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Prince of Egypt'
KJV 흠정역의 졸역 사례 (1)
-잘 생긴 아기 모세
제임즈 왕 성경(이하 KJV) 한글판 번역들은 사역(私譯) 중심이어선지, 살펴볼수록 "유일완전한 하나님 말씀" 또는 우월한 성경이라는 KJV 또는 KJ의 혁혁한 위세(?)를 업은 듯 주장해온 그들 측의 '큰 소리'와는 달리 여러 모로 문제 요소들이 드러난다.
물론 이것은, 본 필자가 원글에서 필요하여 성경본문을 원어로부터 직접 해석하려고 시도해온 다양한 사역들도 충분히 문제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세 가지 한글판 KJV 옹호자들은 거의 하나 같이 자기네 한글판도 역시 KJV 원판과 다름 없는 '유일' 또는 '우월'적 권위를 가진 양 재면서 자랑하고 홍보를 하는 한편으로는 모든 여타 성경 '변개'설을 계속 뿌려왔다. 제발 나중에 가서 "우리가 언제 그랬냐?"는 식의 오리발 내밀기가 없기를 바란다.
여기서는 최근 필자의 눈에 띈 대로 간단히, 히브리서 11'23 등 몇 구절을 중심으로 한글 흠정역(이하 '흠정역'은 모두 정동수 역 한글판을 가리킨다)의 번역상 문제점을 지적하련다. 비판을 위한 비판에 초점을 두는 글이 아니라, 한글 KJV 옹호측의 지나친 자만(自滿)이 쉽사리 자만(自瞞: 스스로를 속임) 또는 부끄러움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주려는 글이다.
히브리서 11'23의 그리스어 원문은 이렇다:
Πίστει Μωϋσῆς γεννηθεὶς ἐκρύβη τρίμηνον ὑπὸ τῶν πατέρων αὐτοῦ, διότι εἶδον ἀστεῖον τὸ παιδίον καὶ οὐκ ἐφοβήθησαν τὸ διάταγμα τοῦ βασιλέως. (그리스어 '사도성경'/AB에서 인용)
다음은 KJV 한글판 옹호자들이 그렇게도 자랑하고 강조하는 '비잔틴 다수사본'이다. 2005년도 판이니까 혹 (그들이 주장하는 이른 바) "변개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Πίστει Μωϋσῆς γεννηθεὶς ἐκρύβη τρίμηνον ὑπὸ τῶν πατέρων αὐτοῦ, διότι εἴδον ἀστεῖον τὸ παιδίον· καὶ οὐκ ἐφοβήθησαν τὸ διάταγμα τοῦ βασιλέως.
아래는 역시 친KJV 측이 그렇게도 애호하는 TR(텍스투스 레쳎투스: 소위 '수납사본'. 에라스무스가 만든 그리스어 신약사본) 원문이다:
πίστει Μωσῆς γεννηθεὶς ἐκρύβη τρίμηνον ὑπὸ τῶν πατέρων αὐτοῦ, διότι εἶδον ἀστεῖον τὸ παιδίον καὶ οὐκ ἐφοβήθησαν τὸ διάταγμα τοῦ βασιλέως.
위 원문들은 모쉐(그리스어 '모세스')의 이름 철자와 일부 구두점만 빼 놓고는 거의 차이가 없다. 그런데 한 가지 두드러진 사실은 위 원문들은 모두 이유를 밝히는 부사절이 달린 수동형 문장을 쓰고 있다는 점. 직역해 본다면, 대강 이렇다:
"믿음으로, 모쉐는 태어난 뒤 석 달 동안 그의 부모에 의해 숨겨졌으니, 그들 보기에 아기가 잘 생겼기 때문이며, 또 그들은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필자 사역)
아래는 KJV 유일/우월주의자들이 그렇게도 신주단지 모시듯(?) (주로 말로만) 애지중지하는 KJV 1611년 초판 원문에 있는 같은 구절이다:
By faith; Moses when hee was borne was hid three moneths of his parents, because they saw he was a proper childe, and they not afraid of the Kings commandement.
