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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독자의 지난 칼럼들/은강의 순례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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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융, 머리 속으로 날선 화살이 하나 날아 든다. 머리 속 어디에서 현이 하나 투둑 끊어지고, 그 서슬에 뇌세포가 갈피를 못 잡고 허둥지둥 부산하다. 동지 섣달 매서운 칼바람이라도 맞은 듯, 온 몸으로 파고드는 긴장감. 

신경이 곤두선다.
바짝 곤두선다. 


그렇게만 한다면 내가 확신하건대, 당신은 내가 그랬던 것처럼, 다음과 같은 옛말이 사실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분을 섬기는 것이 곧 완전한 자유라는 것을! (존 스토트, 존 스토트의 신앙생활 가이드, IVP, 219쪽)


완전한 자유?
그분을 섬기는 것이 곧 완전한 자유? 
자기는 그것을 깨달았다고?
책을 읽은 나도 '그렇게만 한다면' 깨닫게 되리라고?
그렇게만? 어떻게만?


...... 이와 같은 '은혜의 방편들'을 통해 힘을 얻어 믿음, 사랑, 경건 및 지식 안에서 성장하며, 하나님의 뜻과 계명에 순종하고, 당신의 생애를 어떤 형태로든지 그분을 섬기는 일에 헌신하게 되기를 크게 소망한다. (같은 책, 같은 쪽) 


바로 앞, 별 감정 없이 읽어나간 부분에 '그렇게만'이 설명되어 있다. '그분을 섬기는 일에 헌신하게 되기만'이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내가 왜 이 말을 지금 들어야 하나.
완전한 자유? 완전한 자유라니.. 아니 완전한 자유라니.. 스토트는 얼마나 되는 무게를 실어 이 말을 한 것일까. 

책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것이 스토트의 결론이었다.
책 전체에서 신앙에 관한 세세한 안내를 해 놓고, 그 끝에 마무리로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그 마지막 쪽 앞에서, 나는 다 읽은 책을 다 읽지 못 한 채 그냥 펴 들고 앉아 있다.
'완전한 자유'에 완전히 홀렸다. 그 글자 다섯 자가 머리 속에 가득하다. 스토트는 책 한 권 내내 '신앙'을 얘기했는데, 정작 내 귀에 크게 들린 말은 그 끝에 아주 짧게 언급된 바로 이 '자유'다. 
자유, 그것도 완전한 자유, 스토트는 그렇게 말했다.


머리 속이 바쁘다. '완전한 자유'라는 말은 먼지 속에 들앉은 내 여러 생각들을 삽시간에 풀어 놓았다. 불현듯 생기를 얻은 생각들이 순서도 없이 튀어나와 이리저리 부딪히고, 그 바람에 갑자기 교통량이 늘어나 제어장치가 고장이라도 나게 생겼다. 

후우, 깊은 숨을 한 번 쉬어 호흡을 고르고 나는 완전한 자유라는 말에 천천히 네모를 친다.  
내 오랜 버릇이다. 연필을 가까이에 두고 책을 읽는 것. 읽다가 감동적인 장면이 나오면 별도 그리고, 눈이 번쩍 뜨이게 공감되는 말이라도 있으면 길게 밑줄도 긋는다. 다시 안 보는 경우도 많긴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 두면 다음에 다시 읽을 때나 어느 날 뜬금없이 생각나 찾을 때 도움이 된다. 무심코 책장을 넘기다가, 이런 말에 감동 받았던 시절도 있었구나 추억으로 살아나면, 그 감회 또한 솔솔찮이 재미지다. 나중에 혹시라도 내가 한때 쳐 놓은 밑줄에 스스로 민망해지는 일이 생길까봐 잉크 아닌 연필을 쓰는데, 여태껏 지워본 적은 사실 없다.  

자.. 완전한 자유에 네모를 했다.
네모는 자주 하지 않는다. 거의 안 한다고 해야 맞겠다. 그렇지만 이 '완전한 자유'에는 망설이지 않고 했다. 맘 같아선 네모를 몇 개 겹으로 치고도 싶지만 책에는 여백이 많지 않다.

손에 든 책을 차마 덮지 못 하고, 마지막 쪽이 펼쳐진 채로 탁자 위에 엎어 놓는다.
이러지 말랬다. 엎어 놓으면 책이 호흡을 못 한다며 절대로 그러지 말라고 어느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 말했었다. 꼭 호흡곤란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어쩐지 나도 싫어 책을 별로 엎어 놓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지금은 책을 덮어 버리고 싶지가 않다. 다행히 새 책이고 곱게 봐서, 엎어진 책은 납작하게 깔려 있지 않고 가운데가 산이 되어 붕 떠 있다. 그래.. 숨 쉬는 데는 지장 없겠다.

