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묵상연구/요한복음묵상

요한복음묵상 15




바탕본문: 요한복음서 3'7-12

요절:
     "바람은 제멋대로 부니까, 그대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불어와 어디로 가는지 그대가 알 수 없소.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이러하오." (요복 3'8 사역)

 

요한복음서의 이 부분은 3장 앞 부분의 연장선상에서 읽어야 하지만, 편의상 따로 음미해 봅니다.

주님은 니코데모에게 사람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전제하시고, 육의 사람과 영의 사람의 근본적인 차이를 시사하시면서, 영 곧 성령으로 난 사람의 특징에 관하여 보충적으로 설명하십니다.

우리가 이 부분을 읽으며 느끼는 것은 주님의 말씀은 때때로 극명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추상적이라는 것입니다. 바탕본문 속의 위 요절도 사뭇 은유적입니다. 또, 끝 부분은 직유이지요.
주님이 유대 평민들이나 종교인들에게 알 듯 말 듯 하면서도 깊은 진리가 감춰진 비유를 자주 사용하신 것은 우리가 복음서에서 익히 아는 사실입니다. 

이 짧은 구절 속에서도, 주님은 성령으로 난 사람을 바람에다 견주어 조화시키면서 암시를 던지고 계십니다. 사실 그리스어를 잘 아는 (본 권서의 기자인) 사도 요한은 이 문장의 문어적인 절묘함을 익히 알았을 법 합니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갈릴리 호수 주변은 외부 곧 이방에 대한 관문과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이 점은 이미 수 백년 전 성경에 놀랍게 예언됐던 사실입니다(참고: 마태복음 4'13-16).
당시 갈릴리 호수 어부들을 비롯한 현지 주민들은 일찍이, 인근의 데카폴리스를 중심으로 헬라-로마 문명권과 퍽 가까웠고, 이방인들이지만 가끔 그리스인들과 접촉한 때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들 중 상당수는 당대의 공용어인 코이네 헬라어(그리스어)에 익었을 것으로 자연히 추정됩니다. 따라서 갈릴리 사람들은 그 어느 지역 사람들보다 국제적이었다고 할 수 있죠.

갈릴리 사람들이 유대인들이면서도 예루샬렘 종교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한 정통 유대인들과는 또 달랐던 것이 그런 점이었지요. 갈릴리 사람들은, 당시 개처럼 취급 받던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또 다르게, 정통 유대인들의 경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갈릴리가 이방의 관문이었기에 정통 유대인들은 갈릴리 사람들을 이방인 냄새가 사뭇 나고 고기잡이나 하는 천박하고 무식한 사람들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그러한 갈릴리 사람들을 복음의 빛으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을 배척하던 고향 나자렡을 떠나 북쪽 갈릴리 부근의 카페르나움(가버나움)을 사역 본부로 삼으십니다.
페트로/야코보/요한 등 예수님의 제자들 대다수를 비롯한 갈릴리 사람들은 비록 천한 어부들이었지만 마음이 낮아질 대로 낮아진 겸허한 사람들이어서, 침례(세례) 요한이나 주님이 전파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순수하게 잘 받아 들였습니다.

아무튼, 사도 요한은 오순절 성령을 받아 모신 뒤, 과거 주님과 함께 지내던 시절을 추회하면서 성령의 감동으로 본서를 기록할 때, 일각의 학자들이 요한복음 1장 맨 앞 부분의 '로고스'론을 보고, 필로의 헬레니즘-유대 철학에 "정통"했다고 착각(!)을 할 정도로 요한은 능한 그리스어를 구사했습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이 성구의 그리스어 문법적인 절묘함도 요한은 알고 있었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본문에서 프뉴마(바람), 프네오(불다/숨쉬다/불어 넣다..), 프뉴마(성령) 등 상호연계된 세 낱말들이 나옵니다.
이 세 낱말들의 연결고리 안에서 우리는 바람과 성령, 성령으로 난 사람 등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느끼게 되지요. 그리스어에서 바람과 호흡, 성령과 영 등은 모두 같은 낱말을 씁니다. 히브리어에서도 마찬가지로 '루앟'(영/성령/바람/호흡)을 똑 같은 의미로 씁니다. 