그들 말에 따른다면 원본을 '변개'했다고 해야 할 현대어에 가까운 KJV 영문은 이렇다:
By faith Moses, when he was born, was hid three months of his parents, because they saw he was a proper child; and they were not afraid of the king's commandment.
위에서 KJV 후대판은 유일/우월주의자들에 따르면 결코 변개되지 않은 또는 변개됐을 리가 없는 1611년 초판과는 좀 다르다. 부분끼리 서로 대조/비교해 보자. 우선 전자는 By faith; 하고 일단 숨을 고른 뒤 나아가는 데 비해 후자는 By faith Moses, 에서 쉬고 있다. 후자는 왜 전자를 '변개'시켰는가? 또 전자는 Moses when hee was borne was hid three moneths of his parents라고 하여 두 was 사이에 코머('콤마')를 찍지 않고 연결한 반면 후자는 when he was born, was hid three months of his parents라고 하여 코머를 삽입했다. 왜 초판 그대로 두지 않고 함부로 '변개'했는가?? 이어서 전자는 because they saw he was a proper childe,라고 한 것과 달리 후자는 because they saw [he] was a proper child; 라고 하여, 'he'를 이탤맄체로, 끝의 코머(,)를 세미콜런(;)으로 각각 변개(?)시켰다. 아니 왜 함부로 이렇게..? 끝으로 전자는 and they not afraid of the Kings commandement.라고 be 동사를 생략한 데 비해, 후자는 and they were not afraid of the king's commandment.로 하여 'were'를 삽입했다. 왜 후대인들은 초판에 대한 이런 변개(?)를 마구 일삼는가?
아마 영어를 아는 사람들은 필자의 이런 말을 분명 어처구니 없다고 할 것이다. 필자 역시 결코 위 부분의 차이를 변개로 보지 않지만, KJV 유일/우월주의측이 '변개'..'변개'..'변개' 하고 하도 떠들기에 거꾸로 teasing해 보는 말이다.
이제 '흠정역' 번역자(번역팀?)의 고의적(?) '변개'와 오발적(우발적?) 위선(?)을 보도록 하자.
분명 그리스어 원문과 KJV 영어 원문에는 수동형으로 된 위 구절을 흠정역은 이렇게 번역했다.
믿음으로 모세의 부모는 그가 태어났을 때에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니 아이가 [특이한] 것을 그들이 보고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강조는 필자의 것)
위 문장과 KJV(후대판) 및 (KJV 유일/우월주의 팀이 마치 마귀의 성경인 양 그렇게도 '변개'됐다고 저주/악평해온) NASB, NIV를 대조해 보라.
By faith Moses, when he was born, was hid three months of his parents, because they saw he was a proper child; and they were not afraid of the king's commandment. (KJV)
By faith Moses, when he was born, was hidden for three months by his parents, because they saw he was a beautiful child; and they were not afraid of the king's edict. (NASB)
By faith Moses' parents hid him for three months after he was born, because they saw he was no ordinary child, and they were not afraid of the king's edict. (NIV)
어떤가..? 한글판 '흠정역'은 첫째로 위 문장을 수동형 문장으로 나타낸 KJV나 NASB)를 따르기는커녕, '믿음으로 모세의 부모는..'이라고 시작하여, 그 어느 번역판보다 (능동형으로 바꾼) NIV와 가장 잘 일치한다! 왜 한글판 '흠정역'은 KJV의 수동태를 따르지 않고 NIV와 더 입이 맞게 능동태로 변개시켰는가? 필자의 말이 어거지로 생각되는가? 그렇다면 역지사지로 한글판 KJV 옹호자들 자신이 훨씬 더 앞서 어거지를 부려온 것이다!
