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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General Topic

아브라함의 영적 후예들




아브라함의 영적 후예들


김삼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를 도덕종교쯤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삶 속에서 도덕과 철학을 실천한 위대한 철학자였다는 둥, 사상 및 교훈과 행동이 일치한 탁월한 윤리교사였다는 둥 그런 발상들을 가르치고 배우곤 합니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맞는 부분도 있고, 그래서 그럴 듯해 뵙니다.

그러나 기독교를 그 정도로 알았다면 세상 종교와 큰 차이가 없겠지요. 결국 모두 상대적이고 절대신앙은 없는 양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서로 다른 종교인들은 자기네 종교를 절대시 내지 절대화하지요.
 
또 자기 입맛대로 적당한 신을 골라서 예절과 순서를 갖추어 섬기고 제물을 바치며 경배하고 계시의 경전에 따라 그 신을 위해 적당히 종교생활 하면서 살아가면 된다는 식의, 의식종교 이상으로도 생각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모두가 기독교를 잘못 알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첫 인상을 그릇 지닌 결과입니다.

성경을 보면, 창조주 하나님은 태초에 인류의 선조를 내셨으나 첫 불순종과 범죄의 모습을 보시고 구원의 길을 여시기로 하셨으며, 경건한 사람들을 얻으려 하시다가 죄악으로 점점 타락해가는 모습을 보시고 홍수로 일차 세상을 청소하신 뒤, 칼데아 우르의 아브람이라는 사람을 언약의 사람으로 택하셔서 그 후손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되, 그 후예의 한 분인 메시아(=크리스토), 예수님을 통해 그 분 안에서 그 분을 믿는 사람들을 영적인 아브라함의 후예로 택하여 구원과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 분이 가장 높으신 분 전능자 (엘 솨따이)절대자 하나님이시며 그 분의 말씀이 곧 절대계시이고, 절대진리입니다! 그 외에 다른 참 진리는 없습니다. 세상의 '선'과 '진리'라는 것은 모두 단편적인 그림자에 불과하지, 진리의 실체는 아닙니다. 선의 절대 기준은 곧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신 하나님과 예수 크리스토님과 그 분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예컨대 고대의 그리스를 올림포스 제신들을 중심으로 한, 철학적이고 지성적, 예술적인 대단한 신정국가나 모범 종교국가로 여깁니다. 그러나 약 이 천년전 그곳 중심지 아테네를 방문한 파울(바울)이라는 예수님의 사도는 그곳 저자 거리에 즐비한 수많은 신상들을 보며 "아테네 시민 여러분,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종교성이 다분하군요. 하지만.."이라 전제하고, 창조주와 생명과 부활의 진리인 기독교를 설파합니다.


이처럼 종교성과 기독교 진리는 판이하게 다른 것입니다. '종교성'이란, 생명 없는 허식과 관행, 전통과 의례만의, 생명 아닌 생각 속의(!) 외식적 신앙이지, 생명을 살려 존재와 삶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구원을 주는 존재가 못됩니다. 그런데도 이교 신화와 최신 유행 사상 따위를 즐기는 아테네 철학자들은 파울을 또 하나의 새로운 사상가 정도로 여겼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죠.


오늘날도 이런 불행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남녀의 외모나 신체의 균형미를 갖고 '신'이라느니 '여신'이라느니 용어를 남발합니다. 기분학상 표현이겠지요. 그리스인들은 공상 속의 제신들을 그들이 만든 미적이고 예술적인 조형물을 갖고 표현하며 신화(神化)했는데 오늘날은 그처럼 외적, 육적으로 직접 얼굴과 몸매무새를 잘 다듬은 사람들을 선호하며 대놓고 신격화하는 모양입니다.

암튼 이 모두가 육적 종교나 숭배의 모습이지, 참된 영적 진리의 현상이라고 할 순 없지요.


