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
필자는 거듭났다. 즉 중생했다. 구원받았다는 얘기다. 자랑이 아니라 거듭난 체험을 거쳤고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하나님이 주시기에 간증하는 것이다. 필자는 '구원파'가 아니라 정상적인 신자다. 거듭나고 안 나고 는 자신의 영이 알게 돼 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아직 내가 거듭나지 못했구나 라고 믿으면 거의 확실하다.
거듭남은 신앙생활의 시작일 뿐이다. 신앙의 모험은 거듭나고서야 시작된다.
현대교회의 가장 큰 죄악은 교인들에게 거듭났는지 묻지도 않고 도전도 주지 않는 현상이다. "우리 교회에 다니다보면 언젠가 거듭나게 돼 있다"는 식으로 뜸을 들이는 목회자도 많다. 심지어 부흥집회에서도 그런 경우가 있다. 거듭나야 하는 문제만큼 우선적이고 시급한 것도 없는데 말이다. 그래서 그렇게 뜸을 들이는 동안 더욱더 구원파 같은 문제집단들이 날뛰는 것이다.
거듭나지 않은 이상은, 아무리 표면상 교회를 드나들고 교회 활동과 행사에 적극 참여하는 교인이더라도 크리스천이 아니라 종교인/세속인이다. 기독교는 엄밀히 말해서 종교가 아니다. '종교 생활'로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필자도 오래전 거듭남의 문제를 놓고 고민한 적이 있다. 신학교에 다니던 기간중 2년 동안 방황하며 허송세월 했지만 결과는 유익했다. 마침내 거듭났기 때문이다. 모태 적부터 장로교인이었는데 거듭남이 늦어진 것은 신학사상에 물들어 거듭남을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생활을 오래 했건만 그 누구도, 심지어 장로/권사였던 내 부모조차도 내게 거듭남에 대한 도전을 전혀 주지 않았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그 결과로 우리 부부는 일찍부터 두 아이의 거듭남의 도전을 주었고 아이들은 일찍이 거듭났다.
우리 아이들은 아직은 어리지만 세상 재미에 철없이 깊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친구도 잘 선택해서 사귀고 믿지 않는 아이들에겐 복음적 마인드를 갖고 대한다. 해마다 핼로윈 때면 동네나 학교 아이들이 철없이 파묻혀 날뛰지만 우리 아이들은 분별력 있게 행동한다.
책도 자연히 신앙적 표준에서 가려서 읽게 되고 영화/음악 등도 분별하여 감상한다. '해리 포터' 따위는 근접도 하지 않는다. 도움되지 않는 탓이다. "재미로 읽는데 무슨 죄냐? 그런 것도 다 경험상 도움 된다"고 할지 몰라도 그건 순진한 유혹이란 갈고리를 곧잘 써먹는 마귀로부터 빌린 거짓말이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성경말씀은 어떻게 되나?
물론 두 아이가 이러기까지는 성경말씀의 교훈과 많은 건전한 독서 과정을 거쳤다. 필자는 제대로 된 목회는 못했을지라도 두 아이의 교육과 훈련에 신경 께나 썼다.
잠깐 딴 얘기지만..지난 주일엔 집안에서 두 아이의 침례/세례를 베풀었다. 첫 아이가 자진하고 원해서였다. "왜 교회서 안하고?" 물을지 모르지만 필자는 무교회주의자가 아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두 세사람 이상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기에 힘쓰는 곳이 곧 교회임을 독자는 잊지 말기를 바란다. 그래서 공산/이슬람국가에 수많은 처소교회/가정교회/비밀교회가 있는 것이다. 필자에게 지금은 내 집안이 곧 교회다.
성경엔 신학교 나온 목사만이 교회당 안에서 침례/세례를 베풀 수 있고 성례를 이끌 수 있고 축도할 수 있다는 항목이 전혀 없다. 그런 제도는 모두 신교가 카톨릭에서 빌린 것이다. 필립 집사가 칸다케 여왕의 고위 관리에게 침례/세례를 베푼 것, 기억나는가?
[필자는 장로교인이지만 침례를 선호한다. 세례/침례에 관한 모든 성구들이 현재 형태의 세례보다 침례를 더 지지한다. 물방울 세 방울을 똑 똑 똑 성부/성자/성령의 이름으로 떨어뜨리면서 하는 세례는 물속에 잠기는 침례보다 실감이 가질 않는다. 카톨릭에서 유래된 형태다.