둘째로, 보다시피 '흠정역'은 KJV 원문의 'a proper child'를 '아이가 특이한 것을..'이라고 옮겨 놓았다. 상당히 졸역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도시를 가리키는 '아스튀'에서 유래된 해당 그리스 원어 형용사, '아스테이오스'는 신약 성경보다 더 오랜 고대 그리스어 문서에서부터 다음과 같은 뜻으로 전래돼 왔기 때문이다.
1. 도시(출신)의, 상류사회의, 품위/기품 있는..
2. (외모/몸매/매무새 등이) 우아한, 아름다운, 빼어난, 걸맞은/적당한/적절한/어울리는..
왜 흠정역은 유독 '특이한'의 뜻으로 해석했을까? Proper의 한 가지 뜻이 '고유의/독특한/특유의'이기 때문이다. 흠정역 역자는 숱한 어의들 중 하필 이 정의를 골라잡은 것이다. 그러나 '고유의/독특한/특유의'가 이 경우 아기의 모습에 걸맞지 않으므로, 애써 딴 낱말을 찾다가 '특이한'으로 결정한 모양이다. 특이한 아기라..특이하다면 어떻게 특이하다는 말인가? 앞서 태어난 아론이나 미리암과는 영 딴 판이라는 뜻인가? 배다르다는 말인가?!
그리고 우리 한 번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부모가 자기 아기를 내려다 보며 "우리 아기는 우리 아기인데, 좀(아주) 특이하구나." -이렇게 말하는 부모가 얼마나 될까? 어찌 보면 남의 씨앗 또는 시쳇말로 소위 별종/기형아/외계인 등 자칫 이상한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말이다. 과연 아므람/요케벹 부부가 그런 생각으로 모쉐를 내려다 봤을까? 아니면, "정말 볼수록 잘 생겼다! 어떻게 이런 귀한 복덩이가 태어났을까.." 했을까?
물론 말이 영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예사롭지 않고, 범상치 않아 유별날 정도로 탁월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뜻은 여전히 모호하다. 어떻게 특이한지를 밝히는 구체적 형용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국 계열인 '메리엄-웹스터 사전'을 보면, proper 항은 물론 peculiar 즉 '특별한/특이한/특출난/유다른' 등의 어의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14세기 영국에서 첫 용례가 발견되는 이 영어단어 'proper'는 라틴어 'proprius'와 중세 영어 'propre'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래 '나름의/자신만의/고유한' 외에도 얼마 뒤 "멋진/훌륭한/아름다운"이라는 뜻을 갖고 있었다.
과연 KJV 초판은 어떤 의미로 proper를 썼을까? 즉 중요한 것은 KJV 초판 편집팀이 그리스어 '아스테이오스'를 어떤 의미로 풀이하여 proper를 갖다 붙였냐는 것이다. 성경상으로 고대 그리스어로서 아스테이오스의 본래적 어의들 가운데는, '특이한' 따위가 없다. 도시 출신 같으니 특이하다는 것인가?
필자가 참조해 본 그 어떤 성서자전에도 이 낱말에 그런 뜻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더구나 필자의 확인에 따르면, 이 낱말에서 파생된 변형이 쓰인 어떤 성구들도 그런 뜻으로는 쓰지 않았다. 바꿔 말하면, 성경에서는 이 낱말이 '특이한'의 의미로 쓰인 용례가 단 한 건도 없다!
그런데 우리는 흠정역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그것은 흠정역과 가장 닮은 번역이 다름아닌 NIV이기 때문이다! NIV는 이를 'no ordinary child'라고 옮겼다. 즉 '범상치 않은/평범하지 않은/비범한 아이' 정도이니까 그럭저럭 '특이한'에 가장 맞아 떨어지는 어의다. 흠정역 번역자는 NIV를 적당히 참고하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딴 역본들은 이런 뜻으로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흠정역의 오역은 물론 위선까지도 느끼게 만든다. KJV 우월주의 진영은 NIV를 늘 변개된 뉴에이지 성경이라고 저주/악평해오다시피 했는데, '아스테이오스'에 대한 흠정역의 번역은 NIV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더 놀라운 사실을 밝히련다. 이 낱말 '아스테이오스'는 이런 원형 형태로는 두 군데 쓰였다. 본문 외에 다른 하나의 용례는 바로 (사도)행전 7'20이다. 행 7'20을 '흠정역'은 어떻게 옮겼을까?
