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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요한복음묵상

"와 보라" (요한복음묵상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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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타나엘과 필맆 (W.J. 모건 그림)

참고 본문: 요한복음서 1:35~51

"와 보라"

요한은 딴 세 복음서들과는 현저히 다른 얘기들을 여기서 또 하고 있습니다. 페트로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가 된 과정과 장면들을 나름으로 독특하고 실감나게 묘사했지요. 침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로 전이돼 가는 과정이 한 폭 그림처럼 그려져 있어 흥미롭습니다. 기자 요한이 주로 알던 사실을 자신만의 특이한 방식으로 전개했습니다.
페트로/안드레 형제, (요한), 필맆과 나타나엘 등입니다.  
 
먼저 침례자 요한의 두 제자들이 스승으로부터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을 소개 받자마자 냉큼 주님을 따라갑니다. 그 둘은 누굴까요? 안드레(1:40)와 기자 자신인 (사도) 요한입니다. 요한은 안드레와 가까운 동네 친구인 데다, 본 복음서 도처에서 자신을 익명으로 표기한 경우가 잦기 때문이지요(예: 요복 13:23, 19:26 등).

따라오는 둘을 돌아보신 예수님은 "뭘 찾으시오?" 하고 물으십니다. "랍비(선생님), 어디 계십니까?"라고 반문하자 주님은 "와 보시오"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처음부터 성큼성큼 시원시원하게 그 자리에서 단박에 헌신한 사람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예컨대 자존심과 자의식이 퍽 강했던 것으로 보이는 페트로는 주님을 여러 차례 만난 뒤에야 정식으로 제자가 됩니다(다른 복음서들과 비교 바람). 페트로는 맨 먼저 동생 안드레로부터 예수님을 메시아로 간접 소개 받지요(1:41).

여기서, 우리가 흔히 눈여겨 보지 않는 진실을 확대해 보렵니다.

첫째로, 스승 (침례자) 요한에게서 예수님을 소개받은 안드레와 익명의 한 명(요한)은 예수님을 따라가 그분 거처에서 그날 밤 함께 묵었다는 것입니다.

요한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이 당시 고향 나자렡을 떠나 공사역을 준비하시면서 부근을 두루 다니셨습니다(1:36). 그래서 침례 요한과도 적어도 3번 이상 만나시게 된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당시 예수님은 적어도 세 명 이상은 충분히 함께 기거할 수 있는 집에서 지내셨다고 봐야 합니다. 이 집은 주님의 고향 나자렡에 있던 친가는 아닙니다. 그 이유는, 나자렡 본가는 예수님의 일가인 대 가족(최소 9명)이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에 타인까지 2명을 데리고 숙식한다는 것은 적지 않은 무리일 수 있는 탓입니다.

따라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묵으신 이곳은 하숙방도 아니고 주님이 마련해 놓으신 갈릴리 "사역본부" 같은 곳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단순한 천막도 아닐 것입니다. 요한은 안드레와 둘이서 예수님이 계신 곳을 가서 "보았다"고 썼습니다.
가서 본 인상이 깊었다는 암시라고 할 수 있지요.

저는 예수님이 풍요롭게 사셨음을 의심치 않습니다. 혹 소담하고 깨끗하고 검소하셨을지언정 결코 찌들어지게/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지는 않으셨다는 뜻이지요.
혹 독자들이 의아스럽게 생각할 것 같아 좀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걸인 신세를 간신히 면할 정도로 찢어지게 사셨다고 흔히 일부 신자들이 추정하는 까닭은..대개는 카톨맄 수도원에서 나돌다 신교까지 건너온 풍문과 선입견 탓입니다. 유불선적/수도원적 사상에 젖은 사람들은 주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들도 깃들일 보금자리가 있는데.."(마태 8:20)라는 주님의 말씀 하나만 갖고 그렇게 해석들을 하지요.

예수님은 노숙자?

그러나 예수님은 김삿갓이나 보히미언 같은 '방랑 끼'가 있었거나 또는 노숙자들(홈리스)처럼 가난했기에 '동가숙서가식'(東家宿西家食)하신 게 아니지요. 주님은 최소한 초기에 분명히 자기 머물 곳이 있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우도.."라는 말씀을 처량한 노숙자 신세를 가리키는 줄로 오해해선 안되지요.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우리가 풍요롭게 된 점을 들어 예수님이 최하급 빈민 생활을 하신 분으로 생각하는데 상당한 오해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영광 차원에서 가난해지신 것이지 이 세상 차원의 '극빈자'로 오신 게 아닙니다(코린토B 8:9).

