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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독자의 지난 칼럼들/뉴하우스의 돌보며걸으며

꿈꾸는 크리스마스 (뉴하우스)


언제나 그렇듯, 우리가 상기하는 지나간 옛 추억은 빛은 바랬어도 왠지 모든 것이 아름답고 좋게만 보인다.

훗날에 생긴 마음의 여유와 너그러움이라는 특수 렌즈를 통해서 들여다보는 이유일까? 아니면 아무리 철없던 시절이라도 돌아오지 않는 동심과 청춘을 그리는 아쉬운 마음에 대비해 비치는 지난 일들이어서일까?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허심탄회하게 되돌아보며 나누는 많은 추억이 모두에게 있게 마련이다.

특히 크리스마스 시즌에 접어 들면서 사람들은 이런 나름의 추억거리를 더듬으며 꿈을 꾸기 시작한다. 나도 어릴 적 이맘 때면 느끼던 설렘을 되살리는 꿈을 꾼다.
이 시기의 특유한 행복감을  맛보려고 집 안팎을 장식하고 식구마다 줄 선물을 구상한다. 그런가면, 크리스마스 추리를 세우고 장식을 달던 아름다운 추억은 남아 있으나, 더는 돌아갈 수 없는 엄마의 품을 그리워 하기도 한다.
마음에 쏙 드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고 받길 기대하는 남녀노소. 눈과 얼음, 환상의 나라를 그리며 여행을 떠나는 이들. 파티와 흥겨움에 도취하여 밤을 지새는 이들. 샤핑백 가득히 양손에 선물을 들고 바삐 거리를 오가고 그들을 태우는 붐비는 차량들의 모습. 이 시즌에 빼 놓을 수 없는,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꿈꾸는 사람들의 정경이다.

사시사철 여름인 나라에도 크리스마스가 오지만, ‘난 White Christmas를 꿈꾼다’는 노래가 귀에 익어 있듯 하얀 눈에 덮여 온통 평온해 보이는 은세계가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날을 꿈꾼다. 그리고 하얀 눈을 배경으로 추운 날씨에도 당당히 서 있는 파랗고 곧은 크리스마스 추리는 어우러진 불빛 장식과 더불어 유난히 더 당당한 자태를 뽐내기에 눈이 즐겁다.
여기저기 울려 퍼지는 캐럴도 귀에 즐겁다. 자연히 우리는 크리스마스 시즌에만 느끼는 특유의 기분과 분위기 그리고 행복감에 쉽게 빠져 든다.
 
내가 살던 독일에도 이맘 때면 주로 타운에 크리스마스 마켓이 서고 거리는 따뜻한 글뤼봐인(향료/설탕 등을 넣어 데운 포도주)을 마시는 사람들로 가득하고 길거리마다 축제 분위기다. 독일 뿐이랴. 가는 곳마다 역시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명절 분위기가 물씬 난다. 뉴욕 맨해튼에 있는 '로드앤드테일러'(Lord & Taylor) 백화점의 유명한 윈도우 크리스마스 장식에 매료되던 시절의 빛 바랜 사진들 속에 나의 크리스마스 추억의 일부분이 보인다.

누군가 나를 기억하여 카드라도 보내고 연락이라도 오면 왠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반갑게 느껴진다. 집에서 만든(homemade) 크리스마스 과자를 선사 받는 마음은 정성이 느껴져서인지 마음이 따뜻해진다. 바로 이런 게 ‘크리스마스 기분’인가 보다.

