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하우스의 돌보며 걸으며
IBM 회사에서 개인 컴퓨터를 만들어 내기 전, 주로 전문직 회사에 컴퓨터를 공급하던 때다. 내가 IBM 회사에서 만난 P는 엔지니어인 동시에 마케팅을 공부한 비지니스맨에다 세일즈맨이었다.
사람은 자진해서 물건을 사는 것은 너도나도 좋아하지만 누군가의 설득으로 인한 물품이나 서비스의 강매는 싫어한다고 한다. 이렇게 다양한 선택의 권한을 갖은 소비자나 고객을 설득해야 하는 직업이라서일까? 세일즈맨이라는 직업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아마도 그래서 이들은 자연히 사람을 홀릴 만한 현란한 말 재주가 있으리라 짐작한 나는 너무도 평범하고 편안한 그의 고객 대하는 스타일에 넘어가 그보다 더 많은 말을 한 것 같은 어렴풋한 기억이 있다.
그런데 실은 베스트 세일즈맨은 말을 많이 하거나 남다른 말재주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상대방의 말을 잘 경청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서브웨이 안이건 식당이건 길거리에서건 사람들의 대화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유난히 눈이 반짝거리고 생기 있는 목소리, 웃음을 먹은 얼굴로 신나게 얘기하는 아이를 비롯해 어른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의 대화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무엇을 저리 재미있게 말할까 싶어 옆에 다가가 살짝 엿듣고 싶은 충동과 호기심을 돋우는 경우가 있다.
그런 가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얘기인 듯 토씨 하나라도 놓칠까 봐, 그리곤 주위의 모든 이가 자신의 말을 경청하고 있음을 확신하는 표정으로 대화 속에 몰입해 있는 듯한 모습도 보인다. 같이 고개를 끄떡이고 싶은 대화하는 광경이다.
무엇이 이렇게 생기 넘치고 주위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마음문을 활짝 열은 대화를 가능케 할까? 아마도 맞은 편에 앉아 귀와 마음 문을 활짝 열고 가슴으로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서 아닐까?
결혼상담 전문가들의 말을 빌리면, 갓 결혼한 남녀의 대화에서, 어떤 커플이 5년 안에 이혼할 부부인지를 대번에 알 수 있다고 한다. 파괴적인 언어의 사용에 익숙한 사람들의 대화를 진작 알아 보기 때문이다.
부부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부모와 자녀의 관계, 친구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언어의 영향을 받지 않는 관계가 없다. 나도 모르게 길든 이기적인 언어의 사용이나 대화의 방식은 관계에서 파괴적이다.
이로 인해 이혼하는 남녀, 반항하는 자녀, 상처받는 관계, 미움과 복수심에 가득 찬 형제가 속속히 생기고 많은 가족관계가 파편이 되고 만다. 급기야는 사람의 영혼에까지 깊은 상처를 남긴다.
그래서인가 성경도 말하는 것과 관련해 수없이 혀, 입술, 지혜로운 자의 말과 어리석은 자의 말의 언급이 많다. 혀는 불과 불의의 세계로 비유되기도 한다. 또 작은 지체나 큰 것을 자랑한다고 한다. 그래서 온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기도 한다고 한다. 혀의 잘못된 놀림이 가져오는 파괴적인 영향력의 범위가 가히 짐작된다.
그렇다면, 어떤 대화법이 관계 향상에 윤활유 역할을 하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사람은 모두 세일즈하는 활동을 무의식적으로 하며 산다고 한다.
나의 의견이나 새 아이디어를 제의하는 일, 새로운 정책을 내어놓는 일도 상대방을 설득해야 하는 세일즈 활동으로 본다. .
의사나 변호사 그 밖의 전문직에 종사하는 이들도 자신들만이 갖고 있는 지식과 기술을 세일즈하는 사람들로 보면 된다.
부모가 자녀에게 가치관과 올바른 도덕심을 심어 주려고 가르치는 것도 부모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을 자녀에게 세일즈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나의 삶에 중요한 사람들과의 대화는 말할 것도 없이 베스트 세일즈맨 처럼 듣는 데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좋은 대화는 세일즈맨의 경청이 필요하다.
잘 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경청은 수동적이지 않다. 들려오는 소리를 할 수 없이 듣거나 억지로 또는 부분적으로 듣는 피상적인 행위가 아니다. 즉, 귀로 듣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귀와 마음을 열고 적극적이며 의도적인 자세로 상대방의 말을 듣는 경청은 모든 대화의 기본자세다.
결국, 듣는 행위는 목소리를 듣기만을 위함이기 보다는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가슴의 소리를 듣기 위함이 아닌가? 마음으로 듣는다는 것은 동전의 양면성과도 같다. 말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과 내가 하는 말이 어떻게 상대방에게 들리는지를 미리 이해하고 염두에 두는 것이다.
“18살 만 되면 나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거예요!”
어느 16살 난 사춘기 청소년의 말이다. 무엇이 이 아이로 하여금 법적으로 성인이 되는 18살이 되기를 그렇게 바라고 기다리게 할까?
