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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슈

성령침례-무엇이며 어떻게 받나?




김삼


들어가는 말

용어부터 정리해 보자.
필자는 처음부터 여지껏 장로교인이지만, 개인적으로 한글 초기 성경의 번역어인 '세례'라는 낱말보다 '침례'라는 말을 원어 '밮티조'/'밥티스마'(우선적으로, 물 속에 잠김, immersion)에 보다 더 근접한 어의로 본다. 물론 밮티조에 씻음의 의미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처음부터 단지 가벼운 물 뿌림이거나 물가에서 씻은 게 아니기에, 물 속에 잠겼다는 개념이 중요하다! 파울의 로마서 6:2-5 문맥과 콜로새(골) 2'12의 분위기도 이에 더 걸맞다. 그리고 잠김보다 씻음을 강조하는 세례 개념은 초기교회에서 온 게 아니라 천주교에서 왔으며, 따라서 '세례'는 초기 한글 성경 역자들이 천주교 영향을 받아 첫 단추를 잘못 낀 번역어다.

고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마치 물 속을 지나듯 홍해 물벽 사이를 통과한 것처럼(코린토A=고전 10'1,2), 나병(흉한 죄를 상징)을 고침 받을 때의 나아만처럼(왕들B=왕하 5'14), 예수님께서도 요르단 강물 속에 잠기셨다가 물 밖으로 나오셨다(마태복음서 3'16). 성령으로 채워지는 성령침례(일명 ' 성령세례 ')는 더구나 그렇다는 생각이다. 그렇다고 누구나 침례교인이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성령론 특히 성령침례에 대해 긴 얘기를 쓰자면 끝도 없을 수 있지만, 일상이 바쁜 독자들을 위해 비교적 간결하게 쓰려고 한다. 이 글이 길어 보일지 몰라도 책 한 권의 길이에 비길 순 없다.  

가끔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이런저런 성령론 관련 책들을 보면서, 거의 책마다 서로 다른 주장들이 난무하는 데 놀란다. 한 주님, 한 성령님과 한 교회 안에서 더구나 한 성경을 갖고 왜 서로 생각들이 이처럼 다를 수 있는지? 

신학자나 성령론/성령침례 관련 저자와 집필가들은 장황한 논리와 눈부신 논술을 화려하고 뻑적지근하게 펼친 두꺼운 책을 만들기보다, 직접 성경에 기초하여 좀 짧게 써서 독자들의 부담을 덜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바쁜 현대사회 속 비신자들에게 구원이 시급한 만큼, 신자들에겐 성령침례가 시급하며, 무엇보다도, 성경기자들, 그리고 다름 아닌 주님 자신과 사도들이 지극히 간결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성령침례에 관해 장황하고 복잡한 교리와 이론을 전개하지 않는다! 다만 행전 등 여러 권서(券書)에서 그 실제를 보여 주고 있다. 이 실제라는 게 중요하다.


   성령침례는 누가 베푸는가..성령침례자는 누구?

그럼 성령침례(the baptism in the Holy Spirit)란, 과연 무엇일까?
그 답을 알기 전, 우리는 성경의 순서대로 따라가 보도록 하자. 성경은 성령침례의 뜻을 상세히 설명하기 보다 우선 성령침례를 누가 주시는지부터 밝혀 준다.

침례/세례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침례를 베풀었지만, 그 분은 여러분에게 성령으로 침례를 베푸실 터입니다." (마르코스복음서=맑 1:8. 이하 성구 사역)
   
성령침례를 직접 언급한 신약 구절의 하나인 여기서, 침례요한은 자신이 주는 물침례와, '그 분' 곧 예수님의 성령 침례를 분명히 구분한다. 따라서 물침례와 성령침례는 엄연히 서로 다른 것이다. 신자는 누구나 물론 물침례도 받아야 하지만, 성령침례도 따로 받아야 한다.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일부 교파들이 자기 교파의 우월성(?)과 독특성을 강조하는 나머지, 마치 자기네 식의 세례와 동시에 성령세례도 자동으로 받게 되는 것처럼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성경적이며, 어떤 점에선 위험하다.

