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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시편

[시 30:8-12] 죽지 않고 살아서




내가 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주/야웨님.
내가 주/야웨님께 간구했습니다:

-'내가 구덩이에 내려가면 내 피가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흙먼지가 주님을 찬양하겠습니까, 주님의 진리를 선포하겠습니까?
들으소서, 주/야웨님, 날 불쌍히 여기소서! 오 주/야웨님, 내 도움이 되소서!'
주님은 내 슬픔을 바꾸어 춤 되게 하시고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옷 입히셨습니다.
그래서 나로 하여금 가만 있게 않으시고 내 마음으로 님을 찬양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주/야웨, 내 하나님! 나, 주님께 감사하렵니다, 길이길이!
(시편 30:8-12 사역)
 

죽는 사람은 불가능의 존재입니다.
생명이 끊어진 후엔 땅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공동묘원이란 곳은 그런 사람들의 휴식처이지요.
이제 더는 무엇을 해 보려야 해 볼 도리가 없는 사람들..

이젠 남을 축복할 수도 저주할 수도 없습니다.
이제 더는 남에게 축복 받을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평소처럼 시원하게, 주님을 찬양할 수 없고..
또 진리를 선포할 수도 없습니다.
진리 선포-이것은 산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기회요 특권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이란 땅에서 오래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더 기회가 있습니다.
일찍 일찍 죽겠다는 발상은 불가불 순교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지 않았다면, 가당치 않은 생각입니다. 그렇게 볼 때, 자기 안일을 위해 자신이 밴 생명을 일찍 일찍 끊겠다는 낙태 풍조도 아주 악한 흐름이지요.

살되,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악을 행하면 행할수록 살 의미와 가치가 줄어 듭니다. 선하게 산다는 말은 적선(積善)처럼 착해 뵈는 일을 많이 함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예수 크리스토를 믿고 참 선인/의인이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님 없는 사람은 전혀 무가치하니까요!
 
그래서 누구든 자신의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면 지금 현재의 삶을 돌아 보고 그 가치를 따져 봐야 합니다. "살 가치가 없으니 죽겠다"가 아니라, "생명이 아까우니 현재의 가치를 높여 봐야겠다"가 돼야 한다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남은 사람들과 땅의 상황에 끼칠 어떤 효과를 염두에 두고 자살합니다.
또, 자신의 죽음으로써 타인에게 어떤 깊은 인상을 주거나 모종의 변동을 일으키려는 발상을 갖습니다.

그러나 참 사랑-아가페(!)-이 없다면..내 몸을 불사르게 내 준대도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허무할 뿐입니다. 사랑 없는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니까요.

자살이라는 거..모든 기회와 가치를 스스로 포기하고 앞서 끊는 것입니다. 
마치 까마득히 높은 절벽과 산등성이를 타고 올라 정상을 정복하려던 의지를 지녔던 사람이 갑자기 도중에 그만 두고 자신의 자일(seil)을 끊어 버리는 것과 다름 아닙니다.

세상 살기가 어렵긴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아기는 따스한 엄마 뱃속에 있다가 밝은 빛 아래 태어나자마자 눈쌀을 찌푸리며 "응아~!" 하고 웁니다. 바깥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자라나야 하는 거센 도전의 시작이고..견디고 이기며 살아 나가야 하는 고통의 연속입니다.
누구나 그렇게 태어납니다. 그리고 자라납니다.

세상의 삶은 누구에게나 단 한 번만 주어집니다. 누구도 두 번 살 수 있는 기회가 없습니다. 100 살까지 살고 다시 한 번 더 살 수가 없지요.
그리고 성경은 어디에도 '환생'이나 '윤회' 따위를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날 기회 같은 것은 전혀 없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한 번 주어진 이 삶, 소중한 기회를 잘 활용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한 영혼은 정말 소중합니다. 주님은 잃어진 양 한 마리를 찾으러 자기 목숨을 걸고 나서는 선한 목자로 자신을 비유하셨습니다.  

놀랍게도..크리스천은 옛 삶과 새 삶-두 번 째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과거와는 달리 새롭게 사는 삶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주님 안에서 더 많은 기회를 얻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의 삶은 태어나서 살다 죽으면 그뿐입니다. 그 다음은 멸망을 기다리게 됩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여느 사람들처럼 살다가, 문득 어느 시점에서 급변하여-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서-전혀 딴 삶을 살아 갑니다. 세상과 마귀에게 속하여 살던 옛 사람은 죽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살아 가는 새 삶이지요.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뜻 가운데 선택 받아 복음을 받아 들인 사람입니다.
사람은 예수 크리스토를 세상에 보내 주시고 죽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무한하고 값없는 사랑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오픈돼 있으나 인간 편에서 받아 들여야만 합니다.  

그래서 흔히 크리스천은 "둘째 기회(a second chance)의 사람들"이라고 자임합니다.
또는 "덤으로 사는 삶"이라고도 말하지요. 죄값으로 이미 오래 전 마땅히 죽었어야 할 사람들이 예수 크리스토님 안에서 하나님께 새 생명을 받아 새롭게 살아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은 세상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이며 다르게 살아 가는 존재입니다.