이것은 가난에 대한 예수님의 자세를 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한 여인이 값비싼 나드 향합을 깨뜨려 주님께 부어 드렸을 때, 한 제자는 "아니 이게 웬 낭비고 사치냐! 저걸 팔아 빈민 구호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라고 말하자, 주님은 "가난한 사람들은 그대들과 늘 함께 있지만.."(마 26:7~13) 하셨습니다. 가난을 객관화 하신 것이죠.

어떤 사람들은 또, 예수님이 본래 가난한 가정 출신이 아니었냐고도 묻지요. 그러나 부분적으로만 옳은 말입니다.  
예수님 가정이 처음에 퍽 가난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여드레 후 할례와 (산모) 정결의식을 치를 때, 요셒과 마리아가 성전에 바친 예물은 산비둘기 한 쌍 또는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였지요(루카복음서 2:24). 이 예물은 어린양 한 마리를 바칠 여유가 없는 가정을 위해 지정된 수준이었습니다(레빝서=레위기 12장 참조). 물론 하나님은 그 예물을 향기롭고 기쁘게 받으셨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이 가정을 '가난의 본보기'로 놔 두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한 살 쯤 됐을 때 동방에서 찾아 온 현인들이 당대의 왕들에게나 어울리는 황금/유향/몰약 등 값진 보물을 아기 예수께 선물로 증정했습니다(마 2:11). 이 선물들은 요즘 값으로 치면 적어도 미화 몇 만 달러 어치였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요셒 부부는 이 거창한 세 가지 예물을 톡톡한 살림 밑천으로 썼음이 분명합니다. 누구에게 그냥 나눠줬다거나 성전에 바쳤다는 기록이 따로 없기 때문이지요. 분명히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기르는 이 가정에 살림 밑천에 쓰라고 주신 것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아닌 돈 자체를 만물의 악, 재물 자체를 저주로 여기는 사람들은 싫어 할 말인지 모르지만.

요셒이 나자렡의 뛰어난 목수로 이름 날 정도로 생업이 펴인 것은 그의 기술은 물론 이 '밑천'을 통해서였음이 또 거의 분명합니다(마 13:55). 이런 사실은 그의 가족이 최소 9명(예수님은 4명의 남동생과 최소 2명의 여동생이 있었음. 마 13:55,56 참고) 규모의 대 가족이던 사실로도 입증됩니다.

아울러 아버지의 생업을 이어받은 예수님도 20여년간 훌륭한 목수로 집안을 부양하셨습니다(마르쿠스복음서=맑 6:3). 하나님은 예수님이 노력하신 대로 온 가정을 풍요롭게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안 믿는다면, 우리는 재물 얻을 능력을 주신 하나님의 권능을 믿지 않는 셈이 되고 맙니다(신명기 8:18).
예수님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아브라함의 복은 예수 크리스토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이되는데 만약 예수님 자신이 가난하셨다면 아브라함의 풍요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갈라티아서신서=갈 3:8,9,14).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제자들은 3년간 아무 세상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사실 생업까지 다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마 4:22,28, 19:27, 뤀 5:11,28). 그렇다고 무위도식한 게 아니지요. 장차 온 세계를 복음으로 정복할 준비과정으로서 사역훈련에 집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13 식구는 평소 "쫄쫄" 굶은 게 아니고 함께 나눠 먹을 거리가 늘 있었습니다. 물론 스승님 덕분에 여기저기서 대접 받기도 했지만 수시로 음식이나 상품을 구입할 뿐더러(요복 4:8, 13:29, 뤀 22:36,38) 자선사역까지 자주 할 정도로 넉넉한 재정이 있었습니다(요복 13:29). 돈이 없는데 어떻게 수시로 빈민구호를 할 수나 있겠나요!
또 이스카리옽 유다가 일행 열 세 식구의 돈궤를 맡아 있었습니다(요 12:6). 그가 거기서 슬슬 몰래 훔쳐 빼내기도 할 만큼 평소 돈이 많았지요.

그러므로 예수님과 제자들은 3년간 거의 풍요로운 생활을 했음이 틀림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도우신 것입니다. 가난은 죄악에 대한 저주의 결과로 온 것이며 신자는 가난한 삶을 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해/곡해하진 마십시오.
그렇다고 모든 신자가 다 거부가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신자들 중에 아브라함(창 24:34,35), 그 아들 이짜크(창 26:12)와 야콥(창 30:43), 욥(욥 42:12), 바르질래(슈무엘B=삼하 19:32), 슐로모(왕들A=왕상 3:13), 아리마테 요셒(마27:57) 같은 선량한 거부가 혹 있을 순 있으되 잘 감당/관리할 수 있는 재물의 은총을 받은 사람으로 제한될 것입니다(전도서 5:19).
재물을 사랑함이 큰 해가 되는 탓이지요(팀A=딤전 6:10). 혹 신자가 큰 재물을 갖고 있어도 그냥 끼고 있거나 쌓아 두고 자기 후손에게나 물려줄 줄 알 뿐, 좋은 일에 "팍 팍" 쓸 줄 모르면 아무리 신앙이 좋아 보여도 졸부에 불과합니다(팀A 6:17~19, 슈무엘A=삼상 25:2,3,37,38, 전 5:13,14, 6:2).