더욱이 침례/세례 요한이 그런 물방울 세례를 예수님께 베풀었다고 도저히 믿어지질 않는다. 주님은 분명 요단강물에 잠기셨다가 물에서 "올라오셨다"고 성경은 증거한다. 원어 '밥티조'(잠그다)가 이를 지지해준다. 요단강물에 목욕했던 나아만 장군을 상상하면 될 것이다.
만일 카톨릭에서 주장하듯 세례가 초기부터 있었다면 아마도 형편상 침례가 어려웠던 로마 박해시절 카타콤에서 임시방편으로 시행됐을 것이다. 자유로워진 세상에서도 비상시의 방편을 선호한다면 뭔가 잘못이 아닐까.]
필자는 침례뿐 아니라 모든 주요 교단의 건전한 교리들을 장로교 교리처럼 존중한다. 장로교인이 감리교인을, 감리교인이 장로교인을 단순히 교파 교리의 차이점 때문에 이단시 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이비/이단/사교가 아닌 건전한 교회인 이상 말이다. 그러나 마리아/성인/성상/성체(화체)를 숭상하는 카톨릭은 문제가 많다.
중요한 것은 겉으로 나타난 교단/제도/건물이 아니다. 각자 거듭났느냐가 중요하다. 유대 종교생활에 침잠했던 니코데모가 주님을 찾아와 존중의 뜻을 표했을 때, 주님은 "자네가 거듭나지 않은 이상 나와 무관하다"는 식의 말씀을 하신다.
교회에 수천수만번을 드나들어도 내 자신이 거듭나지 않으면 주님과 상관없는 데도 여전히 거듭나지 못한 삶을 우리는 살고있지나 않은가?
그렇다면 어떻게 거듭나나? 성경 말씀 그대로다. 구원파의 교리를 따라선 안된다! 내가 타고난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 크리스토를 나의 구주로, 삶의 주인으로 모셔들이고 그분의 부활을 믿되 입으로 고백해야 한다. "입으로 시인한다"는 대목이 매우 중요하다. 입술은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거듭남은 곧 예수 크리스토의 영 곧 성령의 내주(속에 거하심)로 이끌린다. 그런데 이 성령은 증언하기를 원하신다. 그 증언의 방법중 하나가 전도이며 은사와 방언이다. 거듭남은 뉴에이지가 말하는 따위의 '자연적' 체험이 아닌 성령에 의한 초자연적 체험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반드시 초자연적인 체험으로 증거하시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이적/기사가 신자의 삶에 동반된다. 그래서 신유/은사/방언 등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의심나면 사도행전을 다시 읽어보기 바란다. 사도행전은 옛날 역사가 아니다. 오늘날도 현장체험할 수 있는 실천용 교과서다.
그래서 내가 거듭났는지 안 났는지를 가장 안전하게 확인해보려면, 내가 기꺼이 전도하고 있는지, 방언기도을 하고 있는지, 최소한 한가지 이상의 은사가 나타나고 있는지 성령의 열매를 맺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방법이 확실하다.
"방언을 해야 성령을 받은 것이냐?, "방언을 해야 구원받은 것이냐?"고 영양가 없는 질문을 할 게 아니라 지금 방언기도를 하면 될 게 아닌가? 바로 지금 하나님께 입술과 혀를 맡기고 (모국어가 아닌) 방언을 시작하라. 구구하고 복잡한 과정이 필요한 게 아니다.
그런 것이 안 나타난다면 지금이라도 나타나게끔 기도하고 생활화 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런 것이 나타나는 사람을 질시하고 비판만 할 게 아니라 말이다. 내가 안 하면 내 손해일 뿐. 하고있는 남을 비난하면 비난 죄만 더 추가될 뿐이다. 그런 교인들이 주위에 하도 많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독자는 거듭났는가? 거듭난 삶의 증거가 있는가? 곰곰히 자신에게 물어보길 바란다. 거듭나지 않으면 아무리 '선교'/'사랑'/'봉사'/'신앙 집필'을 해도 내겐 무익하다. 자신에게 그것보다 중요한 문제는 없다.
필자는 거듭났다. 즉 중생했다. 구원받았다는 얘기다. 자랑이 아니라 거듭난 체험을 거쳤고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하나님이 주시기에 간증하는 것이다. 필자는 '구원파'가 아니라 정상적인 신자다. 거듭나고 안 나고 는 자신의 영이 알게 돼 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아직 내가 거듭나지 못했구나 라고 믿으면 거의 확실하다.