"그 때에 모세가 태어났는데 그는 심히 아름답더라. 그가 자기 아버지 집에서 석 달을 양육받다가"
그리스어 원문은 똑 같은 '아스테이온'을 썼는데도, '흠정역'은 사뭇 다른 뜻으로 썼다. 왜 같은 모세 아기를 한 쪽에서는 '특이한'으로 묘사하고, 여기선 '심히 아름다운'으로 썼을까?? 까닭은 바로 KJV 원문에 있다!
In which time Moses was born, and was exceeding fair, and nourished up in his father's house three months:
과연 KJV 번역팀은 어떤 생각으로 똑같은 낱말을 여기서는 'exceeding fair'로 옮겼을까? 왜 히브리서 11'23과는 사뭇 달라 보이는가? 그 연유에 대해 우리는 지대한 관심을 쏟아봐야 한다! KJV가 바탕을 둔 신약 원문은 에라스무스의 TR로 알려져 있다. TR은 KJV 유일/우월주의자들이 비잔틴 사본과 함께 그렇게도 열나게 자랑하고 사랑하고 거의 숭상하다시피 해온 사본이다.
TR의 행전 7:20 본문을 보자:
ἐν ᾧ καιρῷ ἐγεννήθη Μωσῆς, καὶ ἦν ἀστεῖος [τῷ θεῷ] ὃς ἀνετράφη μῆνας τρεῖς ἐν τῷ οἴκῳ τοῦ πατρός αὐτοῦ
(엔 호 카이로 에겐네테 모세스 카이 엔 아스테이오스 [토 테오] 호스 아네트라풰 메나스 트레이스 엔 토 오이코 투 파트로스 아우투. [ ]표는 필자의 것)
위에서 우리는 경악할 사실을 또 발견한다. 위 TR 본문에는 KJV에서는 눈 씻고 봐도 보이지 않던 토 테오/'τῷ θεῷ'(하나님께, 또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 보시기에라는 뜻도 됨)라는 부분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개혁주의자들이 그렇게도 강조하는 라틴어 문구 '코람 데오'(coram Deo)에 해당하는 말이기도 하다.
알고 보면, 모든 사본에 이 부분이 빠짐없이 들어있다! 그런데도 무슨 연유에선지 KJV에는 이 부분-'하나님께'-이 살짝 생략되어, 단지 'exceeding fair'로만 표기되어 있다! 'τῷ θεῷ'를 뺀 번역판은 그밖에도 ASV(미국표준판), DBY(다비역), WEB(웹스터성경), HNV(히브리명역), WEB(세계영어성경), 그리고 다름아닌 NIV가 있다!
반면 그밖의 대다수 성경들은 '하나님께'를 포함시켰다. 한글 개역/개정역도 그렇고, 독일어 역들도 모두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KJV의 이 번역이 그다지 원의(遠意)는 아니며, 더구나 오역은 아니라는 대다수 학자들의 공통된 주장을 본다. 히브리적 관념상, "하나님 보시기에"가 붙은 형용사는 보통 '심히', '굉장히', '엄청나게', '뛰어나게'를 의미한단다(참고: 창세기 10'9, 찬양시모음=시편 36'7; 80'11, 요나서 3'3). 즉 여기서 ἀστεῖος τῷ θεῷ(아스테이오스 토 테오)는 히브리적 최상급이란다. 그만큼 모쉐가 잘났다, 잘 생겼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또는 '신적인(divine) 미'를 가리킨단다.
그런데 아무리 히브리적 개념이 그렇다손 치더라도, 히브리적 개념이 '토 테오'를 생략하지는 않았음을 본다. 모쉐 아기가 그냥 너무 잘생겼다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다는 것은 사뭇 다르다.
