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는 '어머니날'이 시작된 지 딱 100년째였다.
1908년 애너 자비스에 의해 첫 어머니날이 지켜진 것. 한국의 '어버이날', 한국 교계의 '어버이주일', 한인 교계의 '어머니주일' 등의 원조 격인 이 날은 현재 세계 대다수 국가에서 명절로 지켜진다. 심지어 일부 회교국에서도 중시된다. 실은 '아버지날'도 어머니날을 본떠서 배태됐다.
그러나 교계의 어머니날/어버이주일/어머니주일 등은 전반적으로 성경적인 부모공경보다는 어머니나 아버지를 하루 상찬하는 성향이 뚜렷하다. 성경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지, 네 아버지나 어머니를 '일일 상찬' 하라고 하지 않는다.
게다가 동성애가 나날이 심해져 가는 세속 사회와 교계에서 어머니/아버지를 별도로 다루는 양극화 성향으로 치닫고 있다. 아버지들은 어머니날에 소외감을 느낄 수 있고, 어머니들은 아버지날에 그럴 수 있다. 아무리 양쪽을 서로 북돋우고 상기시킨대도 그렇다.
왜냐고..?
서구 전통인 어머니날의 페미닌네스(여성성)는 남성인 아버지들을 좀 "간지럽게"(?) 하기 때문이다.
최근 영국의 기독교 남성지 '소티드'의 조사에 따르면, 남성들은 물론 좀 더 남성적인 것을 선호하며 그렇다고 현대교회가 꼭 "여성적"이거나 일방적이란 것은 아니지만, 교회 안에서 껴안기, 손잡기, 서클(원형착석) 토론, 지나치게 감상적인 복음/경배 노래 등을 싫어하는 대신 표준적 찬송가들, 또렷한 모티브를 던져주는 메시지를 좋아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다 옳은 얘기는 아니더라도 퍽 일리가 있다고 본다.
남성들이 그렇다면 아버지들도 마찬가지다. 현대교회는 여성적 취향이 늘어가며 특히 '어머니주일' 같은 전통은 그렇다. 혹 여성들이 불쾌감을 가질지 몰라도 어머니날의 역사적 배경을 알고 보면..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많은 사람들 특히 크리스천들은 '어머니날'의 시발(始發)을 매우 기독교적으로 생각들을 하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
애너 자비스(Anna Jarvis)가 어머니날을 범사회적 프로젴트로 밀려는 생각을 가졌을 때 매우 개인적인 감정 내지 페미니즘적 센티멘탤러티에서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또 어머니날을 거의 독과점적으로, 무슨 저작권/판권처럼 생각했다.
또 자비스는 단순히 공휴일(holiday)이 아닌 '성일'(holy day)화 하려고 자신의 어머니의 기일(忌日)에 가까운 5월 둘째 일요일을 고집해 뜻을 이뤘다. 더욱이 자비스가 어머니날을 제정하는 데 전적으로 재정적 도움을 준 사람은 유명 프리메이슨/독지가인 '백화점 왕' 잔 워너메이커였다! 1
자비스의 뜻을 따라 첫 어머니날을 지킨 세인트 앤드류 감리교회가 현재 어머니날과 자비스 모녀의 기념교회당도 아닌 기념 '슈라인'(shrine) 2으로 불리는 것도 거북살스럽다. 3
이전 흐름
자비스의 '어머니날' 아이디어는 독창적인 것은 전혀 아니었다. 이미 이전에도 비슷한 관행이나 시도가 있었기 때문.
서구에서는 이미 남신과 함께 여신들을 섬기던 고대로부터 다산과 모성을 중시하는 명절이 있었다. 그리스에선 올림포스의 '위대한 제신들의 어머니', 레아 여신을 기리는 하루 축제를 가졌다.
