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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의 연구묵상/캪튼's 코너

내 생각과 다르신 성령님

사진은 글의 특정 내용과 전혀 무관



내 생각과 다르신 성령님

-내가 깨닫고 겪은 이상적인 교회와 경배


김삼



오래 전, 나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동기로 한 미국인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 곳은 과거 내가 알지 못한 교회였고 처음엔 정말 가고 싶은 마음이 나지 않는 그런 교회였으나, 성령님께서 강제로 내몰다시피 이끌어 가셨다. 더구나 그즈음 내가 멀리 찾아가 꼭 몸 담고 싶은 패러처치가 있었기에, 마음이 크게 설레고 흔들리던 때였다. 


그러나 내 뜻을 정면으로 막으시고 정말 "엉뚱한 곳"으로 이끄시는 성령님의 가이던스에 순종하여 울며 겨자 먹기로 가 보았더니.. 웬 걸, 그 곳은 정말 마치 고향과 같고 어머니 품과 같은 바로 "내 교회"였다. 거기서 성령님의 놀라운 인도와 배려로 정말 과거에 전혀 몰랐던 많은 것을 알고 깨달았고, 배우고 익힐 수가 있었다. 성경에는 엄연히 있는 진리이지만 현존할 수 있다곤 믿지 않았던 많은 요소들이 오늘날 실존한다는 사실을 목도하고 알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린다. 특히 나중에야 크게 잘못된 비진리의 장소인 줄 깨닫게 된 문제의 패러처치에 가지 않도록 미리 막으신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감읍한다.  



이 글은 그런 체험을 다룬, 매우 지엽적이고 부분적인 내용이다. 이 글을 시작으로 앞으로 그 곳에 관해 차차 할 얘기들이 있겠기에, 일단 요약부터 하면 그 곳은 실로 영적으로 수준 높은 교회였다. 내 생애에 그런 교회체험은 전무후무했다. 행전적인 성령의 사역과 열기로 가득했고, 이적과 기사와 은사, 코린토A(고전)서 12~14장 등에 나열된 모든 영적 은사들이 골고루 나타나며, 또한 성령의 아홉 열매를 맺으려고 힘쓰는 교회였다. 모든 사역의 겉모습과 실제가 거의 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와 같은 모습이었고, 무엇보다 영적인 자유가 흘러넘쳤으며, 인종을 초월한 성도들이 정말 꾸밈 없고 허물 없는 입맞춤과 포옹으로 문안하며 친교를 나누는 그런 교회였다. 


그 무엇보다도, 인본적 요소를 탈피하여 늘 하나님을 가장 높이고 성령님께 순종하려고 애쓰는 신본적인 교회였다. 또한 예배의 내적 진리가 극명하여, 현대적인 음악을 제외하고는 파울이 예시하고 증언한 코린토A서 14'26의 예배 모습 거의 그대로였다. 그 교회의 주보에는 '예배순서'라는 것이 따로 없었다. 한 마디로 성령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는 영적인 경배였기 때문이다. 정말 요한복음서 4'23, 24처럼 영적으로 이상적인 경배를 하느라 힘쓰는 교회였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 곳을 '완전한 교회'였다고 우상시하거나 자랑삼으려는 것이 아니다. 지상의 가시적인 제도교회로서는 완전한 교회가 없다. 완전한 교회는 거듭난 사람들이 오직 주 예수 크리스토(그리스도)님을 머리로 모시고 있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교회일 뿐이다. 오히려 자기네가 "완전"하다고 주장하는 교회는 '교주'가 독재하는 거짓 교회이기가 더 쉽다. 


다만 나는 성도가 성령님께 순종하면 어떤 모습과 결과가 올 수 있는지를 예로 들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신자들이 흔히 멋모르고 코린토교회를 흡사 오물 같은 교회였던 양 마구잡이로 폄훼하지만, 파울이 묘사한 당대 코린토교회의 경배 모습은 사실 그 어떤 현대교회보다 영적으로 수준이 높았던 모습이었다. 왜냐하면 코A서 14'26과 같은 경배 광경을 오늘날 현대교회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 교회의 경배는 성령님의 초자연적 사역을 간과하고 멸시하는, 대부분 인위적인 모습이다. 거의 다, 한 마디로 사람들이 주가 되어 이끄는 인위적인 경배이지, 성령님을 진정 존중하여 그 분의 인도에 맡기는 그런 경배가 아니다. 