만약 히브리적 최상급을 창세기 1장에 적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창세기 1'4,10,12,18,21,25에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는데, 그것이 모두 단지 최상급으로서 '심히 좋았더라'의 히브리적 표현이라면, 31의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또 뭐가 되는가? '최최상급'인가?? 그럴 경우는 히브리적 최상급 개념을 적용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가운데서도 가장 좋았더라"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히브리적 최상급의 적용이 애매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 보시기에'를 넣어야 맞는 것이다.
적어도 KJV의 'exceeding fair'나 흠정역의 '심히 아름다웠더라'는 은역(隱譯)이나 의역일지언정 직역은 아니다. 거기 비하면, 전술했듯이 대다수의 번역판들은 '토 테오'라는 문구를 어떻게든 살렸다. 즉 그 어느 번역판도 이 부분에서는 적어도 KJV나 흠정역보다는 더 직역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KJV 유일/우월론자들이 맨날 "가장 직역"이라고 떠들어 온 주장은 적어도 행 7'20에서는 먹혀들지 않는다.
히브리적 최상급이 적용된 예의 하나라면, 창세기 10'9이 있다. 곧 님로드가 예호봐(여호와)님 앞에 힘센 사냥꾼이라면, 아주 유능한 사냥꾼이었음을 시사한다는 것이다. 흠정역의 히 1'23의 그런 개념으로라면, 한글 개역의 '특이한 사냥꾼'을 빌려 '아주 특이한 사냥꾼'이라고 했다면 더 걸맞지 않을까? 그런데 흠정역은 그냥 '강한 사냥꾼'으로 옮겼다. KJV의 'a mighty hunter'를 따라서.
한데, 정작 문제는 이미 전술한 대로 형용사 '아스테이오스'를 KJV가 행 7'20에서는 'fair'로, 히 11'23에서는 'proper'로 서로 다르게 옮겼고, 같은 맥락으로 흠정역은 전자를 '아름답다'로, 후자를 '특이한'으로 일관성 없게 옮겼다는 점이다. 여기서 흠정역은, 같은 원어 낱말에다 서로 다른 영어 단어를 쓴 KJV를 무조건적으로 따랐음을 알 수 있다. 설령 통일한다 해도, 행 7'20의 해당 낱말을 '매우 특이하다'로 옮기기엔 좀 그랬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역으로, 히 11'23의 '아스테이오스' 역시 '아름다운'으로 했어야 했다. '특이한'은 아닌 것이다. 흠정역은 뜻은 같지만 어휘는 다른 동의어를 쓴 KJV를 따른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특이한'이 적확한 동의어도 아닌 것이다!
물론 이 점은 흠정역이 NIV와 함께 나누는 약점이기도 하다.
자, 그럼 KJV는 왜 똑 같은 원어낱말을 'fair'와 'proper'로 각각 다르게 옮겼을까? 첫째로, 행전과 히브리서를 옮긴 역자가 서로 달랐음을 금방 알 수 있다. 실제로 대충 부문별 성경 권서들을 맡아 각각 나눠진 당대의 6개 분과 번역팀들 중 제2옥스퍼드 분과의 10명 번역위원들이 복음서/행전/요한계시록을 옮겼고, 제2웨스트민스터 팀의 7명이 히브리서를 포함한 서신서를 옮겼다. 각 권서마다 모든 위원들이 다 함께(?) 검토했다고는 하나, 이 부분까지 상세히 못 봤거나 아니면 각 분과팀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똑 같은 원어 낱말의 서로 다른 동의어를 허용했을 수 있다. 아무튼 일관성이 없는 것만은 분명하다.