주님은 우선, 바람은 제멋대로-임의로, 불고 싶은 대로-분다고 시청각적으로 예시(例示)하십니다.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바람의 방향을 가름하려고 애를 써 왔지요. 풍차를 만들어 바람의 힘을 이용하고, 배에다 돛을 달아 바람 부는 방향을 따라 뱃길로 항해하는가 하면, 풍향계 같은 것으로 바람 부는 방향을 측정하여 삶에 도움 받으려고들 하고요. 일기예보를 통해 오늘/내일 동풍이나 서풍, 동남풍이 분다든지, 서북풍이 분다든지를 미리 알려 주기도 합니다. 태풍의 눈 같은 큰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경고해 주기도 하지요.

그러나 창조주이신 주님은, 사실 바람은 제멋대로 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제 아무리 풍향을 잡아 일기예보를 한다고 해도 어느 정도 맞아 들 뿐, 바람은 삽시간에, 사람들의 맘이 아닌 자기 '맘'대로 불어 제끼기도 합니다. 돌풍이나 유라퀼로 광풍 따위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지혜자는 이렇게 말한 바 있지요.

   "남쪽으로 불다가 북쪽으로 돌아가기도 하는 바람, 이리저리로 계속 돌던 그 바람은 불던 제 자리로 되돌아간다." (전도서 1'6)

그래서 전도자는, 인생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일들이 마치 아이들이 바람을 잡으려고 따라 다니듯 헛되다고 거듭거듭거듭.. 말합니다(전 1'14,17; 2'11,17; 4'4,16; 5'16; 6'9..).
그러면서 이 지혜자는 결론 짓습니다:

    "바람을 바람으로 억제할 힘이 사람에겐 없고.." (전 8'8a)
    "풍세만 살피는 사람은 씨를 뿌리지 못할 것이고..바람이 가는 길을 네가 모르듯..모든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 수 없단다." (전 11'4a,5)

전도서 기자가 이처럼 바람에 집착하는 이유는, 사람이 바람의 방향을 정녕 가름하기 어렵듯 영적인 존재와 성령도 그러하다는 것을 시사하기 위함이죠. 위에서 '바람'이란 낱말 루앟은 영/호흡/생기, 또는 때에 따라 성령으로도 대입할 수 있는 성질입니다.
 

뭘 말해 줍니까..?
육의 사람은 도무지 영의 사람을 알 길이 없고, 성령님을 더구나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영의 사람은 곧 거듭난 사람, 위에서 태어난 사람, 성령으로 난 사람을 가리킵니다.
성령으로 나지 않고는 영을 알 길이 없습니다!

바람이 지나가는 쉭~, 씽~, 윙~ 따위의 소리는 귀로 들을 수 있어도 실제로 그 가는 길을 가름하기 어렵듯, 성령님의 일, 영의 사람, 성령으로 난 사람을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합니다. 세상은 성령님을 알지도, 받아 모시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난 사람만 비로소 영의 세계를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영의 사람이 아니면서 영과 성령을 아는 체 하는 것은 마치 바람을 잡으려고 이리저리 따라다니는 아이들과도 같습니다.


오늘날, 소위 영과 영성, 영계를 논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실제로 영의 사람이 아니며, 영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영적 세계는 그냥 심리적일 뿐입니다. 심리학이 온통 판 치고 있습니다. 혹 그들 가운데 거듭난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성령님을 통하지 않고 엉뚱한 심리적인 '영성'을 논한다면, 거듭나기 전 상태로 되돌아간 것과 다름 없습니다. 

영적이 아니라 심적인데도 영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지요 착각이지요.
오늘날 대다수의 영성-관상영성/떠오름(이머징)영성/'목적'영성/리더슆영성/에네아그람(에니어그램)영성/뉴에이지영성/오컬트영성..등이 죄다 심리적입니다! 그것들 중 어느 하나도 참으로 영적인 것은 없습니다.

참 영적인 것은 오직 위에서 태어남,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을 통해서만 체득될 뿐입니다.