보통은 물침례를 성령침례보다 먼저 받기 마련이지만, 개인에 따라 순서가 바뀌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예: 행전 10'47,48 비교: 행 19'2-5). 

사도 요한은 침례요한의 말을 다음과 같이 풀어 설명한다.

   "그리고 요한은 증언하여 말했다: '나는, 성령님이 하늘에서 비둘기처럼 내리셔서 그 분 위에 머무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도 그 분인 줄은 몰랐댔지요. 그런데 나에게 물로 침례를 베풀라고 하신 그 분이 내게 말씀하시길 '성령님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시는 것을 보면, 그 분이 곧 성령으로 침례 베푸는 분인 줄로 알라'고 하셨습니다.' " (요한복음 1:33)

따라서 우리는, 물로써 침례를 베푸는 것이 (물)침례이듯, 성령침례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침례를 베푸시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단 이것을 정리해 보자. :

   성령침례: 성령으로 침례(잠김)를 받음
   성령침례자: 예수 크리스토님

그러므로 세상의 누구도, 그 어떤 교회나 제도도, 성령침례를 받을 수 있게 말씀으로 도울 수는 있을지언정, 직접 성령침례를 베풀 수는 없음을 알아야 한다.


   아버님께 성령침례를 몸소 앞서 받으신 성자님

여기서, 한 가지를 독자에게 묻는다: 주님 자신은 성령침례를 받으셨을까?
답은, 물론이다. 주님은 아무 죄도 흠도 티도 없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세상 죄인들처럼 물침례를 받으신 것은 물론이고, 이어서 성령침례도 받으셨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성령님이 하늘에서 내려 그 분 위에 임하여 늘 머무셨기 때문이다.

과거 구약시대에 성령님은 지도자/대언자((=선지자/예언자)/사제(제사장)/장로/판관(사사)/왕..들에게 사역적으로 임하여, 시시때때로 함께 하시어 그들의 직능에 도움을 주셨으므로, 영구히 머무시지(내주/內住하시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에겐 성령님이 내려 늘 머무셨으므로, 항상 능하신 권능을 행하실 수 있었다. 비록 주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항상 하나님이시지만, 땅에서 사람으로도 계실 때 지상사역을 성령으로 행하셨지,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고유하고 전능한 권능을 사용하신 게 아니었다(행전 10'38 참조. 이 점에서, 흔히 신학자들 다수가 혼동한다).

또, 성령님은 곧 성부 하나님, 곧 아버님의 영이시기도 하다. 아버님이 아드님께 늘 머물어 계셨다는 뜻이다(요복 10'30; 14'9-11; 17'21). [성령님은 아울러 성자-크리스토 예수-님의 영이시다.]

이처럼 주님은 당신께서 몸소 아버님께 성령침례를 받으셨기에, 이제 아들로서, 교회의 머리로서 신자에게 성령침례를 베푸시는 분이다. 그 밖에 그 누구도 성령침례를 베풀 수 있는 권위나 권능이 없다!
그러므로 어떤 사역자에게 안수를 받아 성령침례를 받게 됐더라도, 그 안수자가 성령침례자가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혹 교계 명사 누군가의 소위 '임파테이션'을 통해, 방언(이하 '영언'/靈言[각주:1]으로 표기)을 하게 됐더라도 그 명사가 성령침례자가 아니다.


여기서 주님이 아버님께 받으신 성령침례는 우리가 받는 성령침례와 같지만, 한 가지 다른 면모가 있다. 바로 영언이다. 주님은 성령침례를 받으셨어도 신약 성도들처럼, 영언을 하지 않으셨다. 그러면서도 그 분이 우리에게 성령침례를 베푸실 때는 영언이 나타난다.

왜 그럴까? 주된 까닭은, 주님에겐 사실상 영언이 불필요했기 때문이다.

주님은 부활 후 제자들 주변을 오가시며 40일 머물어 계시다 최종 승천하셨다('최종 승천'이란 표현은 주님의 승천이 한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주님의 승천이 한 번뿐이었다고 하지 않는다. -> 참고, & [각주:2] . 더욱이 제자들의 경우, 주님이 승천하신 뒤 지상에 성령을 내려 주셔야 했으므로(요복 7'39 참조) 주님이 설령 영언을 하신다 해도 아직 성령도 은사도 받은 적이 없는 제자들이 그런 현상을 이해할 리도 없고, 일일이 통역해 주시지 않으면, 뜻도 전혀 몰랐을 터이다.