소아시아와 로마에서는 춘분 무렵인 3월에 (훗날의) '이데스'로부터 18일까지 나흘간을 모신(母神) 퀴벨레를 높이는 '퀴벨레 축제' 4로 지켰다. 고대 브리튼 제도와 켈팈 유럽에서는 여신 '브리짇' 5을 높이려고 암양들의 첫 젖이 나오는 봄철에 어머니날을 지켰다. 6
고대 로마인들은 또 매년 3월1일 결혼과 출신의 신이자 '어머니' 여신인 유노에게 바치는 일종의 어머니날인 '마트로날리아'를 지키면서 어머니들에게 선물을 줬다. 다른 나라에서도 '국제여성의 날'이 3월8일에 지켜졌다. 7
힌두교에서는 4월에 '마타 트리타 아운쉬' 축제가 지켜졌다. 살아 있는 어머니를 숭상하여 선물을 바치고, 불사의 몸으로 평화 속에 쉬는 어머니를 기리는 관습이었다. 이란에서는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의 생일인 '주마다알타니'달 20일에 비슷한 날을 지켰다. 8
16세기 영국에선 사순절 넷째 주일을 'Mothering Sunday'로 지키기 시작했다. 사환/일꾼/노예들을 포함한 젊은이들과 며느리들이 '심넬' 9 등을 만들어 들고 친어머니가 다니는 교회로 나들이 하는 날이었다. 현재는 일부 교회를 제외하곤 개인의 어머니를 높이는 전통이 됐다. 10 11
애너 자비스 자신의 어머니 앤 리브즈 자비스가 웨스트버지니아에서 1858년 '엄마들 근로의 날' 12을 시작했다. 지역 교사이며 교인이었던 어머니 자비스는 이날 마을의 청소와 계몽에 힘썼다. 남북전쟁 당시 그는 남/북 양쪽의 위생환경 개선을 열망하면서 이 날을 활용한 것. 13
현대의 공적인 어머니날을 제일 먼저 시도한 사람은 페미니스트 사회운동가, 줄리아 워드 하우 여사였다. 전통교회가 이단시 하는 일신론자/보편구원론자였던 그는 '영광 영광 할렐루야'로 후렴이 시작되는 '공화국 전승가' 작시자로도 유명하다. 14
하우는 1870년 런던/파리의 국제 평화회담을 위한 평화장전을 부르짖기도 했고 훗날 '어머니날 평화선언'을 만들었다. 1872년엔 매년 6월 2일을 평화/모성/여성됨을 기리는 '평화를 위한 어머니의 날'로 지키는 안을 하우가 추진했다. 그 보람이 있어 이듬해인 1873년엔 18개 도시의 여성들이 '평화를 위한 어머니날'을 지켰다. 특히 보스턴에서는 최소10년간 그랬다.
일부에선 30년간이나 지켜지기도 했지만 하우가 재정지원을 하지 않자 사라졌다.
그러던 차, 애너 자비스가 제대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자비스 자신의 주장에 따르면 어머니 자비스는 애너가 12살 때, (세인트 앤드류 교회의) 주일학교에다 주일 하루를 정해 삶의 모든 분야에 기여한 어머니를 기념해 주길 부탁했단다.
어머니 자비스는 마을 그랲턴에서 지역 엄마들과 함께 남북전쟁으로 찢긴 마음들을 치유하는 자선사업에 모성을 활용한 것으로 유명했다. 1905년 어머니가 죽고 나자, 애너는 정치인/기업인/교계지도자들에게 부단히 편지를 띄워 본격적인 캠페인을 시작했다. 일설에 따르면, 평소 엄마 한테 잘 하지 못한 데 대한 후회와 자책 탓에 더욱 열정을 쏟았다고 한다. 그래선지 애너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자신이 어머니는 더더구나 아니었다.
애너 자비스
애너 자비스는 1864년 5월1일 웨스트버지니아 테일러 카운티에서 그랜빌 자비스와 앤 마리 사이의 11자녀들 중 아홉 째로 태어나 1살 반 때 그랲턴으로 이사를 가서 말년을 제외하곤 거기서 거의 평생을 보낸다. 공립학교를 거쳐 어거스타 여성학교를 졸업한 뒤 7년간 교사생활을 했다. 15
애너는 어릴 적부터 엄마 자비스로부터 "모든 죽은 엄마와 산 엄마들을 위한 기념일을 제정했으면 좋겠다"는 소리를 입버릇처럼 듣곤 했다. 애너가 12살일 때 엄마는 주일학교 시간 "성경의 어머니들" 공과를 끝내면서 이렇게 기도했다.
"제가 바라기는, 누가 언젠가 어머니 기념일을 제정해서 삶의 온 분야에 끼친 어머니의 견줄 데 없는 봉사를 기념하면 좋겠습니다. 어머니는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1902년 아버지 그랜빌이 죽자 자비스네는 필라델피아의 오빠(클로드)집으로 이사를 왔고 1905년 5월9일(!) 어머니마저 죽자, 그 무덤 앞에서 애너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엄마는 '어머니들의 날'을 꼭 갖게 되실 거예요."라고 다짐했고 오빠 클로드가 곁에서 이 말을 들었다.
