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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사복음서

[막 11:14,23,24] 막힘의 무화과나무, 막힘의 산 명령하기


바탕본문: 마르코스복음서(마가) 11'14,23,24


이 메시지는 얼마 전 예수님의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에 관한 들풀님의 새로운 참조 해석을 읽은 뒤 나름 떠오른 것입니다. 들풀님의 그 참조 해석을 기꺼이 받아 들이면서..여기서는 이 사건의 핵심 메시지를 다루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의 핵심은 한 마디로 믿음의 명령이라는 무기에 관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무화과나무 자체가 아니라, 주님께서 무화과나무를 향해 명령하셨다는 사실이지요.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있으셨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버린 이 사건과 관련, "하나님을 믿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주님은 하나님과 그 말씀을 믿고 명령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위 본문 부분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여기서 잠깐 강조하고 싶은 얘기는..본문의 핵심 메시지를 놓치지 말자는 것..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주변 사항 때문에 핵심 메시지를 놓치는 경우가 자주/종종 있습니다.


지난 2월 밴쿠버 겨울올림핔 1만 미터 스피드 경기 때, 이승훈 선수와 경쟁하던 네덜란드의 스벤 크라머 선수는 아웉코스에서 인코스로 들어오다가 경계선을 침범해 어이없이 실격함으로써, 이승훈보다 빠른 기록을 세우고도 금메달을 내주고 말았습니다. 
'핵심 코스' 놓치기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처럼 우리도 성경본문의 핵심 메시지를 놓치면, 어이없는 '실격' 처리로 남에게 승리를 앗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안의 형제자매들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하지만, 다들 믿음의 선한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침공'하는 사람의 것이며, 믿음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믿음의 선한 경쟁자들입니다.
마치 트랰을 도는 선수들처럼, 우리는 다들 함께 믿음의 경주 트랰을 돕니다.

내 믿음은 남에게 양보할 성질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으로 남의 믿음을 북돋울 수 있을지언정 내 믿음을 남에게 줄 순 없습니다. 구원을 받아도 각자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니, 상급도 그러하고 삶 속에서의 내 몫도 그러합니다. 내 믿음은 내가 지켜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 경주에 있어, 트랰 경계선을 밟거나 침범하지 않고 자리를 지킨다는 것, 트랰을 제대로 돈다는 것, 핵심 메시지를 놓치지 않는다는 것 -'치명적'으로 중요한 사항입니다!
주변 사항들도 때로 중요하겠지만, 그것 때문에 한 눈 팔다가 핵심 메시지마저 놓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성경 말씀의 핵심 메시지를 놓치지 않고, 그 말씀대로 믿어서 믿음을 지키는 것- 이것 참, 치명적으로 중요합니다.


영국 무신론 철학자, 버트란드 러슬 경은 바로 이 본문 내용에서 실족하여 넘어졌습니다. 그는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란 책에서, 예수님이 애꿎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죽였다면서 그런 잔인한 기독교를 믿지 않겠다고 결심한 내력을 고백한 것입니다. 러슬이 당시 들풀님의 참조해석을 미리 들었다면 혹 생각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네요^^.

러슬은 핵심 메시지를 놓치고 주변 사항에 머물렀습니다. 정작 자신이 마땅히 달려가야 할 트랰은 놓치고 엉뚱한 바깥 선을 에둘러 돈 셈입니다.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의 핵심을 놓침으로써 믿음 아닌 불신에 빠져 구원마저 놓친 것입니다.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 발짝 더 나아가 스스로 잘 났다고 기독교를 부정하는 책까지 썼습니다.
말라 죽은 불쌍한(?)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동정하고 옹호한 나머지, 그 자신이 무화과나무처럼 영원히 저주 받은 신세가 돼 버렸습니다. 불행한 일이지요.

우리는 이처럼 비본질적인 것에 매달리느라 본질과 본론을 놓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자, 주님은 무화과나무에 대하여 어떻게 하셨습니까?

말씀으로 명령하셨습니다.

주님이 무화과나무가 마르자 제자들은 신기하게 생각하고 페트로는 나서서 말합니다.

    "라삐(스승님), 보세요! 저주하신 그 나무가 말라버렸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선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말씀으로 명령하라는 것이지요.

주님은 이어서 곁에 있는 산을 가리키시며, "누구든지 이 산더러 '냉큼 번쩍 들려서 바다에 던져져라!'고 명령하면서 그 말대로 이뤄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으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십니다.
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십니다. 오 할렐루야, 아멘!

말씀대로 명령하고 믿는다는 것-이것이 핵심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의 핵심과 본질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흔히 그 분의 존재를 믿는 수위에서 그치기 쉽습니다.
히브리서(6'1)에 따르면, 그것은 믿음의 초보입니다. 기본적으로 믿어야 할, 밑바탕의 하나라는 뜻이지요.
사실, 하나님 또는 신이 계시다고 믿는 사람들은 흔합니다. 미국인들의 과반수가 그렇게들 믿는다고들 하지요.