그리고 성경이나 성령에 근거하기보다 사람의 머리로 짜 낸 '예배신학' 내지 예전신학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주보에 나열된 '예배순서'에 묶여, 틀에 박힌 예배로 일관된다. 인간이 이미 그런 경배의 틀을 짜 놓고 이름만 "영과 진리", 또는 '성령', '성령' 찾으면서 이름과 명목으로 장식하려 들기에 인본주의 경배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실제로는 성령님이 영적/초자연적으로 일하실 틈을 거의 전혀 열어 놓지 않아서, 성령께서 거기 일하실 구석이 거의 없어 보인다. 경배 이끔이나 설교자나 지도자가 자기 생각을 성령님께 맡기고 그 분의 역사를 갈망하고 기다리기보다 자기 말과 구변과 지식으로 경배 시간의 대부분을 메우고 이끌어가는 양상이다. 이런 모습은 성령님을 진정 환영하는 분위기가 아니다. 


내가 그 곳에서 보고 느끼고 겪은 대로 말한다면, 성령님은 그 분이 쓰신 성경 말씀의 진리를 결코 간과하거나 초월하시지 않고 예나 지금이나 늘 그대로 행하신다는 것이다! 행전에 나타난 모습 그대로가 현실 교회에도 가능하다는 것을 그 교회에서 처음 발견했다. 일부, 초기교회와는 다른, 현대 교회의 불가피한 문화적인 모습을 빼 놓고 말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현대 교회가 성령님의 이런 사역을 믿지 않는다. 대신, 성령님이 "변모"하셨다고들 믿는다. 하지만 변하는 것은 인간이지, 하나님이 아니다. 성령님의 뜻보다 인간의 생각과 아이디어 이론이 앞서는 신학의 영향 탓이다. 그래서 사람은 늘 거짓되되 하나님만은 참되시다고 고백해야 한다. 


성령님은 오순절 강림 당시와 다름없이 늘 계시고 사역도 변함 없으신데, 사람들은 성령님이 시대에 따라 늘 바뀌고 변모하시는 줄로 알고들 있는 것이다. 



내가 다닌 그 교회는 그렇지 않았다. 초기교회와 다름 없는 성령님의 역사를 성경 말씀 그대로 믿는 교회였다. 과거에 일하신 성령님은 오늘도 여전히 일하실 수 있음을 믿고 있었다. 단적으로..파울이 코린토A서 14장에서 말한 그대로 매 주일, 아니 매 번 모임 때마다 "다불과"(많더라도) 3명의 공적인 영언자(방언자)가 순서와 질서대로 소리높여 영언을 말하면, 주변에서 영언해석 은사자들이 해석('통역')을 했다. 때로는 예배인도자나 설교자가 직접 해석할 때도 있었다. 해석된 내용은 주로 권위적(勸慰的)인, 즉 미래예상적인 내용보다는 성도를 위로하고 권면하고 힘을 주는 내용들이 많았다. 물론 담임목회자를 비롯하여 예언은사자들도 많았으나, 미래예고적인 내용이 많지 않았다. 나는 그 교회에서 비로소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의 예언은사의 특성을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었다. 



정말 서로 섬기는 교회


오늘날 많은 현대 교회들이 "섬기는 교회"로 자처하지만, 함께 지내보면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경우가 더 많다. 우리는 섬긴다는 개념을 잘 알지 못한다. 특히 우리 지도자들이 더 그러기 쉽다는 점은 자못 통탄스럽다. 교인들에게 섬김을 강조하는 지도자들 스스로가 남을 섬기기보다는 성도에게 대접 받기를 훨씬 더 좋아한다! 명절 때 교우들 가운데 선물이 유통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흔히 지도자들은 주기보다 받는 쪽이기가 쉽다.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과는 반대이다. 우리는 남에게 대접 받고 싶은 대로 먼저 상대방을 대접해야 옳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낫다! 내게 더 유리하고 유익하다. 주는 사람이 처음에 손해 되는 것처럼 보여도, 나중 받고 누리는 것들이 더 많다는 게 진리이다. 


내가 다닌 그 교회는 대표목회자부터가 남에게 대접받기보다 섬기고 나눠 주기를 즐겼다. 늘 바쁜 가운데도 틈틈히 교회 일꾼들을 조용히 불러다 어떻게 지내냐고 묻고, 가진 것을 나눠 주고 베풀기를 좋아하는 분이었다. 교우들이 요청하면 시간 짬을 내어 상담에 응했다. 물론 상담이 늘 좋은 것만은 아니다. 폐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교인들을 섬기는 품이, 지도자로서 보기 드문 고아한 인품이었다. 