어머니 1주기를 맞은 이듬해 5월9일 애너는 '어머니들의날작업클럽'을 통한 엄마 자비스의 탁월한 성취를 재평가한 뒤 그랲턴의 노먼 켄달 씨에게 편지를 보내 세인트앤드류교회에서 '어머니들의 날 기념위원회'를 구성하도록 요청했고 위원회가 어머니날 제정을 위한 지지 발의안을 통과시켜 주도록 요청했고 그대로 됐다. 16
그래서 2주기를 맞는 1907년 5월12일 이 교회에서 첫 기념예배가 올려진 이래 자비스는 전국 어머니날 제정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연설 솜씨도 대단했던 애너는 어떤 기회도 놓치지 않았다.
그즈음 필라델피아의 독지가인 워너메이커와 연계됐고 그의 도움으로 3주기를 맞던 1908년 5월10일 "모든 어머니들을 위한" 성대한 어머니날 프로그램을 애너 자신의 기획으로 같은 교회에서 치렀다. 17
자비스는 어머니의 순결을 강조하려고 흰 카네이션을 택했다. 그러나 점차 생존 어머니를 위해선 붉은 카네이션, 사후 어머니를 기념하는 데는 흰 카네이션을 선호하게 됐다.
그녀가 로어(L.L. Loar) 씨에게 보낸 전신에서 밝힌 어머니날의 목적은 대강 다음과 같았다.
..우리를 태어나게 해 준 분들에게 드려야 할 숨은 자녀 사랑과 고마움의 회복.
부재자들에게 '내 집 연줄' 제공.
가족 간 소원(疎遠) 제거
꽃배지(=카네이션) 부착으로 형제 결속(a bond of brotherhood) 창출
우리의 착한 엄마들의 마음에 더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더 나은 자녀 되기
좋은 엄마들의 삶 빛내기
자주 못 나누는 고마움 알리기
위 목적들 중 일부는 비성경적이다. 자비스는 아울러 "너무 늦기 전에 우리의 의무를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토를 달았다. 이 통신문 끝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덧붙었다.
그 후 이 교회는 공식 '어머니날 모교회'가 됐다. 같은 해 같은 날 5월10일 오후엔 필라델피아 워너메이커스토어 대강당에서 열린 어머니날 행사에서 워너메이커가 사회를 했다. 자비스는 별도의 앤드류 교회 행사엔 500 송이의 흰 카네이션을 보냈다. 19
같은 날 공식 어머니날 위원회가 조직됐는데, 위원은 워너메이커, 헨리 잔 하인즈, 클로드/애너 자비스 오누이, 노먼 켄달 등이었다. 위원회는 국제적 스케일로 어머니날을 확장시킬 청사진을 짰다. 위원들 가운데 거듭난 교인은 없는 것으로 뵌다. 20
상상 외로 진전이 빨라 1909년엔 전국 45개 주와 프에르토리코, 하와이, 캐나다, 멕시코 등이 희고 붉은 카네이션 배지를 달면서 이 날을 지켰다. 그러자 자비스는 "어디서 끝날 지는 미래가 말해 줄 터. 지구촌 전체를 빙 두를 게 거의 확실하다"고 찬탄했다.
최초의 어머니날 공식 선언은 1910년 윌리엄 글래스캌 웨스트버지니아 주지사가 테잎을 끊었다. 1914년 5월엔 미연방의회 상/하원에서 모두 통과됐고,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승인해 윌리엄 J. 브라이언 국무장관이 공식 선언했다.
그러나 자비스는 남은 삶과 상당량의 재산을 어머니날의 순수성을 구기는(?) 상업화 바람에 맞서 피 나는 투쟁을 벌이면서 지낸다. 어머니날 축하카드 쓰기를 "친필 편지를 쓰기 싫은 게으름"으로 비난하면서 자신은 꼬박꼬박 이미 죽은 어머니께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쓰곤 했다.
심지어 자신을 그토록 도와준 워너메이커의 백화점에서도 항의시위를 했다. 하루는 일년에 딱 한 번 워너메이커 백화점 속 찻집에 들렀다가 메뉴에 '어머니날 샐러드'가 눈에 띄자 당장 주문해다가 찻집 바닥에다 쏟아버린 뒤 일어나 나가 버렸다.
