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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과 검증/관상영성

이성희 목사 영성비평(1)



사진 출처> 위(책표지): 김삼. 아래(저자 이성희 목사): 뉴스파워


이성희 목사(연동교회)는 근래 한국의 대표적인 관상영성가/수도원 영성가로 급부상해 왔다. 
'영성'이라는 것에 목숨을 걸다시피 한, 한 사람이다. 110여 년 된, 유서 깊은 도심지 교회에서 사역하고 있어선지, 다른 관상가들과는 달리 피속적(避俗的) 내지 탈속적이기보다 적극적/행동적이라는 데서 여타 관상가들과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미국의 레너드 스윝처럼,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미래학자'로 손꼽혀 온 그는 연동교회에서 교우들의 신망 속에 오래 목회해 왔고, 연전에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신학교인 장신대학교 총장으로도 선임된 바 있으며, 교단 총회장 후보이기도 했다. 


   '관상회의'?

뉴스파워의 수 년 전 기사에 따르면, '관상회의' 또는 '촛불당회', '식탁종 당회'로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 이 목사는 "성령의 임재를 상징하는" 촛불을 켜고 "성령의 인도를 따르기" 위한 당회 방식이라면서, 아울러 "종교로서의 신비감 회복"이 한국교회 쇠퇴를 막는 길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촛불, 신비감 등의 용어가 그의 중세적인 관상주의/신비주의 성향을 강하게 뒷받침 한다. 

뉴스파워와의 대담에서 그는 말한다. 

    "..관상(觀想)회의라고 한다. 관상(contemplation)이라는 말은 ‘함께 성소에 들어간다’는 뜻을 가진 용어인데, 영성 차원에서 관상법 가운데 하나로 회의를 그렇게 하는 것이다..당회를 할 때 내가 제일 마지막에 입장을 하게 되면 내 자리 앞에 초가 하나 있는데, 그 불을 내가 켠다. 촛불은 원래 개신교의 전통이며, 개혁주의 전통도 교회의 모든 예전(禮典)에서 촛불을 켰다. 
그런데 개혁주의의 전통이 한국에 오면서 촛불 켜는 의식이 많이 없어졌다. 왜냐하면 우리는 절간에 가면 촛불이 있고 초상집에 가면 있고 하니까 그런 연상이 된다고 해서 없앴다. 그런데 사실 그 의미를 알고 보면 참 좋다. 
우리 교회는 지금도 새벽기도회나 모든 예배 때마다 촛불을 켠다. 내가 당회 때 촛불을 켜는 것은 성령의 임재를 상징한다. 예전에서는 성령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촛불을 켠다. 그래서 지금도 유렆 같은 데서는 개신교도 촛불 켜는 전통이 남아 있다. (하략)"

연동교회가 이 관상회의를 당회에 도입한 것은 약 5-6년 됐다고 했으니, 지금은 10년이 가까워 오는 셈이다. 

촛불이 성령의 임재를 상징한다는 말은 성경에 없다. 다만 구약 성소/성전 안의 메노라처럼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등대가 나타날 뿐이다.  


여기서 잠깐..
수도원 영성 또는 수사영성은 관상영성과 대동소이하다. 엄두섭 목사(전 은성수도원 대표)는 한국 수도원 영성의 대표적인 1인자의 하나로 군림해 왔고, 그밖에도 그의 은성수도원을 인수 받은 서울 장신대학교의, 주선애 은퇴교수나 주해룡 현 교수 등을 통해 이런 영성이 활발히 보급돼 왔다. 관상영성은 은성수도원과 직계된 은성출판사나 여타 기독교 출판사들을 통해서도 폭 넓게 보급돼 왔다. 

