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inting by Lady Barbara Brassey
예수 승천은 딱 한 번?
-감람산 승천 사건 이외의 승천 포텐셜
김삼
"예수님은 딱 한 번 지상에 오셨다가 딱 한 번 승천하셨다."
- 아마 대다수 독자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일회승천설 내지 승천단회론은 성경에 밝지 못했던 카톨맄 신학자들의 오판을 대다수 개혁가들이 생각없이 대물림한, 대표적인 잘못된 교리다. 예수님은 최소한(최소한이다!) 두 번 이상 승천하셨다는 명백한 증거가 다름 아닌 성경 속에 있다. 즉 주님은 감람원(the Olivet) 승천 한 번이 아니라 적어도 두 번 이상 하늘 땅 사이를 오르내리셨다는 얘기다.
먼저 짚고 넘어갈 사실은..카톨맄 신학의 주장처럼 주님의 승천이 '꼭 한 번', 즉 일회성 이벤트일 필요가 있느냐는 것. 천사들은 수도 없이 하늘땅 사이를 오르내리는데(예: 창28:12. 마태복음 18:10을 천사들이 늘 하늘에만 머물러 있는 듯 옮긴 일부 번역들은 오역이다. 이 천사들은 개인에게 배당된 수호천사 내지 도우미 천사들로 수시로 하늘땅 사이를 오간다. 히1:14 참조), 하물며 전능하신 주님이 하늘땅 사이를 그처럼 자주 오르내리시면 안될 남 모를 사연이라도 있단 말인가?
또 승천이 두 번 이상이었다고 주장한다 해서 이단/삼단이라고 할 건덕지가 되느냐는 말도 된다. "그야 성경에 한 번이라고 했으니까 그렇잖나" 할지 몰라도 "승천은 한 번만, 그리고 끝!" 이라는 구절이 성경엔 없다. 그러니까 승천단회론은 성경을 오해한 카톨맄 신학의 소산이지 성경 자체의 책임이 아니란 것이다.
그러면 혹자는 승천이 한 번이든 두 번 이상이든 무슨 차이랴고 물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 글을 읽어 보면 차차 알게 되지만, 일례로 히브리서 기자가 계시한 크리스토의 하늘 대사제(대제사장) 위임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한 가지 전제해 둘 것이 있다. 이 글에서는 지면상, 독자들이 너무도 잘 아는 감람산 승천 사건은 따로 깊이 다루지 않으련다.
부활 새벽의 승천
"또 그 분은 [다시] 맏아들을 세상으로 이끌어 들이실 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하라!'"(히1:6. 이하 주요성구는 사역)
일회승천설 주장자들은 위 성구의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 란 부분을 제대로 풀지 못한다. '다시'는 주님이 최소한 2회 이상 하늘땅을 오르내리셨다는 암시다. 즉 초림/성탄 말고도 지상에 오신 때가 있었다는 암시다.
6절엔 '다시(again)'의 그리스 원어 '팔린'(παλι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란 미묘한 이슈가 게재돼 있다. 바로 앞 전치사 '데'(δε)와 합해 '그리고 또', '또한', '더욱이' 정도의 단순 접속사적 의미로 보고 말 것이냐, 아니면 반복을 뜻하는 부사 '(또) 다시'로 파악할 것이냐..란 것이다.
참고로, 6절 원문 앞부분과 한글식 발음은 이렇다.
οταν δε παλιν εισαγαγη τον πρωτοτοκον εις την οικουμενην..
호탄 데 팔린 에이사가게 톤 프로토토콘 에이스 텐 오이쿠메넨..
위에서 '호탄 데 팔린'은 '..때에 또 다시'란 뜻이다.
위 원문을 주요 역본들은 이렇게 옮겼다.
"또 그가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개역 개정)
"하느님께서 당신의 맏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에는.." (공동번역/개정)
"그러나 자기의 맏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에는.." (표준새번역/개정)
"And again, when he bringeth in the firstbegotten into the world,.." (KJV)
"And when He again brings the first-born into the world,.." (NASB)
"And again, when God brings his firstborn into the world,.." (NIV)
위에서 개역한글 개정판과 NASB(새미국표준성경)가 원문에 가장 충실한 번역이다. 공동번역과 표준새번역은 아예 '(데) 팔린'/(de) παλιν을 무시해 버림으로써 치명적인 과오를 저질렀다! 흔히 쓰이는 접속사인 데다 바로 앞 절(5절)에서도 접속사로 쓰였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결과다.