퍽 긴 얘기였는데..아무튼 예수님이 계신 곳은 제자들이 보기에 함께 머물 만한 아담하고 좋은 집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냄새 나도록 찢어지게 가난한 숙소가 아니었다는 것이죠.

페트로를 부르심

예수님을 만나 그분이 계신 곳을 가 보고 하루를 묵은 다음, 퍽 마음에 든 요한/안드레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먼저 안드레의 형 페트로를 찾아 만납니다. 페트로/안드레 형제는 직업이 같은 한 동네의 야코보/요한 형제와 매우 가깝게 지냈지요(마 4:18~22).

안드레는 다짜고짜 "형님, 우리가 마쉬앟(=모쉬앟, "기름부음 받은 사람", 메시아/크리스토. 시2:2)을 만나 뵈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페트로를 데리고 예수님 댁을 다시 찾아 왔습니다. 페트로를 보신 주님은 "그대는 요한의 아들 시몬. 향후 '케파'(칼데아/아람어로 '바위'라는 뜻. 그리스어 '페트로스')라고 부를 것이네"라고 하십니다.
[당시 갈릴리 주변엔 그리스인들의 상업 거주지 데카폴뤼스(10개 도시란 뜻)가 있었기에 갈릴리 사람들은 그리스어에 퍽 익숙했습니다. 당대 유대인들이 갈릴리 사람들을 천히 여긴 것도 이방인들과 가까웠던 때문이지요. 참고: 요복 12:20]

시몬이 공식으로 '페트로'(=케파)라고 불린 것은 바로 이때부터입니다. 한국어로 치면, '바우'(바위의 옛말)라는 듬직한 이름을 얻은 셈이지요. 사실 '돌바위'란 이 이름은 시몬에게 그다지 썩 걸맞은 이름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알고 보면 시몬은 생각 밖에 "삐딱빼딱"한 타잎이라는 느낌이 드는 탓이죠.

시몬은 주님을 여러 번 되풀이하여 만난 뒤에야 비로소 본격적인 헌신을 했고,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해 놓고 한 여종의 지적에 못 견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사람입니다(마 26:69~75). 또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 유대인들에게 들키자 두려웠거나 민망한 듯 위선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해, 사도 파울에게 심한 책망을 듣기도 하지요(갈라티아 2:11~14).

아마도 그래서 훗날 첫 교회 수석 지도자 자리를 후배인 예수님의 동생 야코보에게 양보(?)했는지도 모릅니다(갈 2:9). 아무튼 그는 성령님을 모신 뒤 훌륭한 사도로 사역자로 활약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그런 시몬에게 오히려 더 반석 같은 사람이 되라고 긍정적인 이름을 주셨을 것입니다. 아울러 주님은 주님 자신이 영원한 바위(만세반석, 이사야 26:4)이심을 더욱 상기시키시기 위한 효과도 감안하셨을 터입니다. 

벹새다('물고기 집'이란 뜻) 사람 필맆

벹새다는 페트로/안드레 등이 살던 갈릴리 호변 동네로 필맆 역시 같은 마을 사람이었습니다(요복 1:44). 이 필맆은 예수님이 직접 부르신 제자들 중의 한 명입니다. 필맆은 안드레, 나타나엘과 퍽 가까운, 또래 친구였음이 거의 분명합니다. 둘이서 이름이 자주 나타나니까요(맑 3:18, 요복 6:7,8, 12:22). [성경엔 초기교회 7집사 중 한 명, 헤롣 1세(헤롣 대왕)의 아들 필맆 등, 같은 이름이 퍽 많지요.]  

사도 요한은 다른 복음서 기자보다 더 자주 필맆에 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필맆은 예수님께 믿음의 테스트를 받기도 하고(요복 6:5:~7) 약간의 책망을 듣기도 합니다(요복 14:8~11). 전반적으로 필맆은 다른 주요 제자들에 비해 믿음이 약간 모자랐던 모양입니다. 또 초기교회의 사도 중 한 명이지만 7 집사 중 한 명인 '전도자' 필맆만큼 유명하진 않습니다(행전 6:5, 8:5~13,26~40, 21:8).

