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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요한복음묵상

요한복음묵상 14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 영/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오." (요한복음서 3'6)


예수님은 한밤에 찾아 온 니코데모에게 계속 말씀하십니다.
산헤드린 종교의회 의원인, 유대 종교사회 고위 지도자인 니코데모로서도 지금껏 들어 본 적이 없는, 매우 놀라운 말씀이었지요.

듭남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은 사람의 영과 인간 존재의 나머지의 차이를 좀체 모릅니다.
영과 육이 전혀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평소 영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다가, 한 사람이 죽을 때에야 그 고혼이 흔히 '하늘나라'로 불리는 어디론가 좋은 곳에 가 줄 것을 막연히 희구하곤 하지요. 즉 땅에서는 육과 정신으로만 살다가 저 하늘에서는 영혼이라는 존재로 계속 살아 가리라고 상상과 기대를 하곤 합니다. 그러면서도 무덤 저편에서 또는 '유령'으로 다시 나타나 제삿밥이라도 먹어 주길 기대하기도 하지요.

성경에 따르면, 이 모두가 영의 세계를 모르는 탓입니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바로 영의 존재입니다. 동물에겐 인간보다 훨씬 뒤떨어진 혼은 있어도 영은 없습니다.  

속사람인 영은 사실 인간의 본질입니다. 혼이나 몸보다 더 분명한 실존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관을 갖춘 우리는 늘 몸을 더 의식하고 살며..따라서 몸>혼>영의 순서로 우위를 강조하며 살기가 일쑤이죠. 반면 성경은 영>혼>몸의 순서로 강조합니다.

그런데,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의 영을 좀체 의식하지 못하며, 할 수도 없습니다. 아담-하와의 범죄 이후 하나님과 갈려져 그 분에게서 분리된 죄인들의 영은 실상 죽어 있기 때문이죠. 참 생명은 창조주님이신 그 분에게 있으며, 따라서 그 분에게서의 분리는 곧 죽음을 뜻합니다.


맨 위 본문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이 그런 뜻을 바탕 삼고 있습니다.
 
사람의 영은 이처럼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채, 그 누구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었습니다(로마서 3'23). 영이 사실상 죽은 것이니, 살아 있는 듯한 겉모습은 갖췄어도, 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없지요.

그래서 몸과 피-혈육과 육체로 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육의 일일 뿐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이 육체와 오관을 위한 것들입니다. 비록 정신적인 것들이라도 그렇습니다. 그 차원이 영의 차원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제 아무리 현인/철학자/도사라도 그렇습니다.
영의 차원이 아닙니다.
부따/무함마드/콩푸지(공자)/소크라테스..그 누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기껏 혼의 세계를 논하다 갔습니다.
영의 세계를 '안다'고 떠드는 영매, 심령학자들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들의 그 누구도 실제 영의 세계를 사실상 모릅니다. 껍데기만 갖고 그럴 뿐입니다. 다 심리와 혼의 차원에 그칠 뿐입니다.

이들 모두가 육에서 났기에 통째로 육일 뿐입니다.

영의 세계는 오직 영에서/영으로 난 사람만 알 수 있습니다.
영에서 난다는 말은..속사람인 영이 다시 태어나야(!), 거듭나야(!), 위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그냥 육의 사람일 뿐입니다. 자기야 뭐라고 하든지.

그럼, 어떻게 영에서/영으로 태어날까요?
성령으로 납니다!
물과 성령-말씀과 성령으로 다시 납니다.

주님 말씀이 그렇습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이라고(8절 참조).

사람이 절대유일의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마음으로 믿고, 예수 크리스토(그리스도)님을 자기 구주님으로, 죽음에서 되살아나신 주님/주인으로서, 입으로 시인하여 속에 모셔 들일 때, 비로소 성령으로 납니다(로마서 10'9,10 참조).

그밖에는 달리 거듭날 길이 없습니다.

그래야만 성령으로 난 사람입니다.

그밖엔 그 누구도 영으로 나는 사람이 없고, 영으로 나지 않고는 영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성령으로 나지 않고도 영으로 "났다"고, 영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을 조심하세요! 다 거짓말입니다. 사람은 모두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만 참되십니다(로마서 3'4a).

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만, 그래서 하나님이 내려다 보시는 세상은 성도들을 제외하고는 온통 '공시장(公屍場/morgue)'과도 같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는 조만간 거듭날 사람도 있을 터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사람될 길, 사람다울 길은 거듭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거듭나야 영이 온전히 회복되기 때문이죠.

사람이 거듭나기 전엔 그냥 '싸르크스'(sarx) 곧 육일 뿐입니다.
육은 몸뚱이, 살덩이, 욕심/육욕 덩어리입니다.
육으로 난 육의 사람은 언제나 육욕이 대표합니다.
거듭나기 전엔 누구나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영적인 것이라곤 보이지도 보일 수도 없지요.
아무리 영적 모습, '경건'을 흉내내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거듭나고도 육욕을 따르는 경우와 신자들도 없지 않습니다. 파울은 거듭나고 나서도 죄의 법칙을 따르는 몸을 보며, "아,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한 바 있지요(로마서 7'23,24)
속사람 곧 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하지만, 또 다른 법이 몸에 작용해 죄의 법에 사로잡히기 일쑤라는 겁니다.

오직 크리스토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할 때, 우리에겐 정죄가 없습니다.

위 바탕본문의 주님 말씀은 파울이 주님께 직접 받은 계시에서 상세히 설명됩니다.

파울은 말합니다:
   육을 따르는 사람은 육의 일, 영을 따르는 사람들은 영의 일을 생각한다(로마서 8'5 이하 참고)고.

그러므로 지금 육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 나는 지금 육을 따르고 있다고 보면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의 생각은 죽음,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화입니다.
육의 생각은 하나님과 척을 지게 하고, 적대 관계를 이룹니다.
육에 머무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길이 없습니다. 마치 믿음 없는 사람처럼(참고: 히브리서 11'6a).

그러나 만약 하나님의 영이 내 속에 거하시면 우리가 육에 있지 않고 영에 머물게 됩니다.

크리스토의 영 없이는, 크리스토의 사람 곧 크리스천일 수가 없지요.
'크리스천'이란 말에 그런 무게가 실려 있습니다.
그러니, 함부로 아무나 크리스천이라고 불러 줄 일이 아니지요.

크리스천다워야 크리스천이며, 크리스토의 영을 모시고 있어야 크리스천입니다.

아울러 크리스천은 육이 아닌 영에 따라, 영의 생각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육의 생각을 버리고 영의 생각을 속에 담읍시다.
이것은 인간의 기본욕구, 삶의 본능까지 버리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려면 죽어야지요.

여기서는 하나님께 역행되는 생각과 반대되는 육욕들을 버리자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내 속에 머물게 해야 합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자기 행실을 깨끗게 할 수 있나요?
자기 속에 머물게 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써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권능으로써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