그러나 6절의 데팔린은 단순하지 않다. 히브리서 기자가 단순 접속사가 아닌 반복을 뜻하는 부사임을 분명히 강조하려고 '..때에'(호탄)란 뜻의 관계대명사를 앞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살려 다음과 같이 번역돼야 더 정확하다.
"또 그 분은 다시 맏아들을 세상으로 이끌어 들이실 때.."
부활절 새벽의 긴급성
자..그럼 위 히 1:6의 사건이 언제 벌어진 것일까? 언제 주님이 '다시' 세상에 내리셨다가 오르셨던가? 앞 절에서 해답을 준다. 바로 부활의 날 아침에 그러셨다!
아버지 하나님은 주님이 부활하신 그날 이렇게 선언하셨다.
"'너는 내 아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히 1:5a)
시편 2:7을 인용/성취하신 말씀이다. 독자들은 성부님의 이 선언이 아마도 성탄절 새벽에 이루어진 줄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실은 부활 당일에 이뤄진 선언임이, 다음 구절에서 밝혀진다.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셔서 그들(선조)의 자녀인 우리들에게 이것[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시편 둘째 편에도 기록된 바 '너는 내 아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신 그대로입니다. 또 하나님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시어..."(행 13:33,34)
파울이 피시디아 안티옥의 유대인 회당에서 한 이 설교(행전 13:29~35)의 문맥을 보면, 시2:7의 예언은 분명히 부활절 아침에 성취됐다. 즉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자 예수가 부활하신 그날 직접 일대일로 이 말씀을 건네셨다.
날 건드리지 마오!
그렇다면 부활절날 언제, 어느 결에 주님이 하늘로 오르셔서 하나님 아버지께 이 말씀을 들었을까? 바로 무덤에서 부활하시고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신 직후다. 부활의 새벽 그 동산 무덤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예수님이 그녀에게 '마리아!' 하시자 그녀가 뒤돌아 보고 히브리 말로 '랍부니!'(스승님)라고 외치듯 부른다. 이때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날 건드리지 마오! 난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못했소. 그대는 나의 형제들에게 가서 내가 나의 아버지 곧 그대들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그대들의 하나님께 올라간다고 전해 주오.'" (요복 20:16,17)
위 구절에서 '건드리지 마오'의 원어를 각 번역판들이 다양하게 옮겼는데, 대체로 승천단회론의 영향이 묻어 있다. '건드리지 마오! 난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못했소..'라는 주님의 말씀에서 독자는 모종의 긴급한 비상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가? 그런 느낌이 전혀 안 오는 독자는 좀 문제가 있다. 자신이 영적으로 둔하다(?)고 보면 된다(바로 승천단회론 신학자들이 그렇다!) 이 말씀은 한참 후인 40일 이후에나 승천하시게 될 느긋한 분위기가 전혀 아닌 것이다.
왜 마리아에게 자기 몸을 건드리지 말라고 하실까? 긴박한 비상임무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아버지 하나님을 뵈러 하늘로 올라 가시기 위해서다! 부활하신 거룩하고 신령한 몸(코린토A 15:44)으로 아버지 하나님을 채 뵙기도 전, 사람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피하시기 위해서였다. 갓 부활하신 신선한 몸 그대로 가장 먼저 아버님을 뵙기 위해서였다. 33년전 하늘 보좌를 떠난 뒤로 직접 뵙지 못한 아버님을 뵙고픈 그리움이 불타는 듯 해서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하늘 성전을 사모하는 열정이 주님의 몸 전체를 삼키는 듯 해서였다. 그리고 이 글을 읽어 내려 가다 보면 알게 되지만, 비상임무가 또 있다.
그러나 '일회승천설'을 주장해 온 카톨맄과 대부분의 신학자들, 신교인들은 위 말씀이 40일 이후 승천할 때를 미리 가리킨다고 믿는다. 위 말씀 속 분위기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결과다.
