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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시편

[시 1] 행복한 사람들, 불행한 사람들



 


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꾀를 따라 걷지도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도 않고,
깔보는 무리의 자리에 앉지도 않는 사람!

그의 기쁨, 주님의 법 안에 있어
낮과 밤으로 그 분의 법을 묵상하네

또 그는 마치 시냇가에 심긴
한 그루 나무 같아
철 따라 열매 맺고
그 잎새들이 시들지 않으며
그가 하는 무엇이든 잘 되리

악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네
한낱 바람에 까불리는
왕겨들 같아라!

그러므로 악인들이 심판 때에
또는
죄인들이 의인의 회중 속에 서 있지 못하리

주/야웨님은 의인들의 길을 아시네
하지만 악인들의 길은 쇠망하리

(구약/시편 제1편. 사역)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선호도와는 상관 없이 어폐가 있는 노래입니다. 보편론적이기 때문에. 인류는 본래 누구나 사랑 받기 위해선커녕 진노와 저주 아래 태어납니다. 어떤 사랑이냐가 문제이기도 하고.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면 비로소 운명이 달라지죠. 그래서 갈림길-운명의 길이 두 갈래-입니다. 사랑 받고 안 받고는 거듭남의 갈랫길에서 엇갈립니다. 예수님을 믿어 거듭나면 참 사랑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사랑을 못 받고. 
좀 썰렁해 뵐지 몰라도..성경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예수님을 믿어야 정녕 사랑받는 길이 열립니다!

마찬가지로, 인류는 본래 행복한 존재로, 또는 복을 받으려고 빚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지으신 최초의 인류를 넘치게 복 주셨고 만물도 인간을 위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믿든 말든 온 우주도 사람들이 사는 작은 지구촌을 중심으로 만들어졌고 모든 별들도 지구촌 없이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과학이나 뉴에이지가 어떻게 주장할지 몰라도 성경은 그렇게 밝혀 줍니다(구약 창세기 1장 참조).
누가 뭐래도..인간의 필수 생존 수단인 공기와 물..그리고 넓고 푸른 자연을 갖춘 진짜 녹색 별은 온 우주에 지구 하나 뿐입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하나님은 인류와 지구촌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러므로 성삼위 하나님께서 인류를 복 주시지 않았다는 주장은 말도 안 되는 말입니다. 

인류는 누구나 '영성'과 '종교성'을 지닌다는 말처럼, 본래가 영인 인간은 하나님의 복을 갈구하는 존재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복 없이는 못 사는 존재입니다. 심지어 동식물조차도 하나님의 복을 바라고 삽니다. 그러나 태초에 에덴 동산에서 간교하게 하나님과 인류 사이를 이간질시켜 죄를 끌어들여 아담/하와와 지구촌의 역사를 영영 바꿔놔 버린 마귀는 인류가 하나님의 복 없이도 살 수 있을 것처럼 속이는 데 현저히 기여해 왔지요.

과연, 인류가 하나님의 복 없이도 살 수 있을까요?
인류는 심지어 죄인들조차도 날마다 하나님의 복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복 없이는 단 하루 아니 일 초도 살 수 없는 게 인간이고 동식물입니다.

지금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와 이 산소..하나님의 복이 아닌가요?
주룩주룩 내리는 단비..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던가요?
날마다 내려 쬐는 밝고 따스한 태양빛/햇볕! 이거 복이 아니라면 저주인가요?
첨벙 뛰어들어 시원하게 헤엄칠 수 있는 바닷물..하나님이 주신 것 아닌가요?

남녀가 서로 사랑하다 짝을 이뤄 자녀를 낳고 번성하며 삽니다 - 태초 이래의 복입니다.
노동을 성실히 하면, 벌어 먹고 살아 가게 돼 있습니다 - 태초의 복입니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며 살 터전을 넓혀 갑니다-태초의 복입니다.  
강과 바다 물고기, 하늘의 새와 들짐승 모든 것을 인간이 다스립니다-태초의 복이지요.

