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삼의 연구묵상/삶맛에세이(김삼)

산책길에서

사용자 삽입 이미지


피곤한 늦은 오후, 바닷가 공원 길을 거닙니다.
기도 겸 산책이지요. 공원 한 쪽에서 끝까지 산책로를 왕복하는 데 약 45분 걸립니다. 중얼중얼 방언을 하면서 걸으면 기분전환에도 건강에도 아주 좋습니다. 이따금 멈추고 운동도 합니다. 스트레칭, 팔 굽혀 펴기, 목 운동 등입니다. 바람이 연한  날은 아이들과 배드민턴도 하고 그밖에 줄넘기/공놀이(중국식 핸드볼) 따위도 합니다. 

집에서 가까워 늘 자주 다니는 곳이지만, 오늘 따라 비 온 뒤 안개가 멋지게 껴 (저 보기엔) 아주 보기 드문 장관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멀리 보이는 교량과 섬, 작은 반도, 돌방파제 위의 낚시꾼들 등이 마치 중천 내지 반공(半空)에 떠 있는 느낌이지요. 여백이 많은 동양화 한 폭 같은 느낌도 듭니다. 카메라가 번거로워 휴대하지 않은 게 아쉽습니다.

사방에 도로와 고속도로가 널려 있어 공기가 맑지 않고 그다지 썩 낭만적인 곳은 아닙니다만, 다행히 신선한 바람이 잦아 아쉬운 대로 찾는 곳입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가끔 찾는 공원이 몇 군데 더 있는데..가장 큰 곳은 인공호수 겸 식물원 같은 느낌, 한 곳은 다람쥐/물오리/비둘기/거북이 먹이를 주는(뺏기는?) 장소 같고, 또 한 곳은 백조와 오리떼가 들끓는 늪지대 같은 곳입니다.  

이곳은 바닷가라 바람이 퍽 많이 부는 데다 밀/썰물이 드나들며 한 구석에선 갯벌 냄새도 제법 납니다. 낚시꾼들이 늘 끊이지 않습니다만, 과연 얼마나 깨끗한지는 모르겠습니다. 큼직한 바위들을 쌓아 만든 돌방파제 위로도 전엔 가끔 걷곤 했지만 바위 아래 팔뚝만한 큰 쥐들이 드나드는 게 가끔 발견돼 비위생적이고 끔찍한 느낌에 별로 찾지 않게 됩니다.

아직 이름도 모르지만 흡사 하와이의 열대성 나무처럼 보이는 꽃나무가 요즘 일 년만에 잔뜩 만개해 공원 방문객들을 맞아 줍니다. 털실 같은 분홍꽃이 피는데 향기가 매우 좋습니다. 그밖에도 공원 여기저기 나무와 꽃나무가 꽤 많은 편인데 대강 가꿔 놓은 정원 주변에선 비에 젖은 비료나 흙덮개 냄새와 꽃들의 독특한 향기들이 섹션마다 다르게 납니다. 

************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기에 서로 자주 쳐다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모차에 태운 아기와 다양한 탈것을 즐기는 어린이들, 손잡고 다정히 속삭이며 가는 연인과 부부들, 벤치에 앉아 깔깔대고 웃으며 담소하는 사람들, 푸른 풀밭 위에서 축구(soccer)를 하는 사람들, 롤러블레이드나 자전거로 씽씽 달리는 스포츠맨&위민, 연륜을 담은 여유있는 걸음걸이의 고령자들 등 온갖 연령, 차림새와 다양한 동서양 인종/국적출신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거닙니다.

가끔 벤치에 앉은 사람에게 접근해 복음을 전하기도 합니다만..기도로 단단히 준비한 뒤에나 시도합니다. 이들에게 종교 얘기란 하나의 금기 사항 같은 것이지요. 간혹 크리스천들도 없지 않으나 그나마 성경관과 진리관, 윤리관이 퍽 다릅니다. 성경대로의 진리를 말하려면 마치 외계인 대하듯 합니다. 성경을 시대에 맞춰야 한다며 진리를 자기 주관대로 해석하며 살아 갑니다.