만일 그렇다면, 왜 주님은 (같은 40일 기간 내인) 8일 후 토마에겐 자기 몸을 만지도록 허락하셨는가(요20:26-29)? 주님이 막달라 마리아에겐 자신을 못 만지게 하고 토마에겐 허용하셨으니 마리아를 차별대우 했다는 얘기 밖에 더 되겠는가? 아니면 기분 따라 당일은 못 만지게, 며칠 후엔 만지게 하시는 기분파(?)이셨든지.
일회승천론자들은 "오직 단 한 번만"의 승천을 전제로 한 탓에, 요리조리 앞뒤 안 맞는 상황 끼어맞추기 내지 억지풀이를 하느라 애쓴다. 손 대지 못하시게 한 이유에 관해서도 다양한 억측들을 한다.
부활은 엄청난 사건이다. 독생 성자 예수께서 온세상 죄인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신 뒤 성령의 권능으로 되살아 나셨기에, 하나님은 속히 부활하신 아들을 맨 먼저 보기 원하셨고, 주님도 탄생 이후 생애 처음으로 그 아버지의 얼굴을 하늘에서 직접 눈으로 뵙고 '인사'드리고 싶고 아울러 하늘의 중대사가 있기에 서두르던 참이다.
사실은..마리아를 만나기도 전 곧장 하늘로 올라가실 만도 했건만, 너무나 슬피 우는 마리아를 달래시고 자신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알려 기쁨과 용기를 주려고 구태여 만나 주신 것이다. 혹 토마가 이때 (모든 의심을 버리고) 동산으로 헐레벌떡 달려 왔더라도 역시 주님을 만지진 못했을 것이다.
이 말씀 속에 담긴 이런 깊은 정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40일 이후 승천 사건을 의미하셨다고 운운함은 어지간히 둔한 소치일 것이다. 필자도 신학에 묶인 과거에는 그렇게 오인했었다.
부활의 새벽에 무엇을?
그건 그렇고..그럼 주님은 부활하신 그날 새벽 하늘로 곧장 올라 가셔서 도대체 뭘 하셨을까? "그건 신비 문제이니 우리가 모르며 알 바 아니다"고 독자들은 성급히 단정지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마저도 성경은 친절하게 우리에게 소상히 알려주고 있다.
히브리서로 다시 가 보자.
"크리스토께서 앞날의 좋은 일(들?)의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손으로 짓지 않은,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않은 더 크고 온전한 성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시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어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히 9:12)
"크리스토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히 9:24)
예수님은 부활의 새벽 그날 하늘에 오르셔서 거룩하고 완전한 하늘 대사제로서 지상에서 흘린 어린양 스스로의 피로 우리를 위하여 하늘 성소에 들어 가시고 아버님을 뵙기 위해 그 보좌 앞에 '나타나신' 것이다. 오가는 모든 세대에 그분을 따르는 신자/제자들 곧 그분의 형제들을 위해서다. 이를테면 예수 크리스토의 하늘 대제사장 위임식 사건이 부활절 아침에 이뤄진 것이다.
그런 사건이 그 때 있었다고 어떻게 장담하냐고? 서로 '입맞춤' 하는 다음 성경말씀이 충분히 증명해 준다.
"..많은 아들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들이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주를 수난을 통하여 완전하게 하심은 합당하여라!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하게 된 이들이 다 하나에서 났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주님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주님을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 '보라, 나와 또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을!'.." (히2:10~13에서)
주님이 하늘 대제사장으로서 위임된 그날,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 그것은 오가는 모든 세대의 신자들이 성령을 통하여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가 된 동시에 예수 크리스토의 '형제들'로 선언된 것이다! 주님은 과거 제자들과 함께 지내실 당시 '나의 형제'란 말을 하신 적이 없다. 이 때가 처음인 것이다.
특히 위 구절들중 '나는 주님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주님을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란 부분은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일 천년 전에 미리 내다 본 다윋의 시22편 후반부에서, 우리가 부활 사건의 결과로 주님의 형제들이 될 이벤트도 함께 예언해 놓은 것이다.
물론 주님의 참 형제이려면 그분을 믿음으로써 성령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비로소 제대로 이뤄지는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것까지 내다 본 미래적/상징적 의미를 담았다고 할 수 있다. 가장 먼저 그 분의 '형제들'로 일컬어진 사람들은 당대의 유대인 제자들이었다.