누가 이런 것을 복 아닌 저주라고 할 수 있겠나요? 마귀와 그 졸개가 아닌 이상.
그러나 마귀는 최초 인류를 꾀어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인으로 만들어 이 복의 다량을 앗아 갔습니다. 복이 있어야 할 곳에 저주가 들어섭니다.

그러다 보니 남녀가 사랑하긴 사랑하는데 미워하고 헤어지기가 일쑤요, 아기를 배어도 불편하다며 태어나기도 전 미리 죽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일을 암만 해도 제 몫을 못 받는 때가 왔습니다. 온 세상에 빈민들, 실직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납니다. 건전한 노동보다는 불건전한 욕구풀기, 눈요기 중심의 향락산업이 승세하는, 향방이 잘못 잡힌 부의 편중으로 빈부차가 날로 늘어 갑니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되 청지기로서 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남용하니까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기가 일쑤입니다. 가뭄과 기근, 산불과 홍수, 황폐화가 잦습니다. 지구촌이 이기주의/상업주의가 편만하니 고래들이 떼거리로 죽기도 합니다. 꿀벌떼가 사라져 갑니다. 먹이사슬이 끊어져 갑니다. 그런데 지구촌을 "회복하자"고 목청을 높이는 사람들은 주로 영이 죽은 뉴에이저들입니다.

온 누리의 한탄과 신음소리가 하늘에 사무칩니다. 
죄와 악으로 날로 팽만해 가다 못해 포화 상태인 지구촌은..이제 하나님의 저주 아래 두려운 심판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햇빛/물/공기/동식물 등 인류 생존에 필수적, 기본적인 자연적인 은총을 악인이나 착한 사람들이나 함께 누리고 있음은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러나 개인이 태초의 복을 회복할 방도가 있습니다.
영 속에 예수 크리스토를 맞아 들이면 됩니다!
그것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입니다.

본문이 길다 보니 오늘 메시지도 꽤 길어집니다만..끝까지 참을 성 있게 읽어 주시길. 

성경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의인"이라 불려지는 사람들입니다.
"행복한 사람들"로 불린 존재입니다.
아울러..믿음의 사람들이지요.

시편 제1편은 그런 사람들을, 반대로 불행한 사람들과 대비시킵니다. 

첫째로, 이 시인은 불행한 사람들과 정말 행복한 사람들의 됨됨이 또는 특징을 극명히 대조합니다. 그런데 우선 행복한 사람들이 하지 않는 일들, 곧 불행한 사람들이 현재 하고 있는 행위를 통해 부정(否定)형 역강조법을 씁니다. 그런 연후, 행복한 사람들이 하는 긍정적인 일을 극적으로 강조합니다.

행복하다 또는 불행하다는..결코 세상적 표준으로 가려지질 않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흔히 행복한 사람들, 복된 사람들, 의인들은 곧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누리는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반면 악인들은 신약에서는 복음을 거부하는 비신자들을 가리키지요. 

불행한 사람들의 첫째 가는 특징은 악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악관(惡觀: 악에 대한 관점)과 인간의 악관과는 하늘땅 사이 만큼이나 서로 다릅니다. 세상은 적당히..심지어 오히려 좋게 아름답게 봐 주는 것들도 하나님 앞에선 사악할 뿐입니다. 반대로 세상이 업신여기는 것들이 하나님께는 불쌍히, 곱게 보일 수 있습니다.

불행한 사람들의 특징은..

남을 해코지 하는 악인들의 간특한 꾀를 요리조리 따라 걷습니다.  
죄인들의 길에 섭니다.
남을 깔보기 일쑤인 시건방진 사람들의 자리에 가서 앉습니다.

시인은 여기서 인간의 대표적인 세 행동-걷기/서기/앉기를 나열했습니다.
불행한 사람들은 세상 사회생활 속에서 이 세 가지를 골고루 한다는 뜻이겠지요.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느라..

