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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요한복음묵상

첫 이적 첫 영광 (요한복음묵상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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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나엘을 제자로 부르신 지 사흘 째 되던 날.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 카나의 한 결혼식에 참석하십니다(요한복음 2:1~11).

[한국 성경 번역들은 후세들을 위해서라도 빠른 시간 내로 본래 '카나'(Cana)인 지명을 '가나'(Gana/Ghana?)로 표기한 잘못된 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문맥 상 성경 지명인 줄은 알겠지만 이름만 따로 인용할 때 아프리카의 가나와 혼동됩니다. 새로 나오는 성경마다 계속 낡고 잘못된 표기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은 그만큼 한국교회가 후대보다는 기성세대에 더 신경 쓰다 보니 뒤처진다는 말이 됩니다.
또 여기, '쉬운성경'을 제외한 대다수 한글 성경들이 "예수의 어머니도/가 거기 계시고"로 존대어를 썼는데 별 필요 없는 존대어입니다. 사실 다른 언어권에선 찾아 볼 수 없는 우리만의 존대어이지요. 그렇다면 마리아의 말에 붙을 모든 어미들도 응당 존대어미로 해야 하는데 (예: 5절) 여기만 '계시고'로 표현했기 때문이지요. 통일이 안돼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직접 어머니께 하신 말들은 존대어로 둬야겠지요.]

이 결혼식에는 주님은 물론 모친 마리아와 제자들도 함께 초대 받았습니다. 아마도 잔치자리가 퍽 컸고 따라서 하객들도 꽤 많았던 모양입니다. 준비했던 포도주가 모두 동이 나 버렸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포도주가 물 다음의 주음료이지요.

더욱이 포도주는 연회석-잔치자리를 빛내 주는 행복과 기쁨의 상징물입니다. 당연히 주흥으로 신나고 흥겨워야 할 잔치자리에 포도주가 모자란다는 것은 신랑으로서는 일대 낭패와 과오요, 신혼부부에게 당혹스런 일이고 손님으로선 황당한 노릇입니다.

당대에 이런 실수는 새 부부의 평생에 부끄러운 추억과 쓴 괴로움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예수님이 그런 '악몽'과 수치로부터 신랑신부와 연회 주최자 측, 고객까지 모두 구해 주신 매우 뜻깊은 온정의 이적일 터입니다.
 
그런데 문맥으로 보면, 현재 손님들은 아직 잔을 다 비우지 않은 채 포도주가 떨어져 간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는 듯 합니다(9,10절). 그러므로 마리아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황급히 귀띔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혼 부부는 마리아의 친척이거나 동네나 주변의 가까운 친지이기가 쉽습니다.

또 한 가지 더 추정해 볼 수 있는 사실은..마리아의 남편이자 예수님의 법적인 아버지인 요셒의 이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예수님이 공사역에 나서기 오래 전, 요셒이 일찍 세상을 떠났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 카톨맄은 모든 '중세 성화'에서 하나같이 요셒을 노인으로 그려 놨는데, 이것은 요셒이 일찍 별세했다는 데 근거, 마리아를 신격화 하기 위해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은 뒤에도 영원한 '정녀'요, 요셒과는 전혀 성생활을 하지 않았다는 터무니 없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일환이죠. 남자가 늙으면 성생활이 줄어들지언정 영 안하게 되나요? 그래서 예수님의 동생들도 마치 요셒의 '전처'에게서 난 배다른 동생이나 또는 '사촌동생'들인 것처럼 주장들을 하지요. 모두 마리아 신격화를 위한 정지에 불과합니다.]

여기 카나 결혼식에서 물이 포도주가 된 이적은 예수님이 행하신 뜻깊은 첫 이적인데도 유일하게 요한복음에만 기록돼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퍽 궁금하게 만듭니다. 아마도 마태나 마르쿠스 요한, 루카 등이 모두 갈릴리 출신이 아니어서 이 사건에 관해 몰랐을 가능성도 있고, 갈릴리 출신인 요한이 그 누구보다 이 사건에 정통하고 직접 목격했기에 성령님이 기록을 맡기셨을 가능성도 있을 터입니다.

여기서 어머니 마리아의 태도는 흥미를 자아냅니다.
즉 마리아는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다는 귀띔을 함으로써 강요를 하거나 아들의 뒷등을 밀지 않고 다만 이 긴박 상황에서 모종의 초자연적 권능의 이적이 필요하다는 간접적인 시사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리아로든 누구로든 지금 이 상황이 매우 절박함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들에게서 하나님의 어떤 도우심을 기대하고 있으며 하인들에게도 "너희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일러 둔 점입니다. 즉 마리아가 예수님께 무엇인가 초자연적인 이적을 행할 권능이 있음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여인(님), (그것이) 님과 저에게 무슨 상관입니까? 나의 때가 채 오지 않았습니다."