관상영성은 4세기 광야(사막)수사들로부터 지속돼 온 카톨맄 영성이고, 따라서 서구 영성이자 외래영성이다. 특히 한국 교회 등에는 천주교에서 영향을 받은 자체 수도원 영성 외에, 20세기 후반에 주로 (네덜란드 출신인) 헨리 나웬의 대다수 도서들, (퀘이커 교도 출신인) 리처드 포스터 등 미국 관상가들에게서 도입됐다. 

관상영성은 성경 및 참 기독교와는 전혀 무관하다! 그런데도 미국 교회를 비롯한 해외 교계는 물론 한국 교회에 깊숙이 침투하고 있는 데 대해 깊은 우려를 금치 못한다.   

관상영성에 관한 추가 비평자료들은 티엘티와 분별/청춘 블로그를 참조해 주기 바란다. 



   관상으로 신비 회복?

이 목사는 교회가 원래 가진 신비를 회복하자고 주장하면서, 레너드 스윝이 말한 고대-미래(ancient-future) 개념을 적용한다. 고대와 미래는 "패러다임이 일치하는데, 고대의 패러다임의 핵심은 신비이니 미래도 그렇게 된다는 것.   
또한 천주교나 불교는 아직 신비감을 지니고 있다면서 예전(禮典)도, 성직자들의 삶도 그렇다고 대조한다. 

여기서 우리는 천주교 관상가들이 불교 수도승/명상가들과 내통해온 점과 이 목사의 말이 웬지 상통한다는 데 대해 묘한 감흥까지 느낀다.

이 목사는 천주교와 불교가 신비감을 간직한 반면, 신교는 성직자에 관해 언론에 떠들고 해서 신비감을 전부 벗겨버려 전도에도 방해를 받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국제 천주교 사제들의 대대적인 아동 성추행 소송-배상의 악순환은 여전히 신비 속에 감췬 것인가? 불교계의 문제점들도 여전히 신비 속에 있어 포교에 도움되고 있는가?

이 목사는 신비주의는 과거 종교개혁 당시의 개혁 대상이 아니었나라는 기자의 질문에 신비 그 자체는 비판 대상이 아니라고 하여, 관상영성이 말하는 모든 '신비'를 비판 대상에서 제외시켜 버린다. 그렇다면 '성흔(스티그마타)' 따위를 추구하던 중세 관상가/신비가 모두에게 이 목사의 말 한 마디로 '면죄부'를 주는 셈이다. 그는 또 하나님께 대한 신비감은 있어야 한다고 말하여 관상가들의 신비는 모두 "하나님께 대한 신비감"으로 추켜 올린 셈이다. 
과연 이 목사처럼 관상 영성을 추구할 때 한국 교회의 신비감이 회복될까? 본 평자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성령님의 참 신비는 영적인 것인데 비해, 관상영성이 논하는 신비는 어느 모로든 혼적/심적/심리적이기 때문이다. 


   도시 속 사막?

이하에..이 목사의 저서, '도시 속의 사막'을 갖고 그 영성 세계를 몇 회에 걸쳐 비평해 보련다. 약간 묵은 책이지만, 그의 영성세계를 들여다 보는 데 별 부족이 없다고 본다.  


저자는 집필에 매우 유능한 편이다. 책은 경쾌한 간결체 단문으로 된, 평균 3쪽 분량의 짤막짤막한 칼럼들로 점철돼 있다. 독자들이 부담 없이 읽게 될 만큼 감칠 맛 나고 붙임성과 설득력을 발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그래서, 필자는 그의 책을 퍽 위험스럽게 본다. 감성과 심리를 달래듯 어르듯 부드럽게 자극하는 헨리 나웬의 책들이 독자들을 관상 영성에 빠뜨려 왔듯. 
 