크리스마스를 (주인공인 예수님과는 무관하게) 일 년 중 가장 크다면 큰 명절로 세계 각국에서들 지킨다. 비지니스 측면에서 봐도 주고 받는 선물 때문인지 가장 성수기라 상업성 열기 또한 막지 못한다. 
그런데 12월 25일이 예수님이 나신 날이 아니라는 설이 아주 유력하다. 이 날의 내력도 알고 보면 찜찜하다. 성경에도 나와 있지도 않지만 기독교계에서 가장 크게 지키는 명절이다. 그런가 히면 크리스마스 추리를 공공 장소에 세우고 장식하는 것을 특정 종교에 대한 편파적인 취급이라며 시비거리로 삼는 많은 사람이 생기는 것을 봐서도 모순이긴 하나 이 날을 기독교와 연관 안 할 수는 또 없나 보다.
아기 예수는 이미 사라지신지 오래고 추리 장식이 믿음의 표현이 아니며 오랜 세월 내려오고 지켜진 풍습에 불과하지만서도, 크리스마스 날과 이 날의 분위기를 향한 이들의 적대감이 맘을 불편하게도 한다.  

하지만, 그 어느 명절도 크리스마스 날만큼 사람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명절도 없다. 이렇든 저렇든, 신자든 아니든, 크리스마스는 만인이 즐거워 하는 세계 각국에서 지키는 가장 축제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명절이다.

이때는 영화도 한 몫 한다. 이 맘 때면 쏟아져 나오는 영화들의 소재가 나날이 많이 유치해져 가긴 해도, 주로 '크리스마스 클래식'으로 여겨지는 영화 대부분이 많은 감동을 준다. 신기하게도 소재가 주로 가족 간의 끈끈한 사랑과 용서 아니면 이웃을 향한 따뜻한 마음 등이라 쉽게 공감한다. 복음과 직접적인 연관은 아니래도 크리스마스 날이 의미하는 바를 이런 소재로 표현한다는 것은 참 다행이다 싶다.   

오래된 영화의 순서로 보면 '놀라운 삶이라네'(It’s a Wonderful Life)와 디킨즈의 '크리스마스 캐럴'(A Christmas Carol 또는 스크루지/Scrooge)가 단연 탑이고, 텔레비전에서 보여준 '성탄절의 만남'(The Gathering, 이하 '만남')이라는 드라마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영화다. 제목이 시사하는 대로 병으로 죽어 가는 아버지의 마지막 크리스마스에 모여 별거 중이던 아내와 성인이 된 자녀와의 소원해진 관계가 회복되는 따뜻한 가족 이야기다.

“크리스마스 스토리'는 언뜻 심각한 것 같으면서도 코미디 같다. 어린이가 주인공이지만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만인이 공감하는 재미있는 영화다.
물론 그밖에도 수많은 크리스마스 영화가 즐비하지만 매년 또 보고 싶은 영화는 주로 여기서 맴돈다.

왜 예수님과 상관도 없는 크리스마스 영화 얘기냐고 물을 수 있겠다.

지금까지 진정하게 예수님과 복음을 표현한 영화의 매개체는 본 적이 없다.
한때 사람들이 열광하던 멜 깁슨의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도 나름 문제가 있어 보인다. 많이들 영화에서 자극적으로 표현된 예수님의 고통에 감격을 받았다고 하지만, 우리 영혼의 구원은 영혼의 눈이 띄는 것이고 믿음으로 받아 들이고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 감정은 나중에 따라오기도 한다.

반대로 이런 영화는 시각적으로 사람의 감성을 먼저 자극하기 때문에 죄인됨을 깨달음과 진정한 믿음의 고백이 없이도 믿는 것으로 착각하게 하기도 한다는 우려가 있다. 언제나 그렇듯 왔다 갔다 하는 감정의 변화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와 초자연적인 방법과 능력을 간과하는 것은 아니나 영화로 표현되는 복음의 진정성과 정확성을 한 번 생각할 여지는 있다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차라리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일반적인 인생사를 다룬 영화가 내게는 더 마음에 다가 온다. 그리고 따뜻한 핫코코를 마시며 둘러 앉아 크리스마스 영화를 한 편 보는 것도 나름 나의 가족과 추억 만들기에 속한다. 매년 같은 크리스마스 영화의 관람이 우리 가족만의 전례가 되어 매년 기다리게 되고 훗날에는 가족이 같이 시간을 보낸 의미있는 시간으로 남는다.