거듭남은 신앙생활의 시작일 뿐이다. 신앙의 모험은 거듭나고서야 시작된다.
현대교회의 가장 큰 죄악은 교인들에게 거듭났는지 묻지도 않고 도전도 주지 않는 현상이다. "우리 교회에 다니다보면 언젠가 거듭나게 돼 있다"는 식으로 뜸을 들이는 목회자도 많다. 심지어 부흥집회에서도 그런 경우가 있다. 거듭나야 하는 문제만큼 우선적이고 시급한 것도 없는데 말이다. 그래서 그렇게 뜸을 들이는 동안 더욱더 구원파 같은 문제집단들이 날뛰는 것이다.
거듭나지 않은 이상은, 아무리 표면상 교회를 드나들고 교회 활동과 행사에 적극 참여하는 교인이더라도 크리스천이 아니라 종교인/세속인이다. 기독교는 엄밀히 말해서 종교가 아니다. '종교 생활'로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필자도 오래전 거듭남의 문제를 놓고 고민한 적이 있다. 신학교에 다니던 기간중 2년 동안 방황하며 허송세월 했지만 결과는 유익했다. 마침내 거듭났기 때문이다. 모태 적부터 장로교인이었는데 거듭남이 늦어진 것은 신학사상에 물들어 거듭남을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생활을 오래 했건만 그 누구도, 심지어 장로/권사였던 내 부모조차도 내게 거듭남에 대한 도전을 전혀 주지 않았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그 결과로 우리 부부는 일찍부터 두 아이의 거듭남의 도전을 주었고 아이들은 일찍이 거듭났다.
우리 아이들은 아직은 어리지만 세상 재미에 철없이 깊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친구도 잘 선택해서 사귀고 믿지 않는 아이들에겐 복음적 마인드를 갖고 대한다. 해마다 핼로윈 때면 동네나 학교 아이들이 철없이 파묻혀 날뛰지만 우리 아이들은 분별력 있게 행동한다.
책도 자연히 신앙적 표준에서 가려서 읽게 되고 영화/음악 등도 분별하여 감상한다. '해리 포터' 따위는 근접도 하지 않는다. 도움되지 않는 탓이다. "재미로 읽는데 무슨 죄냐? 그런 것도 다 경험상 도움 된다"고 할지 몰라도 그건 순진한 유혹이란 갈고리를 곧잘 써먹는 마귀로부터 빌린 거짓말이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성경말씀은 어떻게 되나?
물론 두 아이가 이러기까지는 성경말씀의 교훈과 많은 건전한 독서 과정을 거쳤다. 필자는 제대로 된 목회는 못했을지라도 두 아이의 교육과 훈련에 신경 께나 썼다.
잠깐 딴 얘기지만..지난 주일엔 집안에서 두 아이의 침례/세례를 베풀었다. 첫 아이가 자진하고 원해서였다. "왜 교회서 안하고?" 물을지 모르지만 필자는 무교회주의자가 아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두 세사람 이상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기에 힘쓰는 곳이 곧 교회임을 독자는 잊지 말기를 바란다. 그래서 공산/이슬람국가에 수많은 처소교회/가정교회/비밀교회가 있는 것이다. 필자에게 지금은 내 집안이 곧 교회다.
성경엔 신학교 나온 목사만이 교회당 안에서 침례/세례를 베풀 수 있고 성례를 이끌 수 있고 축도할 수 있다는 항목이 전혀 없다. 그런 제도는 모두 신교가 카톨릭에서 빌린 것이다. 필립 집사가 칸다케 여왕의 고위 관리에게 침례/세례를 베푼 것, 기억나는가?
[필자는 장로교인이지만 침례를 선호한다. 세례/침례에 관한 모든 성구들이 현재 형태의 세례보다 침례를 더 지지한다. 물방울 세 방울을 똑 똑 똑 성부/성자/성령의 이름으로 떨어뜨리면서 하는 세례는 물속에 잠기는 침례보다 실감이 가질 않는다. 카톨릭에서 유래된 형태다.