제목 자체가 곧 고대에 관상영성/수도원영성을 수행하던 이른 바 '사막교부'들을 연상시킨다. 책 곳곳에서 사막을 예찬하며, 실제로 책 속의 같은 제목의 칼럼이 사막영성을 논하고 있다.
이 칼럼에서 저자는 미쯔라임출국기(출애굽기) 등 모쉐 5경에 느슨히 근거해 주로 광야 예찬 같은 것을 늘어 놓다가, 끝 부분에서 돌연 사막과 연결시키면서 사막교부의 영성 예찬으로 끝난다. 광야 예찬이 관상/수사영성 예찬으로 연계되는 단순 패러다임이 솔직히 사막처럼 너무 삭막하다는 게 본 평자의 느낌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총을 베풀기 위해서만 광야로 이리저리 끌고 다니신 것이 아니다. 40년 광야생활이 그들에겐 하나의 심판 과정이기도 했다. 1세들은 예슈아(여호수아)/칼렙(갈렙) 2명만 빼 놓고 다 심판 받아 광야에서 죽고 2세들만 남았다. 은총을 베푸셨건만, 불신으로 배신/반항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친 광야가 하나의 고되고도 필수적인 인생 훈련장이라면 모르되, 광야 자체를 예찬할 이유는 그다지 없을 성 싶다. 논산훈련소를 필수 과정의 하나로 여길지언정 훈련소 자체를 웬만해서는 예찬하지 않는 거와도 같다. 상당수 사람에게 '악몽'(?) 같은 곳이기도 하다. 
광야 예찬을 할 것이라면, 광야의 무덤 사이에 살던 악령 지핀 두 사람도 좋은 곳에 살았다고 평가돼야 하나? 

물론 예수님과 파울처럼 광야가 크게 유익했던 경우도 없진 않다. 그렇다고 광야와 사막영성을 연계시킴은 "목적에 휘둘린" 경우로 보인다. 
저자는 "사막은 죽은 땅이 아닙니다. 사막은 무한을 품고 있는 살아 있는 땅입니다."라면서 "우리는 사막으로 가야 한다"고 외친다. 여기서 북한 예찬을 하는 사람들이 왜 북한으로 가 살지 않는지 다시 궁금해진다. 
저자는 사막수사 카를로 카레토의 말을 따라 도시에 사막을 만들어 '은혜의 자리'로 삼고 '도시의 수도사'라는 말을 듣기 좋아한다고 자임한다. 떼제 공동체의 로제 수사나 엄두섭처럼 저자는 명실공히 신교의 수사인 셈이다. 천주교와 다를 게 뭔가? 

저자는 책 앞쪽 칼럼에서 광야가 "잠시 머무는 과정"이라고 말하면서도 영성이라는 것을 위해 자타가 광야나 사막에 항상 살기를 바라는 듯한 모순을 보인다. 관상영성/수도원영성을 위하여.

그는 또 "그리스도인의 영적 훈련이란 그리스도의 내적 통치입니다. 이 때 마음의 질서가 생기고, 그리스도가 앞장서시는 바른 순서가 되는 것입니다"라고 일방적으로 주장한다. 
저자에게 묻고 싶다. 중세 카톨맄교에서 유래한 관상 영성, 수도원 영성 등 소위 '영적 훈련'이 크리스토님의 내적 통치이고 질서이고 크리스토님이 앞장서시는 순서인가? 

저자는 또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를 논하면서, "영적인 사람은 더 영성을 추구하게 되고, 비영성적인('비영적인'의 오타?인듯) 사람들은 영성을 상실한 채로 살아 가게 된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한다. 

묻는다. 오늘날 미국 교계에 편만한 뉴에이지적 영성을 포함한 온갖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더 영적인가? 그런 영성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영성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인가?
도대체 이 목사가 보는 '영성'은 무엇이며, '영적인' 것은 어떤 것인가? 자신의 관점이 성경 그대로인가? 