한글 흠정역은 그것을 다시 한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동일한 원어 낱말을 각각 상당히 다른 뜻으로 번역함으로써 다른 그 어떤 번역보다 일관성이 없게 된 데다 그나마 KJV의 'proper'란 낱말의 어의를 제대로(properly) 파악하지 못해 졸렬한 처리를 한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KJV를 맹종하다시피 함으로써 KJV 번역팀이 채택한 히브리적 최상급 개념인가를 살린 대신, 심지어 TR에도 있는 '토 테오'를 사실상 삭제함으로써 친KJV진영이 자랑해온 독자적이고 탁월한(?) '직역'노선을 벗어났다. 그 결과 한글 개역/개정역을 비롯한 그 어떤 다른 번역보다 직역이 아닌 의역이 됐을 뿐더러 오히려 그들이 더욱 혐오해온 현대역들인 NIV나 한글 새번역과 더 가까워졌다. 반면 그들 및 그들과 비슷한 KJV 유일/우월사상을 나눠온 안식일교 등이 가장 혐오하는 대상인 천주교의 공동성서는 '토 테오'를 라틴어 불가타경에 따라 나름으로 살렸다.
말하자면 흠정역 역자는 이 부분에서 그리스어 원문보다 KJV에 더 충실했던 것이다. KJV의 영문을 그리스어보다 더 높인 셈이 돼 버렸다. 실제로 수많은 KJV 유일/우월주의자들이 그리스어 원문들보다 KJV 영문을 더 높이는 우스꽝스런 뿌리 상실자들이 되어 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흠정역'이 똑 같은 원어 낱말 아스테이오스를 히브리서에서는 NIV에 가장 가깝게 옮겨 놓고는, 행전 7'20에서도 뜻을 통일한 NIV와 길을 달리 했다는 것. 행 7'20의 NIV역은 이렇다:
"At that time Moses was born, and he was no ordinary child. For three months he was cared for in his father's house.
즉, NIV도 KJV처럼 '토 테오'를 직접 포함시키지 않았지만, 적어도 뜻은 히 11'23과 통일돼 있다는 것이다. 이 통일성 면에서 '흠정역'은 그들이 그렇게 혐오하고 적대시하는 NIV만도 못하다.
우리는 지금까지 히브리서 11'23와 유사한 내용과 같은 원어 낱말을 담은 행 7'20을 KJV/'흠정역'이 각각 다르게, 그리고 후자를 의역한 것을 보았다.
그런데 내용상 이 대목의 오리지널은 바로 미쯔라임출국기(출애굽기)에 있다! 따라서 오리지널인 출 2'2의 의미 파악은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출 2'2의 히브리어 원문과 필자나름의 음역/직역은 이렇다.
וַתַּ֥הַר הָאִשָּׁ֖ה וַתֵּ֣לֶד בֵּ֑ן וַתֵּ֤רֶא אֹתֹו֙ כִּי־ טֹ֣וב ה֔וּא וַֽתִּצְפְּנֵ֖הוּ שְׁלֹשָׁ֥ה יְרָחִֽים׃
(봐타하르 하잇샤 봐텔레드 벤 봐테레 오토 키-토브 봐티즈퍼네후 셜로샤 예라힘.)
참고: *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읽는다.
* '봐'라는 발음은 '와'로도 읽힌다.
그 여인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보니까 아이가 잘생겨서 석 달 동안 숨겨 두었다. (필자 사역)
여기서도 모세 아기는 잘 생긴 아기로 나온다. 더구나 이 부분은 모세가 직접 기자로서 성령의 영감 아래 자신의 출생 배경에 관해 쓴 자전적 기록이다. 흥미롭게도 (고대의 그리스어 구약성경인) 70인경(LXX)은 여기서도 (히브리어 '토브'에 해당하는) 형용사 아스테이오스를 쓰고 있다! 즉 아기 모쉐를 묘사한 아스테이오스의 개념은 히 11'23에서든, 행 7'20에서든, 출 2'2에서든 공통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똑같은 낱말을 KJV에서는 또 다시 다른 영어동의어 'goodly'(잘생긴)를 쓰고 있다. 그렇다면 흠정역이 (히 11'23에서) '특이한'으로 잘못 옮긴 것도 본디 '잘생긴'이어야 하는 것이다!