이런 의미에서 '만남'과 '크리스마스 스토리'에 대한 리뷰를 해 보려 한다. 

'만남'은 아주 어린 아이들과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1977년 12월에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드라마이다. 주로 VHS이고, DVD는 요즘 나온 것 같지만 구매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일부 사이트에서 영화의 일부나마 볼 수 있다.
이 영화가 기억에 남는 이유는 내용이 감동적이기도 하지만 제목을 볼 때마다 미국에 온지 얼마 안 되던 1970년대가 생각이 나서이다. 영화를 보면서 당시 옷차림과 그릇 등이 그동안 많은 세월이 지났음을 상기시킨다. 이런 이유로도 또 보고 싶어지는 영화이다.

에드 애즈너(Ed Asner)가 성미가 불 같은 큰 기업의 사장 애덤 톤턴(애덤Thornton)으로 분했다. 그 부인 역인 케이트(케이트)는 모린 스태플턴(Maureen Stapleton)이 연기한다. 4년 전, 애덤은 아내 케이트와의 불화로 집을 나가 둘의 별거가 시작된다. 남편이 집에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여전히 사랑하는 케이트는 어느날 애덤에게서 집을 방문하겠다는 전화를 받는다.

월남전에 관한 이견으로 맘이 상해 집을 떠난 아들 버드(Bud)가 캐나다에 있다는 소식을 알고 만나러 먼 여행을 떠나겠다는 남편의 말을 수상쩍게 여긴 케이트는, 주치의에게 전화해 정확한 사유는 모르지만 건강이 아주 안 좋은 것을 알게 되자, 화를 내고 다른 방안을 제시한다. 아이들을 크리스마스에 모두 불러 모으자는 것.
반신반의하며 예전의 가족으로 되돌아 갈 수 없다는 남편에게 노력해 보자는 말을 하고 케이트는 이미 성인이 되어 각자 삶에 바쁜 딸 둘과 아들 둘에게 애덤의 마지막 크리스마스 겸 성탄절 가족재회(Christmas Reunion)을 위해 연락을 한다. 

그러나 두 아들은 아들대로 집 나간 아버지에게 대한 원한과 감정이 쌓여 있고, 딸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예전과는 달리 힘 없는 엄마의 목소리 때문에, ‘엄마와 아빠로부터’라는 전보를 이상히 여긴 이유로, 또는 엄마의 간청이 맘에 걸려 집에 갈 수 없는 다른 여러 이유로 고민하다, 결국 하나씩 둘씩 집에 모여 든다. 이렇게 시작되어 삶이 얼마 안 남은 애덤은 자신이 많은 복을 받은 것을 알기는 하나, 찢기고 상처가 나 소원해진 가족관계 회복의 필요성을 느끼고 노력한다는 줄거리다.

다시 한 번 죽음 앞에서 남편이자 부모인 인간의 본연의 자세로 돌아오고 자신의 프라이드와 이고(ego)를 내려놓는 모습이 잘 그려졌다. 그것도 크리스마스이기에 더 가능해 보인다. 용서를 안 할 수 없는 가족 간의 사랑이 무척 감명 깊다. 이 노부부처럼 깨지기 쉬운 부부관계 또한 주목할 만하다.

일터에서는 승승장구하는 강한 이미지의 남자이나 집에서는 아내에게 인정 받기 위해 아이 같이 행동하는 남편. 그러나 아내도 의견과 생각이 혹은 다를 때가 있다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 나가는 남편인 자신의 부족함을 아들 앞에서 시인하는 솔직한 모습도 그린다.

그리고 자녀 하나하나와 화해하는 모습이 맘을 훈훈하게 한다. 제일 기대하기 어려웠던 Bud의 제일 늦은 홈커밍이 주는 온 가족의 기쁨과 열기가 내게도 전해져 온다. 반갑게 아빠를 껴안는 화해의 모습에 가슴 뿌듯함을 주치의이자 애덤의 친구인 잔의 미소를 통해, 우리 모두 용서와 사랑의 파워를 공감하고도 남게 된다. 

