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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의 연구묵상/캪튼's 코너

왜 예수님은 어린이를 사랑하시나?

Source: Anniston Bible Church

 

왜 예수님은 어린이를 사랑하시나?

김삼


나는 교회의 특정 절기의 준수에 별 관심이 없다. 그러나 어떤 절기들은 그 정신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는 5월초의 '어린이주일'을 생각해 보겠다.

현대에 들어와서, 어린이를 기리려는 생각이 거의 나라마다 있어 왔다. 한국교회엔 본디 '꽃주일'이라는 것이 있었다. 나중 이름이 '어린이주일'로 바뀌었지만. 이보다 앞서 1920년대초 천도교 제3대 교주이자 3.1 만세 운동 지도자인 손병희의 사위였던 아동문학가, 소파 방정환이 중심이 되어, 처음으로 '어린이'라는 용어와 함께 만든 어린이날이 있어왔다.

원래 우리나라엔 '어린'이라는 말과 함께 한자 용어 '아해(兒孩)'가 있었다가, 어린아이로 합해져, 어린이로 진화됐다. 처음에 나는 교회의 어린이주일이란 명칭과 개념도 소파 때문에 생겨났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그 전에 이미 '꽃주일'이 있었기에 좀 틀린 이야기가 되겠다. 그러다가 인터넽에서 이 꽃주일의 유래를 알게 됐다. 미국엔 '어린이주일'이나 '어버이주일'은 없지만, 어린이를 기리는 날은 있었고 어머니날도 줄곧 있어왔다. 그 효시는 일찍이 19세기 중엽 기독교계에서였다.

1857년 촬스 레너드 목사/박사( Reverend Dr. Charles Leonard)가 그해 6월 둘째 주일인 6월 8일을 특별히 어린이들을 위한 하루로 지정했다. (*레너드 목사는 매서추세츠 주 첼시의 구속주교회(UCR)의 목회자였는데, 이 교회는 만인구원설을 믿는 유니버설리스트 교회였다. 만인구원설을 비성경적이므로, 정통교회에서는 이단시하는 대상이다.

레너드는 그날 어린이를 위한 특별예배를 드리고 명칭을 '장미의 날'(Rose Day)로 정했다. 그랬다가 '꽃 주일'(Flower Sunday)로 바꿨고, 그 다음은 '어린이들의 날'(Children's Day)로 바꿨다. 지금도 다수의 UU교회는 Flower Communion 등으로 지킨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의 '꽃주일'은 방정환이 아닌 미국 선교사들에게서 왔을 가능성이 더 크다.

미국 매서추세츠 주 햄든의 그랜빌 침례교회 꽃주일 장식(1870년대)

 

어린이날이 최초로 국가 차원에서 공인된 나라는 터키다. 터키 공화국이 1920년 4월 23일을 '어린이들의 날'로 공식 제정한 것. 그러고 보면, 방정환의 어린이날은 터키의 어린이날에 자극받았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 이후 전세계 국가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저마다 어린이날을 지키기 시작했고, 그 지정일도 연중 거의 매달에 두루 분포돼 있다. 어린이날의 유래와 각국의 어린이날을 알고 싶다면 다음 문서를 참조하기 바란다(https://en.wikipedia.org/wiki/Children's_Day).

이처럼 어린이주일이나 어린이날은 모두 기독교에서 비롯했다.


예수님도 거치신 어린 시절

그런데 우리는 어린이날이나 어린이주일을 생각하기 앞서 어린이를 사랑하시는 우리 주님 생각부터 해 봐야 할 것 같지 않은가?
예수님도 우리들 모두처럼 어린이로 오셨다! 하늘로부터 우리 가운데 몸소 내려와 계신 하나님이신 임마누엘로서말이다. 우리처럼 어머니 몸 속에 태아로 오시어 아기로 태어나셨고, 점점 자라가시면서 그 키와 슬기도 성장해갔다. 엄청나고 놀라운 일 아닌가!
그뿐 아니라 청년으로 성숙해지셨고, 마침내 우리와 같은 성인이 되셨다.

어린 시절을 거치며 세상 삶을 겪으셨기에, 그 분은 어린이들을 아시고, 이해하시고, 사랑하신다. 주님이 어린이를 얼마나 사랑하시냐고?

눈을 들어서 한 번 역사를 둘러 보라. 고대로부터 거의 현대에 이르기까지 어린이들은 사회에서 괄시당했다. 옛날부터 무슨 무슨 날들이 많았지만 여성과 어린이의 날은 거의 없었다.위에서 봤듯, 어린이날도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생기기 시작했다. 뭘 말해 주는가? 어른들은 자신의 과거를 쉽게 잊어버리면서 어린이들을 그만큼 알아주지 않았다는 얘기다.

천대받던 어린이들을 처음으로..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을 보라. 아니 딴 사람들은 두고라도, 주님의 제자들을 보라. 하루는 엄마들이 주님의 축복을 바라고 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나아오는 중이었다. 한 없이 즐거워 재잘재잘 떠들어대는 어린이들에게 제자들이 막 신경질을 부리고 화를 내며, 야단을 치지 않았던가? "데끼, 이 녀석들~! 어디서 감히 떠들어?"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러자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맞아, 나도 좀 시끄럽네. 좀 딴 데로 데려가시지. 아니 우리가 조용한 데로 가자구나" 하셨던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제자들을 향해 야단치셨다.
"아~, 저런! 그러지 말게나. 어린이들을 막지 말고 내게 오도록 놔 두게~." 하셨다.

