여타 바로크 명장들과 나란히 명성을 떨쳐 왔습니다.

바흐는 로젠뮐러를 익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칸타타 '나의 끝이 다가왔음을 누가 알랴?'(Wer weiß, wie nahe mir mein Ende?)에서도 로젠뮐러의 5성 합창곡 '세상아 잘 있거라, 나는 그대가 지겹다'를 기용한 바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작곡가 크리거는 1670년대에 베네치아에서 로젠뮐러의 제자로 있었습니다.  


신화의 함정 

작곡가들은 신화적 주제를 즐겨 활용하곤 합니다. 리히하르트 봐그너의 오페라 작품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죠.
반수반인의 상상적 존재인 '사튀르'(Satyr)들과 그들의 두목 격인 '판'(Pan, 로마의 Faun), 그리고 이들과 잘 어울리는 디오시소스(바쿠스) 등은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는 가장 음란한 신들입니다. 사튀르/판 비슷한 존재들은 신화에 오래 탐닉했던 C.S 루이스의 작품에도 나타나지요.
인상파 작곡가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도 바로 님프를 그리며 낮잠을 자는 목신 판의 몽환적/자위적인 공상에 관한 스테판 말라르메의 시의 분위기를 다룬 것입니다.

영적 분별이 있는 사람들의 공통된 얘기 하나는 다양한 지역의 고대 신화 속에 나타나는 '신'들은 실상 악령들의 다양한 특징들을 의인화 내지 의신화(擬神化) 했다는 것입니다. 가령 올림포스 주신인 제우스(로마의 유피테르=주피터)는 악령들의 두목인 싸탄의 특징을 보여 준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사튀르나 판은 악령들의 음란성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피칸더-바흐 팀은 단지 귀족들을 즐겁게 하느라 이런 문제점-문제점으로 보지도 않았겠지만-을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음악인인 바흐는 세속과 교회의 경계를 무사무난(無事無難)하게 넘나들던 피칸더와 허물없이 어울려 이런 황당한 신화적인 음악을 쓰는데도 아무 부담감을 갖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바흐는 이렇게 의식 속에 문제점을 지닌 피칸더의 가사모음에 곡을 붙이면서, 특히 '노래'룰 활용한 가사에다 당시 소년 소프라노와 청소년 베이스 사이에 이른 바 '대화'를 주고 받는 형식의 곡을 붙여, 민감한 사람들에겐 묘한 '동성애적' 감흥과 자극을 준다는 학설도 없지 않습니다. 물론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바흐의 악곡 가운데 가장 포퓰러한 한 가지가 '양떼는 한가로이 꼴을 뜯을 수 있고'이지요. http://www.youtube.com/watch?v=OTcTx1gPim4 (서창 후 아리아가 나옴). 풀밭 위를 조금씩 이리저리 거닐며 뛰노는 듯한 기악반주가 나오다 이윽고 정감 넘치는 가락이 나오는, 매우 전원적인 곡이지요. 목장 분위기를 묘사한 바흐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중 전원 신포니아, 핸델의 '메시아' 중 1부 예언/탄생 편의 간주곡 '피파'처럼 전원성이 두드러집니다. 

그런데 이 곡은 본래 바흐의 세속 작품인 사냥 칸타타 '나의 최고 기쁨은 신나는 사냥뿐'(BWV 208)에 나오는 소프라노 아리아로, 배역들 중 '팔레스'가 부릅니다. 그런데도 다양한 성부의 '성가' 합창곡으로도 편시/편곡돼 나왔습니다. 마치 성구에 근거한 것인 양.  
이 칸타타 역시도 신화적 존재들이 나타납니다. 즉 사냥의 여신 디아나(또는 루나. '달의 여신'.  처녀성과 사냥의 수호신. 그리스의 셀레네/아르테미스에 해당)를 비롯, 전술한 팔레스(고대 로마 건국제인 4월21일 '팔리아' 때 받들던 목신), 엔뒤미온('셀레네/루나'의 총애를 받은 양치기 미소년), 판(음란한 목신) 등이 노래 배역으로 등장하지요.

사냥칸타타는 잘로몬 프랑크의 가사에 곡을 붙인 작품으로, 1713년 바이센펠스에서 잨센 공 크리스티안의 생일축하용(2월 23일)으로 쓰였고 내용상 아부성이 대단하지요. 크리스티안 공이 사냥을 즐겼기 때문에 이 가사엔 '크리스티안'이라는 이름도 나옵니다만 훗날 다른 곳에서의 연주에선 '크리스티안'을 딴 이름으로 교체하기도 합니다.    

이 작품 역시 나중에 다양한 교회칸타타에서 패러디(가사만 바꿈)하여 원용됩니다. '양떼는..'의 가락은 잨센 주민들을 다스리는 크리스티안 공을 흡사 양떼를 이끄는 선한 목자 예수나 다빋으로 비유한 것 같아 사뭇 간지럽습니다. 더구나 이름이 크리스티안(=크리스천)이다 보니, 신화 캐맄터들과 기독교 신자가 뒤섞여 어울린 듯 혼동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이처럼 바흐는 생애 전반기에든 후반기에든 신화적 스토리를 위한 음악도 별 생각 없이 썼습니다. 이 방면에 영적 분별이 없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나운영은 찬불가 등을 썼다고 비판하지만, 바흐는 이런 잡신들이 뒤섞인 신화적 음악에 개입했는데도 교계에서 아무 욕도 얻어 먹지 않고 찬사만 받아 온 게 사실입니다. 바흐는 이 점에서 나운영 등과 함께 비평 받아 마땅합니다.

독자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으세요?


  1. Am Abend aber desselbigen Sabbats [본문으로]
  2. Bach-Werke-Verzeichnis 즉 바흐 작품 목록의 이니셜. [본문으로]
  3. 칸타타인 그의 BWV 147에서 그러함. [본문으로]
  4. 쇼프의 원 멜로디 제목 'Werde munter, mein Gemüthe' (작시자는 요한 리스트=Johann Rist였음) [본문으로]
  5. BWV 55(5번곡), 146(8번), 147(제6, 10번), 154(3번), 244, 359, 360, 1118 등. 가사는 서로 다를 수도 있음.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