그 교회는 장로들이 특정석에 앉아 자신의 높은 신분을 드러내고 쇼오프하는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앞장서서 군데군데 출입구 안내 등 궂은 일을 도맡아 섬김의 모범을 보이는 교회였다. "높은 사람들"의 그런 스스로 "망가지고" 낮아지는 모습에 오히려 익숙치 못한 새 교우들이 당황할 정도였다. 

그 교회에 갓 온 교인들은 얼떨결에 한동안 섬김과 대접을 받다가도 이내 남들의 그런 모습을 본받아 자신도 어느 새 섬김이가 돼가고 있었다. 누가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말이다.  


그 교회는 특히 '리더'와 따르미(followers), 무슨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따로 없었다. 누구나 교회 구석에 필요한 일에 다 함께 어울려 뛰고 일하는 사역자들이었다. 그러나 내적인 질서는 분명했다. 표면상의 권위가 아니라 영적 권위가 존중 받고 있었다.  



자리타령


교회당이나 예배실 앞 자리에 나오지 않는다고 인도자나 설교자, 리더 등이 다그치고 꾸짖고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앞 자리는 금 자리네 은 자리네, 뒷 자리는 흙 자리네 짚 자리네 해 가며 짐짓 우등석과 차등석을 나누며 폄하할 필요가 없다. 어느 자리에 앉건 교인들의 자유이다. 더욱이 몸이 불편하거나 어린 젖먹이나 아이를 데리고 있는 엄마들, 안내/보안 등 특수임무를 맡고 있는 사역자 등등 특수상황에 처해 있는 교우들도 많은데, 무대 앞에 있는 이끔이들이 메가폰을 든 영화감독처럼 장소와 로케이션을 갖고 일일이 교인들을 타박할 일이 결코 아닌 것이다.  


주님과 제자들은 벹새다 광야 등에서 군중을 그렇게 다루지 않으셨다. "자, 다들 되도록 앞 자리로 나와요. 앞자리에 더 은혜가 있어요~" 하신 적이 없다. 그 어느 곳에서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됐지, 주님과 제자들 가까운 자리를 금자리, 은자리로 나누어 특대하지 않으셨다. 그냥 있는 곳에서 질서를 지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콩가루, 빵가루가 앞 자리에 더 떨어진다"는 식으로 이끔이들 자신에게 편리한 광고를 할 게 아니라 좀 불편하더라도 콩가루와 빵가루를 들고 구석자리, 뒷자리에도 찾아가 골고루 뿌려 주면 되지 않겠는가. 그것이 성경적이다. 야코보가 경고한 것처럼 교회에서의 자리타령은 오히려 차별적이거나 타산적이고 위선적일 수 있다.   


성경엔 앞 자리에만 은혜가 있고 뒷 자리에는 은혜가 없다거나 상대적으로 모자란다는 대목이 없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좋다고는 했어도 그것이 곧 교회당 앞 자리라는 논리는 잘못된 것이다. 어차피 교인수가 늘면 빈 자리를 모두 남김없이 메우게 되어 있는 것이지, 앞자리만 채우고 뒷자리는 비워두는 게 아니잖은가. 앞자리 교인들은 일등 교인, 뒷자리 교인들은 하등 교인으로 차별할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파리새는 성전에 나와 버젓이 앞에 나서기를 좋아했지만, 세무관은 감히 가까이 나올 생각을 못하고 멀찌감치 서서 가슴을 치며 통회한 것이 하나님께 더 선하고 의롭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므로 지도자나 설교자, 강사들은 교인들 자리타령하지 말기를 바란다. 별 근거가 없다. 교회가 부흥성장되고 발전하여 교인수가 많아지면, 앞자리부터 뒷자리까지 고루 채워야 하기 마련이며, 앞 자리를 비워두기보다 앞 자리부터 채우면 자리 정돈과 보기에도 좋고 또 강사가 느끼기에 심리적/정서적으로 더 잘 경청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뒷 자리에서도 오히려 더 경청이 더 잘 되고, 상황과 내용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이 더 잘 될 수도 있다. 더구나 콘서트 홀 같은 데서 연주자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위층은 어떤가? 상층에 있다고 더 멀어서 잘 들리지가 않는가? 그러므로 앞 자리 뒷 자리 갖고 교우들에게 율법의식을 심지 말자.

대형교회에서는 어떤 자리든 안내자가 이끄는 대로 앉게 되어 있다. 