똑 같은 발상, 비스름한 생각을 하며 함께 따라 걷기,
같은 길에 서 있기,
그리고 같은 자리에 앉기..

친구 따라 강남 간다던가요..가재는 게 편, 솔개는 새 편이랍니다. 백로와 까마귀 떼는 각각 끼리끼리 모인답니다. 더불어 함께 하고 어울리는 이런 '유유상종'형 동지의식이 그들에겐 모종의 만족과 위로감, 안심을 안겨 줍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소위 '왕따감'을 느끼게 되기 마련이죠. 하지만 어울리다 보면 이른 바 '동류집단압박감'(peer pressure)도 맛보게 되는데 그걸 극복하려고 치열한 경쟁도 벌입니다.
[ 물론 의인들도 천국행 달리기에 힘쓴다는 또 다른 의미에선 거룩하고 선한 경쟁자들이죠만. "네냐? 내냐?"라는 '찬송가' 수준은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불행한 사람들, 악인들끼리는 한 동안 헤헤거리며 아울리다가도 하루 한 순간이 멀다 하고 치고 박고 떠 받고 싸우다 죽이기 마련이지요.

반면..행복한 사람들은 이 세 가지를 모두 하지 않습니다.
악인/죄인/조소자들과 함께 행동-걷기/서기/앉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근본적으로 그들과는 서로 어울리지가 않습니다.

같은 지구촌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 한 가지로는 기본적인 동료감을 느낄지 몰라도 영이 서로 다릅니다. 늘 하는 말이지만..영이 죽은 사람들-예수님을 믿지 않아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그들이 다수로 판 치는 이 세상은 시체공시소나 거의 다름 없습니다.그러기에 온 인류가 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둥, 한 가족이라는 둥의 말은 보편론 풍 또는 뉴에이저 풍이지 크리스천 풍의 말은 아닙니다.

온 인류가 한 지구 땅덩어리에 살지만, 행복한 무리와 불행한 무리, 악인들과 의인들의, 뚜렷한 두 그룹이 있기 때문이죠. 어느 한 쪽도 아니고 그 가운데 끼어 어정쩡하게 중간계 노릇 하는 사람들은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 '중간족'은 미안하지만 확률로 볼 때 악인들 쪽에 더 가깝습니다.

우리는 소속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세상 쪽인지 하늘 쪽인지
악인 쪽인지, 의인 쪽인지
불행한 무리 쪽인지, 행복한 무리 쪽인지. 

그러기 위해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돼야 합니다. 자신을 성별해야 합니다.
사특한 사람들과 한 길을 걷지 말아야 하고, 함께 서지 말아야 하고, 함께 앉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그들과 함께 생활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지요. 그러려면 세상을 벗어나야 할 터입니다.
행복하려면 소금과 빛 속에서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세상을 살더라도 주변 어둠으로부터 자신을 밝게 지키고 어둠을 부끄럽게 하며, 소금 맛을 짜디짜게 내면서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행복하려면..아니 행복한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멍에를 함께 메지 말아야 합니다. 크리스토와 벨리알, 의와 불법,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서로 조화/일치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들로부터 구별되어 있거라!
깨끗하지 않은 것들은 만지지 마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맞아들여
나는 너희 아버지,
너희는 내 자녀가 되리
(코린토B서/고후 6:17 )

참 행복은 심리적 만족감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늘에 속하고 의인의 무리에 속하고 참 행복한 무리에 속한 영적 만족감입니다. 

참 행복, 참 만족은 어디서 어떻게 올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 묵상하기에서 옵니다!
행복한 사람들은 기쁨과 삶의 바탕을 주님의 법 안에다 둡니다.
존재의 의미를 성경 말씀에서 찾습니다.
밤낮 주님의 말씀을 먹고 되새김질 하여 소화시켜 내 것으로 삼습니다.
그것이 행복한 사람들의 제일 가는 긍정적 특징입니다. 

