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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의 연구묵상/삶맛에세이(김삼)

청산(靑山) 보다는 찌온(Zion)을

 




김삼

대 교회 목회자들도 하루 아침에 자신의 모든 수고를 무참하게 만들어 버릴 정도의 행실로 마감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목도한다. 명문대학과 신학교를 줄줄이 꿴 학력, 줄기찬 연구, 화려한 경력으로 사회와 교계에 괄목할 업적을 남긴 이들이 성경진리를 벗어난 엉뚱한 얘기들을 아무렇게나 하고 다니는 모습도 본다. 자기 나름으로 최선을 다하고 충실했던 것도 경우에 따라 전혀 의미 없을 수 있다는 생각에 황당해진다.

필자가 설명할 필요도 없거니와, 삶의 가치는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뜻 깊은 시간을, 어떻게 보냈느냐에 달렸다. 구약에서 그런 삶을 산 대표적 인물을 꼽으라면 에놐을 들 수 있고, 신약에서는 다름 아닌 예수 크리스토일 것이다.

살으리 살으리랏다
청산에 살으리랏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으리랏다

우리네 옛 시 '청산에 살으리랏다'의 부분이다. 그뿐인가. '청산에 살리라'(김연준/김연준), '청산은 깊고 좋아라'(이공전/송은), '금강에 살으리랏다'(이은상/홍영후)란 가곡들도 있다. 분위기인 즉, 깊은 산골 우거진 푸른 그늘과 드높이 우뚝 선 바위들을 벗 삼아 지내는 것이 복잡하고 시끌벅적한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정갈하고 속 편할 것이라는, 소박하면서도 차별적인 바람이다. 요즘 한국 도시 사람들의 희망사항이기도 하지만.
[사실 요즘은 청산에서도 잘 먹고 잘 살길 바라는 쪽들이다. 산의 희귀종/보호종/멸종위기종 약초나 동물들도 '보신'하느라 도시인들이 모조리 요절내고 '작살'내고.]

그런가 하면, 성경 구약 시인들도 산은 산인데 청산 아닌 찌온에서 늘 살기를 바랐다.

바빌론 강물들 곁
거기 우리 앉아
울었네
찌온을 기억하며
(시 137:1 사역)

찌온이란 곧 고대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높은 언덕으로 하나님의 거소를 상징한다. 청산을 바라는 삶과 찌온을 그리는 삶의 차이라면 무엇일까?

전자는 하나님이 아닌 자연 속에 파묻혀 살겠다는 생각인데 비해, 후자는 구원자이신 하나님이 계신 곳을 바라고 하나님 앞에서, 그 분의 거룩하신 면전에서 그 분의 빛과 영광을 바라보며 살겠다는 의지다. 개혁가들이 강조하던 '코람 데오'(Coram Deo)의 삶과도 같다.
전자는 세상을 잊고 인연과 속연(俗緣)을 끊고, 자연으로부터 득도하며 자신의 선인(仙人)적 고결함을 지켜나가겠다는 의미니, 다분히 이기적인 발상일 수 있다. 반면 후자는 하나님께 위로를 얻고 힘을 얻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와 자비를 드러내고 영광을 선포하겠다는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포함하고 있다.

나이 60살 때부터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에놐에게서 우리는 언뜻 세상을 완전히 등지고 오직 하나님과만 사귀는 수도원적 삶을 떠올릴지 모른다. 그러나 에놐은 하나님만을 알던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 장차 오실 크리스토의 복음을 전한 대언자였다고, 예수님의 아우 사도 유다가 밝혀 준다.

