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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독자의 지난 칼럼들/은강의 순례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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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 착오, 전혀 예상치 못 했다.
그저 죽 읽으면 되려니 했다. 이렇게 발목 잡힐 줄은 내 진정 몰랐다. 요한복음 전체를 얼른 한 번 조감해 보고 그의 강의록을 읽으리라, 단순하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런 상황이라니, 야간 기습이라도 당한 심정이다.   
 

"제가요.. 공부를 안 했을 때는.. 문제 푸는데 시간이 안 걸리대요? 궁리하고 어쩌고 할 거리가 아예 없잖아요. 그래서.. 일찌감치 대강 풀어 놓고는 검토할 것도 없고 그냥 시간이 남아 돌아 팡팡 놀았거든요?"
 
말하면서 저도 민망한지 아이는 쿡쿡 웃었었다.  
모의고사만 보면 사회탐구 영역에서 번번이 죽을 쑤던 녀석이었다. 1학년 때였던가, 국사에서 백분위 90%가 넘는 점수를 받은 적도 있었다. 백분위 90%면, 시험 본 사람을 백 명이라 치고 한 줄로 세웠을 때 90등이 넘어간다는 뜻이다. 다른 과목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은 점수였다.  
사실 맘 먹고 공부하면, 사회탐구 영역은 어렵지 않게 점수를 올릴 수 있다. 기초랄 게 따로 크게 없어서, 언어나 수학에 견주어 공부에 긴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다. 이해와 암기에 걸리는 시간 정도만 들이면 투자 효과가 바로 나타나는 과목이다. 그렇긴 한데, 도무지 그 맘을 먹을 기미가 안 보여 언제 그 공부를 하려나,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기다려도 도대체 여유만만 매달릴 조짐이 없었다. 그러더니만, 지 생각에도 도저히 더는 미룰 수가 없겠다 싶었던지 드디어 어느 날 사회탐구 공부를 해야겠단다. 그게 지난 겨울이었다. 발등에 불 떨어지니, 지루해 싫다며 절래절래 쳐다도 안 보던 인터넷 강의를 듣겠다고 등록을 해 달랬다. 겨울 두어 달 열심히 몇 개 듣고는 새학기 되어 첫 모의고사를 치르었다. 

"그런데요.. 공부를 좀 하니까 인제는 문제 푸는데 시간이 모자라네요, 아하하."  
 
공부를 좀 하고 보니, 잘 풀리지 않는 문제를 놓고 고민할 밑천이 생긴 거였다. 어이구 장하다 축하한다 그래 그거 깨닫느라 애썼다 득도를 했으니 하산은 언제 하냐 어쩌구 하면서 아이와 함께 끼들거렸던 기억이 멀지 않은데, 지금 내가 꼭 그 짝이다. 녀석이 알면 좋아하게 생겼다. 우하하 모전자전이네요 열심히 하면 다 돼요 자자 기운 내서 해 보세요 으하하하, 장난끼 잔뜩 서린 목소리가 들린다.

휘유우, 정말로, 녀석 말 대로다.
요한복음 읽기가 도대체 만만하지가 않다. 왜 이렇게 진도를 못 나가고 헤매는지, 때려치고 재미난 소설책이나 진도 팍팍 나가며 읽으면 딱 좋겠다. 이미 두어 번 읽었으니 한 번 더 읽는 거 쯤이야 수월하리라 여겼었다. 웬만하면 앉은 자리에서 다 읽고 일어날 생각이었다. 그랬건만 웬 걸, 참 꿈도 야무졌다. 내가 뭘 몰라도 한참을 모른 거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모르는 것 생각해야 할 것이 왜 이렇게도 많아졌나. 시간으로 치면 십수 번은 읽었어야 맞겠건만 끝은 아직도 요원하고 요원했다. 곳곳에서 복병들이 우후죽순처럼 돋아나 기승을 부려대니, 대체 전진을 할 재주가 없는 거다. 놈들은 읽어 나가는 길목마다 버티고 서서는 내게 딴지를 걸어 온다.

