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하우스의 돌보며 걸으며
군인가족인 우리는 자주 이사를 한다.
3년 만에 전근이 될 수 있고 대개는 2년 마다 움직이고 어떤 때는 1년 또는 6개월 만에 이사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자주 이사를 한다는 것을 알고는 "당장 직업을 바꿔야 한다"고 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측은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사실 이렇게 자주 이사를 하는 것을 좋아 할 사람은 거의 없다.
따지고 보면 손해도 많고 불편하고 머릿속이 복잡해질 경우도 상당하다. 어른이나 애들은 말할 것 없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보니 은근히 스트레스도 받는다. 그리고 이사 전 준비도 그런 데다 이사 후 짐을 풀고 정리하는 것도 중노동이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많지를 않다. 그래서 이웃도 친구도 빨리 사귀어야 한다.
뜸 들이고 기회를 보다간 어느새 또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하고 떠나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아이가 어리면 정들었던 놀이터, 그리고 친구들도 떠나야 해 힘들어 한다. 그래서 우리 아이에게도 금방 떠나 온 곳이 항상 가장 좋은 곳이고 그리워하고 다시 가고 싶은 곳이 된다. 서서히 예전의 삶의 터가 잊혀지고 새로 정착한 곳을 떠날 무렵엔 이곳이 또 지금까지 살던 중 가장 좋은 곳이 되어 간다. 지금도 현재 사는 곳이 우리 가족이 지금까지 살아온 곳들 중 가장 좋은 곳이 되었다. 떠나면 아쉬워 할 것 같다.
집을 찾거나 부대 안의 관사도 순서를 기다리다 보면 guest house에 한 달씩 살기도 한다. 가진 것이라곤 꼭 필요한 필수품이 전부다. 집을 정하고 짐을 풀 수 있기 전까지는 이렇게 산다. 매 번 외식을 할 수도 없어 빨리 쉽게 식사를 준비하는 건 내 몫이다. 이럴 때 마다 나의 창의력도 유감 없이 발휘해야 한다. 그동안 그렇게 많이 끌어 안고 살던 짐들은 다 잊혀 가고 가방 안의 살림이나 차에 실을 수 있는 만큼이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소유물 전부다. 그런 대로 불편한 줄 모르고 또 살아진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근무지에서 살 집을 찾는 문제는 항상 숙제요 도전이다.
물가가 비싼 지역에서의 난감함, 또 6개월 정도 살기 때문에 집이 아닌 아파트의 좁은 공간에 적응하기, 반 이상의 살림은 창고에 두어야 할 때 어떤 것을 취사선택 할지에 대한 고민 등이 있다.
설상가상, ‘이왕이면’ 이라는 생각이 상황에 따라 지혜로운 발상이 될 수도 있지만 어떤 때는 한도 끝도 없어 판단력을 무디게 하기도 한다.
나에게도 다른 사람들이 사는 집에 가본 후 생긴 "이왕이면 나도.."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생겼다. 적어도 방이 몇 개는 되어야 하고 너비가 몇 평방 피트는 되어야 하고, 동네도 학교도 괜찮아야 하고… 당연히 요구되는 상식과 판단일 수도 있으나 우리처럼 자주 이사해야 하는 경우는 사람을 반 돌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틀 안에서 생각하다 보면 실타래는 더 점점 엉켜 가는 듯하다.
뿐인가?
전혀 예상치 않았던 상황 속에서 서로의 반응이 다르다. 그리고 서로의 반응에 속상해하기도 한다. 워싱턴 DC 에 있는 육군 병원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는, 하늘로 치솟는 듯한 주변 집값이 우리를 당황케 했다.
“이렇게 비싼 데서 어떻게 살라고 이런 델 보내지?” 남편이 하는 소리다. 몇 차례 버지니아와 메릴랜드를 어기 저기 돌아본 후 나올 법도 한 말이다.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 보면 보일까 말까 한 극히 작은 점에 불과한 공간이 내가 필요한 것 전부인데…
생각하면 참 허탈하다.
그래서 다시 생각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단순하다. 복잡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음이 편안하다.
이 방법은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내게는 믿음이 최고의 방법이다. 나 스스로 그리고 많은 이들이 만들어 놓은 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생각하자. 그래서 나는 모든 것이 가능한 하나님을 신뢰하기로 한다. 내가 생각지 못한 곳으로 이끄시기도 하고 보여 주시기도 하실 수 있다. 우리를 위하여 가장 적합한 곳을 예비하고 준비해 주시는 하나님만이 답이다.