속세와 절연하고 깊은 산 속에 입산해 불도를 통해 해탈과 무아를 지향하며 지내는 불승이나 금욕적인 도사, 조용히 지내는 뉴에이지 구루들, 수도원에 들어가 말뚝 박고 지낸 중세 카톨맄 수사들, 안토니우스 같은 광야의 은자들, 안으로 안으로 자기 속의 '하느님'을 찾아 호흡한다는 현대 관상가들의 삶은 서로 유사한 데가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사는 금욕주의 생활 속에서, 홀로 대도(大道)를 터득하고 깨달은 각자(覺者)요 성스러운 성인들로 평가받는 호사를 누리곤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흔히 외곬 신비사상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 거룩하고 경건한 삶은 우선 하나님 앞에서 그 분의 말씀을 묵상하면서도 세상과 이웃에 대하여 할 일을 다하는 인터랙션을 통해 가치가 좌우된다. 그런 삶은 한 마디로, 성실히 살되 하나님을 늘 최우위에 모시는 하나님 중심의 삶이다.
"너희는 먼저 그 분의 나라와 그 분의 뜻을 찾아라"는 말씀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흔히 '가장 높으신 분'[至尊者·Most High]으로 일컬어진다. 물론 그 분 자신이 온 우주와 하늘에서 가장 높으시기도 하지만, 가장 높으신 분답게 섬겨 드려야 할, 내 삶의 최우위 대상이시란 뜻도 포함된다. 그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핵심, 본질이다. 에놐이 그랬고 예수 크리스토가 그러셨다. 또 교회가 지상에 존재하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 주님은 새벽 미명엔 한적한 곳에서 아버지 하나님과 사귀셨고 낮엔 죽기까지 죄인들을 돌보고 섬기는 봉사의 삶을 사셨다.

모쉐는 그의 대표적인 시(시90편)에서 하나님 앞에서는 계수(計數) 받는 삶만 의미가 있다고 성령으로 노래했다. 창세기에 나타난 구약인들의 족보를 유심히 살펴 보면, 카인의 후예들과 셑 후손 족보가 현저히 다른 점이 나타난다. 전자는 나이가 셈쳐지지 않았지만 후자는 계수 되었다. 에놐을 보면, 하나님과 동행한 삶을 중심으로 계수 되었다.

현대를 사는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그 분의 뜻대로 살아 간 삶만 의미가 있고 셈으로 쳐진다. 그 밖에는 이렇다 할 마크가 되지 않고 주마등처럼 지나갈 죄악의 삶일 뿐, 무의미하다. 그 분의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 아닌 내 뜻과 내 계획 대로 산 삶은 다 그렇다.
수사들의 삶이나 독자적/신비가적인 삶을 보면, 흔히 한 가지가 결핍돼 있다. 하나님과 자신만을 중시하는 수직적 삶만 생각하고 이웃을 돌아 보는 수평적 삶은 빼 놓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세상과 이웃에게 봉사를 최우위에 놓고 덤벙거리는 삶도 하나님과의 깊은 친교가 빠져 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뜻하는 바, 하나님께 계수 받는 삶은 과연 어떤 것일까? 그 삶은 매일 이른 아침에 시작된다. 가장 높으신 분을 찬양하고 말씀과 영혼 속에서 성령의 은밀한 목소리에 귀 기울임으로써 그 분의 가르침과 기름부음을 받아, 그 권능과 은사로써 세상을 이기며 살되 먼저 이웃의 영.혼.들을 위해 섬기는 삶이다. 이웃의 몸이나 심리 차원을 간지럽게 만족시키고 끝내는 삶이 아니다.

아울러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나도 너희와 함께 하겠다"는 주님의 말씀에 근거해 성도가 한데 모이기에 힘쓰고, 하나님을 높이고 함께 사랑하고 힘을 얻어, 세상에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선포하여 드러내는 삶이다. 수직적·수평적 균형이 바로 잡힌 그런 삶은 참 복을 누리며, 마침내 하늘 상급을 받게 된다.

찌온은 더 나아가 장차 우리가 가서 살 하늘나라를 뜻한다.
참된 찌온 중심의 삶은 유대적인 찌온주의(Zionism)가 아니다. 땅의 예루살렘이 참 찌온이 아니다. 찌온은 현재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 곧 거듭난 신자의 영과 하늘 처소이다.
청산이 아닌 찌온을 그리며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