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카리아의 무덤'으로 알려진 유적. 예루샬렘 키드론 골짜기의 '압샬롬의 무덤'과 사제 가문 '브네이 하지르' 가(家) 무덤 곁에 나란히 서 있다. (기둥 부조 장식이 그리스- 도리아 양식이고 새겨진 히브리어 비문의 글자 모양도 훨씬 후기에 속해, 당대가 아닌 후대에 기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
바탕본문: 연대기B 24:15-22 1
대사제 예호야다의 죽음
왕의 자문 역할을 해온 대사제 예호야다는 장수하다가 130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대로서도 드문 케이스인 그의 오랜 장수(長壽) 사실은 그의 경건을 반증한다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건강과 장수는 분명 하나님의 뜻이지만, 정말 하나님의 은총으로 드문 장수를 누리는 사람들은 과히 흔치 않지요. 3
[ 여기서 잠깐 딴 얘기지만..요즘 한국에선 환자의 병세가 악화되면 "주위 사람들이 지켜 보기도 힘든데 천국에 일찌감치 빨리 가야지 장수가 왜 필요하냐?"는 식으로, 기독교 안에까지 안락사 풍조가 깊숙이 스며든 사실은 놀랍기 그지 없습니다. 미국은 아직 기독교계까지 그러진 않습니다. 그리고 세속 환자들조차 (윤리적/법적으로) 안락사는 매우 삼가는 편입니다.
만약 그런 생각이 옳다면, 하나님의 영광과 하늘 상급 받기를 위해 장수할 게 아니라..다들 일찍 천국 가기 위한 '조기사망'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구원 사실을 확신하기 전에 환자가 천국 간다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왜 세상의 자살/안락사 방조에 교회까지 동참하는 것입니까? 세상과 교회의 차이가 뭔가요?
세상에서 주어진 한 번 뿐인 목숨의 기회는 구원은 물론이고 땅에 살 동안 하늘에서 받을 상급을 준비하는 기회임을 왜 우리는 모르냐는 것입니다. "환자가 무슨 상급 받을 기회가 있냐?"는 의식은 환자의 영적 능력과 하나님의 뜻을 간파할 뜻이 없다는..매우 잘못된 발상입니다. 그렇다면 장애우들은 주변에 폐를 끼치기에 세상에 살 가치가 없다는 뜻인지요?
그리고 환자 자신도 왜 목숨이 붙어 있는지 이유를 알고 마지막까지 삶의 의지를 굳혀야 할 것입니다. 한 가지 환자 주변 사람들이 알아야 할 명백한 진리는..비록 코마 상태에 있더라도 환자의 영은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본인이 아니고서는 미뤄 알기 힘든 부분이지요.
구약에서도 모쉐, 엘리야 4, 요나 5 등의 케이스에서 보듯, "이만 하면 됐으니 일찍 목숨을 거둬가 달라"는 식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았습니다. 의인들의 건강과 장수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죠 6. ] 7
예호야다는 사제로서는 역시 드물게 다빋 성에 있는 역대왕 묘실에 매장됐습니다. 그 까닭을 성경 기자는 그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그 성전을 위하여 선행을 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온 국민들이 그를 얼마나 존경했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입니다.
마태복음서 23:35에 따르면 예수님은 제카리아의 아버지를 '베라키야'(또는 베레키야)라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예호야다의 딴 이름이거나 또는 (히브리 관습에 따라) 제카리야가 예호야다의 손자이고 그 사이의 아버지의 이름이 베라키야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베리키야는 파생어와 풀이에 따라 즉 주/야웨님께 복 받은 사람, 야웨님의 복된 사람, 야웨님을 송축하다는 등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이름의 어원은 본래 '무릎'과 주/야웨님이란 뜻으로 송축/복/축복 등과도 연계됩니다.
'베레키야'라는 이름은 성경에 퍽 많이 나타납니다. 포로시대 대언자 제카리아도 베라키야라는 사람의 아들이었습니다.
베라키야가 정녕 예호야다의 이름이었다면, 그가 이토록 장수한 것은 진정 주님께 복 받은 표징의 하나일 터입니다. 아울러 그는 평생동안 몸 바쳐 주님을 송축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국민들 다수는 예호야다를 존중하는 만큼 주 야웨 하나님을 존중하진 않았다는 사실은 놀랍습니다. 왕인 요아쉬조차도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예호야다가 왜 장수했는지 왜 그가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존귀한 사람이었는지를 금방 망각한 것이지요.