또 물과 성령으로가 아니면, 참 거듭남일 수도 없습니다. 뉴에이지적인 소위 '환생'이나 '윤회' 따위가 참 거듭남일 수가 없지요. 그런 것들은 모두 심리술이나 악령들에게 속는 것일 뿐입니다.


오늘날 교계에서 영적인 '고수', 고단자처럼 행세하는 명사들은 죄다 심리적인 것에 몰두합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내세우면서도 실제 기름부음이 아닌 뉴에이지성 임파테이션을 지닌 사람들도 알고 보면 다 심리적인 차원에 머물어 그걸 갖고 사람들을 이용하는 '꾼'들일 뿐입니다.


니코데모도 본래 이와 대동소이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이 성령의 권능을 지니지 못하면 한낱 종교인에 불과하기 나름이라는 사실을 그는 미처 체득하지 못했고, 이스라엘의 고위급 지도자이면 가장 영적이고 가장 차원이 높은 삶인 줄말 알았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에게서 범상치 않은 모습을 발견했고 그래서 자연히 호감이 가서 사람의 눈길이 한 적한 밤을 틈 타 찾아 뵌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알 듯 말 듯 하며 사람이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둥 너무나 엄청난 충격적 발언이어서 니코데모는 연신 반신반의합니다.
니코데모의 입이 벌어지면서 신음 같은 탄성이 나옵니다.

   "아니, 우째(어찌) 그런 일이.."

이때 주님은 니코데모를 꿰뚫어 보시고 정곡을 찌르십니다.

   "그대는 이스라엘의 라삐(교사)이면서도 이런 것들을 알지 못하오? 참으로, 참으로 그대에게 말하오: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오! 그러나 그대들은 우리의 증언을 받아 들이지 않는구려."

얼핏 보기에 주님의 이 말씀은 마치 교만스럽고, 이스라엘 고위 지도자 앞에 시건방진 말씀 같지만, 사실 주님은 하나님 당신(!)이시기에 감히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으며, 니코데모의 영의 진상을 투명하게 들여다 보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곧 성삼위 하나님과 거듭난 사람들인 성도 쪽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실로, 당대 유대 종교인들은 실제로는 모르는 것을 아는 양 가르치고 있었지요. 그것이 그들의 현실이고 진상이었습니다. 그들이 거머쥔 율법 해설권의 남용은, 실체는 안에 그냥 모셔 둔 채, 껍데기만 갖고 모두 다 아는 양 행세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표면적/외면적 종교들은 다 이와 대동소이합니다.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거듭나지도 않은 채, 다만 그럴 듯한 옷차림새 등 겉껍데기 외식과 의식만 붙들고 종교적 계율과 종교생활만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강조할 뿐입니다. 그들이 교회당 안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의식을 진행한다 해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실로 모르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아는 체 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대다수의 교회 안은 성령님이 계시려야 계실 수 없는 곳들입니다. 왜냐..? 거듭나지 못했기에 성령님이 과연 누구이신지도 모르고, 그 분의 선물과 은사, 권능도, 예수 이름도 활용할 줄 모르므로 온갖 의식(儀式)과 의식문들과 계율에만 매달려, 스스로도 거기 얽매일 뿐더러 따르는 사람들을 옭아 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름 '거듭남'과 '구원'을 유달리 강조하는 '구원파'나 비슷한 아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교주나 그들에게서, 또한 그 주변에서 나는 열매들을 보면, 그들의 구원관과 중생관은 성경과 달리 잘못돼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들은 아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아는 것'이란 하나님의 지식, 하나님에 관한 참 지식, 영에 관한 거룩하고 영적인 지식을 가리키죠. 

