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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시편

[시 90:10,12] 기회선용의 슬기

우리 삶의 길이는 일흔, 힘이 남으면 여든이나
그 자랑이라야 수고와 슬픔 뿐,
이내 가 버리니 우리는 날아갑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수의 셈을 가르치소서, 슬기의 마음을 얻도록.
(시편 90:10,12 사역) 


금주에 나눌 메시지 주제는 약간 길고 어렵습니다.
생각을 깊이 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끝까지 읽으시는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슬기가 함께 할 것입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엘 엘리온)!
그분은 절대자시며 우주지존의 통치자로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그분으로부터 받은 기회입니다.

기회는 태초-창조 때부터 시공간의 틀 안에서 주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 두신 최초 인류 아담과 이브는 기회가 주어진 자유인들이었지요. 그러나 그 기회는, 조건과 언약이라는 틀 안에서만 참 자유를 누립니다. 즉 하나님이 제시하신 선의의 약속을 무시하거나 어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회를 누릴 자격은 자유의지자-즉 free moral agent로서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기회의 참 의미가 없어지고 맙니다.
 
아담/이브보다 앞서 기회가 주어진 존재들이 있습니다.
바로 천사들이지요.
성삼위 하나님은 우주 창조 훨씬 이전, 아득한 태곳 적 기왕에 천계를 창조하시고 천군천사들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 기회를 맨 먼저 짓밟은 영물(靈物)이 대천사(=천사장) 헬렐이었지요. 하나님은 헬렐을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로 지어 주셨건만 괘씸하게도 창조주를 배신하고 반역해 천상의 쿠데타를 시도한 것입니다. 이같은 사실을 다음 성구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이사야 14:12, 에제키엘=에스겔 28:11-19, 유다서 6, 요한계시록 12:9)

요한계시록 12:4에 따르면, 헬렐을 따른 천사가 3분의 1로 추정됩니다. 헬렐은 '빛나르미'(라틴어 '루키페르'), '아침의 아들' 등의 화려한 이름들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후 타락하여 미카엘의 하늘군대에 내리쫓겨 둘째 하늘로 밀려났습니다(요계 12:7,8). 그 후 그는 반역자 '싸탄'(=반역자/도전자) 또는 '마귀', '유혹자', '세상 신'등으로 불리고 있지요.
한 번 주어진 기회를 짓밟은 타락한 천사들은 밑없는구덩이(무저갱)와 지옥에서 영벌을 받거나 앞으로 받게 됩니다(페트로 2:4, 유다 6, 요계 20:1-3,14). 지금도 이들 다수가 싸탄의 종으로서 악과 어둠의 뿌리들로 암약하고 있지요. 

각설하고..개인이 세상에 태어남으로써 하나님께 부여 받는 인생-한 평생은 사람마다 공평하게 한 번씩만 주어진 중대한 기회입니다. 물론 한 번의 큰 기회 속엔..'칠전팔기'란 말처럼 잦은 실패 후 성공 같은 작은 기회들이 있긴 합니다만, 전체 삶의 기회는 하나 뿐이지요.

삶의 기회란 것은..마치 극배우들에게 주어진 무대연기와도 같습니다. 무대와 다른 점이 있다면, 사전 연기연습이 따로 없고 나자마자 곧장 실기로 들어 간다는 것, 그리고 전체 연기 기회가 한 번 뿐이라는 것이지요. 다만 살아가고 자라면서 고치고 바꿀 훈련 기회는 많습니다. 인생의 이런 특징에 관해 슐로모(솔로몬)의 실험적(?) 인생 체험담, 간증이랄 수 있는 전도서나 잠언 등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일독해 보시길 권합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늘 강압적인 '절대주권자'이시기보다 그 분의 주권으로 기회를 주시되, 인간이 자기의지로 선용하게 하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기회를 바로 선.용.(善.用.)할 수 있는 참된 슬기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으로부터 오지요.