이런 과정을 여러 차례 거치며 더 이상은 내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이렇게 해야 하고 이렇게 돼야 하는 생각은 점점 없어져 갔다. 왜냐면, 내가 나의 아는 생각의 틀 안에서 방법을 찾으려고 할 때보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방법을 구할 때, 항상 더 나은 길이 열리고 선하게 이끄셨기 때문이다.
많이도 싸고 풀었던 짐. 나의 살림살이. 나의 소유물. 우리가 가는 곳마다 따라 다닌다.
그런데 걔 중에는 우리와 같이 연명을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내가 좋아하고 아끼던 그림들도 거울도 종적을 감추었다. 출신이야 주로 flea market 표, thrift store 표, Salvation Army표, Goodwill 표라 돈으로의 가치는 얼마 안 되어도 내가 좋아하던 것이고 가는 곳마다 나와 동행하던 것들이라 마음 한 켠이 쓰리다. 주거지가 자주 바뀌는 변화
가운데 우리에게 있는 유일한 친숙함인데..., 눈에 익은 것들인데… 이들이 사라지고 없어지면서 적응해야 할 낯섦이 더 많아져 가는 것 같다.
moving company 에 전화해서 따따 거리는 나. claim 하면 되지 않느냐는 무심한 대답은 군인 식구들은 한 번쯤은 누구나 다 들어본 소리다. 돈으로 환산 될 수 없는 추억과 친숙하던 삶의 일부가 실종된 그 기분을 그들이 알 리 없다.
의자도 등이 다 깨어져 나타났다. 다리도 부러졌다. 짐이 도착해서 풀고 나면 마치 영화 M.A.S.H.에서 여기저기 다쳐 누워 있는 군인들의 모습처럼 나의 살림살이도 여기저기 깨지고 다쳐 있다. 한 쪽이 으스러져 들어간 텔레비전, 어디서 떨어뜨렸는지 일그러진 밥솥. 박살이 난 시계와 그릇들. 일부가 떨어져 나가 소용이 없게 된 물건들이 수도 없다.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한 지 얼마 안 되어 겨우 안정이 되고 물건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던 어느 날.
아이가 가게 된 대학의 orientation에 참석하고 오는 길에 전화가 온다. 부엌에 ceiling fan을 달려고 우리 집에 들어갔던 관리부 직원이다. 나의 접시장(china cabinet)의 가운데 유리 선반이 무너져 내려 앉으면서 놓였던 내용물이 전부 마룻바닥으로 다 깨져 나와 있는 것을 목격하고 놀래서 온 전화였다.
참 어이없다. 오랫동안 잘 견뎌 주었는데.
“혹시 그 사람들이 건드린 거 아냐? 괜히 가만히 있는 선반이 왜 내려앉아?”
이사하는 과정도 아닌 짐을 다 풀고 정리가 된 상태에서 이것은 또 무슨 일이람? 그러면서 누가 무엇이 원인일까부터 생각이 된다. 집에 도착해서는 남편과 아들 아이가 먼저 들어가서 자기들이 치운 후에 들어오라고 한다. 그들도 안다. 내가 아끼고 제일 좋아하는 것들이 무너져 내린 캐비닛 안에 다 들어 있다는 것을.
나중에 집안에 들어 와 보니 그래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것들이 몇 개 있다.
이들도 역시 돈의 가치는 하나도 없다. 그냥 내가 발품 팔아 건져내 한동안 나의 장식장을 빛내 주던 내가 좋아하는 색깔과 종류의 그림이 담긴 접시요 잔들이고 티 팟 등이다. 지금까지 이렇게 나의 일부를 보내는 데 익숙해져서 인지 그런 대로 견딜만하다. 그리곤 집에 없기를 잘 했다 싶다. 그 앞을 지나 다니다 다칠 수도 있었을 테니까.
"천국 가는 연습 잘 하네...”
친구가 하는 말이다. 이 땅의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그렇다. 그런데 나는 많은 것이 이렇게 깨지고 박살 나고 실종될 때 그리 초연하지는 못하다. 하나하나에 묻어 있는 추억과 이야기가 더는 나의 삶의 일부가 아닌 것 같아 내 마음이 머무적거린다.
나는 이렇게 사는 동안은 절대로 새 물건을 사지 못한다. 거금을 들여 새로 장만한 가구가 어떻게 될까 전전긍긍해야 하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역시
나는 무엇인가에 매이는 것을 싫어 하지.