바로 그래서 부활절 새벽, 주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대는 나의 [형제들]에게 가서 내가 나의 아버지 곧 [그대들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그대들의 하나님]께 올라간다 전해주오.'"(요복 20:17).
그러므로 히브리서의 이 기록은 부활절 아침 주님이 아버님을 뵈러 일차 올라 가셨다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바로 이 '대사제 위임'과 '형제 선언' 사건이 있은 후 주님은 즉시 땅으로 다시 내려오셨다. 이때 하늘에서는 모든 천사가 그 분께 경배하는 엄청난 임시 '송별식'이 있었다.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술회 보도한다.
"또 그 분이 다시 맏아들을 세상으로 이끌어 들이실 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하라!'"(히 1:6)
왜 '맏아들'이신가? 거듭난 우리 모두 그 분을 통하여 성령으로 그분의 형제인 하나님의 양자들, 곧 그 분의 자녀들이 되기 때문이다. 부활의 첫 열매인 예수 크리스토는 하나님께는 맏아들, 우리에겐 맏형(Big Brother)이신 것이다. 오, 영원히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
이상과 같은 사건들이 부활절 아침 승천 당시 하늘에서 이뤄졌다. 그리고 그것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확증됐다.
독자는 거듭났는가? 그렇다면 하나님 안에서 주님의 동생이 됐다는 게 기쁘고 영광스럽지 않은가? 필자도 신나고 너무나 흥분스럽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신 가족(God Family)의 일원이 됐다는 얘기다! 신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은 [어떤 종교로든 신처럼 될 수 있다는] 뉴에이지 명상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오로지 예수 크리스토의 피로, 어린 양의 보혈로 거듭난 그분의 형제여야 가능한 얘기다. 할렐루야!
베타니에서의 승천
그럼 부활 당일 아침의 승천과 40일 후 감람원에서의 승천 외에 혹시 또 다른 승천도 있었을까? 있었다! 이 또 다른 승천 사건은 바로 루카스(누가)가 기록했다. 흥미롭게도 복음서 기자들은 승천 사건을 조금씩 다르게 조명하면서 부활절 승천 사건은 요한이 운을 띄운 것을 훗날 히브리서 기자가 주로 다뤘고, 루카스는 베타니 승천과 감람산 사건을 상세히 기록했다(마태는 승천 사건을 다루지 않았고, 마르쿠스는 최후 승천을 약간만 다뤘다).
구교 신학과 카톨맄적 성서해석에 따라 감람원 승천 사건 한 번만 기억하도록 여태 세뇌돼 온 독자들은 "아니 베타니 승천이라니?" 하고 의아스러울지 모른다.
하지만 다음 성경 구절을 보자.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타니 앞까지 나아가셔서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셨습니다. 축복하실 때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자 그들이 그 분께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루카 24:50~53).
위 승천 사건은 부활절 40일 이후 감람산 승천과는 전혀 다른 별개의 승천 사건이다. 그것을 어떻게 장담하느냐고? 먼저 기억할 것은 루카복음서와 행전은 루카가 고위급 귀족(정치인?) 테오필로스에게 쓴 편지 형식으로 돼 있다는 사실이다(뤀 1:1~4, 행 1:1,2 참조).
루카는 분명히 루카복음서 끝 부분에서 베타니 승천 사건을 기록하는 것으로 일단 마무리한 뒤, 행전 초두에서 최후의 피날레 승천인 감람산 승천을 포함한 그 뒷 얘기를 계속한다. 베타니 승천 사실을 하릴없이 반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루카는 의사였다. 의사는 일종의 과학자다. 그런 루카가 엄연히 별개인 두 사건을 마치 하나의 사건을 재강조하듯 서로 달리 되풀이하지 않았단 얘기다. 더구나 고명한 상대자에게 기독교 복음을 소개하는 입장에서, 두 별개의 사건을 마치 하나인 듯 헷갈리게 만들었을 리가 없었다.
자, 이 점을 확실히 하기 위해 (똑같은 루카가 기록한) 루카복음 끝 부분과 행전 초두를 서로 비교/대조해 보자.