그리고 지도자들이 자주 착각하는데, 교회당은 구약 성전이 아니다. 성도가 거룩한 것이지, 건물이 거룩하게 해 주는 게 아니다. 건물은 모임장소일 뿐이다. 앞자리에는 하나님이 더 가까이 계시고 은혜를 더 많이 베풀어 주시며 뒷자리일수록 은혜가 "떨어진다"는 생각은 인간의 조바심이요 착각일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 생각과 달리 시공간에 제약받지 않으신다. 

뒷자리에 있거나 유아실에 있으면서도 또는 그 날 어떤 형편으로 지각을 하여 맨 뒷 자리에 앉았지만 마음이 낮아질 대로 낮아져 있거나 평소 수줍어서 뒷 자리에 앉아 있어도 그 날따라 남달리 강력한 은혜를 느끼는 교우들, 남달리 외롭게 상한 심령들이 한 구석에 있을 수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자꾸 "뒷 자리에 숨어서 부정적이 되지 말라"며 다그칠 필요가 없다. 앞자리든 뒷자리든 성령님께 맡기노라면 그 분이 찾아 믿음 있는 사람, 그 분이 긍휼을 베풀고 도우실 대상을 찾아 고루 역사하신다. 설교자 바로 앞이 공중에서 금싸라기가 떨어지고, 맨 뒷 자리에는 흙가루가 날리고 먼지가 쌓이기 쉽다는 얼토당토 않은 착각은 버리는 것이 좋다. 



문제는 바로 그 날 그 곳, 오늘 이 곳이 성령님을 환영하는 곳이냐는 것이지, 하나님이 인간의 생각에 따른 '로케이션'에 좌우되지 않는다. 내가 다니던 그 교회는 그런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무질서를 용납했다는 것은 아니다.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은 한국 교회나 한인 교회 목회자들 다수는 교인들의 움직임에 대해 굉장히 히스테리컬하다는 점이다. 예배 도중 누군가 일어서서 자리를 이동하거나 움직이면, 마구 혈기를 부리며 신경들을 쓴다. 차라리 중고등부나 청년회 지도자들은 덜한데(dull and less) 말이다.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다. 그건 성령의 열매의 일부인 인내의 열매가 아니다. 그래서는 새 교우들을 끌 수가 없다. 

교회가 누구의 것인가? 하나님의 것이지 설교자의 소유물이 아니다. 대형교회의 사례를 보면 이내 알게 되지만 큰 교회일수록 교인들은 경배 도중에라도 끊임없이 수시로 움직이며, 또 그럴 자유가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 지금 오줌보가 터질 지경인데도 설교자를 봐서 "은혜롭게 참고 있으라"는 것은 그냥 참고 있다가 빨리 죽으라는 얘기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도 설교자들은 독재자나 거의 다름없다. 설교자들은 마치 자신의 신성한 영역이 침입 당한 듯이나 인상을 찌푸릴 것이 아니라, 온유하게 신경을 덜 쓰는 훈련을 스스로 해야 한다. 교인들의 그런 움직임을 일일이 나무라고 꾸짖고 혈기를 부리다 보면, 그런 교회는 머지않아 새 교인들과 담을 쌓게 돼 버린다. 그런 신경질적인 설교자는 자신의 혈기에 오래 익숙해진 교인들과만 '교회 살림'을 차릴 일이다. 



성령님이 바라시는 찬양


성령님이 바라시는 찬양은 한 마디로 그 분에게 민감한 찬양이다! 그런 찬양은, 물론 금식과 기도 등으로 준비하는 가운데, 또는 평소 말씀을 묵상하고 통찰하는 데서 문득 깨달을 수도 있다. 


나는 그 교회에서 특히 성령님이 바라시는 경배 특히 찬양의 모습을 깨닫고 배울 수 있었다. 그 교회도 물론 때로는 성도들의 힘을 일깨우려고 박수를 치며 힘차게 찬송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경배에서 영이신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의 감관과 플랜이 중심 되다 보니 흔히 놓치기 쉬운 것 한 가지는... 비둘기 같이 온유하신 그 성령님이 바라시는 그런 찬양은 신나고 요란하고 빠른 박자와 리듬 중심의 노래들이기보다는 말씀 진리를 묵상하는 내용이 많고, 깊은 강물이 흘러가는 듯, 거의 조용한 찬양에 더 가깝다는 점이다. 