우리의 기쁨의 뿌리와 바탕은 주님의 법, 말씀 속이어야 합니다!
참 기쁨은 내 법, 내 뜻에 있지 않습니다-그건 착각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 속에 거할 때..그것은 참 기쁨이고 삶의 참 바탕입니다. 
주님과 그 말씀을 기뻐함이 곧 나의 힘입니다!

사람들은 기쁨을 잃을-기쁨의 씨와 뿌리가 말라 버릴-때, 삶의 의미성을 잃고 죽어 갑니다. 죽음을 느낄 뿐더러 죽음을 앞당기기도 합니다.
왜 사람들이 자살합니까? 왜 동반자살을 합니까? 왜 자살욕구를 느낍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기쁨이 그 속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줄 수 있는 참 기쁨..그것이 결핍돼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결핍증은 곧 기쁨결핍증을 가져 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절망의 자리에서, 죽어가던 병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고 소생합니다! 기쁨을 되찾고 삶의 의미를 되찾습니다! 존재의 의미를 새롭게 거머쥔 그들은 되살아납니다! 병도 낫습니다. 기쁨이 되살아나니 살이 오르고 뼈에 힘이 갑니다. 병상을 박차고 일어 납니다. 걷기도 하며 뛰기도 하고 춤 추기도 합니다.

주님은 말씀을 보내시어 그들을 고치셔서 위경에서 건지십니다(시편 107:20).
이 진리를 과거의 것, 구약의 복으로 돌려 안 믿거나 못 믿는 교인들은 또 다른 의미의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자..이 기쁨을 주님 오실 때까지 날마다 계속 누리려면, 그냥 성경을 읽기만 해선 안 되겠지요. 수시로 읽고 듣고 음미하고 되새긴 말씀을 시인/고백/선언할 뿐더러 매일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할 터입니다. 그것은 믿음을 북돋아 하나님을 더 의존/신뢰하게 해 주고 성경의 원저자이신 성령님을 힘 입어 권능적 생활을 하게 해 줍니다.  

그 다음으로..시인은 행복한 사람들의, 행복한 행동의, 행복한 결과를 말합니다.
그게 뭘까요?

시냇가에 심긴 나무와 같습니다.
제 철에 열매를 맺습니다.
잎새가 시들지 않습니다. 
하는 일이 다 잘 됩니다.

제가 수시로 말하지만..시1편은 존재론적/주체 중심의 행복론입니다.
이 시인이 선언하는 '에쉐르'(행복함)는 행복한 주체들, 존재 자체가 행복한 사람들, 행복하게 된 사람들, 행복을 누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겐 객체적 복도 필요하며 따르게 됩니다. 물론 그것을 믿고 인식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복이 절로 "굴러 떨어진다"면..시 1:2은 불필요한 말이 되고 맙니다.

오늘날 언필칭 반기복론자, 안티기복주의자로서..객체적 복을 한사코 부정/거부하고 주체적/존재론적 복관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불균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만..그것은 마귀의 공교로운 꾀에 빠진 상태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겐 복이 마치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얘기일 터입니다. 

오래 전 한국 MBC 라디오방송의 최장수 단회 입체낭독 드라마-'전설 따라 삼천리'가 있었지요(훗날 KBS-TV의 '전설의 고향'으로 흐름이 이어졌습니다만). 텔레비전이 덜 보급된 시절, 들을 때 마다 귀가 솔깃해지던..단연코 애청 대상 1호였습니다. 유기현 해설가의 구수한 '할아버지 목소리'의 해설 낭독이 일품이었지요. 전설을 다뤘기에 내용은 거의 황당했지만.

그 입체낭독극 전후에 곁들여진 유명한 배경음악은 '앙 바토'(En Bateau. 조각배 위에서)입니다. 프랑스 인상파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의 '소곡모음'(쁘띠 수이뜨) 제1번곡으로, 본래는 두 연주자를 위한 피아노곡인데, 바이올리니스트/작곡가 프리츠 크라이슬러가 바이올린 곡으로 편곡한 것이 더 유명해져 버렸지요. 테마에 걸맞게 아주 환상적입니다. 