베타니 승천 사건 (루카복음서 24장) | 감람원 승천 사건 (행전 1장) |
부활 당일 저녁 (전체 문맥 참조) 부활예언의 성취 확인 주된 명령: "이 도시에 머물어라" 주 목격자: 11 사도와 측근들 손을 들어 축복하심 이후 주님을 경배한 뒤 성전에 있음 |
부활 40일 후 (오전?) 제자들이 계속 올려다보자 천사들이 나무람. 늘 머무는 다락방에서 기도함 |
차이를 느끼는가?
되뇌지만, 동일한 저자인 과학자/의사 루카스가 동일한 수신인인 테오필로스에게 동일한 사건을 혼동스럽게 두 번 나열했을 리가 없다. 베타니 승천과 감람산 승천은 분명히/확실히/절대로(!) 별개의 승천 사건이다. 이 점에서 독자들은 혼동이 없기를 바란다.
그런데도 카톨맄과 신교 일각의 일회승천론자들은 이 두 사건을 한데 뭉뚱그려 "감람산 승천 딱 한 번!" 뿐이라는, 기막히게 헷갈리는 주장을 해 왔다. 하지만 앞에서 지적했듯, 승천단회론은 히브리서 1:6 단 한 절 앞에서도 힘을 잃는다.또 다른 승천?
이상과 같이 우리는 (감람산 승천을 포함해) 최소한 3회의 예수 승천 사실을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 그 이상의 승천도 있었을까? 물론 제 4 회, 제 5 회...아니 더 많은 승천/하강 즉 오르내림이 있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것은 '내가복음'이 아니다.
자, 그럼 그 이상의 승천 가능성을 알아 보자.
주님은 분명히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셨다. 비록 여인들과 토마, 제자들 등 만진 사람들이 있긴 했어도 부활하신 후 주님의 몸은 전과 달리 평범한 인간의 몸이 아닌 시공간을 초월한 신비체/신령체라는 뜻이다. 그런 신령체가 수난/부활 이전과 [똑같이] 무조건 사람들과 자유롭게/허물없이 어울릴 수 있을까?
주님은 수난 전 과거에도 친히 인간의 속마음을 아시기 때문에 여느 인생들의 집에 오래 머물지 않으셨다. 주님이 누구의 집에 머무셨는지는 모르나 거기 주무셨거나 지내셨다는 직접적인 기록이 없다. 하나님과 친교하실 때는 반드시 새벽 미명에 혼자 계셨다. 겟세마네에서의 최후의 기도 때도 주님은 비록 세 제자를 가까이 데리고 가시긴 했지만 따로 떨어져 계시면서 하나님과 단둘이 친교하셨다.
더구나 부활 후 신령체를 입으신 주님이 감람산의 최후 피날레 승천을 앞둔 40일 동안 세상을 돌아 다니며 어느 누구 개인의 집에 묵으셨다고 상상하기 어렵다. 하수상(?)하게도 복음서 기자들은 이 40일 동안 있은 일에 관해서는 극히 일부만 제외하고는 거의 함구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바로 주님이 하늘에 수시로 자주 오르내리셨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40일동안 주님의 승천/하강은 다반사였던 것이다. 이 하늘땅 오르내리기는 3층천까지 꿰뚫으며 다니는 과정이긴 하지만 '장시간 코스'가 아니라 신비롭게도 단숨에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하늘나라는 시공간을 초월한 영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비에 속한 이슈여선지 성경에 상세히 기록되지 않았다.
이 사실은 부활 후 40일 동안 주님이 다양한 방법과 모습으로 다양한 장소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던 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주님은 부활 직후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시고 하늘에 다녀 오신 뒤 다시 몇몇 여성들을 만나셨고(마 28:9, 이때는 여인들이 주님의 발을 만질 수 있었다!), 갈릴리의 한 산에서 제자(형제)들과 함께 만나자고 약속하셨다(마 28:7,16 비교).