더욱이 침례/세례 요한이 그런 물방울 세례를 예수님께 베풀었다고 도저히 믿어지질 않는다. 주님은 분명 요단강물에 잠기셨다가 물에서 "올라오셨다"고 성경은 증거한다. 원어 '밥티조'(잠그다)가 이를 지지해준다. 요단강물에 목욕했던 나아만 장군을 상상하면 될 것이다.
만일 카톨릭에서 주장하듯 세례가 초기부터 있었다면 아마도 형편상 침례가 어려웠던 로마 박해시절 카타콤에서 임시방편으로 시행됐을 것이다. 자유로워진 세상에서도 비상시의 방편을 선호한다면 뭔가 잘못이 아닐까.]
필자는 침례뿐 아니라 모든 주요 교단의 건전한 교리들을 장로교 교리처럼 존중한다. 장로교인이 감리교인을, 감리교인이 장로교인을 단순히 교파 교리의 차이점 때문에 이단시 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이비/이단/사교가 아닌 건전한 교회인 이상 말이다. 그러나 마리아/성인/성상/성체(화체)를 숭상하는 카톨릭은 문제가 많다.
중요한 것은 겉으로 나타난 교단/제도/건물이 아니다. 각자 거듭났느냐가 중요하다. 유대 종교생활에 침잠했던 니코데모가 주님을 찾아와 존중의 뜻을 표했을 때, 주님은 "자네가 거듭나지 않은 이상 나와 무관하다"는 식의 말씀을 하신다.
교회에 수천수만번을 드나들어도 내 자신이 거듭나지 않으면 주님과 상관없는 데도 여전히 거듭나지 못한 삶을 우리는 살고있지나 않은가?
그렇다면 어떻게 거듭나나? 성경 말씀 그대로다. 구원파의 교리를 따라선 안된다! 내가 타고난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 크리스토를 나의 구주로, 삶의 주인으로 모셔들이고 그분의 부활을 믿되 입으로 고백해야 한다. "입으로 시인한다"는 대목이 매우 중요하다. 입술은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거듭남은 곧 예수 크리스토의 영 곧 성령의 내주(속에 거하심)로 이끌린다. 그런데 이 성령은 증언하기를 원하신다. 그 증언의 방법중 하나가 전도이며 은사와 방언이다. 거듭남은 뉴에이지가 말하는 따위의 '자연적' 체험이 아닌 성령에 의한 초자연적 체험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반드시 초자연적인 체험으로 증거하시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이적/기사가 신자의 삶에 동반된다. 그래서 신유/은사/방언 등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의심나면 사도행전을 다시 읽어보기 바란다. 사도행전은 옛날 역사가 아니다. 오늘날도 현장체험할 수 있는 실천용 교과서다.
그래서 내가 거듭났는지 안 났는지를 가장 안전하게 확인해보려면, 내가 기꺼이 전도하고 있는지, 방언기도을 하고 있는지, 최소한 한가지 이상의 은사가 나타나고 있는지 성령의 열매를 맺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방법이 확실하다.
"방언을 해야 성령을 받은 것이냐?, "방언을 해야 구원받은 것이냐?"고 영양가 없는 질문을 할 게 아니라 지금 방언기도를 하면 될 게 아닌가? 바로 지금 하나님께 입술과 혀를 맡기고 (모국어가 아닌) 방언을 시작하라. 구구하고 복잡한 과정이 필요한 게 아니다.
그런 것이 안 나타난다면 지금이라도 나타나게끔 기도하고 생활화 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런 것이 나타나는 사람을 질시하고 비판만 할 게 아니라 말이다. 내가 안 하면 내 손해일 뿐. 하고있는 남을 비난하면 비난 죄만 더 추가될 뿐이다. 그런 교인들이 주위에 하도 많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독자는 거듭났는가? 거듭난 삶의 증거가 있는가? 곰곰히 자신에게 물어보길 바란다. 거듭나지 않으면 아무리 '선교'/'사랑'/'봉사'/'신앙 집필'을 해도 내겐 무익하다. 자신에게 그것보다 중요한 문제는 없다.
'김삼의 연구묵상 > 삶맛에세이(김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큐레이터 예수와 믿음 박물관 (3) | 2007.12.26 |
---|---|
누가 성직자이고 누가 평신도인가? (2) | 2007.12.03 |
청산(靑山) 보다는 찌온(Zion)을 (0) | 2007.12.02 |
한국 부흥강사들의 허와 실 (5) | 2007.12.01 |
오직 영혼 구원? (11) | 2007.1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