하나님은 범죄한 슐로모와 레호보암(=르호보암)으로부터 이스라엘(10 지족)을 갈라 북 이스라엘 왕 야로브암(=여로보암)에게 넘겨 주신 사실은 주권적 행동이었지만, 그 기회를 선용하는 것은 야로브암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사람의 자유의지의 균형 및 조화를 우리는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절대적 최고 통치자시라는 진리와 신학적인 '절대주권주의'를 혼동해선 안됩니다. 만약 '절대주권주의'가 진리라면, 야로브암을 하나님이 강제로라도 회개시키고 좋은 사람으로 만드셔서라도 계속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하셨어야 합니다. 그것이 절대주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절대주권'으로 강제하시지 않고, 행동의 경중(輕重)을 그분의 '저울'로 달아 보십니다. (여기 '저울'이라는 것은 신화적 스토리가 아니라 상징입니다.) 저울추에 비해 너무나도 모자라는 삶일 때 하나님은 타인에게 기회를 넘기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몰라도 크리스천들은 저울추에 맞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주어진 기회에 부응하는 방법입니다.

독자님은 '메네 메네 테켈..'의 일화를 들어 보신 일이 있나요..?(구약 다니엘 5:1-31 참조)

고대 바빌론 제국(바빌로니아)과 그 마지막 임금 벨샤자르의 멸망에 관한 스토리이지요. 벨샤자르는 선대 왕 네부칻네자르의 영웅적 전과(戰果) 덕분에 혁혁한 영광을 누리더니..신하/왕족/귀족들 1,000명을 초청해 거나하고 뻑적지근한 잔치를 벌입니다.
 
지금 메디아-페르시아 군대가 바빌론 성벽 주변의 강물 아래 지하도를 통해 비밀 침공하여 나라가 망해 가는 줄도 새카맣게 모른 채로! 그런데도 수많은 아내들과 신하들에게 어주(御酒)를 마구 퍼부어 주던 벨샤자르는 취흥이 도도해지다 못해, 네부칻네자르가 옛 예루샬렘 성전에서 앗아 와 왕궁 창고 안에 보관해 둔 황금 그릇들을 꺼내어 먹고 마십니다.

이쯤이면 난장판이랄까요. "인생이란 무엇인가..마시고 또 마시고.."란 노랫가락처럼 한껏 흥겹고 신나게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 뿐인가요..금/은/구리/쇠/나무/돌로 된 왕궁 안팎의 온갖 신상/우상들을 찬양하며 기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문득 촛대가 놓인 맞은 편, 왕궁 석회 벽에 난데없이 큼직한 손가락들이 나타나 이상한 글자들을 새겨 넣기 시작했습니다. 아닌 밤중 홍두깨란 이런 경우를 가리키나요.
이 광경을 바라 본 왕과 내빈들은 취중에도 놀라 가슴이 서늘~, 간이 콩알 만 해져 다들 온몸을 와들와들 부들부들..후들후들 제각기 떨고들 있었습니다. 특히 벨샤자르 자신은 취기가 싹~ 사라지면서 넓적다리가 녹는 듯 두 무릎이 서로 맞부딪치고 있었습니다. 현대 공포영화 주인공들과 맞먹는 모습들이었지요.

눈을 부릅뜨고 벽을 뚫어져라 바라 보다 술 기운이 완전히 가신 왕은 즉시로 황급히 고함을 지르며 나라 안 현인들과 칼데아 술사들, 점술사들을 불러 들여 누구든지 저 글자를 읽고 해석하는 사람에겐 왕족/장관에 준한 최상급 대우를 해 준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그럴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자, 왕과 내빈들의 얼굴은 잿빛이 돼 버립니다.

이 때 급보를 전해 받고 왕궁에 들어 온 정실, 수석 왕후는 왕에게 옛 현인 다니엘을 부르라고 권합니다. 선대 왕인 네부칻네자르 당대에 활약한, 이스라엘의 신 야웨님의 영감을 지닌 옛 유다 출신 현인/대언자인 은퇴 정치가 벨테샤자르(다니엘)에게 공이 떠 넘겨집니다. 