그 날 오후엔 홀연히 엠마오의 낯 모를 길손으로 나타나 클로파스와 그 친구, 두 제자에게 수난과 부활에 관한 바이블스터디를 해 주셨다(뤀 24:13 이하). 두 제자들이 "집에 묵어 가시죠" 라고 집안으로 모시자, 들어가 손수 떡을 떼 주시면서 자신임을 증명하신 뒤 다시 순식간에 휙~ 사라지셨다!주님은 부활 직후 매우 바쁘셨다. 시공간에 제약받지 않는 신령체의 몸으로 단숨에, 그리고 바지런히 두루 다니셨다. 클로파스와 친구가 주님이 떡을 떼어주신 저녁을 먹은 직후 이 기쁜 소식을 전하러 헐레벌떡 예루살렘으로 7마일 길을 되돌아간 부활절 당일 밤 제자들 앞에서 자신들이 목격한 사실을 알려주자마자, 그 방 한 가운데 주님이 또 나타나셨다(뤀 24:28~36).
그밖에도 앞서 언급한 부활 여드레 후 토마와의 대면(요복 20:26), 갈릴리 해변에서의 새벽 모닥불가의 만남(요복 21장) 등 여러 번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그런데 감람산 최후 승천을 앞둔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난 사이사이 어간에는 어디 계셨을까..두 말 할 나위 없이 하늘 출장을 다녀 오신 게 틀림없다. 그 신령체의 몸으로 그 동안 가보지 못했던 세상 각곳을 두루 구경하고 다니셨거나 예루살렘 성전이나 어느 누구의 사저에 묵고 계셨다고 믿기 어렵다.
더군다나 (몰몬교나 기타 종교계의 헛소리처럼) 그 기간동안 세계 각곳에서 '선교활동'을 하셨다는 기록이 성경엔 전혀 없다. 국외/해외 선교는 제자들에게 맡겨져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시작된 임무일 뿐.
염두에 둘 사실은 부활 후 주님이 하늘 삼층천으로 오르내리신 여행 길은 인생이 생각하는 것처럼 번거롭지 않고 순식간에 이뤄지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럼 구약 시대의 승천/하강 성자 하나님이 인간으로 성육하시기 전, 구약시대 때도 하늘땅을 오르내렸을 가능성이 없었을까? 충분히 있다! 주님이 성삼위 중 하나님의 형상을 입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사실 에덴동산 시절부터 구약시대 때 지상에 나타나셨던 분은 성삼위 중 형상을 지니셨던 성자님이셨을 가능성이 많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냐고? 바로 아브라함을 만났던 하나님이 성자이셨기 때문이다.
"그대들의 선조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보기를 (기다리며) 즐거워하다가 보고서 기뻐했다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있네(I AM)."(요복 8:56.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
어떤 이들은 에녹과 엘리야의 승천 사건도 예로 들지 모르지만, 두 사람과 주님의 승천은 질적으로 다르다. 에녹과 엘리야는 오르내림이 아닌 단지 올라가기만 한 승천이지만, 주님은 부활의 첫 열매인 신령체로서 영들인 천사처럼 자유자재로 오르내리셨다는 것이다. 엘리야의 경우는 승천의 방법도 달랐다. 따라서 주님의 승천을 다른 인간들과 동질선상에 놓고 보기는 격에 맞지 않다.
그러나 주님의 공중재림 때는 과거에 죽은 믿음의 선인들과 거듭난 우리 모두가 주님과 같은 신령체를 입고 하늘로 오르게 된다(테살A 4:17). 주님은 그밖에도 평소 자신의 승천/하강에 관한 말씀을 제자들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에게 몇 번 하셨다.
다음 성구들을 살펴 보자.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인자 외엔 하늘에 올라간 이가 없소."(요복 3:13. 니코데모에게. '올라간'이라는 과거형을 쓰신 것을 주목하라).
"그럼 자네들은 인자가 전에 있던 데로 올라가는 걸 보면 어쩌려는가?"(요복6:62.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들이 단지 감람산 승천 단 한 번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없다.성자의 이런 잦은 오르내림에 관해 잠언 기자들 중 한 명인 아구르는 이렇게 물었다.
"하늘로 오르셨다 내려오신 분이 누구신지..너는 아느냐?"(잠30:4).
결론
이상을 종합해 볼 때, 주님의 승천은 '딱 한 번'뿐이었다고 고집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 분의 승천/하강은 일회용이 아닌, 다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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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 4:10-21] 아가페의 4차원 (경배 도우미) (2) | 2008.01.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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