이 아름다운 바닷가 길을 둘씩 셋씩 여럿씩 짝지어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겉으로는 정다워 보여도 대부분은 껍데기와 허울만인 듯 보여지기도 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이 사실 상 죽은 채, 송장들이 걸어가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부분적으로 간직하고도 살았으나 실상 죽은 사람들입니다.
밤에는 다들 편안히 잠들어도 온 세상은 시신들이 즐비하게 누운 시체 공시소 같습니다. 골짜기에 널브러진 마른 해골 떼나 다름 없습니다. 복음을 거부하고 거듭남이 없는 곳은 어디나 그렇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받아들여 거듭난 영혼들은 이 바닷가 언덕의 꽃송이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

그런데 오늘날 교회도 세상 비슷한 꼴이 되어 갑니다.
진리와 생명이 넘치는 곳이 아니라 세상과 야합하고 세상 체제 속에 뿌리박아 이상한 움을 틔우고 이상한 열매를 맺는 지도자들이 늘고 있습니다. 예수님보다는 그런 지도자들을 받들어 섬기는 교인들도 그 소용돌이에 송두리째 빨려 들어 갑니다.
세상 종교들과 별 다름없는 기도를 참 기도로 믿고 흉내 내는가 하면, 온갖 거짓 이적과 표징을 앞에 내세우고, 거대한 검은 배후를 숨긴 세상 시스템을 성령님의 본 고장으로 착각하고 속아 넘어 갑니다.

이상한 영들이 준동하고 암약하는데도 육안에 보이질 않으니 모든 것을 '천사'들과 '성령'님의 역사로 미화시키고 매도합니다. 분명히 성경과 다르고 열매가 다른데도, 명백히 양 탈을 쓴 이리떼, 약탈자인데도 불구하고 동료와 아류로 삼아 허물 없이 지냅니다.

교회와 성도는 엄연히 세상과 구별되어 나그네로 살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온 세상에 이름을 내고 나팔을 불며 세상 시스템으로부터 영광을 찾고 명성을 떨치는 행악자들이 늘고 있습니다. 자신들만 그럴 뿐 아니라 후대도 소위 '신종'(a new breed)을 삼아 기르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헤아려 경계하기보다 여기 미혹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불어 갑니다.

이것이 말세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것이 성경이 예언한 배도(背道, apostasy)의 시대가 아니면 뭐란 말입니까?

지금은 거대한 대 부흥의 시대가 아니라 거대한 대 배역의 시대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참 부흥을 갈망하는 사람은 결코 진리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진리의 한 구석, 말씀의 도(道)를 부분적으로라도 희생시키는 부흥, 그것은 거짓 부흥일 수 밖에 없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넓은 길을 찾습니다. 좁은 문, 좁은 길을 싫어합니다.
자기 편리와 편의를 따라 적당히 자의로 진리를 해석하면서 그것을 '사랑'과 '관용'이라고 부릅니다. 진리인 성경말씀이 아니라 수많은 '명사들', 베스트셀러들이 곧 사랑의 표준이 돼 있습니다. 그리곤 사랑이란 미명 아래선 진리가 얼마든지 용해되고 희석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래밭 위에도 든든한 집을 세울 수 있다고들 믿습니다.

************

하지만 진리는 바위입니다. 진리는 용해되거나 희석될 수 없습니다.
진리면 진리, 비진리는 비진리일 뿐,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은 늘 진리와 함께 머물며 진리와 함께 움직이며 진리와 함께 갑니다. 

복음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예수 크리스토님이 십자가 위에서 흘린 피는 세상에 넘실대는 모든 죄를 씻고도 남는 권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전능한 보혈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다 구원받는 건 아닙니다.

성경은 누구든 예수 크리스토를 선택하여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약속합니다.
하지만 예수 크리스토와 그 모든 말씀의 진리에서 한 발 두 발 벗어나면 그건 약속된 생명의 삶이 아니라 불안한 그림자와 어둠의 안개로 화해 버립니다.

예수님 없이도 누구나 구원을 받는다는 둥
모든 사람이 다 나름의 신과 하느님을 믿고 있고 그래서 천국에 간다는 둥
모든 초자연적 역사는 다 성령님의 것이다 라는 둥..
그런 식의 주장들은 진리에서 거리가 먼 것들이지요.
 
이 캄캄한 암흑의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진리 등대의 빛입니다.
진리와 구원의 빛을 잃어 헤매는 무리에게 
우리는 등대의 빛을 나눠 비춰주는 작은 등불이어야 합니다.

등불은 말 아래 숨겨 두지 않고 등경 위에서 비췹니다. 
참된 빛나르미는 거짓 샛별 루키페르를 섬기는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가 아니라..
바로 우리여야 합니다!

우리는
항아리에서 진리의 횃불을 꺼내어 어둠을 밝히며
진리의 외침이라는 나팔을 불고
성령의 검 곧 주님의 말씀을 휘두르며
주 예수 크리스토님의 승리를 외칠 수 있는..

현대의 기데온과 300 용사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