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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의 연구묵상/캪튼's 코너

한계 테스팅



새해 초에 이런 말을 하면, 일부 독자들은 혹 불쾌한 감정을 가질지도 모를 일입니다만..

제가 연전에 한국 가서 상당히 놀란 점 하나가 있습니다.
젊은 여성들의 치마가 대단히 짧더라는 것입니다. 초미니..라는 그것. 대한민국 도시마다 발견되는 공통점이었습니다.
그나마도 나날이 치마가 더 짧아가더라는 것..그래서 초초미니> 슈퍼미니>  아니, 울트라슈퍼미니> 마이크로미니 화(化) 해 가는 현상도 걷잡을 수 없어 갑니다. 물론 비키니 수영복 등 여성들의 다른 의상도 아슬아슬한 국제 유행 타기는 대동소이하지만. 

친구 목회자의 차를 타고 길거리로 나섰을 때, 횡단보도 위를 보무도 당당히 씩씩하게 건너가는 초미니 차림이 유난히 눈에 띠어 "아니, 왜 저렇게 짧아..?"라고 묻자, "삭막한 거리가 한결 아름답지 않소?"라는 친구의 농 섞인 대답에 쓴 폭소를 터뜨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다들 아다시피 초미니는 하루 이틀 현상은 아닙니다. 퍽 오래 전이지만, 뉴욬시 맨해튼 어느 교회의 주일 낮 예배에 초청 받아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유학생들이 유달리 많은 교회였습니다. 설교가 끝나 가방을 챙겨 아래층 친교실로 막 향하던 중, 좁고 가파른 계단 위로 위층으로 올라가는 한 자매님의 뒤를 본 순간, 그만 아찔하여 얼른 고개를 돌린 적이 있습니다. 소위 'x꼬 반바지'란 것을 입으셨기에. 
과연 누구를 위한 노출인지..? 자신만의 만족을 위한? 
 

새해에 한국/한인 교회 자매님들에게 권유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치마 길이를 좀 더 내릴 순 없냐는 것입니다.
세상은 어차피 마귀 세상이니 그렇다 치고, 꼭 성도들까지 초미니, 슈퍼미니여야 합니까....? 그리고 교회 강단 앞에서까지도 "교회 연예문화 발전"의 일환의 무대로서 같은 색깔의 속옷까지 노출되는 "야한" '몸사역' 의상이 선용(?)돼야 합니까?

대한민국이 유행/패션에 왕창 '빠삭'한 편이라면 틀린 말은 아니겠지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초초미니가 표준화 돼 가면 심각하지 않나 싶습니다. 대체로 사회의 유행과 패션은 연예계가 이끌어 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국민 전체가 연예인 화(化)를 지향하는 성향이 있다고 판단됩니다. 연예계는 "멋있게 보이기 위해 '한계 테스팅'을 하는 바람잡이"라고 한다면 과언일까요?

여기서 '한계'란, 치마 길이 최소/최단화의 경계선을 뜻할 수도 있고, 좀 더 솔직히, 이성(남성)의 욕정의 인내의 경계선을 넘나든다는 암시이기도 합니다. 멋져 뵈는 남의 짧은 스커트 길이를 흉내 내려는 카피심(心) 자극도의 한계이기도 하고, 기 죽고 자존심 상하는(?), 두툼하고 소박한 '무다리' 여성들의 질시의 인내력의 경계선도 포함될 테지요. 
더 덧붙인다면, 성범죄자들의 인내력의 한계도 테스팅 됩니다. 
말하자면 여러 종류의 한계 테스팅이 스커트 길이에 한꺼번에 결부된다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 자매들의 초미니까지도 세상의 영향인 것은 분명한데..도대체 그 끝이 어디냐고 물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껏 위로, 위로, 위로만 치솟아 온 스커트 끝이 과연 언제, 어디서 멎겠냐는 것입니다. 남성들의 욕망의 총체적 폭발까지? 아니면 남성의 완전면역 때까지? 여성들 가운데는 이런 초초미니 현상을 결국 남성들이 초래했다고들 주장하는 분들이 없지 않은데..일리가 없는 건 아니나, 과연 어느 정도 유력한지는 모르겠습니다. 

연예계의 모..모..모 라는 젊은 여성 음악그룹들을 보면, 다리를 늘씬하게 다듬고 가꾼 신진들일수록 활짝 더, 시원한 모드를 추구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쭉쭉 뻗은 시원한 다리를 한껏 지켜 봐 달라"며, 한계 초월(?) 상황 직전까지는 한계를 계속 테스팅하겠다는 식의..
물론 보기야 시원하고 좋지요. 아울러 고감도 시신경 보유자인 남성들의 눈요깃감도 되겠지요. 그들의 욕망을 아슬아슬하게 자극하고, 맘과 몸이 달아 속으로 무언의 한계 테스팅을 즐기게 되고, 더 나아가 간음하고 싶은 음욕을 자아내겠지요. 그러다 보면 에너지 소비-수음-까지 부추기게 됩니다. 신사들의 '점잔'은 책임감과 함께 한계도 따르는 법입니다. 
 
요 얼마 전 다음넽에서는 'x벅지' 논란이 있었습니다. 'x벅지' 보유자가 사실상 가벼운(?) 성추행을 당한 사건의 고백입니다. 대체로 네티즌들은 "자초한 일이 아니겠냐"는 식이었습니다.