   성령침례는 누가 받는가? 수례자(受禮者)는 누구?

여기서..성령침례를 누가 받을 수 있는가, 곧 성령침례 수례자는 누구냐는 물음이 자연스레 뜬다. 간단히 말하면, 참 신자 곧 거듭난 사람이다. 세상-곧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성령님을 받아 모실 수도, 성령님을 알지도 못한다(요복 14'17). 복음을 먼저 듣고 받아 들인 뒤에야 가능하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거듭남-성령침례의 과정이 거의 동시적일 수도 있다.
거듭나려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주님/구주로 속에 모셔 들여야 한다(로마서 10'9,10). 예수 크리스토님을 주님과 구주로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입술과 혀엔 믿음을 표출하고 작동화하는 권능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입술과 혀만으로는 안 되고 마음으로 믿어야 한다.
바로 위에서도 말했지만, 비신자는 성령침례를 받을 수 없으나, 거듭남과 거의 동시에 받을 수도 있다.


   도대체 '성령침례'란 무엇인가??

독자는 여기까지 읽으면서도 과연 성령침례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확실한 감이 아직 쉽게 잡히지 않았을 터이다. 이제 그 의미가 더 밝혀진다.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그대들은 오래지 않아 성령으로 침례 받을 것이오.' " (행 1'5)
  
주님이 최후대명의 일부로서 하신 이 말씀은, 바로 며칠 후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성령침례임을 확실히 해 주고 있다. 즉 오순절 성령강림이 성령침례와 같다는 등식을 발견한다.

자, 그렇다면 행전 2'4 에 나타난 오순절 성령강림의 특징이 뭔가?
우선적으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영언이다. 따라서 누구든 성령침례를 받기 원하는 신자라면, 으레/반드시, 영언을 할 것을 기대해야 한다. 만약 영언이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더라도, 2000년전 성령께서 이미 모든 신자 개인에게 언변을 주셨기에, 믿음으로 혀를 내 맡기고 움직여야 한다[각주:3]!    

많은 신학자/사역자/신자들은 성령침례가 가장 일차적으로 영언을 의미한다는 진리를 부정하려 든다. 마치 영언이 성령침례와 무관한 양, 영언을 하지 않고도 성령침례를 받을 수 있는 양 주장하기도 한다. 그들이 그러는 이유 몇 가지를 이해한다. 필자도 과거 그랬기 때문이다.

그 이유란..

   1) 엄연히 어제와 오늘, 늘 한결 같으신 하나님의 불변성/영원성/권능을 이해 못한 잘못된 신학이론(신학은 하나님을 바로 알려는 학문이니, 성경에 나타난 성령님의 뜻을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은 신학이 아니다!)인 소위 '중단론'/'종식론'(cessationism) 탓이며[각주:4],
   2) 추구 실패 경험 등으로 인한 현대 영언에 대한 불신감,
   3) 현대 영언 현상에 대한 거부감 탓이기도 하며,
   4) 타 종교 등의 '영언', 즉 거짓 영언과의 혼동 탓이다. 그러나 가짜가 있으면, 반드시 진짜가 있다!
   5) 한 가지 추가한다면, 현대 교계에 팽배해 온, 비성경적인 소위 ' 신사도개혁운동 '(NAR)에 대한 반감 탓이기도 하다. NAR은 기존 오순절적 체험을 적극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식론은 안티 NAR 운동에 편승해 과거보다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이유로 영언을 거부하는 것은 알고 보면, 기실 성경 진리에 대한 불신이다. 그런 이유가 성경대로의 성령침례로서의 영언을 거부하는 타당한 근거나 핑계거리가 되지 못한다. 더욱이 그런 이유들을 지도자/신학자/사역자가 역강조할 경우, 교회와 성도들의 피해는 심각하다. 바로 필자가 그 피해자의 한 명이다. 수십 년간 영언이 전혀 불필요한 줄 알았으니까! [ 영언에 관한 더 상세한 것은 ' 영언 ', ' 방언 ' 등으로 티엘티를 검색하기 바란다. ] 


성령침례와 영언이 직결돼 있다는 것은 추가적인 성경 말씀이 명백히 증거해 준다.