이래서 드디어 왕궁에 나타난 늙은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이 문제의 비밀 코드를 읽고 해독해 줍니다.

메네 메네 테켈 우파르신..
'메네': 하나님이 이미 왕의 시대를 셈하여 마감하셨고,
'테켈':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무게가 모자라고,
'우파르신'(동사 원형 페레쉬): 그래서 나라를 쪼개어 메디아와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나눠 주게 됐다는 뜻이었지요.
아니나다를까 그날 밤 벨샤자르 왕은 죽음을 당하고 나라는 메디아/페르시아 제국의 다루쉬(다리우스)에게 넘겨지고 맙니다.  
   
우리는 이 사건으로부터 큰 교훈을 받습니다. 단지 당대인들에게만 적용되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벨샤자르는 선왕 네브칻네자르의 유명한 '들짐승 스토리'를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즉 네부칻네자르가 제국의 힘을 믿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행동하다 들짐승의 마음을 받아 소처럼 풀을 뜯으며 들나귀들 사이에서 지내고 나서야 하나님을 알아 봤다는 이야기입니다(다니엘 4:28-37).
이 유명한 역사적 사실을 다니엘은 물론 벨샤자르 왕실 측근들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터입니다.

다니엘은 그런 왕에게 말합니다.   

    "오, 그러나 그분(네부칻네자르)의 아드님이신 벨샤자르님! 왕께선 이 모든 일을 아시고도 마음을 낮추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하늘의 대 주재님보다 높이시어 그분의 성전 그릇들을 왕 앞에 갖다가 왕과 귀빈들과 왕후들과 후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셨습니다. 또한 왕께서는 은/금/구리/쇠/나무/돌로 만든 신상들-볼 수도 들을 수도, 아는 것도 없는 신들-은 기리면서도, 정작 왕의 생명줄과 왕의 모든 길을 손에 쥐고 계신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않으셨군요!" (다니엘 5:22-23)


이 얼마나 두려운 말입니까!? 
벨샤자르는 [ 프랑스 동화 '미녀와 야수'(La Belle et la Bête) 얘기와도 방불한 ] 야수처럼 지낸 선대 왕 네부칻네자르의 '들짐승 스토리'로부터 충분히 교훈을 받아야 했는데도, 새카맣게 무시하고 잊어먹은 채, 제국의 군주라고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까불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은 진작에 셈하시고 달아 보시고 그의 기회를 마감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계산법 내지 산정법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셈과 저울질을 면제 받을 수 없습니다. 기회가 마감되면, 우리는 목숨을 잃고 떠날 곳으로 떠나고 갈 곳으로 가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하나님은 은혜로우셔서 우리에게 되도록 최장-맥시멈의 기회를 주신다는 사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를 최대한 선용할수록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게 됩니다. 선용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어 놓으신 경계선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고 결과적으로 그분의 영광을 드러냄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귀를 기울여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고 순종함으로써 가능해집니다.

인생의 기회선용이란, 다빋의 경우처럼 주님의 마음에 맞는 행동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질문모범생' 다빋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자주 여쭤 봐야만 합니다(필자의 글, '왕도 헤브론-메시아계보대장정 시리즈 16회 참조). 신약시대/교회시대/성령시대/복음시대/은혜시대인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 말씀과 함께 성령님의 도구인 방언과 은사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여쭙고 알고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 초대왕인 야로브암은 대언자 아히야로부터 옷 열 조각과 예언을 받은 뒤로는 아히야에게 하나님의 뜻을 여쭈러 간 적이 없습니다(위 시리즈 28 참조). '왕들'A(=열왕기상) 제14장을 보면 그런 적이 거의, 또는 단 한 번도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왕들A 14:1,2). 야로브암은 옛 판관(=사사)시대 때 하나님의 성막을 모셨던 거룩한 옛 마을 쉴로에 아히야가 상주 대기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아히야가 늙기까지 이 충직한 대언자를 활용하지 않고 폐기처분 하다시피 한 것입니다.