'자초'라..스스로 초래한다..이거 중요한 말입니다.  자초.. 여성과 자매님들은 혹시 자초하는 일들은 없습니까?
자신의 행동거지나 멋 내기가 뭔가 예상 못하던 것을 자초하진 않나요? 마냥 짧아져만 가는 여성들의 치마 길이는 사회의 성폭력 수위와 정비례하고 있진 않은지요? 한계 테스팅 상황을 연출하는 옷 길이가 혹 한계를 못 견딘 욕망의 폭발과 성폭력이라는 예상 못한 불행을 자초하진 않나요?
아니면 궁극적으로는, 그런 욕망 폭발과 잠정적 성폭력을 '자초'하기 위한 것인가요?
아니 도대체 우리가 왜..민심 잡아 돈도 잡는 연예계의 한계상황 연출용 저울 접시 위에 올려져야 하는 겁니까?


얼마 전, 우연히 한 범죄 동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뉴욬시의 한 주택촌 강간범 용의자를 잡기 위해 뿌린 CCTV 녹화물이었습니다. 아파트 현관 출입문이 열리고 한 젊은 백인 아가씨가 방금 무도회에서 돌아온 듯 화려하고 비교적 짧은 무도회 드레스 차림으로 발랄하고 경쾌하게 또박또박 구두소리를 내며 들어오더니 곧 이어 층계를 올라가는 중이었습니다.
불과 몇 초 후 문이 다시 열리더니 신사복 차림의 한 흑인이 따라 들어왔습니다. 언뜻 여기까지 보기엔 마치 그 아가씨의 파트너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 신사는 계단 몇 개를 밟아 올라가 위로 오르던 아가씨의 입을 냉큼 틀어 막고 허리를 잽싸게 낚아채더니 계속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 아가씨는 뭔가 소리 치며 온 몸을 바둥바둥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걸 갖고 요샛말로 '상황 끝'이라고 하나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폭력범, 성추행범, 성희롱자들을 최악의 사회악으로 규정합니다. 물론 그렇지요. 추잡합니다. 형량도 더 강화돼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 간접 기여를 하는 요소도 있습니다. 연예계의 '과다노출 패션 질환'입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이것이 곧 일차적인 시각 간음과 부차적인 성폭력의 공범요소라는 것이죠. 

간접기여 요소들은 더 있습니다. 과거의 부모들은 아이들 특히 딸인 소녀들 단속을 잘 했습니다. 남정네가 쉽게 엿볼 틈이 없도록 꽁꽁 동여매다시피 감쌌습니다. 사춘기 소녀들의 봉긋한 가슴 부위도 숨을 잘 못 쉴 정도로 질끈 누르고 덮어 최대한 가렸습니다. 물론 숨 막히는 봉건주의도 가미됐었지요. 그러나 오늘날 부모들에게 과연 이런 보호의식이 얼마나 있을까요? 혹 자녀의 돈벌이를 위해 가능한 한 더 노출시키길 원하는 "개방된" 부모는 없을까요?  

미국이 한국과 현저히 다른 점 한 가지는 중고교생들인 사춘기 여학생들이 좀처럼 치마를 입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평균 성장속도가 빨라 이미 성숙할 대로 성숙한 남학생들에게 웬만큼 위기나 자극, 유혹 등의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섭니다. 그런데도 미국 고교생들의 혼전 성습은 국제 평균 수위를 훨씬 넘습니다. 인터넽 폰(porn)의 영향이 클 겁니다. 
이런 데다 여학생들이 스커트를 선호하고 길이까지 짧으면 어떨까요? 당연히 성폭력과 혼전 성행위가 증가하겠지요.


욕망과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는 요인들은..마귀의 성품이고 유혹이기도 합니다.
"내 다리가 예쁘다"고 일단 자부감을 갖게 되면, 싸탄은 계속 그렇게 자부하고 자랑삼도록, 튜브에다 공기를 주입하듯 한껏 환상의 바람을 넣습니다. "드러낼수록 아름답다"는 마법적 환각을 불어 넣습니다. 결국 한계를 초월해도 자신은 마비와 면역이 돼 갑니다. 그러나 자꾸만 노출 일변도로 나가고 일삼다 보면, 동시에 모든 욕망과 위기와 잠재적 범죄 가능성 앞에도 노출되어 vulnerable하게 됩니다. 
이 vulnerability는 누구의 책임인가요? 마귀나 범인이나 사회만의 책임은 아닐 겁니다. 아니, 잘 추스르지 못하고, 조심하거나 신중하지 못한 본인의 책임이 가장 크지요! 


에덴의 꽃뱀 속에 숨은 마귀는 하와에게 접근해 그녀의 시신경을 최대한 자극했습니다.
선악지식의 열매 나무로 다가가 열매를 보자 먹음직스럽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게도 보이게 합니다.
하나님의 경고는 새카맣게 잊어 먹습니다. 결국 욕망의 한계성을 넘어서서 손을 내뻗습니다. 상황 끝..이었습니다. 

오늘날 그 똑 같은 마귀는 그 졸개들을 적극 활용해, 똑 같은 원리로 남성들의 시신경을 최대한 자극하고 꼬십니다.
한 쪽으로는 노출욕을 한껏 자극하고, 한 쪽으로는 이성을 욕망의 인내 한계 상황으로 몰아갑니다. 

인내를 기르기 위한 다양한 훈련이 있습니다.
죄를 이기기 위한 시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극과 노출로써 욕망의 인내력을 시험해선 안 됩니다.

그건 싸탄이 즐기는 짓거리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할 일은 못 됩니다.

세상은 내버려 두세요. 어차피 버려진 세상이니까.
거기서도 간혹 복음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세상을 본 받진 맙시다. 
세상 유행을 따르지 맙시다. 


새해엔 치마 길이를 늘립시다. 
그리고..상반신 노출도 최소화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