이 목사가 추종/극찬해온 관상영성/사막수도영성의 시조 격인 안토니우스를 비롯한 모든 중세 영성가들, 20세기 관상영성의 선구자 토머스 멀튼(딴 표기 머튼)이나 헨리 나웬 등은 하나님 보시기에 영적인 사람들이고, 나머지는 별로 그렇지 못하다는 뜻인가?
무엇이든 '영성'이란 맨틀(망토)을 하나씩 걸치고 있으면 더 영적인 사람인가? 
그렇다면 저자 자신과 이동원, 리처드 포스터를 비롯한 모든 관상영성가들, 떠오름(이머징)영성의 브라이언 매클러런, '목적에 이끌림' 영성의 맄 워런, 뉴에이지적인 미래영성의 레너드 스윝, 신사도영성의 C.P. 왜그너 등과 그들의 추종자들은 다들 하나님 보시기에 영적인 사람들이고, 나머지는 덜 그런가? 

이 유명 영성가들 대다수가 동시에 신비가이며 보편구원론자들, 종교다원주의자들, 종교혼합주의자들이란 사실을 이 목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결국 저자가 '영적'이라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온당치 않을 뿐더러 극히 위험하다는 결론이 서진 않는가?

그리고 "참 훈련만이 그리스도인을 만든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영성훈련을 받아야 참 크리스토인으로 만들어지는가? 교계의 모든 영성의 틀이 참 크리스천 제조기라도 된다는 말인가?  


저자는 경건의 연습을 논급하면서, 늘 율법 말씀을 묵상하다 나무에 이마가 부딪쳐 피가 흘러 '이마에 피 흐르는 바리새인'이라는 말을 듣기 좋아하는 위선자들의 사례를 든다. 
경건에 대한 전통적 개념은 "정적이고 고요한 것" (곧 수도원적인 것)을 의미하나, 저자는 참 경건이란 동적이고 활기찬 것이라며 야코보서 성구를 든다.  

여기서 저자는 묘한 아이러니를 보인다. 즉 야코보가 말한 경건에 포함된, 세속에 물들지 않음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경건은 세상 속에서의 삶과 인간관계에서 드러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의미합니다. 참된 경건은 사람을 세상에서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더 잘 살면서 세상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를 이원적으로 분리하여 사는 것은 바른 삶이 아닙니다."

사실 이와 비슷한 얘기를 과거 신학교 때부터, 또는 책에서 우리는 많이 들어 왔다.  

그런데 저자는 적어도, 야코보가 말하는 경건의 정의의 출발점이랄까를 빠트렸거나 잘못 짚은 듯 하다. 주님의 동생이기도 했던 야코보가 말한 경건은 사실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야코보서 말씀과 저자의 말은 얼핏 모순되어 보인다.  

하나님보다는 신자의 세속 속 자세를 더 강조하는 듯 보이는 저자는, 경건이 이원론적이 되는 것을 경계하면서 어째 다른 이원론에 빠져 든 느낌이 든다. 


구약 성경에서 경건한 사람이란, '헤쎄드' 곧 하나님께 사랑 받는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가리켰다. 하나님께 사랑 받지 못하면 경건이 아니라는 말과도 같다. 

헤쎄드는 아울러, 에메트(참/진리/신실)와 마치 기차바퀴처럼 병행해 다닌다. 구약 곳곳에서 그렇다. 바꿔 말하면,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진리의 하나님이시므로 성경 진리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경건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진리의 하나님께서 무엇을 요구하시느냐는 점. 그 분은 세속으로부터의 성별/구별을 각별히 요구하신다!  

   "'그러므로 그들 가운데서 나와서 따로 떨어져 있거라!' 주님 말씀하신다.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마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받아 주리." (코린토B서=고후 6'17)

야코보의 경건 정의 끝 부분과도 일치하는 위 말씀은, 이 목사 칼럼의 뉘앙스와는 사뭇 달리, 오히려 하나님의 세계와 세상을 거의 이원적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 말씀은 요한서신에서도 강화된다고 할 수 있다(요A서=요일 2:15-17).  
 