   " '믿는 사람들에겐 이런 표징들이 따를 테니, 내 이름으로 그들이 악령들을 내쫓고, 새 언변(글로싸/영언)을 말하며,' " (맑 16:17)

역시 주님의 대명의 일부인 위 말씀에서, '새 언변..'이란 곧 영언을 가리킨다. 이 말씀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제자들이 권능을 받을 것(및 그 일부로 영언을 하게 될 것)을 알려 주고 있어, 성령강림과 그 이후 사도/집사들의 행적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만약 위 말씀까지도 부정하거나 의심하려거든, 다음 말씀을 눈여겨 보길 바란다.
필자가 아닌 사도-쉬몬 페트로(시몬 베드로, 케파=게바)-가 하는 말이다. 
 
   "내가 말을 시작하자, 성령님이 그들 위에 내리시되 처음에 우리에게 하셨던 것처럼 그러셨습니다. 그 때 나는 주님 말씀-'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그대들은 성령으로 침례를 받을 거요'-하신 것이 생각났어요." (행전 11:15,16)

페트로가 어떤 사건을 회고한 내용의 위 말씀에서, 분명히 자신이 눈과 귀로 보고 듣고 느낀 사건을 성령침례와 동일시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페트로가 본 광경은 무엇이었을까? 그 앞 장의 다음 구절에 잘 설명돼 있다.

   "페트로가 이 말을 하고 있는 동안, 성령님이 말씀을 듣는 모두에게 내리셨습니다. 페트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유대인) 신자들은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부어지심에 놀랐습니다. 그들이 영언을 말하면서 하나님을 드높이 기리는 것을 그들은 들었기 때문입니다.." (행 10'44-46)

페트로는, 요빠에서 "부정한 짐승들 보자기"의 하늘 환상을 보고 난 뒤, 케사리아(가이사랴)에 사는 로마 제국군 켄튀리온(백부장)인 코르넬리우스[각주:5]의 가정 모임을 이끌면서, 성령님께서 이방인들인 코르넬리우스 가의 온 식구들에게 내리셔서 모두들 영언을 하는 광경을 보고 들으며 놀란 것이다.

오순절 성령강림 당시 분명히 현장에 있었던 페트로조차도 이제서야 과거 주님이 말씀하셨던 성령침례가 뭔지를 깨달은 것이다. 지금까지는 영언과 성령침례의 연계에 대해 다소 긴가민가 했었다는 얘기다. 이것은 약간 뜻밖이다. 왜냐 하면, 페트로는 오순절 때 말고도 이미 이런 일을 앞서 한 차례 겪은 바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사마리아(히브리어: '쇼메론')의 성령침례 사건이다(참고: 행전 8'14-17).
 
사마리아에서 (사도 필맆 아닌) 집사 필맆이 놀라운 이적을 행하며 전도하여 수많은 결신자를 얻었으나, 아직 성령님이 임하시지를 않자, 예루샬렘 교회에서는 페트로와 요한을 파송한다. 페트로/요한이 사마리아 신자들에게 안수를 하자, 그들은 성령을 받고 뭘 했을까?

신학자 다수는 본문을 문자로만 이해하여, 이 때 사마리아 신자들이 영언 같은 건 안 했다고 흔히 주장한다. 본문에 그런 사실이 "없다"면서.  
그러나 예루샬렘의 대마술사 쉬몬은 호기심이 많아 페트로/요한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둘이서 안수할 때 성령 받는 것을 분명히 "봤다"고 루카(누가)는 기록했다(행 8'18). 루카는 당대의 의사/과학자였기에 사실적으로 기록했다. 성령님은 눈에 보이질 않는데, 뭘 '봤다'는 말일까? 물론 영언 광경이다! 그래서 놀라며 자신도 그런 권능이 탐나서 돈으로 사려고 했던 것이다. 만약 신학자들 주장대로 영언 현상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면, 쉬몬이 뭘 보고 그리 탐냈는지 불분명해지고 앞뒤가 맞지를 않는다.  