그 청취자 세대는..이 음악을 '전설 따라 삼천리' 주제음악으로만 알지, 음악작품 자체로는 거의 정체를 모릅니다. 입체낭독극 타이틀 뮤짘으로만 귀에 못이 박히다 보니 언제 어디서 그 음악이 흘러나오든 드뷔시의 '조각배'로 순수히 듣기보다 '전설 따라 삼천리'로 듣게 되곤 합니다. 그 드라마가 당대 한국인들의 귀를 버린(?) 셈이랄까요.

마치 그처럼, 한국 교인들 다수의 귀는 '기복주의' 개념과 비판으로 물들다 보니 이젠 면역이 되어 '복'이라는 말만 나와도 무조건 기복주의 '배경음악'으로 들리나 봅니다. 하나님의 복이 정말 뭔지 개념도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모조리 '기복주의'로 싸잡아 붙이기 일쑤니까요.   
 
존재론적/주체적 행복만 강조하고 객체적 복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제가 늘 묻는 말이 있지요:
그대들은 복을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현재 마시는 공기와 물, 버는 돈은 복이 아니고 저주이던가요? 현재 하나님의 복을 누리고 있지 않나요? 하나님이 태초에 인류를 복 주신 것은 복인가요, 저주인가요?
기복, 기복, 기복 하도 떠들다 보니 마치 하나님의 복이 필요악인 양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갑니다.

그러나 시1편의 시인의 논리는 명약관화합니다:
존재론적/주체적 행복은 대상적 복, 객체적 복을 동반한다고요.
시인은 1:1-2로 끝내지 않습니다! 1:3로 계속합니다! 제1,2절과 3절은 상관관계, 인과관계로 서로 얽혀있고..3절은 당연귀결로 찾아 듭니다. 그러나 3절은 언제나 2절이 전제돼야 합니다.
 
그런데 기복사상에 전염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고 기를 쓰다 보니, 하나님의 복을 은연 중 끔찍히 부정하고 거부하는 많은 교인들은..3절을 믿지 않다 보니까 자연히 3절을 위한 2절은 하지 않게 되지요.
 
시냇가에 심긴 나무처럼 행복한 사람들이 제 철에 열매 맺기, 늘 푸른 잎사귀, 모든 일이 잘 되기..는 단순히 말씀 읽기로만 오지 않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행복과 복은 말씀 읽기와 듣기, 고백/선언하기, 믿음으로 실천하기를 통해 오는 법입니다. 행복한 사람들은 주님의 은총 속에서 행복하기 위해 스스로 할 일을 알고 동시에 하는 사람들입니다!

악한 사람들은 어떨까요? 그들은 시냇가에 탄탄히 심긴 나무 같지가 않습니다.
시인도, 불행한 사람들, 악한 사람들이 당장/곧장 잘 못 되리라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태초에 하나님의 선언하신 복을 일부는 받기에 잘 되고 잘 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 마음은 참 평화가 없어 자연히 이리저리 헤매며 "굴러 다니게" 됩니다. "돌고 도는 세상살이"로 치부하게 됩니다.
 
그런 모습을 시인은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악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네
한갓 바람에 까불리는
왕겨들 같아라!

그런 악인들, 불행한 사람들에게 보장되는 참 미래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악인들이 심판 때에,
또는 죄인들이 의인의 회중 속에 서 있지 못하리


하지만 하나님은 의인들의 길을 아시고 일일이 챙겨 보장해 주십니다.


주/야웨님은 의인들의 길을 아시네
하지만 악인들의 길은 쇠망하리

우리는 그러나 악인들의 쇠망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영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우리의 복을 나눠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적입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우리가 먼저 진정 행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복을 누려야 합니다.
그것이 시1편에 나타난 주님의 뜻입니다.

바라건대..

티엘티 독자들은 모두들
행복한 사람들로서
주님의 말씀 속에 기쁨을 두고
밤낮 묵상하여
약속된 넘친 복을 누리기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