우리는 세상을 '개선'할 수 없을 뿐더러 개선이 하나님의 뜻도 아니다. 왜냐 하면, 현세는 세상 임금, 세상 신인 마귀에게 지배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개선'하여 '하나님 나라'로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바로 '주권론자'들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세계관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은 구약적인 신정(theocratic) 사상일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 제도와 세상 시스템에 깊이 관여하여 그것을 '개선'하길 바라시는 게 아니라, 크리스토님의 날까지 세상에서 성별되어 우리의 온 영/혼/몸이 보존되길 바라신다(테살로니카A서 5'23).
그러므로 '땅 밟기', '성시화운동' 따위는 주권주의 어젠다에 속한 것이지, 성경에 속한 발상이 아니다. 

이 점에서 필자는 이 목사가 경건의 개념부터 더 성경적으로 전환/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가난/청빈 예찬

'가난한 자의 크리스마스'라는 글에서, 저자는 이른 바 수도원적 '청빈' 사상을 설파한다. 중세 수사들의 필연적/필수적 주요 사상의 하나가 이것이다. 

이 글에는 테레사 수녀, 토머스 머튼, 장 바니에(헨리 나웬이 말년에 도왔던 캐나다 라르슈 공동체 설립자),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 등 모두 카톨맄 교도들인 사람들의 말을 아무 부담 없이 인용한다. 관상영성을 하다 보면 얼마나 구교에 근접하게 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이 목사는 기독교가 참 종교, 참 진리임을 강조하던데, 구교가 과연 참 종교이던가? 이 목사 보기에는 구교가 진리의 종교인가? 
  
수도원적/불교적인 '청빈' 사상은 전혀 성경적이 아니다! 
청빈과 관상(觀想)에서 수사들과 수도승들은 기막힌 공통점을 보인다. 바로 그래서, 머튼, 나웬, 토머스 키팅, 리처드 로어, 포스터 등 주요 관상영성가들이 티벹 불교나 일본 선불교 따위와 친교 정신이 두텁다. 

성경은 '청빈'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주님이 산상 메시지에서 심령의 가난을 말씀하고 계실 뿐. 
잠언 기자들의 한 명인 아구르, 대언자(선지자/예언자) 하바쿸(학개), 사도 파울(바울) 등이 '청빈'을 말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되새겨 보길 바란다.  

교계 일각에서 주장하는 '청빈'은 분명 천주교 수도원에서 왔다는 진실이 저자의 이 칼럼에서도 입증된다. 

저자는 가난을 예찬하다시피 하면서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욕심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수도원 수사/수녀들이 '청빈'을 추구하면서도 챙길 건 다 챙기고, 자기네만 그런 게 아니라 바깥의 남들에게까지도 "비워라", "놓아라" 해 온 장본인들이며, 중세에 그 수도원이 발달했던 카톨맄의 총 본부인 바티칸이 사실상 거부정부(巨富政府)라는 사실을 저자는 아는지 모르는지? 그렇다면, 그들의 청빈론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오늘날 관상영성이나 불교와도 흡사한 '무(無)/제로(0)점' 영성이나 '청빈'이나 '비움'/'놓음' 신학 따위의 뿌리가 모두 이 천주교 수도원이다. 성경과는 전혀 무관하다!

저자가 해당 칼럼에서 줄줄이 카톨맄 명사들의 말만 인용한 것은 수도원적 청빈이 곧 성경의 심령의 가난이라고 해석한 결과이고, 교회의 뿌리를 예루살렘보다는 로마로 시인한 결과가 아닐까.  

"실제로 가난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며 관계적인 것이다"라는 저자는, "아무 것도 없지만 가난하지 않은 사람이 있고, 많은 것을 갖고 있지만 가난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 "배부른 돼지보다 주린 소크라테스가 더 낫다"는 유의, 일종의 철학적 궤변이라고 생각된다. 