그래서 현대 교회가 갈망하듯 성령님이 친히 나타나시고 일하시기를 말로만 아니라 진정과 믿음으로 바라는 그런 경배이려면, 현대 교회가 어쩔 수 없이 시대적으로 사랑하게 된 드럼키트 등은 최대화가 아니라 반대로 최소화되어야 한다. 요란하게 쿵쾅거리며 폭타하는 드럼 소리 등의 타악기음 특히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뢐(rock) 리듬 등은 성령님이 별로 기뻐하시지 않음을 그 교회에서 깨달았다. 

그렇다고 내 얘기는 성령님은 케케묵은 클래싴 음악만 선호하신다는 주장이 결코 아니다. 성령님은 그 분의 성품처럼 온유하고 말씀에 깊이 기초한 그런 음악 속에 사역하시기가 더 쉽다는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성령님이 그 분 고유의 "무드를 타신다"고 말하고 싶지만, 인간적인 표현이어서 삼가련다. 



오늘날 대다수 교회의 찬양 모습은 거개가 인본적이다. 성령님의 현존('임재')을 갈망하고 그 분의 사역을 기대하기보다는 사람들이 스스로 애를 쓰고 힘을 쓰고 머리를 쓰고 목을 써서 휘둘러치는 모습들이다. 진정 성령님의 이끌림을 받아 순전히 하나님께 바치려는 경배나 찬양이기보다 우선 사람들의 눈귀와 감정에 호소하는 엔터테인먼트 또는 프로그램에 따른 '쇼'이기가 쉽다. 그래놓고 거기에 그냥 말과 명목상으로만 성령님을 찾고 부르고 있는 셈이다.  


'무대' 앞에서 설치며 이끄는 사역자들도 매우 인위적이다. 흔히 그들이 생각하는 그들 나름의 '성령충만'과 "영적" 열심은 교인들의 관심을 끌려고 높이 고조된 흥분스러운 음성이나 강력한 마이크로폰과 고도의 첨단 시청각 테크닠으로 청중을 자극하고 부추기는 소리, 감성적인 불협화음과 리듬으로 교인들의 센티멘털리티에 호소하거나 일사분란한 함성이나 박수소리를 억지 유도해 내거나, 평소 훈련에 의하여 매끈하게 잘 다듬어진 발성이나 점잖은 매너, 맥시마이즈한 키보드나 드럼 등 악기소리를 의미할 때가 잦다. 


물론 이런 것들이 모두 불필요하다는 말이 아니다. 활용하되, 그보다는 하나님이신 성령님의 '기분'과 '무드'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들 대다수는 비둘기처럼 온유하시고 고요하신 성령님을 좀체 이해하지 못한다. 신나고 시끄럽고 떠드는 박수소리와 함성 같은 노래소리, 유연한 현대적 재즈 화성과 악기 소리에 곧 성령충만이 있다고 착각하기가 일쑤이다. 


그렇다고 지금 필자는 소위 "조용한 기도"라는 '관상기도'를 강조하는 '관상영성'이나' 떠오름'(이머징) 영성 등이 성령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영성이라고 주장하려는 게 결코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교회에 내신 바 없고 천주교에서 흘러들어온 거짓 영성이다.  



지금 필자가 말하려는 것은, 너무나 많은 교회나 사역자들, 경배 이끔이나 지도자들이 성령님을 오해하고 있다는 말이다. 성령님은 교인들이 리듬 박수를 치며 소리 높여 신나게 부르는 찬양을 즐기시기보다는 거의 부득이하게(?) 이해와 관용을 하시는 쪽에 더 가깝다. 가만히 참고 계신다고 해서 그런 음악을 "즐기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믿음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믿음으로 다 밀고 나간다고 옳은 것이 아니다. 


왜냐고? 한 마디로 그 분은 성품이 온유하고 비교적 고요하시기 때문이다. 성령님을 종종 불에 비유하며, 또 불처럼 죄악을 태우시지만, 마치 걷잡을 수 없는 불길처럼 과격하신 분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박수를 하면서라도 닫혔던 마음을 열 수는 있으되, 박수로써 성도를 억지강압해선 안 된다. 인위적이기 때문이다. 무슨 특정 호르몬의 분비에 좋다며 손바닥이 아플 정도로 크고 센 박수와 고래고래 지르는 함성 같은 노래가 때로는 좋을 수도 있지만, 마치 그것이 성령충만의 표상인 양 거듭거듭거듭 강요하는 찬양 인도자는 미안하지만 미련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다. 성경에 그런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고대엔 현대와 같은 리듬 박수라는 것이 없었다. 다만 서로 호흡을 맞추기 위해 숨을 쉬는 단락 같은 데서 이따금 한 번씩 '탁~' 하고 박수를 쳤을 뿐이다. 타악기였던 제금도 그와 비슷한 역할이었다. 오늘날 시끄럽기 짝이 없는 세속음악의 '사물놀이' 같은 기능이 아니었다. 시편 기자가 말한 바닷물이나 폭포수의 박수도 리듬 박수가 아니다. 