최근 한 전직 대통령이 자살을 했습니다. 한국 사상 전무한 일이지요.
그로서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나, 스스로 모든 기회와 가치를 포기하고 끊어 버린 것입니다. 책임을 포함해서.
그러나 순교의 처경이 아니라면, 우리의 책임이 아무리 무거워도 나의 생명의 가치와는 비교가 안 됩니다. 목숨을 포기하는 것 자체가 책임을 무겁게 깨달음과는 거리가 멉니다.

선진 서구 사회에 나날이 자살과 안락사가 늘듯, 한국 사회에서도 어느 덧 다반사가 돼 버린 자살은 이젠 심지어 '크리스천'을 자처하는 일부 교인들 가운데도 그다지 드물지 않은 '병리 현상'입니다.

누군들 죽고 싶은 생각을 단 한 번이라도 안 해 본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래선지 "내 몫까지 살아 주~" 하며 앞서 어디론가(?) 가겠다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남이 내 대신 "죽어 주기를" 행여 기대하는 사람도 없지 않습니다. 

그런데..우리, 삶의 가치를 솔직하게 기본적으로 한 번 따져 봅시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씨를 난자 속으로 받아 들여 태아를 배면, 무려 10개월이라는 긴 기간 동안 애써서 뱃속에서 탯줄을 통하여 최상의 영양을 공급하여 사지백체와 오장육부가 조성되고 길러서는, 이윽고 때가 되면 말글로는 이루 표현 못 할 극도의 진통 과정 속에서 아기를 낳아 세상의 빛을 보게 합니다.
어린아기가 이처럼 태생하고 출생하고 자라나는 과정은 모두 창조주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솜씨로 태초에 한 법칙으로 이뤄 놓으신 것이지요 . 

제대로 된 정상적인 가정이라면, 일가 친척까지 모두들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노래하고 춤추며 넘치는 기쁨으로 반겨 주고, 부모는 그 날부터 온갖 정성을 다하여 밤낮 먹여 주고 길러 주고 안아 주고 입혀 주고 잠 재워 주고 배변을 시키는 데다 부모가 아기 앞에서 재롱(?)을 떨고 요리 까꿍 조리 까꿍 얼러 주면서까지 기쁘게, 웃게 해 주고 키와 슬기가 점점점점 커 가도록 오만 정성을 쏟아 가며 돌봐 줍니다.
아기도 부모의 도움과 스스로의 힘으로 옹알이를 하다 말글도 배우고, 어렵고 힘든 세상에 적응할 모든 삶의 기술을 터득하게 됩니다. 한 해 한 해 자랄 적마다 '생일축하'란 것을 꼬박꼬박 지켜주기도 합니다. 꼬마가 자라고 살아 가는 게 대견하지요.

그러니..이 아기는 정말 소중한 목숨입니다. 누구나 정말 소중한 영혼입니다.

사람이라고 해서 누구나 다 완벽하고 괜찮은 모습으로 태어나는 건 아니며, 집안과 사람에 따라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정상조건에서 좀 모자라거나 아쉽게 어렵사리 태어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누구나 한 번 삶을 살 가치는 있는 법입니다.

요전 뉴스에 보니, 미국의 한 엄마는 태냇아기가 선천성 뇌불구인 탓에 "낙태를 하라"는 의사의 지속적인 강요를 받았지만, 굴하지 않고 끝내 아기를 낳아 약 93일간 함께 살다가 최근 아기가 숨졌다는 뉴스를 봤습니다. 이 엄마는 "살아 온 나날 동안 이 93일이 가장 행복했다"고 고백했답니다! 엄마의 마음은 그런 것입니다.   

물론 그런 배후엔 하나님이 우리의 목숨을 이어 주시는 배려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지요. 그래서 욥서(=욥기)에서는 말합니다: "사람의 생명을 파멸에 빠지지 않게 지켜 주시고, 사람의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 내어 주십니다"(욥기 33:18).
  
그런데 하나님과 부모로부터 받은 주어진 삶을 책임성 있게 충분히 다 채우지 못하고 미리 앞서 목숨을 끊는 자살을 해 버린다면, 자녀가 잘 자라고 충실히 살아 주길 기대하면서 알뜰살뜰히 길러 온 부모의 심정에 대못을 박는, 영 어긋나는 일이 아닐까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창조와 생명의 원칙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좀 더 오래 살지 못해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아둥바둥 온갖 건강식품과 영양제와 보약을 먹어 가며, 운동도 하면서 피땀 나는 노력을 다하는데, 미리 가 버린다는 건 죽음도 남보다 앞서 간다는 선진 정신에선가요? 그런 조기 미완성 생애는 지금까지 뭘 해 왔든-잘 했든 못 했든-자신에게나 남에게나 책임 이행을 하지 못한 삶일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모든 생명의 근원은 곧 하나님이시라고 증언합니다. 무신론자, 타 종교인이야 믿든 말든 그렇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은 모든 생명들이 양껏 힘껏 자유롭게 살도록 자연법칙을 조성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천상계와 지상의 수많은 생명체들 가운데 인간이 어떤 존재입니까?
독보적 존재이지요! 하나님은 태초에 우주만물을 창조하시면서 유독 사람을 그 분의 형상을 따라, 그 분의 모양대로 지으셨습니다. 가장 고귀하고 존귀한 존재라는 것이지요.
천상천하에 오직 인간만, 영/혼/육 3차원의 존재로 살아 갑니다.
천사도 아니고 오직 인간-그 가운데서도 거듭난 사람들과 그 집단인 오가는 세대의 교회에 오순절날 성령님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유물론자, 진화론자나 썩어질 뉴에이지 사상자들은 인간을 동물과 같은 존재로, 아니 동물보호론자들은 인간을 오히려 동물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또한 이처럼 고귀한 형상을 지닌 자신을 스스로 천대하여 금수와 버러지 같이, 동물 같이 살아 가는 인생들도 있습니다. 동물마저도 원앙처럼 암/수를 가리고 짝을 지어 평생 반려자로 살아 가는 기특한 동물이 있는가 하면, 인간이라면서 남/녀 성별도 제대로 못 가리는, 되레 동물 보다 못한 인간들이 과거에도 현대에도 존재합니다.