다시 아까 얘기인데, 하나님은 칼데아-우르의 신상 제작가의 아들인, 한 세속 소시민에 불과했던 아브라함을 직접 찾아오셔서 그와 일방적인 언약 관계를 맺으십니다. 즉 하나님을 믿고 의존하기만 하면, 그를 복 주어 영원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겠다는 약속이었죠.


이 언약 관계 속에서 아브라함의 한 후예로 위대하고 유일하신 참 메시아(크리스토=기름부음 받으신 분)이신 예수님이 오셨고, 이 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먼 이방 땅인 대한민국에도 복음이 전해져 오늘날 여러분과 제가 진리와 사랑 가운데 서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세상 사람들은 늘 두려움 가운데서 종교생활을 합니다. 악귀나 액운을 내몰기 위해 굿이나 푸닥거리를 하기도 하고, '재수' 좋고 운수대통하는 삶을 위하여 꼭두새벽에 정화수를 떠 놓고 손바닥을 부비며 천지신명에게 빌거나, '서낭당'에 돌을 던져 쌓아보기도 하고, 모종의 '신'이나 귀신을 골라잡아 그에게 아가리에다 지폐 쪽을 물린 돼지 대가리 따위를 바치고 섬기기 시작하고, 그래서 이름이 있거나 없는 추상적인 신을 숭앙하게 되며, 거기서 어떤 위안을 받아 나름의 복을 누리며 두려움을 극복하려고들 애씁니다.


이같은 것은 참 진리의 계시 신앙일 수가 없습니다. 절대자이시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사람을 직접 찾아오셔서 구원의 길을 여신 언약신앙이야말로 우리가 바랄 만한 유일한 참 진리입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한겨레이고 동양인이니 우리 식의 신과 도덕으로 충분하다..서양귀신이나 서양종교는 안 믿는다..따위의 발상은 너무나 몰이해적인 생각입니다. 


동양과 서양의 지역적 차이에 국한되는 신이라면, 그야말로 상대적인 보통 신이지, 절대자일 수가 없지 않습니까!? 고대에 중동에도 유행하던 '지방신' 개념에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선언하십니다. 아브라함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선택하시되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아, 예수 크리스토님을 믿기만 하면, (대한민국 사람이든 누구든) 예수님 안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구원과 복을 받는다고! 그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 '복' 얘기를 꺼내면, 또 한국인들은 언뜻 으레 '기복주의'라는 개념을 내세워 꺼리는 성향이 있습니다. 아니 자기네들은 누구나 새해 벽두에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얘기를 서로 하면서도, 꼭, 정작 기독교와 관련해서는 '기복주의'라고 뒤집어 씌웁니다. 아마도 '기독교의 복'을 싸잡아 통째로 '기복'이라고 인상을 지우려는 모양새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말한 (그림자 격인) 창세기 17장과 서로 입을 맞춘 (실체 격인) 갈라티아서 3장을 읽어보면, 아브라함의 복은 예수님 안에서 그분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대물림되고 전수되는 실제적인 복입니다! 추상적인 복이 아니라 명실공히 '완전 대박'이라는 것입니다.

흥부전에서 놀부의 동생 흥부가 제비의 다리를 고쳐주어 얻은 박씨를 심어서 자라나고 익은 박을 켜다 '깜놀'의 보물을 얻은 얘기는 그야말로 전설 속의 물적인 복에 불과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아브라함의 복은 영적, 혼적, 육적, 물적인 모든 복을 말하는 다차원적, 입체적인 복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이었던가요.. 창세기 14장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의 선조로 선택 받은 인물인 그는 소돔과 고모라 등 5개의 고대 소도시 국가를 침범한 동방의 4 제국 연합군 때문에 소돔에 살던 자기 조카 롵이 가족친척과 함께 포로로 잡혀가자, 하나님의 도움으로 직접 자기 집안에서 훈련시킨 군대를 거느리고 4 제국 연합군을 물리친 혁혁한 전승 영웅으로 돌아오던 개선 길목에서, 지존자 엘리욘, 곧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사제(제사장)로서 또 다른 도시국가 샬렘의 왕이었던 멜키쩨뎈의 축하와 축복을 받습니다.

