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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과 검증/관상영성

광야교부들이 동양종교에서 빌린 것






레이 영엔 글 / 티엘티 역

천주교 사제 윌리엄 쇄넌은 그의 책 '평화의 씨앗들'에서 인간 딜레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하느님과의 하나됨에 대한 우리의 망각은 개인경험일 뿐더러 인간의 집단경험이기도 하다. 실은, 이것이 원죄를 이해하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아는 것 같지가 않다. 우리는 낙원에 있지만 깨닫지 못하고 있다. 


쇄넌의 관점은 온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 movement 또는 '향심기도'/centering prayer) 운동의 바탕에 깔린 세계관을 정의해 놓고 있다. 비슷한 말을 거의 관상가의 책에서마다 발견할 수 있다. 힌두교 구루나 선불교 선사들도 이와 똑같은 설명을 내놓을 것이다. 

이것은, 관상기도의 뿌리를 추적해 볼 때, 완전히 논리적인 귀결이다. 이 관행 내지 행습의 시작을 살펴 보자.


중세 초, 중동 광야지대에 한 떼의 은자들이 살고 있었다. (천주교 중심 '교회사'에 따르면) 그들은 '광야교부'들이라고 불린다. 그들은 "세속을 떠나 하느님께 완전히 바치는 삶"을 목적으로 작은 고립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이 관상운동은 '만트라'를 하나의 기도 도구로 삼고 증진하며 살던 수사들에게로 그 뿌리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명상학자 대니언 골먼은 이 커넥션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초기 기독교 수사(수도사)들의 명상 행습과 생활의 룰은 동양의 몇몇 왕국들 너머 있는 힌두교/불교 탈속(입산) 형제들과 강한 유사성을 보인다...그들이 하느님을 찾느라 채택한 명상기법은 동양에서 빌렸거나 자발적인 재발견임을 시사한다."

당시는 영적 방법론들의 굉장한 실험 시기였다. 수많은 수련 방법이 시도됐는데, 어떤 것은 현대인들에겐 너무 고되거나 극단적이었다. 다양하고 수많은 방법들이 고안되고 탐구되었다.  

비술신비적(occult mystical) 종교행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시도는 실패와 불행이 보장된다. 에짚트 사막교부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창의적인 방법을 더듬어 모색할 당시, 특별히 더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었다. 

신학자, 켄 케이슈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기독교 명상수련의 발흥은 에짚트에서 시작되었음이 틀림없다. 왜냐 하면, 기독교의 명상 관행의 지적, 철학적, 신학적 바탕의 많은 부분도 헬라-로마 시대의 에짚트에서 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의미심장하다. 기독교 신학이 (학자들에 의하면) 동양 특히 인도에 뿌리를 둔 다양한 영지주의적 사상들과 가장 많은 접촉을 한 곳이 바로 (당대 에짚트 수도였던) 알렉산드리아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광야교부들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진지한 이상, 그 어떤 방법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유용하다고 믿었다. 만약 힌두교인들이 자기네 신에게 나아가는 데 먹혀들었던 방법이라면, "크리스천 만트라"도 예수님께 나아가는 데 쓰일 수 있을 것이라는 식이었다. 

광야교부들의 신비주의적 기도를 증진해온 현대의 관상가, 틸든 에드워즈는 신비주의적 선구자들을 다음과 같이 논리적으로 공식화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열린 영(성령?)님의 폭넓은 에큐메니즘 안에서, 우리는 특정 동양종교들의 배움을 겸허히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특정 관행을 따르는 신자를 만드는 것은 그것의 소스가 아니라 그것의 의도이다...우리의 영적 자산을 너무 좁게 정의함으로써 그것을 빈곤하게 만들려는 크리스천들 앞에서 이것을 기억함이 중요하다. 인간가족은 하나님의 영 안에서 하나라고 본다면, 사실 이 역사적 융합은 놀랄 일이 못 된다...동양의 영적인 관행들에 대한 신중한 관심은 크리스천의 삶의 완전한 구현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독자는 틸던이 몰고가는 억지 논리를 파악하는가? 

   "비기독교적 소스들은 영적 성장의 큰길로서 기독교인의 삶 속에서 완전히 합법적이다. 만약 성경에 의하여 기독교를 실천한다면, 사실 자신들의 영성을 빈곤하게 만들 것이다."
 
- 이것이 광야교부들의 생각이었다. 
그 결과로 현재 관상기도가 생겨난 것이다.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들에게 경고하실 때 이 점을 다루셨다. "그리고 너희가 기도할 때 이방인들처럼 헛된 반복을 사용하지 마라" (마6'7)
이것으로, 만트라 명상 또는 성스런 문구기도는 "헛된 반복"이며 예수님이 지적하신 포인트에 정확하게 걸맞는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복음주의 신자들이 흔히 기독교 신비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하므로 다른 신비주의와 다르다고들 주장한다. 

이 논리는 표면상 그럴 듯해 보이나 크리스천들은 먼저 "무엇이 관행적 크리스천을 만드나?라는 매우 단순하고 기본적이고도 명백한 체크용 물음을 던져봐야 한다:  

   ✔ 신약성경이 그것을 허용하는가? 
   ✔ 크리스토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그 분의 이름으로 믿음 안에서, 그 분의 뜻에 따라 그것을 가르치셨는가? 
   ✔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을 그 분이 뭔가 빠트리고 생략하신 게 있는가? 
   ✔ 그 분이 참 제자들에게 숨기신 게 있었는가?

관상기도가 이 물음에 답변이 되는가? 천만에!

이 진리를 아시는 하나님은 결코, 진지하지만 죄악된 사람들에게 그들 나름의 기독교를 재편하라고 맡겨 두시지 않는다고 그 분의 말씀 속에서 선언하셨다. 크리스천들이 주님을 따름에 있어 하나님의 지시를 무시할 때, 그들은 이방인들의 방법을 배우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 이스라엘은 이것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그것이 인간 본성이다. 

아담의 두 아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배신 행위의 고전적인 본보기다. 그들은 둘 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었지만,  카인은 자기 나름의 헌신 방식을 실험하기로 결심한다. 카인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터이다: "아마 하나님은 죽인 짐승보다는 과일이나 곡식을 더 좋아하실 거야. 그것은 끔찍하지 않아. 냄새도 덜 나. 와, 그렇게 해 봐야지."

아다시피 하나님은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보려는 카인의 의도에 전혀 감동받지 않으셨다. 주님은 카인에게, 단지 하나님을 위한다는 의도나 하나님에 초점을 맞출 뿐더러 옳은(의로운) 것을 했더라면, 그 분의 은총이 그에게 베풀어졌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셨다. 

여러가지 점에서 광야 교부들은 카인과 같다. 즉 기쁘시게 하려고 안달이었지만(?), 주님의 지시를 기꺼이 경청하여 옳은 것을 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열심과 헌신도를 나쁘다고 할 순 없겠지만, 분명 그들의 분별 없음을 탓할 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