어머니날 대형 축제를 벌이려던 앨 스밑 뉴욕주지사를 상대로 고소 협박도 했고, '미국전쟁어머니협회'가 어머니의 날(Mother's Day)에 기금모금을 하려다가 그녀의 항의로 어머니의 날에서 소유격을 뜻하는 '표(apostrophe)를 떼냈다. 그밖에도 엘리너 루즈벨트 대통령 부인을 공격하기도 했다.
자비스는 말년을 환자인 자기 자매 릴리를 돌보면서 어머니 무덤가를 꽃으로 장식하는 데 보낸다. 릴리가 죽고 나서 그녀가 더욱 외로워하자 친구들이 정신요양원에 보내줬고 거기서 1948년 84세를 일기로 페니 한 푼 없이 세상을 떴다. 앤드류 교회는 84회 종을 울려 조의를 표했다.
존 워너메이커
워너메이커(1838년 7월11일-1922년 12월12일)는 1908년부터 1914년까지 6년간 애너 자비스에게 재정지원을 해 공휴일 제정에 기여했다.
18세기에 이민을 온 독일계 '봔너마허' 가문의 후손인 그는 필라델피아 태생으로 최초의 백화점을 세우면서 정계의 도움으로 뉴욬/런던/파리 등으로 끝없이 사업확장을 해 나아갔다. 상인/부호/광고주, 종교계 지도자와 시민/정치적 명사로 이름을 날렸지만, 물론 참 크리스천은 아니었다. 명목 상의 장로교인일 뿐.
그는 첫 가게인 '오크홀'을 조지 워싱턴의 필라델피아 대통령 관저 자리에다 열었다. 그래선지 정직과 신용을 모토로 삼았다. 21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뜬 그의 맏아들 토머스는 '북미'(NA)란 신문을 구입, 급진 사회주의자들의 칼럼을 연이어 실어 아버지의 마음을 불쾌하게 한 데다 일요판을 만들어 성경을 빌린 아버지의 "기독교적" 견해를 비판하면서 비위를 긁어댔다.
현재도 필라델피아 시청 건너 편에 있는 대형건물 '워너메이커 빌딩'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대통령 주재로 '헌당' 22됐다. 이 건물엔 초대형 파이프오르간이 있어 최근까지 다양한 오르가니스트들이 연주해 왔고, 2500파운드 짜리 '워너메이커 독수리'상이 그랜드코트에 놓여 있어 "독수리상 곁에서 날 만나 주세요"란 필라 특유의 속담이 생기기도 했다. 23
워너메이커는 직원들에게 무료 의료보험, 교육, 리크리에이션 시설, 연금, 이익배분, 흑인/미원주민 복지 등의 혜택을 앞당긴 선구자였으나 조합 구성엔 극력 반대, 1887년 '노동 기사(騎士)들'조합이 결성될 기미가 보이자 사립탐정들을 시켜 색출한 조합원 12명을 무조건 해고했다.
그는 한편으로는 백화점 물건을 팔면서도 1889년 검약 정신 장려를 위해 제1일페니저축은행을 열었다. 그해 벤저민 해리슨 대통령에 의해 미국 우정장관에 임명돼 최초로 기념우표를 발행하기 시작하기도 했지만 4년 재임기간 동안 소위 '엽관배당제'(spoils system)에 의한 3만 우정직원 해고 파동으로 같은 공화당의 티어도어 루즈벨트 24와 충돌 사태를 빚으면서 큰 혼동을 자아냈다. 25
워너메이커 혼란상은 다른 방면으로 계속돼 새로 번역된 레프 톨스토이의 '크로이처 소나타'를 주문했으나 마감일이 지난 데다 일반할인만 제공되자 그 앙갚음으로 '선정성'을 핑계 대고 책의 미 우편물 배송을 금지, 언론에게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다. 이어서 1891년엔 우체부 제복 변경령을 내려 자신과 비밀연계된 것으로 추정된 한 볼티모어 회사에만 일괄 주문하게 해 비난 받았다.
그는 제1차 대전 당시 미국이 벨기를 독일로부터 1천억 달러에 매입하라고 공식 제안하기도 했다. 그의 사망시 1억 달러의 재산은 아들 랃맨과 두 딸에게 3등분됐으나 랃맨은 6년후 역시 사망했다. 워너메이커는 세계 각국에 7채의 저택을 보유했고 그의 챌튼햄 저택은 광대해 구내에 기차역까지 짓기도 했다.