의문은 의문을 낳고 생각은 생각을 낳았다.
한 의문이 다른 의문을 낳고 한 생각이 다른 생각을 낳는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여기저기 찾으며 뒤지다가 별 관련 없는 엉뚱한 자료에 퐁당 빠져 헤어나지 못 하기를 몇 번.
가지 쳐 진 의문들이 머리카락에 껌 붙듯 서로 엉겨 붙는 바람에 애시당초 단초가 뭐였더라 생각이 안 나 진도 잠깐 미뤄둔 채 억지 복습 하기를 몇 번.   

드디어 머리 속에 안개가 끼었다. 어느 순간 자욱해지더니 한 치 앞이 안 보인다.  
안개가 퍼지면서 기운도 빠진다.
가뭇가뭇 안개 속으로 의욕도 사라져 간다.   


그는, 복음서 네 권 중 글쓴이의 의도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책은 요한복음 뿐이라고 했다.
다른 책은 모두 있었던 일의 객관적 사실 묘사에 그치고 있다는 것이다. 기자의 관점이 강조되지 않은, 오직 예수의 행적이나 말씀에 대한 기록이라는 면에서 그 세 권의 의미는 더 크다고 했다. 

[이해할 수가 없네요. 책을 읽는데 어쩌면 이렇게 저자가 보이지 않는 걸까요. 보통은 책을 읽다 보면 그 책을 쓴 사람의 사고 방식이나 성향, 가치관, 정신 세계들이 어떤 식으로든 느껴지기 마련이잖아요.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서는 그게 안되네요? 책 읽으면서 느껴지는 이런 막막함이라니, 드문 경험입니다.]

이상했다.
내가 이상한 건지 책이 이상한 건지, 아무튼 이상했다. 
읽어 나가는 글에서 도무지 저자가 보이질 않았다.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아 가는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저자의 의식구조가 들여다 보이지 않는 책이라니, 당황스럽다 해야 하나 뜻밖이라 해야 하나. 
일부러 보려고 애쓰지 않아도, 책이라는 게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저자가 눈에 들어 오기 마련 아니던가.

글을 쓰는 사람들은 흔히 글 속에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자기를 드러낸다.
설명이나 등장 인물의 대화, 사건의 전개 양상등 글쓴이의 의식구조를 알 수 있는 장치는 도처에 깔려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 글쓴이는, 글을 써 나가는 동안 어쩔 수 없이 자신을 글 속에 드러내게끔 유도된다. 그런데 그게 성경에서는 발견이 안 되고 있었다. 별 생각없이 무심코 읽어 나갔는데 어느 순간 문득 이상했다. 어? 그러고 보니 저자가 안 보이네? 어딨지? 
      
나는 그게 내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성경에 대해서는 당최 문외한이니 혹시 바람직하지 않은 방법으로 읽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모르는 좀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만 좋은 방법이 따로 있는 거라면 당연히 그가 안내를 해 주지 않았을까, 아니지 그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일이어서 미처 생각하지 못 했을 수도 있지. 

혼자 백 날 따져 봐야 결론이 나올 리는 없고, 결국 그에게 물었다.
질문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독백인 셈이었다. 내가 직접 겪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 이상한 상황을 얼른 받아 들이지 못 하고 있었다. 수습이 안 되니 답답했고, 참다가 결국은 말이 되어 나와 버렸다. 의문문으로 말은 했지만, 그게 정말로 질문이 되리라고는, 그래서 진지한 답을 얻게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 했었다.      
 
날카로운 질문입니다, 그런데 시작부터가 예상과는 달랐다.
어? 이게 날카로운 질문? 소 뒷걸음 치다가 쥐 잡았나?
아무튼 기분은 괜찮았다. 이런 말은 보통 칭찬의 다른 표현이다.       