멜키쩨뎈은 하늘땅의 소유주(코네 샤마임 봐 아레츠)이신 지존신(엘 엘리온)의 이름으로 아브라함을 축복합니다.


하늘땅의 소유주와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라면 한 마디로 그 이상 누가 없다는 뜻이죠! 그런데 그런 분을 믿는 우리에게 뭐가 부족하겠습니까. 이스라엘 왕 다뷔드는 시편 23편에서 "예호봐님은 나의 목자, 나 아무런 부족함도 없네!"라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이의 메아리라고 할 수 있는 신약성경 요한복음서 10장을 보면, 선한 목자이자 양들의 문이신 주님께서는 양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더 풍요롭게 하시려고 오셨다 했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이 우리의 영과 혼을 구원하시고 새롭게 하시며, 몸을 강건케 치료도 하시고, 물적인 풍요도 주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직접 말씀하시길 "은도 내 것! 금도 내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또한 그분은 참 의사이신 예수 크리스토님을 통해 수많은 환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겠다는 진리 안에서 무슨 '기복주의'가 왜 있는 것입니까?!


사실 하나님께 복을 빌지 않는(=기복/祈福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복이 필요 없는, 하나님과 상관 없는, 그 분과 무관한 사람들이라는 게 제 주장이 아닌 성경의 교훈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하나도 빌지 않으면서 다른 교우들을 빗대어 '기복', '기복' 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위선자들입니다. 내심으로는 복을 받기 바라면서도 겉으로는 복을 피하는 체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비판적 의미의 기복주의란, 참 신이신 하나님이 아닌 딴 대상에게 복을 잘못 비는 것이 기복주의입니다. 그게 바로 미신이고 샤머니즘입니다.
 
기복주의자가 되기 무서워 이 하나님의 입체적인 복이 필요 없다는 사람들은 그냥 영혼만의 복을 달랑 받고 육적/물적인 복을 극력 피하여 받지 말고, 평생 가난하고 병든 채 살아가기를 역설적으로 축복(?)해 봅니다. 말이 되는 얘기인가요, 이게?

그렇다면 "나야 지금 정상이고, 돈 있고 의사 있는데 뭘~!?" 할지 모릅니다. 그런 교인들은 정작 어려움이 닥쳐봐야 하나님의 참 복의 의미를 뼈저리게 깨달을 터입니다.


우리는 이방인으로서 예수님을 믿어 아브라함의 후예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서 아브라함의 모든 복이 나의 복으로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복은 영적이고, 혼적이고, 육적이고 물적인 모든 복을 포함합니다. 믿거나 말거나.
이 복을 현재 예수님 안에서 내가 누릴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복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불신하면 불행하고 유감된 일입니다.
그런 분은 구원은 턱걸이로 간신히 받을 수 있겠지만 정작 구원 저너머 하늘 상급도 받을 수 있는, 더 큰 일을 할 기회와 자원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구원이 제일이지, 나만 구원받으면 됐지, 뭐 남이야.." 한다면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입니까.

복음이란, 내가 받은 구원과 복을 남과 나눌 수 있어야 진정한 복음이죠!
그래서 제가 오늘도 독자들과 약속된 이 복을 더불어 함께 나누려고 목청껏 외쳐보는 겁니다.


시편 65편 11절 이하를 보니, 하나님은 그분의 은택으로 한 해를 금관 씌우신(crown a year) 결과로, 그 해의 열매와 복을 누린다고 했습니다.
티엘티 사람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택으로 올 한 해에 금관이 씌워져 온갖 열매와 복을 누리는 풍요로운 삶이 되길 축복합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고 멜키쩨뎈을 통해 그에게 복 주신
하늘땅의 소유주, 가장 높으신 하나님 곧 엘 엘리온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곧 엘 샤다이-
곧 전능하신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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