행전은 그리고도, 샤울(사울. 훗날의 파울)의 변화 후 성령침례도 증거한다(행 9'17). 이 사건에 대해서도 신학자들은 샤울이 영언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샤울이 이때 영언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해서 코린토 교회의 모든 교우들보다 파울이 더 많이 영언을 하게 된 것인지 설명이 되지를 않는다(코린토A=고전서 14'18). 

신학자들 일부는 또 다시 본문을 문자적으로만 보고, 샤울이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아 성령충만해졌지 어떻게 성령침례를 받아 영언을 했다고 하느냐고 물을지 모른다. 신학자들은 '성령충만'이 뭐라고 이해하려는지는 모르나, 여기서 '충만'에 해당하는 동사 원형 '핌플레미'는 '채우다'란 뜻이다. 이 때 샤울은 성령으로 채우심을 입었고, 따라서 성령침례를 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영언은 너무나 지당한 것이다!


이후에도 물론 에페소 교회(행 19'6), 코린토 교회(코A 14장 참조)..등등 기타 교회들의 성령침례가 이어졌다. 신학자들처럼 본문을 문자적으로만 따져서, 안티옼 교회 등 어떤 교회들이 영언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면, 성령님이 교회 일부를 차별대우 하셨다는 얘기 밖에 되지를 않는다.

이 여러 사건들이 수 년 내지 수십 년 간격으로 일어났다. 오늘날까지도 이어진다. 왜 그럴까? 예수 크리스토님은 어제나 오늘, 늘 한결같으시기 때문이다(히브리서 13'8)! 그리고 대언가 요엘이 말한 그 '말세'는 일시적 말세가 아니라 현대까지 이어지는 말세임을 명심불망하기 바란다(행전 2'17 참조). 


여기서 잠시..
마태/루카가 침례요한의 말을 인용해 기록한(마 3'11, 뤀 3'16) '(성령과) 불의..침례'는 무슨 뜻인가? 불침례(불세례)란, 성령침례와 달리 따로 별도의 것이라기보다 성령침례에 포함된 요소이다. 이에 대해선 행전 2'3을 참조하기 바란다. 성경은 불침례에 관해 깊은 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루카복음서(눅) 3'(16),17에 근거해 보면, 죄의 정화, 불심판 등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관해 개인의 경험을 연계시켜 지나친 해석을 하면, 바람직하지 않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신사도운동이 그런 성향을 강하게 풍긴다.  


이상과 같이, 성경이 말하는 대로의 성령침례를 간단히 논해 보았다.
다시 강조하지만 성령침례 수례자들 곧 모든 신자들은 반드시 영언을 하게 돼 있다!

[ 재언급하지만, 영언에 관해서는 본 블로그의 다양한 관련 글들을 검색해 참조하기 바란다(검색어: 영언 방언 ). ]

또, 향후 기회가 있으면, 성령침례에 관한 추가적인 것을 상론해 보련다.


  1. '방언'(지방언어/사투리 곧 지상언어) 역시, 한글성경 초기 번역자가 첫 단추를 잘못 낀 번역어다. [본문으로]
  2. 필자의 다음 글도 참조하기 바란다. '왜 마리아가 못 만지게 하셨는가?' [본문으로]
  3. 코린토A(고전)서 12'13이 이를 뒷받침한다. [본문으로]
  4. 개혁주의권에서 주로 주장하는 매우 비성경적인(!) 소위 '중단론' 내지 '종식론'에 관해서는 본 블로그의 성령/영언(방언)/은사 등에 관한 다양한 글들을 검색해 보기 바란다. 성령님의 권능/은사/영언/신유 등의 '중단'/'종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행전 2'17의 '말세'가 일시적인 말세인지 영구적인 말세인지부터 가름해야 옳다! 개혁은 성경과 성령님의 뜻 자체를 뜯어 고칠 순 없다. 그리고 성경 아닌 개혁주의 신학이 더 옳다는 발상은 어리석다. 그런데도 개혁주의 유일/숭상/우위 사상이 웹에 매우 흔하다. 그렇다고 개혁신학이 다 그르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필자는 개혁신학에서 성경과 일치하는 부분만 동의할 따름이다. [본문으로]
  5. 한글성경 표기: 고넬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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