질문의 사람 다빋에 비해 얼마나 대조적인가요!
이것은 기회선용이 아니지요.  

이것은 야로브암이 즉위 초기부터 금송아지 등 우상숭배를 하게 된 것의 자연적인 결과입니다. 그의 이런 행동에 대해 하나님은 진노하셔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 야로브암은)..나를 네 등 뒤에 버렸구나!" (14:9 끝)

이 말씀은 하나님이 종종 쓰신 표현이지요(에제키엘=에스겔서 23:35).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림과도 같습니다(느헤미야서 9:26, 시50:17). 우리가 하나님을 잊었거나 하나님의 뜻, 말씀을 저버리는 행위를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감히 위대하신 하나님을 '등 뒤'에 버릴 수나 있겠나요? 그러나 야로브암처럼 기회 악용을 하면 우리의 행동은 그런 무서운 결과를 낳게 됩니다.

야로브암은 과거 나라의 노동부 장관에 불과했던 자신에게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소중하고 중대한 기회와 영예를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말씀을 늘 묵상하고 한때 자신의 주인이었던 슐로모의 실족과 범죄, 과오를 마땅히 거울로 삼아 삶과 행동을 성찰하면서 살았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빋 같은 질문모범생은 못 돼도,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조언자/상담역/고문에 진 배 없는 대언자 아히야를 자주 만나고 적극 활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여쭙는 자문을 받았어야 합니다. 만약 그가 그랬다면 이스라엘이 이렇게 쉽게 망헀을 리가 만무합니다. 만약 그랬다면 제마라임 전쟁도 이겼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남왕국의 아비야 왕이 '제마라임' 연설 내용에 걸맞으리만큼 그다지 선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번만인 인생의 기회선용법을 주님 말씀을 통해 터득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바보처럼 살았군요"라는 유행가 가사가 우리의 고백이 되는 불행은 피해야 할 터입니다.

사도 파울은 말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걸어갈지 잘 살펴서 슬기없는 사람처럼 말고 슬기로운 사람들답게 하시오. 세월을 아끼시오! 시대가 악한 탓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어지지 말고 오직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으시오." (에페소 5:15-17)


여기서 파울은 우리의 슬기를 호소하면서 "세월을 아끼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원문 상 "기회를 사라"(buy opportunity)는 말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한 번 주어진 삶의 기회 외에 값을 주고 기회를 새로 더 '살' 수는 없습니다.
아무도 돈을 주고 시간을 사 들이거나 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어진 한 번 삶 속의 세월을 아껴 하나님의 뜻을 찾아 이행하며 산다면, 그것은 기회를 "사는" 것이나 다름 없는 효과를 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의 1. 선하고 2. 기쁘고 3. 온전한 뜻인지를 늘 헤아리고 분별하면서 살아야 슬기롭습니다(로마서 12:2b). 

파울은 그러면서 술 취하지 말고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합니다.
또 시와 찬양과 영적인 노래로써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님을 노래하고 ㅎ찬양하고 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고 크리스토를 두려워하여 서로 겸손하게 복종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중요한 뜻이지요!

오늘날, 본 티엘티에서도 장기간 검증해 오듯, 많은 사람들이 온통 영적 카오스의 소용돌이에 깊이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까운 돈으로 아까운 밥 먹고 아까운 잠 자고 아까운 시간을 들여 아까운 삶을 살면서, 심지어 거듭나서 아까운 신앙생활/교회생활을 하면서, 거짓되고 헛된, 잘못된 영성에 빠져 아까운 남은 삶을 허비한다는 것은 기회선용의 슬기가 아닙니다. 

기회를 선용합시다!
세월을 아낍시다! 

티엘티 독자들은
기회 선용의 영적 지성인들로서
남은 삶을 통해
더욱 주님께 영광 돌리기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