[마태 마가 누가의 경우는 책을 쓴 의도가 특별히 선언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행적을 적은 기록이라는 의미를 천명했지요. 따라서 공관복음서는 자연히 객관적 사건의 전말에 대한 기록이나 강의록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이 책들에서 단순히 '말'의 흐름을 읽는 것만으로는 기록자의 관점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분석의 단계, 그것도 비교 분석의 작업을 거쳐야만 기록자의 관점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기록자의 관점이 아주 없다는 말은 아니렷다. 
 
[비교 분석의 경우, 그냥 비교해서 읽어보는 것으로는 각 권의 관점 파악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가설을 먼저 세우고, 그 가설에 입각하여 자료들을 다시 검토하고 분류하여, 가설로 세운 그 경향이 과연 뚜렷한가를 검증해야 합니다. 가설이 떠오르지 않으면 분석이 안 되니 당연히 처음 읽는 사람에겐 아~무 생각이 없게 됩니다.]

그렇구나.. 그런 거였구나.
처음 읽는 사람에게는 당연한 거였구나.
바보되지 않았으니 다행이긴 했지만 성경이 그런 성격의 책인지는 몰랐다. 
 
쉽게 말하자면 복음서는 교과서 같은 성격을 지닌 모양이었다. 예수의 행적과 가르침을 객관적으로 기술한 기본서.  
읽으면서도 그런 쪽으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인류 최고의 '저서'라고 불리우니 누군가 썼다는 이야기이고 그렇다면 당연히 지은이의 경향이 읽히리라 여겼다. 아니 그런 생각도 실은 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은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않다는 거였다. 주관적인 개입은 없이 객관적인 사실만을 기록했다는 얘기였다.  

교과서 같은 책이라면 그건 이해가 되었다. 저자의 가치관이 어디 눈에 보이는 교과서가 있던가.
사실 모든 교과서는 지은이가 누군지도 대부분 모르는 채 읽는다. 교과서 읽으면서 누가 썼나 관심을 가졌던 기억이 없다. 매 학년 매 학기 그 많던 교과서 중 저자가 기억나는 건 단 한 권도 없다. 교과서는 으레 내용이나 파악하면 되었다. 객관적 기술에 지은이의 가치관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그런 여지가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교과서로서는 실격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권의 교과서를 가져다 놓고 일일이 동일한 단원마다 그 내용이나 서술 방식을 비교하며 분석해 보면, 비슷해 보이던 것들도 다 조금씩 서로 다른 특징을 갖고 있기는 하다. 입시생이 되어 본격적으로 수능을 준비하는 아이는 교과서를 과목당 적어도 두 권은 지니고 있다. 교과서가 강조되는 사회 과목은 서너 권도 갖고 있다. 이 책에는 이게 없고 저 책에는 저게 없다. 이 책에는 이게 강조되어 있는가 하면 저 책에는 저게 강조되어 있다. 확인은 못 해 봤지만, 지은이 자신의 전공 분야를 기술할 때는 지면을 조금 더 할애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아는 게 많으면 할 말도 많아지나 보았다.   
 
교과서에 빗대어 생각해보니 복음서도 이해가 되었다. 
객관적 기록으로서의 성격이 짙어 세 권이 함께 공관복음이라 불리우기는 하지만, 마태 마가 누가가 그래도 조금씩 강조점이 다르단다. 그러나 그것은 초보자가 찾기에는 좀 지루하고 재미도 없을 거란다. 전제가 필요한데, 초보자가 그 전제를 찾아내기는 어렵단다. 
간단히 말하면, 지은이가 드러나긴 하지만 지금의 내 주제로는 볼 수 없다는 말이었다. 
  
약은 조금 올랐지만 수긍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부터 쉽게 읽어지는 거면 성경을 놓고 뭔 해석들을 그리 분분하게 싸워가면서 하겠나. 
  