교회가 찬양 때 성도의 기분을 고양시키기 위해 리듬 박수를 치는 것은 무방하지만 경배 때는 되도록 조용하고 묵상적인 가사와 음율과 리듬의 찬송가가 좋다.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다니던 그 교회에서는 찬양팀이 고조되어 노래를 부르던 도중에라도 사역자가 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쉬(Shhhh)~" 하며 조용하기를 요구할 때, 노래소리를 확 줄이거나 fade out 하듯 중단하는 것이 일쑤였다. 그 정도로 성령님께 민감했다. 그럴 때는 잠시 기다리노라면 으레 예외없이 특정 개인을 위한 특별한 신유가 있거나 계시은사 등의 영적/초자연적 은사, 이적 등 파울이 말한 "성령님의 나타남"이 발생하곤 했다. 


성도는 말로만 아니라 만사에, 범사에, 성령님께 민감해야 한다! 바람이 언제 어디서 흘러 어디로 흐를지를 감 잡을 수 없듯, 미묘하고 섬세한 성령의 흐름과 기름부음에 사역자들도 지도자들도 성령님께 민감해야 한다. 떠들고 고함지르고 박수 치는 것이 대표적인 성령충만적 열성이거나, 지름길이거나 표상이 결코 아니다. 성도들이 민감해지도록 가르쳐야 한다. 성령님을 환영하는 곳에서는 그 분이 스스로 나타내시길 바라시는 것이 있으며, 그 나타나심을 고요히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시끄럽게 기다리거나 바랄 수가 없다.  


성도들의 열심 있는 찬송을 율법적인 태도로 막아서도 안 되지만, 너무나 볼륨을 키운 소리와 되바라진 리듬 등을 고조시켜 가며 일률적인 박수로 일관하거나 인위적 열심으로 자신들이 성령님께 더 호응해 드리고 있다고 착각해선 안 된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와 다르다. 



그리고 성령님이 계신 곳에는 어디나 영적인 자유가 있다. 일부 교인들이 박수를 치지 않는다고 해서 인도자가 사역자가 조바심을 치고 신경질과 혈기를 부리거나 강압적인 태도를 보여선 안 된다.  



비진리를 거부하시는 성령님


또 한 가지 우리가 잊지 말 중요한 사실은 성령님은 비진리와 섞이시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혹여라도 그 분께 그런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순전히 우리의 착각일 뿐이다. 수많은 찬송가나 음악에는 성경과 거리가 먼 비진리적 요소가 숨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나 성가들 가운데는 비밀집단 단원들이 만든 작품도 있다. 그러므로 늘 분별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성령께서는 실제로 마귀를 섬기는 '비밀집단'에 개입된 명사나 음악인들을 통해 결코 역사하시지 않는다. 아무리 그들이 세상이나 교계에서 유명하고 인기가 좋더라도 말이다. 세상이나 세상 교계에 널리 알려진 유명 가수를 교회에다 불러다 놓고 성령께서도 기뻐해 주시고 환영하시고 함께 역사해 주시길 바라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도 드물다. 그것은 인위적인 엔터테인먼트일 뿐이다.  


성령께서는 또 인간이 만들어 놓은 '교회력'에 아무 감동도 받으시지 않는다. 교회력에 따른 교회절기, 교회명절, 소위 수난주간, 재의 수요일이든 세족 목요일이든 성금요일이든, 부활절이든 대림절(대강절)이든 성탄절이든 현현절 따위에 성령께서 전혀 구애받지 않으신다. 그런 교회력과 플랜과 '절기색'에 맞추어 그 분도 함께 아기자기하게 역사하신다고 믿는 믿음은 순전히 인간의 상상에 불과하다. 

그 분은 사도 파울에게 나타내신 계시를 통해 분명히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신자는 그런 절기와 상관 없다고 명언하신 바 있다.   


그러나 이런 진리를 뒤늦게 깨달았다고 해서 율법적으로 강행할 일은 아니다. 믿음으로 홀가분하게 쉽게 받아들이는 성숙한 신자도 있고, 지도자라고 해도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시간을 두고 온유함과 타이름과 복음적인 마인드로 해야 한다. 