하나님을 배신한 요아쉬 왕
예호야다가 죽자마자 거의 곧장, 요아쉬는 하나님을 배신하게 됩니다. 유다 귀족들이 찾아와 그에게 간사스럽게 아부하면서 접근해 이젠 다시 아쉐라 신을 섬기자고 제의하자 아무 저항감 없이 홀딱 넘어 가 버린 것입니다. 이래서 사람이란 얼마나 간사한 존재인지요..
우리는 이런 요아쉬의 태도에서 다양하고도 심각한 문제를 느낍니다.
첫째로, 요아쉬는 비록 고모부이지만 아버지와 및 스승과 다름 없는 예호야다로부터 온실 속 같은 타이트한 교육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최우위로 모시는 삶의 본을 배워왔습니다.
둘째로 요아쉬는 분명히 과거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와 그 원인에 관해 들었을 것입니다. 과거 성전이 거의 황폐화됐던 이유도 바알 숭배 탓이었음을 알았을 터입니다.
셋째로, 선조 다빋이 하나님과 마음이 맞은 군주였던 이유도 알았을 터입니다. 갓난아기였던 요아쉬를 위기로부터 구출해 다빋 같은 왕으로 기르려는 일심으로 성전 속에 숨겨 여태까지 신앙으로 길러온 이유가 그것입니다.
늙은 예호야다가 자신의 조카에 불과한 요아쉬에게 순종해가며 그를 보필한 것도 다빋 같은 야웨님 중심의 일관된, 선한 통치 정신을 그에게서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예호야다는 성전 보수공사 당시 한때나마 요아쉬에게서 그런 열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요아쉬는 스승인 예호야다가 죽자마자 거의 즉시로 예호야다의 충정과 자신의 지난 모든 선한 과거를 일시에 저버리고 사악한 왕으로 변질돼 버립니다! 이거야 말로 지난 몇 십 년 간 빈틈을 노리며 싸탄 마귀가 기다리던 바가 아닐까요?
아무튼 요아쉬는 아첨하는 귀족들의 말에 귀가 솔깃한 채 경청하더니, 지금껏 섬겨온 주/야웨님의 성전을 하루 아침에 내동댕이 쳐 버리고 아쉐라 목상과 우상을 섬기기 시작합니다. 참으로 놀랄 일입니다.
성경은 밝히 말합니다. "이 죄 탓에 진노가 유다와 예루샬렘에 임했다"고.
하나님의 공의(公義)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무섭지요! 과거 구약 시대에도 특별한 중재 행위 없이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이 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을 하시기 전 먼저 대언자들을 보내어 요아쉬 왕을 주님께로 다시 돌이키려고 타이르고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지만 여러 대언자들이 와서 경고해도 왕은 돌이킬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간신들, 귀족들과 한 통속이 되어 시작한 아쉐라 숭배가 딴에는 너무 재미있고 맛있었나 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인 주/야웨님을 섬기는 것보다는 더 실감이 가고 편했던 모양입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참 신이신 하나님보다는 가시적/유형적인 세상 잡신들과 돈을 더 숭배하는 것도 이와 별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어리석게도 그들은 참 신이 눈에 보이지 않을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천주교만 해도 언필칭 하느님을 섬긴다곤 하나 굉장한 겉모습의 제도교회와 교황청, 화려하면서도 검소해 뵈는 사제/수사 제도, 마리아상/성인상/성화상 숭배나 '성지순례' 등 유형적 요소와 무형적 요소를 교묘하게 혼합/결속시켜 성문 앞의 압샬롬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끕니다.
생각해 보면, 아쉐라 우상숭배는 바로 요아쉬의 생명을 위협하던 아탈리아를 비롯한 남/북 왕국의 역대 군주들이 줄줄이 패망한 원인이었습니다.
요아쉬도 죽을 수 밖에 없는 아슬아슬한 구사일생의 위기에서 하나님이 이런저런 사람들을 통하여 살려내셨는데 그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들을 요아쉬는 정면으로 배신해 버린 것입니다.
그의 배신은 우상숭배로 그치지 않습니다. 은인을 철저히 배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 역시 하나님께 대한 배신이기도 하지요.