비교 분석, 재밌겠다. 성경을 좀 더 알게 되면 복음서 세 권을 그렇게 읽어 보는 것도 좋겠다.
후훗, 하지만 언제? 그가 했다고 따라서 해 보려고?  

그는 언제나 그렇게 답해 왔다. 그렇게 해 보고 싶게끔, 자신이 읽은 방법들을 설명했다. 듣기에, 열의와 정성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성경을 그렇게 읽다니, 나로서는 꿈도 꾸어보지 않았다. 아니, 꿈은커녕 그러한 사람이 있으리라는 상상도 해 보지 않았다. 나는 살면서 쳐다도 안 봤던 성경을, 어떤 사람은 온갖 정성을 쏟으며 생애 긴 시간을 투자해 읽고 있었다니, 그 이야기를 들을 때는 내심 좀 긴장도 되었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들과 견주어 보면 비교적 기자의 의도가 뚜렷이 드러난다고 했다.
모든 사건에 대해 왜 하필 이 사건을 기록했을까, 생각해 보는 것이 요한복음을 제대로 읽는 비결이란다.
그는 요한복음을 '갈등의 복음서'라고 표현했다.

[예수님이 외로이 지니고 있는 사명과 지식, 그 앞에 드러나는 인간들의 상식적인 반응, 그 사이에서 야기되는 갈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생각의 갈등 그리고 사태의 발전까지 포함해서요.]


그렇게 쓰였다는 요한복음을 다시 읽는데, 기자의 의도가 비교적 뚜렷이 드러나는 복음서랬는데, 그 갈등들이 깊이 있게 들어 오지 않고 있다. 다 그저 그래 보였다. 어느 것 하나, 가슴에 부딪는 것이 없었다.
가슴에 와 닿을 것들은 술술 빠져 나가고, 앞뒤 연결의 애매함이나 말의 모호함 같은 것들만 걸러져 머리에 남아 나를 애먹이고 있는 거다.      

그는 보는 것을 나는 못 보고 있었다.
그에게는 보이는 것이 나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도리안 그레이 같은 정 주기 어려운 주인공에게도 책 읽는 동안에는 연민을 느꼈건만, 인류를 구원했다는 예수가 주인공인 책을 읽으며 이다지도 주인공과 교감이 아니 되다니, 역시 또 아는 만큼 보이는가.   

빠른 속도로 바뀌는 무대에 절대 친절하지 않은 대사, 게다가 주인공의 대사는 온통 비유로 점철되어 있다.
장면은 예고도 없이 순식간에 전환되어 버려서, 아무 생각 없이 무심코 들여다 보다 문득 정신 차리면 이미 벌써 새로운 막이다.
막간 휴식은 고사하고 오르내리는 커튼조차 없다. 그 흔한 안내방송 한 마디 없다. 
관객이야 따라오거나 말거나, 저만치 혼자서 앞서 가는 주인공.    
    
몇 번이나 봐야 제대로 이해가 될까.
아는 만큼 보인다면, 아는 게 없으니 봐도 안 보이고, 본 게 없으니 다시 봐도 역시 안 보이고, 또 본 게 없으니 또 다시 봐도 역시 아니 보이고.. 참 내,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람.
그럼 초보자는 영원히 초보 딱지를 못 떼고.. 한 발 먼저 떠난 거북이를 토끼는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고.. 궁시렁 궁시렁, 혼자서 머리 속으로 이천 년도 더 된 궤변이나 흉내내 본다.  
 

어쩌랴.
별 방법이 없다, 나로서는. 그저 읽는 수 밖에.
읽다가 정 재미 없으면 그만 두는 수 밖에. 읽다 말았다고 누가 잡아 갈 것도 아니고.
가는 데까지 가 보는 거지 뭐.
 
아 그렇지, 은근과 끈기, 한국인의 영원한 기상.
맞다. 나도 한국인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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