사도 야코보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믿습니까? 좋습니다만, 심지어 악령들이 (그렇게) 믿고 두려워 떱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철학자, 러슬 경의 믿음은 악령만도 못했던 셈이지요! 정신 차원인 철학과 영의 차원인 믿음의 경지는 그만한 차이가 있습니다. 제 아무리 머리가 똑똑하고 천재이고 학력/학식/연구경력이 탁월한 대 석학이더라도, 이 믿음 없이는 순수한 어린이만도 못한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철학과 인생의 '노하우'를 익히더라도 믿음의 노하우를 못 갖춘다면 불행한 일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분의 말씀도 믿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그 분의 말씀대로 우리가 믿고 명령하면 그대로 이뤄질 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통째로 우리가 믿어야 할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그 가운데 있는 약속들은 우리가 믿고 명령할 수 있는 사안입니다.
삶 속에서, 기도 가운데서 활용할-"써 먹을" 수 있는 진리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삶 속에서 우리의 기도제목을 곧장 말씀 메시지와 연결하여 '명령거리'로 삼을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대들이 내 안에 머물고 내 말이 그대들 안에 머물면 무엇이든 바라는 대로 구하오. 그러면 이룰 테니." (요한복음서 15'7)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기도하고 구하는 대상은 믿음의 바탕이 될 성경 말씀을 우리 속에 품고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든든한 바위 위에 서서 믿고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집은 말씀의 바위 위에 지어야 합니다.

우리는 삶을 가로막는 막힘의 무화과나무를 향해 명령해야 합니다.
우리의 복을 가로막는 막힘의 산을 향해 명해야 합니다.
명령하되, 말씀대로 이뤄질 줄 믿어야 합니다. 의심치 말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본질을 우리에게 깨우쳐 줍니다.
'믿음'장이라고도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의 첫 절에서 선언합니다.

    "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이 말은..얼핏 어려워 보이지만, 주님께서 하신 말씀- "바라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오"라는 말과 결국 같은 뜻입니다. 아직 눈엔 보이지 않지만 실체로서 잡은 줄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마치 '믿음 박물관'처럼, '믿음 영예의 전당'처럼 주욱~ 이름과 행위록이 나열된 믿음의 선열들은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나아갔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지만, 하늘의 본향을 바라고 믿고 담담히/묵묵히 걸어갔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경주자이면서 나그네들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궁극적 본향이 아닙니다.
우주도 아닙니다.
우리는 '구천'을 떠돌 운명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이 계시는 그 하늘의 성이 우리 신자들의 궁극적인 고향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땅에서 믿음의 나그네/순례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순례자에게 기본적으로 꼭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길이 없습니다! 혹 딴 걸 놓쳐도 내 믿음만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안주해야 합니다.
그 말씀 안에 머물고, 그 말씀이 내 안에 머물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명령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주님의 교훈입니다.

말씀을 믿고 안 믿고, 명령하고 않고는 우리에게 달린 문제이지 주님의 문제가 아니지요. 남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라는 겁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특정 말씀을 믿을 수도 있고 안 믿을 수도 있습니다.
말씀대로 명령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살아 오면서 과연 몇 번 주님 말씀대로 명령해 봤습니까? 여러분 앞을 가로막는 문제의 무화과나무, 문제의 산을 향해 몇 번 소리쳐 명령해 보셨나요? 혹, 단 한 번도 없진 않습니까? 기도할 때마다 그냥 달라 달라 달라, 주세요 주세요 주세요로 일관하진 않습니까? 우리의 기도가 너무 '- 주소서'로만 도배된 건 아닌지요?
'달라', '주세요'로만 끝낼 일이 아니지요.

주님께서는 구하고 바라는 것을 말씀대로 믿고 명령/선언/고백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그대의 믿음이 어디 있소?"라고 묻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행방을 되찾아야 합니다. 믿음의 주소를! 믿음의 본질도!
우리의 트랰을 바로 보고 바로잡아야 합니다.

믿음의 주소, 믿음의 좌소는 하나님 말씀에 두어야 합니다. 말씀의 바위 위에 믿음의 집을 지어야 합니다.
그래야 탄탄합니다. 그래야 비바람이 불고 홍수가 나도 무너지지 않죠.

지난 1월 아이티의 지진 피해의 주요인은..평소 집을 든든히 짓지 못해서였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진이 나도 끄떡 없는 탄탄한 믿음의 집을 지어야 합니다. 이 집은 말씀 위에 세워야 합니다!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구하고, 말씀대로 명해야 이뤄집니다. 그래야 막힘의 무화과나무가 마르고, 막힘의 산이 들려서 바다에 빠집니다.

우리의 앞을 가로막고 우리의 복을 앗고 우리의 재정, 우리의 평화를 야금야금 갉아 먹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삶의 독소입니다! 그것이 문제이든 마귀이든 악령이든..그렇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미처 모르는 가운데, 보이지 않는 가운데 그렇습니다.

내 삶의 도처에 가로막고 있는 문제들..문제의 산들, 문제의 나무들..그것을 방치해 두는 것은 나의 불신이고 나의 우매이고 결국 내 손해입니다.

그것을 향해 지금 명령합시다. 믿음으로! 예수 이름으로! 그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너, 문제의 무화과나무여, 뿌리째 말라 버려라!
너, 문제의 산아, 번쩍 들려 해결의 바다에 풍덩~ 빠져라!

그리고는 마음에 의심치 말아야 합니다.
야코보는,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권하면서, 의심하는 사람은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닷물결 같다고 경고합니다(얔 1'6). 의심하지 않을 때에만..우리의 믿음의 명령/고백/선언이 이뤄질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주님 말씀대로 믿음으로 예수 이름으로 명령한 적이 없었다면, 이제부터라도 하면 되는 겁니다. 하는 사람이 막말로 '장땡'입니다.
아는 것도 써 먹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그림의 떡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더욱 믿음의 명령이 잦아지고, 선언과 고백이 흔해지길 열망합니다.
우리의 삶을 가로막은 무화과나무, 산들이 하나 둘씩 사라져 가길!


티엘티 성도들은
주님 말씀대로 막힘의 나무들과 산을
명령하여 이루는 삶을 살기를~!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