아무튼 그 역시 주님께 부름받아 끝까지 귀하게 쓰인 사도였지요. 또한 제자로 부름 받은 직후 친구 나타나엘(바르톨로메)을 주님께 이끌기도 했습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 나타나엘
 
예수님의 제자들 중 나타나엘은 속에 간사함이 없는 진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고 난 친구 필맆에게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인 '나자렡 예수'를 소개 받자 "하이고..나자렡에서 무슨 선한 게 나겠냐?"고 깔보듯 말합니다.

이때 필맆은 "와 보라"고 대답하지요. 

'와 보라..'-기억나십니까? 본 장에서 예수님에 이어 두 번째 나오는 말이지요.
"한 번 와 보세요."- 극히 단순하고 쉬워 보이는 이런 말들을 우리는 권능의 복음을 소개할 때 활용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처음 보셨을 때, 요한의 아들임을 알아 보셨듯, 여기서도 나타나엘을 금방 알아보십니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음을 간파하셨습니다.
그러자 나타나엘은 놀랍니다.

"아니 어떻게..저를 아십니까?"
"필맆이 그대를 부르기 전, 그대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네."

나타나엘은 더 크게 놀랍니다! 아마도 그는 혼자 무화과나무 아래서 쉬고 있었든지 아니면 이스라엘을 위해 묵상/기도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마치 자기를 지켜본 듯 보았다고 하시니 놀라지 않을 수 없지요.
그래서 이 분이 여느 사람이 아니시구나 느끼고 탄복한 듯이 말합니다.

"랍비! 님께선 하나님의 아드님, 님께선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주님이 답변하십니다.

"그대는, 내가 그대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봤다니까 믿는 건가? 앞으로는 이보다 더 큰 일을 볼 걸세."

이어서 주님은 필맆과 나타나엘, 두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참으로 그대들에게 말하는데 하늘이 열려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내리는 것을 볼 것이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몇 가지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을 느낍니다.

첫째로, 주님은 처음 보는 사람의 정체라도 금방 알아 보셨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배경/내력까지 척척, 순식간에 알아 보셨지요.

둘째로, 사람의 속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셋째로, 개인이 혼자 있을 때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알아 보셨습니다.
(겁나지 않나요? Isn't it too scary?).

아마도 우리는 성급하게 선뜻 "아, 그야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이시니까 당연히 그렇지" 할 터입니다. 그런데 그 때문이 아니지요. 예수님이 이처럼 처음 보는 사람과 그 속을 꿰뚫어 보신 것은 바로 성령님의 권능을 통해서 였습니다. 성령을 기름 붓듯 물 붓듯 부음 받으셨기 때문이지요(행전 10:38).

사실 이 점에서는 침례자 요한도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요한은 비록 예수님과는 사촌 간이지만, 자신이 광야에서 주로 살았기에 오랫동안 예수님을 볼 수도 없었고, 거의 전혀 몰랐다가 예수님을 보는 순간 메시아이신 줄을 알아 봤다고 했습니다(요복 1:31,33). 어떻게 그랬을까요? 바로 성령님이 수시로 알려 주셨기 때문이지요(1:32, 33). 그러므로 우리는, 사실상 구약시대 최후의 대언자인 침례자 요한이 예수님과 공통된 특징을 갖고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바로 성령님의 기름부음과 은사가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 성령의 감화를 받은 대언자들 또 기름부음 받은 왕/지도자/판관(사사)/사제들은 거의 모두 예외 없이 이런 특수현상들, 즉 은사가 작용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은사들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사도들에게도 나타납니다. 구약 대언자나 예수님께 나타났던 거의 모든 종류의 이적들이 사도들에게서도 나타난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구약 대언자, 침례자 요한이나 심지어 예수님께라도 나타나지 않던 은사가 사도 시대 이후부터 나타나는데, 그것은 바로 방언과 방언 통역-두 가지입니다(코린토A 12:10)!
그러므로 예수님 자신이 사도 파울에게 주신 계시들 가운데 중요한 계시의 하나인 코린토A 12장에 나타난 성령의 9 은사들 중 방언/방언통역 두 가지를 제외한 다른 7 은사들은 모두 침례자 요한을 포함한 구약 대언자들과 예수님, 사도들이 공유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그렇다면 역으로, 신유의 은사, 큰 믿음의 은사, 권능 수행의 은사, 영들 분별하는 은사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바로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두 가지인데 바로 이 두 가지가 지금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이나 침례 요한에게서 나타났던 은사들의 작용이었다고 우리는 결론 지을 수 있습니다.

과연 어떤 것이 지혜의 말씀의 은사이고, 어떤 것이 지식의 말씀의 은사일까요?
앞으로 좀 더 상세히 알게 돼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