그러면서 나만의 사는 방법을 터득한다. 나와 같이 있는 동안 맘껏 사용하고 즐기는 것이 본전 뽑는 유일한 길이다. 나는 아끼는 물건이 없다. 그릇도 다 꺼내 쓴다. 나와 같이 영원히 있으라는 법이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내가 가진 것과 나의 마음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두어 본다.
그렇게도 많이 내리는 비와 흐린 날씨의 시애틀 지역.
내 성격으로 절대로 좋아할 수 없는 곳이지만 좋은 교회에 다닐 수 있었다. 한 여름에도 눈이 덮인 레이니어 산이 어디서 돌아 봐도 떡 하니 버티고 있다. 일 년 내내 사방이 파릇파릇 하다. 하늘을 치르는 소나무들이 듬직하다. 아름다운 곳이다.
여름엔 숨 막히도록 습하고 더운 사우스 캐럴라이나, 이곳에서도 다시 보리라고 상상 못했던 완다를 만났다. 또 미니도 만났다. 오랜 만의 회포가 짜증 나는 날씨를 잠시 잊게 해주었다.
갑자기 겨울옷이 쓸 데가 없어진 텍사스. 삭막하기 이를 데 없는 이곳. 줄 이어 서 있는 탱크들과 구급차들이 지금까지 모르고 살던 현실을 보게 한다. 이곳에서 조우지와 션이 우리의 삶 가운데 들어왔다. 음식 잘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즐기는 커맨더의 부인인 낸시 덕분에 잘 얻어 먹고 재미 있었다.
메릴랜드에 살면서는 좋은 이웃들 때문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독일에 살면서는 갑자기 세상이 좁아지고 역사책 속 한가운데 서 있게 되었다. 수없이 많이 남은 지난 날의 흔적으로 말미암아 나는 생전 처음 역사라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된다.
지금 사는 곳도 미국역사의 현장이다.
1609년에 세워진 미국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포스트다. 남북전쟁 당시 노예들이 여기만 오면 자유를 얻던 그런 곳이다. 사방이 물로 덮인 곳. 지나 다니는 배들의 고동 소리가 귀에 익은 곳이다. 씨월(sea wall)에 나가 바닷바람을 맞으며 울어대는 갈매기 소리도 벗삼아 걸으며 기도하는 곳..
내가 사는 집도 1800년대에 지은 집이다. 오래 된 집의 구석구석이 주는 느낌이 좋다. 위층은 남북전쟁 당시의 리 장군이 중위 때 살았다고 한다. 비바람이 치면 무서운 곳이다. “예수님 저 무서운 광풍이 잠잠하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해야 하는 곳이다. 여기서 아이를 대학교에 보내면서 떠나 보내는 연습을 한다. 역시나 아직은 지금껏 살아본 곳 중 가장 애착이 가는 곳이다.
새로운 근무지를 향하여 떠나기 전 주변의 친지와 친구들에게 우리의 다음 행선지를 알린다.
당연히 신나고 들 떠 있는 나의 마음도 따라 붙는다. 하나님께서 또 누구를 나의 삶 가운데로 인도하실지 누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어떤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될지 어떤 관심을 갖게 될지 모두 미지수다. 그래서 들뜨고 기대로 부푼다.
이제는 나의 연락을 받는 많은 이들은 우리에게 익숙해졌다.
그래서 더 이상은 “벌써?”, “또?”, “어휴~ 힘들어서 어떡해” 하지 않는다.
어떻게 그러고 사느냐고 하던 친구 러베카는 나의 e메일을 받은 후 이렇게 답한다.
“너의 메일을 받고 마음에 감동되었어. 저장해 두고 또 읽고 읽어.”
“나도 자주 이사 다니는 편인데 나는 불평을 많이 하는데… 한 번도 너처럼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아마도 새로운 곳에 대한 호기심 많은 나의 모습이 또 지금까지 단련된 나의 마음이 또다시 미지의 세계를 향해 움직여야 하는 상황을 알리는 나의 메일 속에 나타난 모양이다.
잃는 것도 손해 보는 것도 많지만 이런 방랑객 같은 삶 덕분에 얻는 것도 많다. 그 무엇보다도 이런저런 상황에 부닥칠 줄 알고 만족해 하고 좋아하는 법을 배운 것이 내가 아끼는 재산 목록 1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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