심리적인 것을 참으로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심리적으로는 제아무리 힘써 봐야 어디까지나 심적/심리적/정신적일 뿐입니다. 그것은 결코 영적인 지식이 아니며 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알기(!) 위해서는 거듭나야 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육의 사람은 하나님의 것, 영의 것을 알려야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죽은 영혼의 안테나엔 잡히는 게 없습니다.
육적, 심리적인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열렬히 애호하고 받들어 주는 고대/중세/근대의 '현인'이나 '성인'들은 참으로 아는/알았던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모르는 것을 갖고 머리를 짜서 끙끙 앓으며 논했던 사람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소위 온갖 '영성'이란 것을 갖고, 맑은 냇물을 온통 휘젓고 다녀 삽시간에 흙탕물로 바꿔 놓는 미꾸라지들처럼 교계를 '휘젓는' 명사들도, 자신들조차 모르는 것을 갖고 아는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들입니다. 왜냐..그 '영성'이라는 것들이 실제로는 심성이기 때문이죠. 사람들 속에 심리적 효과를 노리고 요리조리 장난 치는 사람들입니다.

'신사도'들만 해도, 힌두교 요가의 쿤달리니(뱀심=蛇力) 현상과 다름 없는 것들을 갖고 마치 성령의 권능와 역사인 양 몰고 가죠. 기계적으로 혓바닥을 날름대거나 팔다리를 요동치며 마구 떨거나 허리를 상하로 꺾어대거나 머리를 좌우로 흔드는 진동, 뱀 같은 '쉿쉿' 따위를 소위 '임파테이션'(권능 분여), '성령의 권능'으로 꾸며 대니 그저 어이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 앞에 거룩한 게 아니라 오히려 가증스럽기만 하지요. 

신사도들은 그런 것을 갖고 사람들의 눈을 현란하게 자극하여, 성령의 활동으로 믿게끔 닦아 세웁니다. 또 구약 예언을 적당히 둘러 대어 꾸며낸 것을 갖고 예언과 성취로 몰아 갑니다. 그들의 열매가 그들을 말해 줍니다.

이런 것들은 아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없지요.


바람이 가는 곳을 제대로 가름할 수 없듯, 성령으로 난 사람들이 가는 길과 하는 일은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합니다. 이해하려야 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고대의 엘리야나 엘리샤, 신약의 파울과 페트로 등 성령의 사람들은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여 이리저리 옮겨 가던 사람들입니다. 육의 사람들은 그들을 쉽게 발견할 수도 없었거니와, 혹 발견해도 무슨 일을 하는지 간파할 수 없었지요.
파울이 어디로 갈지 사람들은 미처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성도들조차 그가 예루샬렘이나 로마로 간다고 하자 좀체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만 했습니다. 파울은 또 여러 번 유대인들에게 얻어 맞아 죽을 뻔 했거나 실제로 죽었댔지만, 번번히 살아났습니다!
육의 사람들은 영의 사람들이 가는 곳을 모르며, 알아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페트로는 옥중에 갇혔다가 천사의 도움으로 '탈옥'한 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성도들조차 그가 어디로 갔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도로 예루샬렘 교회에 나타나기도 하고, 멀리 바벨론에 가 있기도 했습니다. 실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사람들이 성령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초기교회 집사 필맆은 성령의 권능으로 초자연적인 '수평공간이동'을 하기도 했지요(행전 9'39,40). 구약 대언자들에게도 있었던 현상입니다(에제키엘=겔 3'12). 뉴에이저, 오컬티스트들이 "그런 건 우리도 한다"면 그것은 악령의 힘을 이용한 거짓 이적일 뿐입니다.

실로 성령으로 난 사람들을 세상 사람들,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육의 차원과 영의 차원이 하늘/땅 사이만큼 다르기 때문이죠.
이 엄청난 차이/사잇폭을 성령님의 권능이 아니고는 메울 길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당대 니코데모 및 유대 종교인들이 주님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진리의 증언을 받지 않는 사람들은 거듭날 길도 없고 진리를 알 길도 없지요.


그러나.. 훗날엔 니코데모가 주님을 사랑한 나머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후 아리마테 요셒과 함께 그 누구도 감히 근접하려 하지 않던 주님의 시신을 거두어 향과 향품을 바르고 정성껏 무덤에 장사 지낸 것을 보아, 이 두 사람 다 참 신자가 되었을 가능성을 어림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거듭나야 합니다!
진리를 알기 위해선 영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성령의 사람일 수 있습니다. 
또 그래야만 성령의 사람들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