그나마도 그들은 나름대로 살아 가면서 기회를 엿보지만, 자살자는 뭡니까?
스스로 미리미리 목숨을 끊는 사람들은 뭐냐는 말입니다.
이제 더는 세상의 불행을 맛보지 않게 된 행복한 도피자인가요?
아니면 더 큰 불행을 앞서 자초하는 인생 조기자퇴생들인가요?
스스로 죽거나 남에 의해 죽거나 죽는 사람은 그 걸로 끝입니다. 그 이상의 기회는 없는 법입니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무서운 심판 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살아 있을 동안 예수님을 믿고 그 분을 굳게 붙들고 그 분 오시기까지 견뎌야 합니다. 혹 불가피하게 병사 등으로 미리 가더라도 그 분이 다시 오실 때 확실하게 부름 받아 공중으로 들리움(휴거)을 받도록, 미리 준비해 놓고 가야 합니다! 그것이 최상의 기쁨입니다.

성도는 죽음 또는 휴거를 통해 세상을 떠날 때, 구원만 달랑 받아 가선 안 됩니다. 빛나는 상급과 면류관도 받아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것을 약속해 놓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사람들은 하늘의 빛난 별들처럼 주님이 높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자살자는 불행하며..특히 예수님을 안 믿고 미리 간 사람들은 제 2의 삶의 기회, 세컨 챈스도 스스로 놓치는 이중 불행입니다.

최근까지 댓글사회에 유행해 온 아주 나쁜 말이 하나 있습니다.
"왜 사니? 왜 살아?"라는 말. 
"무슨 목적으로 왜 살고 있나?"라는 진지한 인생철학적 질문이 아니라, "좀 죽지 왜 살고 있냐?"라고 저주하다시피 내뱉는 살인적 조소 겸 비아냥이지요.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기 자녀에게까지 그런 말을 내뱉습니다.
남은 죽고 자기 혼자 더 살겠다는, 선의의 경쟁 아닌 악의의 경쟁 정신인가요. 그런 말을 내뱉는 사람은 정말 자신이 왜 살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돌이켜 봐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살기 위해 아둥바둥 노력하면 살 만큼 살게 돼 있습니다.
거의 죽는 자리에서도 의지로 되살아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실제로 심장이 멎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사람들의 얘기를 우리는 종종 듣지 않습니까.

악한 사람이든 착한 사람이든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왕 한 번 뿐인 이생의 삶을 살아가려면 의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그 분과 함께 하늘에 앉혀진 바 됩니다.
땅에서 미리 하늘 영광을 맛 본다는 말입니다.

세상이 아닌 하늘에 속한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 가되 이 땅의 임자라거나 땅에 속해서가 아니라 나그네로 살아 갑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하늘시민으로서의 예비훈련을 거치는 곳입니다.
이 곳에서 주어진 삶을 최대한 최선껏 영위하며, 끝까지 승리하며 살아가야 제대로 된 훈련입니다. 구원만 아니라 상급도 받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엉성한 모래성이 아닌 단단한 바위 위의 탄탄한 집을 지어야 합니다.

살아가는 동안 다른 세상 사람들처럼 우리도 슬프고 어려운 일을 겪습니다.
우리라고 그런 것들로부터 면역되거나 예외는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재 대신 화관을, 슬픔 대신 기쁨을, 베옷 대신 찬양의 옷을 입혀 주십니다!
No matter what..주님 보좌 앞엔 넘치는 기쁨이, 그 오른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죽기 전 내가 기꺼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다 하는 게 좋습니다. 단, 욕심에서가 아니라면. 몸과 함께 기회를 앞당겨 죽이는 자살은 우리의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선택'은 아닙니다.

시인은 외칩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주/야웨님의 일을 선포하리!" (시편 118:17)

할렐루야~!

티엘티 독자는 모두들
주님 오시기까지 오래오래 살면서 
주/야웨님의 일을 선포하고 찬양하고 감사하며
진리를 선포하면서
구원 받고 상급 받는 훈련을 잘 치르시길~!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