요즘 특히 조심해야 할 일은 성령님을 흉내 내어 비스무리하게 작동하는 친숙령의 장난이다. 기존 교회를 그럴듯이 카피하면서 엄연한 비진리를 표방하는 자기네가 유일하거나 우세한 척 하는 이단들도 그렇지만, 관상영성, 떠오름영성, 목적 중심 영성, 리더슆 영성, 소위 '킹덤나우' 사상 등 주권주의(dominionistic) 영성, 뉴에이지 영성.. 등등 잡다한 이상(異常) 영성들, 오순절적 성령 사역을 인위적으로 모방하는 소위 신사도개혁운동권(NAR) 인사들의 문제도 크다.  


신사도들, 신사도운동가들은 과거처럼 성령님의 사역이 현존할 수 있음을 인식한다는 점에서는 옳지만, 성경과는 사뭇 다른 '역사'가 자주 나타난다. 아마도 대표적인 사례가 케닡 헤이긴, 베니 힌, 케닡 코플랜드, 타드 벤틀리 등일 것이다. 재정추문, 성추문 등 스캔들 등이 폭넓게 폭로돼 온 피터 파팦, W. V. 그랜트, 짐 베이커, 지미 스왜거트, 크레플로 달러 등도 그렇다. 맨날 범국가적 '회개'와 '예언' 성취를 떠들어대는 케냐의 데이비드 오워나 요 얼마 전에 죽은 캔저스시티 그룹(KCF) 출신의 예언가, 밥 조운즈(존스)도 다들 대동소이한 사람들이다. 물론 한국에도 비슷한 부류들이 많다. 


표면상으로는 이들에게서 언뜻 성령님의 역사로 보이는 초자연적 현상이 자주 일어나지만, 알고 보면 성령님을 흉내 내는 악령의 역사이다. 특히 그들의 열매로 알 수 있다. 

사실 그들 대다수는 교인들의 기부금/헌금 등을 노리고 사리사욕을 더 탐하는 자들이다. 겉으로는 성령님과 권능을 팔아 가며 온갖 간특한 생각과 그럴 듯한 말 수단으로 교인들을 호리지만, 개인적으로는 '장풍' 안수, '폭풍'과 진동의 안수 등 초자연적 쇼로 대중의 인기를 노리고 누리면서, 그를 바탕으로 추종 교인들을 털고 긁어모은 헌금으로 전용 제트기와 호화 자가용차를 타고 가족끼리 호화 주택에 살고 고급 호텔을 전전하는 등 호사를 하고 있다. 결국 자기 매끈한 말이나 용모를 팔아 교인들의 등을 쳐서 개인적으로 호사하는 사역자들의 종말은 비참한 곳으로 정해져 있다. 

구약의 온갖 예언을 원용하면서 맨날 족집게식 미래 예언 성취를 떠들어대는 실상은 점쟁이들 같은 현대의 선지자들, '예언가'들도 우리가 마냥 조심해야 할 대상들이다. 그들의 달콤한 말이나 마저린/버터 같이 부드럽고 흐느적거리는 듯한 언변, 감미롭고 우렁찬 노래소리에 속지 말아야 한다. 

모름지기 성령님의 대언가와 그 분의 참 청지기는 성경적이고 진리적인 열매로 알 수 있다. 


앞으로 성경과는 다른 거짓 신비와 이적을 행하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호릴 사역자들은 얼마든지 더 나타날 것이다. 



신학에 지배받지 않으시는 성령님


나는 그 교회에서 일하시는 성령님을 알고 배우기 위해 과거에 배운 모든 신학지식의 대부분을 제쳐 놓아야 했다.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자신이 배운 신학이론의 굴레 속에다 성령님을 묶으려 든다. 하지만 성령님은 결코 인간의 신학이론이나 이론, 이데올로기에 묶이실 수 없고, 특정 교파나 교단의 신학과 함께 일하시지도 않는다. 그 분은 그 분이 기록하시고 감동하시는 그 분의 진리 말씀대로 사역하실 뿐이다! 