소파에 깊이 몸을 묻는다. 다리도 소파 안으로 불러 들여 오그린다. 두 손으로 다리를 감아 몸을 만다. 물소파 같은 게 있어서 이대로 포옥 깊게 파묻히면 좋겠다. 몸이 아주아주 조그맣게 줄어 엄마의 자궁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의식을 갖고 그곳으로 돌아가면 어떤 느낌일까.

엄마.. 그러고 보니 엄마 가신 지가 벌써 일 년이 넘었구나.. 자궁은커녕 엄마도 없는데.
엄마는 지금, 정말로 하나님 나라에 있을까.
엄마는 지금, 자유로울까.

자유.. 그래, 자유..
내 삶의 오랜 꿈이었고 긴 소망이었다. 완전한 자유까지는 바라지 않았었다. 그냥 '자유' 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자유를 소유하는 것까지도 바라지 않았다. 경험에 대한 반추로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정 내가 '자유한' 인간임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다면, 단 한 순간이어도 좋았다, 한 번만이라도 온전한 자유 속에서 그 찬란한 희열을 맛볼 수 있다면, 그 경험을 추억하며 되새기며 생의 나머지를 살 수도 있을 거 같았다.
내 푸르디 푸르렀던 젊은 날, 나는 뜨거운 가슴으로 자유를 그렸다.

그러나 그런 '찬란할' 자유에의 경험을, 나는 얻을 수 없었다.
그건 경험되어지지 않았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건 내 몫이 아니었다.

드물게 기쁜 일이 생겨도, 칭찬이나 감사를 듬뿍 받아도, 어떤 일을 내 뜻대로 처리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도, 나는 자유로워지지 않았다. 높은 산 정상에서 수많은 봉우리들을 발 아래로 내려다 보아도, 심지어 언젠가 해먹 속에 몸을 얹어 나뭇가지 사이에 둥둥 떠 있어도 봤지만, 나는 진정 자유롭지는 못했다.  
나 혼자 쓰기에는 넉넉할 돈이 있었어도 역시 그것으로 자유로워지지는 않았다.
몇 날 며칠 집을 떠나 여행을 해도, 길에서 낯선 이를 만나 밤을 새워 이야기를 나누어도, 그러다 다음 날 그이와 헤어져도, 나는 참된 자유인이라는 자각이 일어나지 않았다.
피는 꽃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지는 꽃이 아무리 서러워도, 그 안에서 자유를 경험하지 못 했다.

책? 책 속에 길이 있다지만, 나는 자유로 가는 길을 책에서 찾지 못 했다. 
관념으로서의 자유가 아니라, 내 삶의 현장에 실재하는 자유를 맛 보고 싶었다. 머리로 가슴으로 마음으로 내 온 감각으로, 생생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그것을 나는 호흡하고 싶었다.       

자유라는 것이 정말로 실재하는 것일까.
개념으로서가 아니고 구체적 감각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이것이 혹시 자유로움일까 싶은 순간, 그것은 벌써 빠른 속도로 사라져 버렸다. 사라진 것은 되잡히지 않았고 마음 속 어딘가에서는 늘 다른 소리가 들려 왔다. 그것은 양심인 거도 같았고 뿌리 깊은 죄의식인 거도 같았고 딱히 지칭할 수 없는 무엇인 거도 같았다. 어쨌거나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어떤 요소가 항상 나를 잡았다. 존재감이라기엔 너무 막연한, 실체를 알 수 없는 무엇 때문에 나는 주저앉았다. 해갈되지 않는 갈증으로 기진해졌다.

때로 자유롭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었다. 환경이 일시적으로 허락한 감정적 자유였을 뿐 내가 뜨겁게 바라던 그것은 아니었다. 가슴 저 깊은 곳으로부터 솟구쳐 올라오는 기쁨이 없었다. 억제가 불가능할 희열이 동반되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잠깐 맛보는 자유를 닮은 즐거움일 뿐이었다.

나는 내 의식이 자유롭기를 원했다. 내 의식 깊은 곳에서 진정 자유인이고 싶었다. 손발이 묶일지언정 의식은 자유롭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경험되어지지 않았고 나는 길을 찾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진정 자유로워지는가.
무엇이 나를 자유케 할 수 있는가.

시간이 흘렀다.
어느 틈에 이다지도 길었나, 자유를 향한 갈증 위에 세월이 더께로 내려 앉았다.
시름시름 나는 잊어 갔다.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을 끌어 안고 산다는 것이 어디 그리 만만할 리가 있을까. 세월은 나에게 포기를 가르쳤다.