은인의 아들을 쳐 죽이다
'제카리아 무덤'의 기념 비문 (훨씬 후기에 속한 글자 형태를 보더라도 당대의 것으로는 보긴 어렵다. 본 시리즈 46회 비문 사진과 대조)
하나님은 이런저런 대언자들을 보내셔도 왕이 들은 체 만 체 하자 드디어 최후의 결정적인 수단을 쓰십니다. 다름 아닌 대사제 예호야다의 아들인 제카리아를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언의 영이 임하시자, 정의로운 제카리아는 담대히 높은 곳에 올라서서 백성들에게 크게 외칩니다:
"주/야웨님의 말씀이오! 여러분이 어찌 주/야웨님의 명을 어기고 스스로 형통을 가로막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그 분을 저버렸기에 주/야웨님도 여러분을 버리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그들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습니다. 사람이란 누구나 올바른 경고를 들을 때 마음이 찔리기 마련이며 그 결과 긍정/부정-두 가지로 반응합니다. 어느 쪽으로 반응하냐에 따라 운명이 엇갈리기도 합니다.
백성이 이 때 마음이 찔렸으면 마땅히 선한 쪽을 택했어야 할 터입니다. 그러나 다수층에 속한 일부는 제카리아를 밉게 봤습니다.
"흥, 제까짓 게 뭐야? 왕께서도 야웨 신전을 저버리고 이제 몸소 아쉐라님을 섬기고 계신 마당에 왜 갑자기 주제 넘게 나서서 예언자 노릇 하는 거야? 매운 맛을 봐야 하나?"
그들이 왕에게 이 사실을 고자질하자, 왕은 밀명을 내립니다.
'야웨의 전 뜰 안의 성소와 번제단 사이에서 그 놈을 돌로 쳐 죽여라.'
자..이 정도라면, 요아쉬 왕이 얼마나 싸탄 마귀에게 조종을 받아 철저히 악에 팔렸는지 짐작이 갑니다. 아쉐라 신을 섬겨 오던 그가 철저히 변질됐음을 웅변해 주는 대목입니다. 소름이 돋을 정도입니다.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는 속언이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요. 순간, 싸탄이 "그럼, 그렇지! 역시 내 작전이 잘도 먹혀드는구만" 하고 회심의 미소 내지 박장대소를 하는 듯 합니다.
제카리아는 요아쉬 왕과는 고종 사촌지간이고, 요아쉬가 예호야다의 수하에서 자란 만큼 분명히 어릴 때는 서로 형제처럼 지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나님이 제카리아를 여태 마이동풍(馬耳東風) 격인 요아쉬에게 보내는 마지막 대언자로 쓰신 것은 어쩌면 왕과 가장 친한 사람의 한 명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그에게 이런 암살을 그것도 거룩한 주/야웨님의 성전 뜰에서 자행하도록 사주하다니 참으로 가증스럽고 몹쓸 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왕의 제카리아 암살지령을 하달 받은 악인들의 돌 몰매에 맞아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숨져 가던 제카리아는 하나님께 외마디 기도를 합니다.
"주/야웨님은 살피시고 갚아 주소서!"
먼 훗날..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서 비록 합법적인 혈통으로는 요아쉬 왕의 직계 후손이셨지만, 선조 편을 들지 않으시고 제카리아 편을 드십니다(마태복음서 23:35, 루카복음 11:51). 과거 아벨로부터 제카리아까지 의인들과 대언자들이 억울하게 뿌린 피의 책임을 '이 세대'의 사람들이 도맡게 된다고 예언하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예루샬렘의 처참한 멸망으로 성취됐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온전한 심판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필자는 외래어는 되도록 원음에 가깝게 표기하자는 생각입니다.
이 점, 독자의 이해를 바랍니다.
- 역대하 [본문으로]
- 구약에서 참 경건은 하나님께 사랑 받음을 의미. [본문으로]
- 신명기 6:2, 시편 21:4, 34:12(페트로A/벧전 3:10에 인용). 시 91:16, 103:3-5, 잠언 3:2, 기타 다수), [본문으로]
- 민수기 11:15 [본문으로]
- 왕들A(왕상) 19:4. [본문으로]
- 요나서 4:3,8 [본문으로]
- 신명기 6:2, 시편 21:4, 91:16, 103:3-5, 107:20, 잠언 3:2, 4:10, 9:11, 10:27, 이사야 40:30,31/ 이 말씀들이 오직 구약인들을 위한 것이라면 왜 페트로는 신약인들에게 다음 말씀을 인용하는가? 페트로A(벧전) 3:10과 시 34:12-16 비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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