제자들에게 혼쭐이 나서 놀라고 시무룩했던 어린이들이 (아니면 "당연하지...어른들은 으레 그렇겠거니" 했을까) 금방 다시 기운을 차려 생글생글 웃으며 주님께 다가왔고, 주님은 그들을 하나 하나 안아 주시며 축복해주셨다. 어린이를 혼 내려던 어른들이 되려 혼 난 셈이다.

얼마나 놀라운 사건인가! 전에 그 누구가 이랬던가! 지난 수 천 년간 거의 없었던 일이다.
이것은 사실상 어린이의 해방을 뜻하는 하나의 대 혁명이었다. 그 전엔 어린이와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남자들에게 억눌려 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우리나 우리네 아이들처럼 방긋방긋 웃는 어린이로 오셔서, 부모의 사랑을 듬뿍듬뿍 받으셨다. 천진난만한 두 살배기 쯤의 모습으로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받으셨다.
열두 살 때는, 성전에 데리고 함께 온 부모가 그분을 깜박 잊은 채 둘이서만 귀향길에 올랐다가 정신 차리고 허둥지둥 다시 성전으로 오고 있을 동안, 소년 예수는 성전에서 열심히 성경학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계셨다. 그 풍부하고 막힘 없는 방대한 성경지식에 대학자들은 놀라마지 않았다.

뒤늦게 다시 찾아온 부모가 깜짝 놀라며 "얘야, 너 왜 이랬니? 봐라, 네 아빠와 내가 널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어린 주님은 놀라운 답을 주셨다. "왜 저를 찾으셨으요?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걸 모르셨나요?" 부모는 멍하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곤 나자렡에 돌아와 계속 부모에게 순종하며 사셨다. 그렇게 성장하고 성숙해 가는 그 분을 하나님도 사람들도 무척 사랑했다.
그리곤 머잖아 청년이 되셨고, 어른이 되셨다.

주님은 여러 사람을 고치고 살리시던 중, 죽었던 열 두 살 소녀도 살려내셨다. 그 손을 잡고, "탈리타 쿰(소녀야, 네게 말한다. 일어나라)!", 한 마디 하시니 죽었던 소녀가 마치 잠자던 중인 양 스르륵 일어나 앉았다. 그녀가 배고픈 것을 아시고 먹을 것을 주라고도 하셨다.

주님은 어린이 하나를 앞에 세우시고 정답게 안아 주시며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그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네. 누구든 날 영접하는 사람은 나만 영접하는 게 아니라 날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네."

독자는 지금 봤는가? 어린이 하나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접해 주면, 주님은 물론 아버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 어찌 놀라운 말씀이 아니랴!
그만큼 어린이의 가치가 높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말씀에 입을 딱 벌리고 놀라마지 않았다. 전에는 그 누구에서도 기대하지 않았던, 아니 상상도 못 했던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대 혁명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어린이들에게, 창조 때 부여받고도 지난 수 천 년간 어른들과 사회에 도외시 당해 왔던, 고귀한 인간의 가치와 존엄을 되찾아 주셨다!

어린이 아니면 돌들이라도!

당시 유대 사회를 지배하던 성전 대사제들과 성경학자들은 주님과 어린이를 둘 다 이해하지 못했다. 성전 뜰에서 그분에게 "호쉬아나(호산나), 다뷔드의 자손님!"이라고 외쳐대는 어린이들을 보고 마구 역정을 냈다. "당신은 저 애들이 뭐라 떠드는지 알고 있소?"라고 묻자, 주님은 말씀하셨다. "그렇소. '주님이 어린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에서 찬양이 나오게 하셨네' 라고 하신 말씀을 여러분은 읽어 보지 못하셨소?" 그 말씀에 대해 종교지도자들은 묵묵부답이었다. "지가 찬양을 받는다고..?" 라고 속으로는 말했을지 몰라도.
찬양하는 어린이들의 입을 막으면 돌들이라도 소리를 지르게 하실 수 있는 주님이시다.

맞다! 어린이들은 모두 찬양하기 위해 태어난다. 새들은 자기 노래소리로, 꽃들은 자기의 미와 향기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듯.
사람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 태어났다. 우리가 어린이의 찬양하는 입을 막으면 돌들이라도 대신 외칠지 모른다!

그런데 왜 아기 엄마들과 산부인과 병원들은 합세하여, 어린이들의 찬양하는 입을 미리 미리 차단하는가?! 돌들이 찬양을 외칠 날을 기다리는가?!
수만 개의 별똥별들과 바윗돌들이 합세하여 외치며, 자기네 머리 위에 떨어질 것을 기다리는가? 지금 지구촌 바깥 저 태양계 주변에는 수 만 개 운석들이 떠돌며 지구를 칠 날만 고대하고 있다. 그들이 한꺼번에 떨어질 날이 있다. 언제인가? 마지막 심판 날이다. 그 심판 날은 우리의 생각보다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뉘우쳐 회개하고 어린이들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자. 말만이 아닌 행동으로!

주님은 왜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나? 자신도 거치신 어린 시절을 돌아보시며 그들을 진정 축복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영광의 찬미를 돌리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께 복 받을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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