행전 7'20은 순교집사 스테판이 유대교 법정인 산헤드린 공회에서 한 증언의 한 대목이다. 스테판은 어떻게 모쉐 아기의 이 스토리를 익혔을까? 바로 당대 유대인 사회에서 널리 통용되던 LXX의 출 2'2를 통해서였다! 즉 LXX의 이 성구에서 아스테이오스를 자신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같은 내용을 담은 히브리서 11'23의 아스테이오스도 당연히 그런 뜻으로 옮겨져야 한다. (참고로, 친KJV 측은 LXX를 훨씬 후대인인 오리게네스의 '헥사플라'였다고 주장한다. 물론 어불성설이다.)
이 점에서 '흠정역'은 핀트가 영 안 맞는다.
이제 이 오리지널 기록의 다른 주요 번역들을 살펴 보자.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개역개정)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달을 숨겼더니 (개역한글)
아내가 아기를 배어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너무나도 잘생겨서 석 달 동안을 숨겨서 길렀다. (공동번역)
그 여자가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하도 잘 생겨서, 남이 모르게 석 달 동안이나 길렀다. (새번역)
그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녀는 그 아이가 아주 예쁜 것을 보고 석 달동안 그를 숨겨 오다가 (현대인의성경)
and she became pregnant and gave birth to a son. When she saw that he was a fine child, she hid him for three months. (NIV)
The woman conceived and bore a son; and when she saw that he was beautiful, she hid him for three months. (NASB)
히 11'23, 행 7'40에서 '범상치 않은 아기'를 고집해온 NIV마저도 여기서는 'a fine child'로 했다. 왜 그럴까? NIV의 공동번역팀의 신약/각권별 역자팀은 서로 입을 맞췄는데(?), 미쯔라임출국기를 맡은 구약학/히브리어 학자와는 미처 미리 입을 못 맞췄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어쨌든 NIV가 이 구절에서 신/구약 사이에 일관성이 없다는 뜻이겠다.
KJV는 똑같은 낱말 '아스테이오스'를 각각 goodly, fair, proper 등 세 가지 동의어로 나눠 옮겼다. 히브리어와는 달리 영어엔 동의어들이 풍부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서로 다른 KJV 번역 분과가 각기 개성이 달라서였을까, 아니면 각각 자존심이 강해서였을까? 아무튼 분명한 것은 흠정역도 이를 그대로 답습하여 엇비슷이 서로 다르게 옮긴 셈이다.
흠정역의 출 2'2는 이렇다:
그 여인이 수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가 준수한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다른 모든 번역들은 '잘생긴' 정도로 했고, 흠정역은 여기서 한글개역과 같은 '준수한'이란 형용사를 썼다. 물론 '잘생긴'과 '준수한'에 큰 차이야 없겠지만, 흠정역은 결국 똑같은 아스테이오스를 준수한/아름다운/특이한으로 각각 다르게 옮겼고, 이 과정에서 '특이한'은 명실공히 특이한 어의를 갖다 붙인 것이다. 즉 흠정역은 성경 원문이야 어떻든, 어디까지나 KJV를 위하여 KJV에 충성한 셈이다! 정동수님은 사전에 이를 의식하고도 철저히 KJV에 충성(?)을 바친 것일까? 그런 의미에서 KJV 유일주의/우월주의의 맹점이 여기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한 가지 새로 발견한 흥미로운 사실은 다국어성경 HolyBible 사이트에 언제부터인가 흠정역이 슬며시 추가됐다는 것이다. 그냥 http://www.holybible.or.kr의 초기화면으로 들어가면 흠정역을 찾기 어렵고, 통합검색난으로도 안 나온다. 그러나 흠정역은 구글링을 하면서 따로 성구를 찾으면 http://www.holybible.or.kr/BIBLE_hkjv/로서 나타난다. 다국어성경 HolyBible 사이트의 안팎다른 이중성(?) 같은 것을 느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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