아직 성장하는 단계에 있는 아이는 현재와 미래를 잘 연관짓지 못한다. 부모에게서 독립하고 싶어 하고 자기의 자아를 찾고 알아가는 청소년 시기이나 아직은 부모에게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기도 하는 시기이다.
그래서, 언뜻 귀로만 들으면 18살이 됨과 동시에 자급자족할 수 있는 성인이 누리는 혜택이 자동으로 주어지는 줄 아는 철없이 반항하는 소리로 밖에는 안 들린다. 귀로만 들으면 쉽게 단죄하고 판단하게 된다.
“지금까지 먹여 주고 입혀 주고 공부시켜 준 게 누군데…?” 라는 화내는 어른의 반응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가슴으로 들으면 이 아이의 성나고 반항하는 목소리 외에 들리는 또 다른 음성이 있을 수 있다. 눈에 안 보이는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전쟁 중에서와 같은 혼란 속에서 외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새장에 갇힌 새인 양 더 날고 싶어도 날개를 몇 번 퍼득거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지는 않았는지? 자신의 생각과 마음과 의사의 표현이 자유롭게 허용되지 않았는지? 누군가의 조정과 영향권에서 벗어 나고 싶어 발버둥치는 절규는 아닌지?
마음으로 들으면 어떤 소리가 들리나?
혹시 이 아이의 마음에서 하는 말은 이런 게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다.
“나는 엄마 아빠가 억지로 시키는 운동을 하기 싫어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해 주세요..”
“내 말 좀 들어주세요…”
“내가 스스로 결정하게 해주세요…”
“억지로 학원에 가야 하는 게 싫어요..”
“내 의사를 들어보지도 않고 단기 선교 가는 거 왜 등록했어요?”
“피아노 억지로 쳐야 하는게 싫어요…”
이 아이의 관점에서 이해하며 듣는다면, 나이가 어리다고 모든 결정권이 부모에게만 있는 것이 아님을 그리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능력을 키우려면 책임감이 따르는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나 자칫 이유 없는 반항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부모인 내가 더 잘 안다고 생각하면 대응하는 대화의 방향도 달라진다. 더 간섭하고 더 강요한다면 점점 서로 주고 받는 대화(對話)가 대화(大火)로 치닫게 되거나 아니면 대화의 단절마저 생기면서 서로의 가슴에 많은 상처를 내게 된다.
대화를 이어 나가려면, 귀에 들리는 것 이상을 들을 수 있어야 함과 동시에 나의 반응이 어떻게 들려지는지를 미리 생각할 수 있어야 가능하다.
마음으로 듣는다는 것은 대화 가운데 같이 동반되는 상대방의 감정표출을 허락하고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습관적인 불평불만과 부정적인 사고의 소유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나 의사를 표명할 때, 대화의 소재에 따라 우리의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감정이 표출된다. 자녀나 부부끼리, 친구끼리 형제끼리 또는 서로 서로가 대화 가운데 표현하는 감정을 정당한 감정으로 인정하고 존중할 때 의미 있는 대화로의 진전이 가능해져 마음 문을 여는 대화와 마음으로 듣는 대화가 가능해진다.
“나는 수학이 너무 싫어(I hate math)!”
아이는 당연히 해야 하는 줄 아는 과목이지만 어려워서 힘들어 하다 보면 싫어하는 감정을 부여한다. 그런데 싫어하는 상대는 살아 숨 쉬는 생명체가 아니라 수학이라는 교과이다. 잘 못하는 것을 정당화하려는 감정이자 잘 못 하는 자신을 향한 감정표출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좋아할 필요는 없지. (You don’t have to like it)”
마음으로 듣는 사람은 수학을 싫어하는 감정의 표현을 일단은 허락하고 존중하며 인정한다. 표현된 감정에 공감함은 말하는 사람도 마음을 먼저 열고 들을 수 있는 귀를 갖게 한다.
이쯤 되면, 수시로 변하는 감정보다는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은 저절로 되게 마련이다.
“그냥 하면 되지 (You just do it.)”
세상에는 감정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도 싫으나 좋으나 해야 하는 일도 있음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무조건 판단하고 단정하고 몰아 세우는 것은 대화의 단절로 몰고 가게 된다.
특히, 조절이 잘 안 되는 격한 감정은 전적으로 이해하고 공감할 때 누그러지고 더 이상 자신의 방패로 사용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상대방의 의견과 생각, 그리고 판단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일어나는 일과 처한 상황 그리고 누군가에 대한 속상한 감정, 분노, 상처, 실망 등 사람의 수없이 느끼는 감정을 허락하고 그 정당성을 수긍하는 배려일 뿐이다.
싱글일 적에 아버지와 친분이 있는 분이 내가 일하는 직장으로 날 만나러 오셨다.
내 나이 불과 22 아니면 23 이던 땐 거 같다.
다짜고짜 “너, 연애하니? 이뻐졌다!”라는 그 아저씨의 폭탄 발언은 나의 안색이 변할 정도로 기분 나쁘게 했다. 한참 성인의 대열에 끼고 싶어 어지간히도 많은 착각 속에 살던 때인지라 나를 애 취급하는 것을 아주 기분 나빠 하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나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는 격하된 무례한 발언으로 받아 들였다.