가난은 일용 양식의 핍절에서부터 온다. 주님은 "가난한 사람들은 늘상 그대들과 함께 있으나.."라고 하셨다. 당장 먹을 빵이 없어 주려 죽어 가는 사람은 도움이 없다면, 정신적으로도 공황감에 빠지기 쉽다. 하바쿸이 믿음으로 한 고백을 철학적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현실과 철학과 신앙은 서로 다르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난의 신이 아니라 전능과 창조와 풍요의 신이시다. '풍요의 신'이라면, 좀 유식(?)하다는 사람들은 으레 아슈타롵 등 카나안 신 이름만 떠올리는데, 그들은 실제 풍요와는 전혀 무관한 잡신일 뿐이며..참 풍요의 신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에게 당신을 나타내신 엘 샤따이 그 분이 곧 풍요의 하나님이시다. 

미리 앞서 준비하시는 예호봐 이레님의 이름, "예호봐는 나의 목자, 나 아무런 부족 없네!"라는 고백에서 가득한 참 풍요를 느끼지 못한다면, 선입견과 편견에 의해 뭔가 맘이 비뚤어진 것이다.   
 
기독교는 풍요의 진리이지, 가난이나 예찬하는 가난 찬미의 종교가 아니다. 물질적 가난, 정신적 빈곤, 심령의 가난은 각각 서로 다른 것이다. 
먹이를 찾아 하나님께 부르짖는 들짐승들처럼, 물질적 가난은 성경 도처에서 풍요를 약속해 놓으신 아버지 하나님을 향해 믿음으로 부르짖고 풍요를 고백/선언하게 만든다. 심령이 가난하여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은 오늘날 지상에 계신 성령님의 모든 것-권능/이적/은사/영언/열매-도 성경 그대로 갈망하게 된다! 
철학 나부랭이나 구술하고 있지 않는다. 

그런데 저자는 가난 예찬을 위해 카톨맄 인사들의 이름만 구슬꿰미처럼 동원한 것은 그가 지향하는 가난의 진리를 위해 천주교와 수도원을 표준 삼은 게 거의 틀림 없다. 
왜냐 하면 그는 "수도사들이 광야로 간 것도 가지는 것에서부터 해방되기 위함"이라며 "아무 것도 갖지 않고 사는 물질의 가난"이 곧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과 삶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가난해지지 못한 대가는 죽음", "가난 자체가 생명"이라고 선언한다. 그래서 이스카리옽(가룟) 유다, 아나니아와 사피라의 죽음이 가난해지지 못한 대가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그게 성경이 말하는 가난과 생명과 죽음일까?

여기서, 수사들의 정신과 예수님/사도들의 가르침 및 삶이 일치한다고 주장하려는 저자의 뜻을 본다. 과연 주님이 "갖는 것에서 해방돼야 한다"고 하셨는가? 사도들도 그랬던가? 수사들이 예수님이나 사도들의 삶과 일치하게 살았다면, 우리 모두 수사/수녀가 돼야 한다는 것인가?

물론 저자도 모종의 오해나 오착을 막을 요량인지, 다른 설명들을 곁들이려고 한다. 그러나 성구도 하나 인용하지 않은 채 카톨맄 인사들의 어록만을 인용한 점과, 본인의 영성 방향을 감안할 때 가난/'청빈'의 개념을 수도원적으로 몰고 가려는 뜻이 여실하다 하겠다. 

저자의 선친은 '이상근 주석'으로 불리는 신약주해서들을 쓰기도 한 성경학자였는데, 아들 목회자는 성경과 거리가 멀고 카톨맄적인 관상영성에 빠지다니 참 유감이다. 이 목사는 "영성적 경건"을 실천하던 선친을 '수도사'였다고도 지칭하는데, 영적이 아닌 정신적/관습적으로 부친의 간접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나 싶다. 
 
과연 카톨맄적 관상영성이 "성경에 어긋나지 않게 시대를 앞서 가는" 자신의 목회철학을 대변하는지?  
 

다음 회에도 '도시 속의 사막'을 계속 비평/분석해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