여기 '여인(님)'이란 말을 한글 성경 상당수가 '어머니'로 풀어 썼습니다만, 원문(호격 '귀나이')과는 다릅니다. 이 말은 낮춤말이 아닌 존칭입니다(요 19:26). 왜 예수님이 구태여 '어머니'란 말을 한 번도 안 쓰시고 '여인'(님)이란 호칭을 썼는가는 다양한 추정이 있을 수 있겠지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여느 사람과는 달리 하늘에서 성육신 하여 오신 하나님이시자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언젠가는 다시 아버지께로 올라가실 분입니다. 그래서 인간인 요한이 보기엔 어머니지만, 예수님의 이런 위치에서는 사람과 뚜렷이 구분됩니다. 역지사지로,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는 아니란 뜻이지요. 카톨맄 측 주장과는 달리, 여기 '여인'은 "뱀의 머리를 밟을 여인" 마리아가 아닙니다. 뱀의 머리를 밟은 분은 바로 예수 크리스토 그 분이십니다. 

여기 지금 예수님이 "무슨 상관입니까?"고 반문하신 것은 퉁명스런 말 대꾸가 아닙니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는데 지금 이 집에 떨어진 포도주를 어떻게라도 보태는 것이 과연 우리가 할 일이냐는 뜻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시 생각하십니다.
우선 젊은 신랑신부, 이 연회를 준비해온 주최측과 연회맡음이, 모든 하객들을 온정으로 측은히 여기십니다.
둘째로, 마리아가 하인들에게 적극 지시하는 모습을 보시자, 그녀의 믿음과 기대감을 가상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 온정과 인자하심이 본래 사역 예정에 없던(?) 성령의 권능과 주님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이 자신의 때보다는 온정을 더 중시하셨음을 봅니다. 
그 결과 맹물로 포도주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물론 앞에서도 성령의 은사는 이미 작용했습니다. 나타나엘이 혼자 있는 모습을 영으로 보신 예가 그것이지요. 그러나 여기서는 구체적인 첫 이적('세메이온')을 행하신 것입니다.

마리아의 믿음 못지 않게 하인들의 순수한 순종도 괄목할 만 합니다.
이 하인들은 포도주 대신 물을 나르면서도 이상스레 생각하고 웃거나 비웃지 않습니다. 마리아의 지시, 그리고 예수님의 지시를 그대로 따랐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본 받을 점입니다.

여기 이 연회장에는 정결 예식용 물항아리가 여섯 독 있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고유 풍습인 식사 전 의식적인 정결을 위한 것으로 손님들의 손발에 부어 씻는 물이었지요. '두 세 통'이라면 고대 왕국시대에 쓰던 액체의 단위인 '바트'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연대기B=역대하 4:5). 한 바트는 오늘날로 말하면 9갤런(34.2리터)보다 좀 적은 양으로 추정됩니다. 즉 항아리 하나가 68~103리터 정도 됐을 것이라는 추산이지요.

주님이 "물을 채우라"고 하시니 하인들은 준비했던 물을 길어 와서 아구까지 가득가득 채웁니다. 마치 엘리야가 자레팥 과부의 밀가루와 기름을 활용했듯이, 현재 있는 것을 최대한 활용하시는 태도입니다. 즉 항아리와 물, 그리고 하인들의 순종과 봉사정신이지요.
이처럼 우리에게 있는 자원을 주님을 위해 최대한 활용하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아직 하인들의 믿음이 활용될 기회를 주십니다.
즉 물을 떠다 먼저 연회맡으미에게 갖다 주라고 합니다. 이것은 당대 풍습 상 연회맡으미가 먼저 술맛을 봤다는 의미일 겁니다. 연회맡으미는 그밖에도 식탁 정돈, 좌석 준비, 요리 맛보기 등의 일을 맡곤 했지요.

하인들은 묵묵히 순종하여 그냥 맹물을 떠서 가지고 갑니다만,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연회맡으미가 맛을 보는 순간 이미 포도주가 돼 있는 것입니다! 그는 당초 준비했던 포도주와는 전혀 다른 맛이기에 어디서 생겼는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이 하인들은 알고 있습니다. 즉 그들만 아는 비밀이었던 것이지요. 마치 찬송가 가사 "우리 서로 나눈 그 기쁨을 알 사람이 없어라" 구절처럼 말입니다. 

연회맡으미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신랑을 불러 말합니다.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다가 취한 다음엔 덜 좋은 것을 내 놓거늘 그대는 가장 좋은 걸 여태 남겨 두었군요."

연회맡으미의 이 말은 우리에게 그지없는 통쾌감과 안도감을 줍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긴장되고 황당한, 절박한 상황을 주님이 멋지게 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성령님을 통해 우리의 긴장과 절박감을 풀어 주십니다.

주님은 또 성령님의 초자연적 권능을 통해 최상의 우량 포도주를 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싸구려가 아니라 좋은 것을 주십니다. (시103:5, 마태 7:11)

주님의 이 이적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실 뿐더러 제자들에게 믿음과 신뢰의 계기를 던져 주었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이왕에 믿고 주님을 따랐지만, 주님은 본격적으로 권능과 영광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특히 나타나엘에겐 주님이 약속하신 이적의 첫 본보기가 된 셈입니다(1:50 참조).
 
우리는 믿기가 어려워 표적만을 구하는 유대인들이 아니라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신자들로서, 우리 자신이 믿기 위한 표적보다 비신자들이 믿도록 하는 표적들을 주님의 이름과 성령의 권능으로 행할 수 있습니다.
그 잠정 능력과 가능태를 주님은 교회와 신자들에게 이미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분이 하신 일을 할 수 있을 뿐더러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복 1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