퇴근 후 집에 돌아가 아버지한테 내가 사용 할 수 있는 형용사라는 형용사는 다 사용해 나의 안 좋은 감정을 쏟아놓았다. 다행히 누구 편도 안 드시고 웃으며 들어 주시던 아버지 때문에 나의 화난 감정은 정당화 되었다. 내 입장에서는 화 날 만한 일이었음을 인정하신 거였다.
그 나이가 그리 어른 대접 받을 만한 나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 건 한참 후지만, 그 당시 미성숙한 나의 이런 반응을 마음으로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나의 생각이 얼마나 편협하며 필요 이상으로 민감하다는 식으로 나의 잘못을 부각하는 비판으로 대화가 흘러 갔다면 우리의 관계는 점점 일방통행으로 바뀌어 갔을 확률이 높다.
그때 그 순간 나의 감정을 수긍하는 아버지의 배려가 더 대화하고 싶게, 그리고 더 많이 표현하고 싶게 만들었다. 나의 격양된 감정을 수긍하는 대화 때문에 더는 감정을 고조시켜 나의 얘기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자연히 알게 됐다.
마음으로 듣는 것은 빈정되는 말투, 비꼬는 말, 폄하하는 언어의 사용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런 유의 언어의 사용은 불신하는 관계로 발전하여 멍들고 깨지는 단계로 이어진다. 듣는 이의 마음에 큰 상처로 남으며, 아이에게는 불안전한 자아형성이나 자존감에 한 몫 한다.
어느 친한 동생이 하는 말이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에 늦게까지 남아 열심히 유화를 그려 집에 가져 와서 엄마에게 보여 드렸다고 한다.
“그게 뭐니, 나도 하겠다”
엄마가 무심코 던져진 말이 가슴에 창을 꽂았다. 그런데 실은 이 동생은 어려서부터 그림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서 그림 대회에 나가 상을 휩쓸던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자신의 재능에 대한 확신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부모가 아무리 그림을 보는 안목이 없다 할지라도 나의 표현 방법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들려질 것을 미리 생각한다면 빈정되는 말투보다는 긍정적이고 칭찬하는 말의 훈련이 가정 안에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 (잠언 12:18b)
[Reckless words pierce like a sword…]
공부를 잘 하는 마이클은 우리 모두 있는 데서 성적표를 자랑스럽게 엄마에게 내민다.
전부다 95% 이상인 아이에게 다짜고짜 “95% 면 나머지 5%도 할 수 있다는 거 아 니니...?” 하며 다그치는 엄마의 모습에 삽시간에 방안의 분위기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 정적에 빠져 이내 불편해진다.
어느 가정을 방문했을 때, 부엌에서 자신의 식사를 손수 준비하는 그 댁의 아저씨를 보고 칭찬하는 내게 “별 수 있나요? 안 해 주니까 해 먹는 거죠.”라고 웃으면서 하는 말에 많이 머쓱해진 적이 있다. 많은 의미가 내포된 말인 줄은 알겠는데 어딘지 모르게 듣기에 불편하고 그 이상의 말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대화로 그치고 만다.
만약 그가 “이 정도는 얼마든지 하지요.” 라고 했다면, 우리의 대화는 더 많이 흘러 갈 수 있었을 텐데…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나 그의 말 또한 그의 마음 속에서 나온 말이기에 그에게도 누군가는 그의 말을 마음으로 들어 주는 대화의 필요성을 생각하게 하는 날이었다.
가끔은 누구나 내가 하고 싶은 말에 급급해 할 때가 있다.
그러다 보면 상대방에게 어떻게 들린다는 것을 순간 염두에 두지 못할 경우가 종종 생긴다. 그러나 이런 파괴적인 대화의 습관은 나의 가정이나 나에게 중요한 사람과의 관계를 벼랑으로 몰고 가기도 하고 자녀의 가슴에, 남편과 아내의 마음에 평생 남아 그들의 속을 갉아 먹는다고 생각하면 용납되어서는 안 되는 대화의 방법이다.
얼마나 많은 관계가 언어폭력으로 인해 미로에 빠지고 그 구성원이 괴로워하고 상처로 신음하나? 혀에 자갈을 물려 혀를 다스릴 수도 없다고는 하지만 이런 식의 언어에 익숙해졌다면 극단의 조치가 필요하기도 하다. 무심하게 던지는 말이 심령을 죽일 수도 있다.
마음으로 듣는 말은 대신 긍정적이고 칭찬할 만한 언어, 힘과 용기를 주는 믿음의 언어, 그리고 사랑의 대화를 하게 한다. 그리고 자연히 대화의 주변을 평화롭게 한다.
성경은 입술의 열매로 좋은 것을 누린다고 한다. 또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입을 열어 지혜를 베풀며 그 혀로 인애의 법을 말하는 여인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려면 먼저 잘 듣는 습관이 앞서야겠다.
열린 귀와 마음으로 들을 때 좋은 대화로 이어지고 지혜를 베풀기도 하며 하나님의 진리 말씀을 나누는 아름다운 관계 형성이 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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