성령님은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인 온갖 예배신학의 원리에 묶이시지 않는다. 그 분은 보수적 편향도 진보적 편향도 아니시고 그냥 그 분 말씀대로의, 진리의 영이실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 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성경 자체보다는 구교 중심의 신론/교회론 등의 일부 요점만 따다 놓고 신앙고백을 하는 듯한 소위 '사도신경' 등 인간이 만들어 놓은 온갖 신조에 묶여 일하시지도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온갖 신조나 교리보다 성경 말씀을 더 중시해야 한다.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가 밝혀 놓은 초기 단계의 교리(참고: 히브리서 5'12~14; 6'1,2)를 매스터하고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 바른 회개나 하나님의 존재, 침례(세례)들, 안수, 죽은 사람의 부활, 영원한 심판 등 '유동식'도 못 믿으면서 단단한 음식을 먹겠다고 할 수가 없다. 부활과 하나님의 존재도 못 믿는 지도자가 참 교회 지도자일 수 없다. 


주님이 이미 약속해 놓으신(요한복음서 14~16장 참조, 행전 1'8; 마르코스복음서=맑 16'17,18) 영적/초자연적인 혜택도 못 믿으면서 더 큰 믿음의 굉장한 역사를 바랄 수가 없다. "성경 따로, 믿음 따로" 식의 구호는 먹혀들지 않는다. 성경대로의 믿음이어야 할 뿐이다. 


성령님은 어제나 오늘, 언제나 한결 같으시다. 어제 사역하신 그대로 오늘도 일하신다. 성경에 기록해 놓으신 그대로다. 그 분의 진리에다 플러스/마이너스로 가감하여 믿지 마라. 

성령님이 과거엔 그러셨지만 현대는 그러시지 않는다는 식의 가변적 신론, '성령변모론', 그리고 현대 '개혁주의' 교회 지도자들 다수가 주장하는 소위 '종식론/중단론'(cessationism) 등은 순전히 인간의 머리로 짜 낸 신화에 불과하다. 

다시 강조하지만, 성령님께서는 성경에 기록해 놓으신 그대로 오늘도 동일하게 일하신다! 바뀐 것은 인간의 머리통 속일 뿐이다. 


주님이 몸소 일하시고 제자들도 그랬고 후대에도 영구적으로 약속해 놓으신 대로 오늘날도 악령을 내쫓을 수 있고, 신유도 이적도 그 분의 말씀 그대로 일어난다. 다만 인간이 그 분의 사역을 "옛 전설 따라 삼천리"처럼 취급하고 불신할 뿐이다. 

하나님은 그 분의 약속과 말씀에 바위처럼 충실한 신실한 하나님이시므로, 인간이 생각하고 꾸며 놓은 이론과 각본대로 움직이시지 않는다. 



결론


이상은 필자 자신의 머릿속 아이디어가 아니라, 필자가 여태 본 대로 들은 대로 깨달은 대로 직접 체험해 온 성령님을 증언하는 말들이다. 

"우와, 그런 교회가 정말 있다는 말인가? 그런 교회에 꼭 가 보고 싶다. 아니, 그런 교회에 다니고 싶다"고 나설 독자가 있을지 모르나 바람직한 생각이 아니다. 왜냐 하면 특정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내가 성령님을 환영하고 있나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성령님을 환영하는 같은 뜻과 같은 생각을 가진 성도가 모여 함께 경배하기 시작하면 된다. 주님의 이름으로 두 셋이 모이면 거기 주님이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신자들은 보기에 번듯하고 그럴싸한 장소를 중시하기 때문에, 성령님의 뜻에 닿지 못할 때가 많다.  


나는 지금 이 글과 이야기로 어떤 새 유형의 교회나 신화적 모델을 만들어 내려거나 어떤 어젠다와 목적을 갖고 획기적인 모멘텀을 도출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우리는 성령님께 민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말세로 치달을수록, 그 분은 그 분의 진리와 뜻에 민감하게 순응하는 신자를 찾으신다. 우리 사람이 성령님을 사람의 뜻에 복종시킬 수 없다! 우리가 성령님께 순복해야 한다. 

그 분에게 순종하면, 그 분의 말씀에 약속된 그 결과-열매를 먹을 수 있다. 하지만 불복하면 쓰디쓴 열매를 맛볼 뿐이다. 


성령님은 그 분의 사람들을 통해 기록해 놓으신 성경 말씀을 결코 초월하시지 않는다. 그대로만 일하실 뿐이다. 


그 분을 환영하려면, 그 분의 말씀 그대로 믿고 따라야 한다. 

다른 방법은 없다. 그 분이 지정해 놓으신 향불 외에 '딴 향불'로는 그 분을 기쁘시게 해 드릴 길이 없다. 


살아계신 영이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면 우리 자신이 영적인 경배자가 되어야 한다. 성경 그대로 영과 진리로 경배해야 한다. 

인위적이 아닌 신본적인 경배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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