거기에, 버리려 버리려 애를 써도 잡초처럼 다시 돋는 내 안의 노예 근성. 그것은 또 기회만 있으면 저 속에서 비집고 올라와 내 자의식을 위협하곤 했다. 기운이 떨어져 있을 때면, 자의식이고 자유고 다 때려치고 그냥 노예처럼 살아 버릴까도 싶었다. 
자유에 대한 열망만 갖지 않는다면 노예로 사는 삶은 어쩌면 안락할 것이었다. 자유인으로 살기를 열망하면 끊임없는 내적 싸움을 피할 길이 없었지만 노예로 사는 삶은 보다 쉬웠다. 별다른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 없이 하루 또 하루 살아가면 되는 일이었다. 어찌 보면 완전한 노예의 삶이 행복할 지도 몰랐다. 판단할 권리가 없으니 책임질 의무도 없고, 선택을 놓고 갈등할 필요도 없고, 그에 따른 걱정 두려움 후회도 노예의 몫은 아니고.
그러나, 그 속에 그렇게 안주해 버릴 자신이 있었을 리야.

더께 속에 숨었어도 뿌리까지 사라지지는 않아 가끔 자유는 아물지 않은 묵은 생채기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면 아슴아슴 가슴 한 켠이 아려 왔다. 하지만 어쩌랴, 세월이란 그런 거였다. 아린 구석도 끌어 안고 살게 마련이었다. 세월 속에서 끌어안지 못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또, 세월 속에 들어 앉았다고 늘 끌어 안아지는 건 아니었다. 내 의식 어딘가에 숨어있다가 어쩌다 한 번씩 표면으로 떠오르면 나는 못내 앓기도 했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앓았다. 이루어지지 않은 꿈을, 이루어지지 않을 꿈을, 쓸쓸하게 스산하게 앓았다.  

자유, 그것을 향한 지독히도 끈질긴 그리움.
나는 왜 그리 자유를 탐했던가.


그렇게만 한다면 내가 확신하건대, 당신은 내가 그랬던 것처럼, 다음과 같은 옛말이 사실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분을 섬기는 것이 곧 완전한 자유라는 것을!


엎어진 책을 제껴, 스토트의 말을 다시 읽어 본다.
그분을 섬기는 것이 완전한 자유란다, 스토트는 단호하다.
내가 그린 네모 속에 '완전한 자유'는 얌전히 들어 있다. 역시 눈에 쉽게 띈다.
그러고 보니 자유를 네모 안에 가뒀구나.. 그냥 밑줄만 그을 것을, 사방 틈도 없이 가둬 버렸네.
이거 어째 자유에 대한 대접이 말이 아니다. 글자 속에 갇히고 네모 속에 또 갇힌 '완전한 자유'라니, 이 무슨 아이러니람.

스토트는, 그분을 섬기는 것'만'이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길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그분을 섬기는 것이 그렇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길은 많지 않다. 나는 그걸 안다. 내가 한때 찾다 찾다 못 찾은 길이었다. 유일한 길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 길이 자유로 가는 하나의 길이라는 말은 된다.

나로서는 상상도 못했던 길이다. 나는 그 무렵 종교는 염두에 두지 않았었다. 철학이나 사상은 염두에 두었을지라도 종교는 아니었다. 내가 본 종교는 구속이었다. 특히나 기독교는 구속이었다. 그 무렵에나 그 이후에나, 종교에서 자유를 찾을 가능성을 나는 별로 열어두지 않았었다.

그분을 섬기는 것이 길이라면, 그렇다면 자유로움은 내 혼자 힘으로는 어떤 식이었든지 어차피 얻을 수 없는 것이었나?
신을 통해서야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었나?
그것은 정녕 신의 영역, 하나님의 영역에 속해 있는 것인가?
태어날 때 이미, 아니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나는 내 자유를 구속 당했나?
내 자유는 본디부터 네모 속에 갇힌 것이었나?

이 시대를 대표하는 기독교 지성의 하나라는 스토트, 그의 말이 맞다면 내가 완전한 자유를 경험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유일한 길이 아닐지라도, 적어도 이 길에서는 내 혼자 힘으로는 얻을 수 없다는 얘기 아닌가.
그렇다면, 그렇다면 나는 혹시, 처음부터 안 되기로 이미 예정되어 있던 일에 아무 것도 모른 채 기를 쓰고 매달렸던 것인가.
다 헛짓이었나. 신의 영역에 속한 것을 인간 주제에 겁도 없이 탐했던 것인가.

그분을 섬기라고?
그분을 섬긴다는 게 어떤 거지?
기독교인이 되는 것? 그리하여 그분의 말씀대로 사는 것?

그럼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스토트의 말을 내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내가 죄인(그렇지만 내가 왜 '죄인'이어야 하지?)임을, 그리고 그분이 나의 구원자임을 고백하고 내 안에 그분을 받아 들이는 것.

고백은 그럼 어떻게 하는 거지?
고백만 하면 다 저절로 받아 들여지나?


아아.. 스토트는 진정 자유로운가.
붙잡고 묻고 싶다. 마주 보고 앉아, 눈을 바라 보며 묻고 싶다.

자유로우세요?
얼마나 자유로우세요?
진정 자유롭다는 건, 정말로 어떤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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