우리도 모두 우리의 삶이 얼마 안 남은 것을 알면 애덤처럼 많은 후회가 몰려오지 싶다.

애덤 같이 되돌아 갈 수 없음에 회한을 느끼고 ‘지금’이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 전부임에 안타까워 할 거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모은 장식과 부서진 장난감을 꺼내며 추억에 젖는 이 노부부. 이들이 완전하진 않으나 가족으로 보낸 오랜 세월과 많은 추억이 이들의 마음을 하나로 다시 묶는다. 가족으로서 서로에 대한 사랑이 다른 모든 부족함과 섭섭함을 내어 몰고 서로에 대한 사랑을 다시 신뢰하게 된다. 

성탄절 시즌에 합당하게 용서와 화목을 그린 영화라 단연 내게는 크리스마스 클래식이다. 

그런가 하면 1980년대에 만들어진, 정말 웃지 않을 수 없는 영화, '크리스마스 스토리'는 1940년대가 배경이다. 주인공 소년 랠피(Ralphie)가 성장해 어릴 적 크리스마스 시즌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전개하는, 엄마와 아빠, 랠피 그리고 남동생 랜디 4가족의 이야기다. 

표현력이 없고 말이 없는 뚱한 아빠, 그러나 가족을 끔직히 사랑한다. 엄마 역시 당시의 많은 여성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엄마와 아내이다. 만인의 귀염둥이며 유난히 파란 눈의 소유자인 랠피는 아홉 살의 천진난만한 소년이다. 크리스마스를 소재로 펼쳐지는 랠피와 가족, 주위 친구들 이야기가 많은 공감을 자나낸다. 

당시 대부분의 소년처럼 랠피도 장난감 BB건(원래는 .18인치 탄환용 공기총)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원하지만, 잘못하면 눈을 쏠 수 있다는 이유로 엄마는 반대한다. 학교 작문시간에서는 ‘받고 싶은 선물’의 소재로 썼다가 선생님에게마저 혼이 난다. 크리스마스 무렵, 동네 백화점의 험상궂은 산타에게 부탁을 하고 나서 딴 어린이들처럼 발로 걷어 차여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 온다.

그래서 포기한 랠피. 크리스마스 새벽에 아무 생각 없이 동생 랜디와 함께 추리 아래 선물들을 뜯어 보는데...오! 그렇게도 바라고 바라던 BB총이 거기 있지 않은가! 아빠가 몰래 사다 준 것이다. 그러나 발사 순간 오발로 눈에 상처를 입고 떨어진 안경을 모르고 밟아 박살내는 장면.

아들이 있는 나는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 이야기다. 우리 집에서도 아들 아이가 어렸을 적에 쏴 대는 BB건 총소리를 견디느라 힘들던 시절을 생각나게 한다.

그 밖에 이 가족에게 일어나는 웃지 못할 사연들을 소개하면... 
크리스마스 날 부엌에서 식사시간을 기다리던 칠면조 고기를 그 집과 동네 개들이 먼저 시식함으로써 온 가족이 외식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문을 연 곳이라고는 중국 음식점 뿐. 하는 수 없이 칠면조 대신 북경오리 요리를 먹는다. 고객을 즐겁게 해 준다고 식당 직원들이 늘어서서 중국식으로 혀가 꼬여 부르는 캐럴, 오리머리가 웃고 있다며 난처해 하자 큰 칼로 댕강 오리목을 쳐 버리는 장면 등은 배를 잡고 웃게 한다.

이 랠프네 집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어, 뉴하우스네서도 이번 크리스마스는 중국 음식으로 테마를 잡자는 의견도 나왔다. 실천될지는 모르나 '크리스마스 스토리'는 올해도 다시 한 번 보고 싶어진다. 옷을 너무 많이 껴 입어 뒤뚱거리다 눈 위에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뒹구는 랜디도 보고 싶고, 혀가 전봇대에 얼어 붙어 떨어지지 않던 랠프의 친구 이야기도 보며 웃어야 할 것 같다. 

어디선가 이벤트 상품으로 아빠가 수신한 여자다리형 램프가 넘어져 부서지자 접착제로 어슬프게 고치지만 다시 깨져 끝내 버리게 되는 사건, 그걸 만져 보는 랠프를 나무라며 기겁하는 엄마의 반응에 안 웃을 수 있겠나. 순진한 소년의 호기심을 믿게 하는 그럴 듯한 아역 배우의 연기가 놀랍다. 

선물이란 역시, 랠프의 BB건처럼 전혀 예상치 못한 선물일 때가 재미 있다. 추리 밑에 놓인 선물이 뭔지 맞춰 보려고 궁금증으로 전전긍긍하던 때가 재미있었던 거 같다. 그러려면 많은 생각이 필요하다 보니 아예 원하는 것을 말하는 식으로 바뀐 지가 오래다. 그래선지 이젠 스릴과 재미도 없어진 거 같다.
아이가 커 가면서 이런 재미도 줄어 들다 보니, 언제부터인지 우리 가정에서도 선물 교환이 없어졌다. 아니면 먹어 가는 나이 탓에 점점 갖고 싶은 것도 없어져서인지 선물에 연연하지 않게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에게 가장 값진 선물이자 세상의 그 어느 선물과도 견줄 수 없는 예수님과 구원의 축복을 생각하면, 내 손길을 전혀 예상치 않는 어려운 형편의 이웃을 기억하고 싶어지는 때이기도 하다. 어떤 이에게는 안부 정도도 많은 위로가 된다. 누구에게는 예쁘게 포장한 크리스마스 쿠키도 충분한 기쁨을 안겨 준다. 그러나 크리스마스의 분위기가 이왕 서로 주고 받는 것이라면 줄 수 있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다. 가슴에서 우러나는 사랑과 감사의 표현이라면 뭐든지 가치가 있다. 

분명히 한 해가 저무는 이 시기는 크리스마스 탓에 맘이 들뜨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맘이 숙연해진다. 살 같이 빠른 세월의 무상함도 한 몫 하지만 마음이 원하는 만큼 많은 것을 행동에 못 옮기는 자신의 무기력과 나태함과 통제력의 부족, 현재에 만족하는 편안한 생각 등이 나를 부끄럽게 하기 때문인가 보다.
또 아무리 맘을 새롭게 먹어도 또 실수하고 넘어지겠지. 그러나 나처럼 일관성 없이 수시로 변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변함 없이 사랑하시는 그분의 사랑 안에서 쉼을 찾고 다시 한 번 앞을 향해 가기로 맘 먹어 본다. 그리고 날마다 내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말씀과 은혜를 믿고 새해도 달려 보기를 소원한다.

“지금이 내가 가진 시간의 전부인데…” 하는 애덤의 독백이 귀에 머문다. 애덤 톤턴처럼 얼마 안 남은 삶의 날들 앞에 후회막급이기보다는 바로 지금이 내 가족을 더 사랑할 만한 때임이 분명하다. 곧 내게도 다가 올 ‘우리 가족의 모임’은 이 땅에 사는 동안 나와 우리 가족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회상하며 감사하는 날이 되기를 꿈꾼다. 

랠프처럼 끈질기게 바라고 소망하고 기도하고 싶어진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 우리의 소원을 아시는 하나님은 랠프의 BB건 이상으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좋으신 아버지이시다. 받을 자격이 없어도 우릴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크리스마스 때가 오면 더 실감이 난다. 

여기에 더 실감 나는 오감으로 느끼는 크리스마스 기분을 위해 크리스마스 쿠키를 만들 때도 되었다. 이맘 때면 온 집안에 풍기는 과자 굽는 냄새에마저도 행복해지는 건 무슨 이유일까? 쿠키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아들아이가 집에 오면 합동작전으로 선물하고 싶은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쿠키를 만드는 크리스마스의 분위기와 행복감을 나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