워너메이커는 펜실베이니어 소속 프리메이슨이었고 1993년 펜실베이니아 그랜드라지에 의해 워너메이커와 메이슨 이상에 동조하는 비(非) 메이슨에게 수여되는 '존워너메이커메이슨박애메달'(JWMHM)이 제정되기도 했다. 26
상업화된 어머니날
죽기까지 상업화 방지를 위한 법정 투쟁에 몰입했던 자비스는 "나는 이 날이 이익의 날이 아닌 정서의 날이길 바랐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축하카드 쓰기도 '게으른 핑계'라고 경멸하고 친필 편지를 고집했다.
그러나 현재는 매년 어머니날에 '홀마크'사 등의 축하카드, 모든 화훼점의 카네이션 꽃으로부터 백금 목걸이까지 엄청난 물량의 상품이 팔린다. 미국에서는 흔히 성탄절 다음으로 선물이 많이 오고 가며, 미국 소비자들의 96%가 어머니날 소비에 참여한다. 이 날은 장거리전화 사용 '핔데이'의 하루이기도 하다.
수많은 식당들이 이 날 가장 바쁘다. 미국엔 총 23,000여 꽃 회사에 12만5천여명이 일하는데 이 시즌에 유달리 바쁘다. 최근 센서스에 따르면, 나이 40-44세 미국 여성들의 82%가 어머니다.
카네이션?
카네이션의 기독교적인 의미는 전무하다.
어머니날/결혼식 등에 잘 쓰이는 이 꽃은 고대에 제우스/유피테르에게 바치던 꽃의 주 품종으로 '조브의 꽃'으로 불렸다. 카네이션이란 이름은 붉은 색깔이 연상시키는 육류(carnal 27)나 육화(incarnation)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28
이 꽃은 다양한 대학교 동아리의 상징으로도 쓰인다. 무늬 카네이션은 실연(失戀)을 상징한다. 일본 천황의 보좌는 '카네이션 보좌'로 불리기도 한다. 프랑스에서는 색깔과 상관 없이 불행을 뜻하며 장례용으로 쓰인다. 29
자비스는 단지 어머니가 좋아하는 꽃이었기에 이 꽃을 택했다. 그러나 그녀가 의도한 어머니날 카네이션 달기는 어머니에 대한 경의보다 "'형제결속'(brotherhood)을 다지는 꽃배지로 달기"가 주목적이었다. 그런 '꽃배지'라면 프리메이슨 사회에서 유행하는 것이기도 했다.
'성모의 날'?
한 카톨맄적 전설에 따르면, 카네이션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때 땅에 처음으로 솟았는데,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어머니 마리아의 눈물방울이 떨어진 자리에서 꽃이 피었단다. 그래서 핑크 카네이션은 어머니의 불사의 사랑을 상징한단다.
어머니날은 천주교에 의해 '온 우주의 어머니' 격으로 부각돼 온 여신(?) 같은 존재인 마리아를 숭앙하는 날로 통일될 가능성이 높다. 천주교는 마리아를 '성4위일체'의 하나로 모시려는 노력을 부단히 경주해 왔다.
영국은 이미 어머니날을 성모의 날로 겸해 지켜 왔고 스페인 등 대다수 천주교 국가들을 비롯한 나라들도 그런 개념으로 이 날을 지켜온 게 사실이다.
- 프리메이슨 스카티쉬라잍(SR) 33단 [본문으로]
- 성 안드레. 당시는 감리감독교회였다. [본문으로]
- 고인을 기리는 성지/성당/사당 등의 뜻. 프리메이슨의 유파 중엔 '슈라이너'(Shriner)도 있다. [본문으로]
- Ides. 고대 로마 달력의 3월·5월·7월·10월의 보름 또는 기타 달들의 제3일 [본문으로]
- Cybele [본문으로]
- 훗날엔 '성(St.) 브리짇'으로 둔갑했다. [본문으로]
- 그리스의 헤라. 올림포스 주신인 제우스(로마의 유피테르/주피터)의 '아내'. [본문으로]
- 어머니 순례를 위한 2주간 [본문으로]
- 어머니 교회 방문 주일 [본문으로]
- 과일로 만들거나 과일을 속에 넣은 케이크. 본래 성탄절 용으로 유행했다. [본문으로]
- 이 관습은 2차 대전 후 한때 미군들에 의해 수입돼 일시 미국에 상륙, 한동안 상업화되기도 했다. [본문으로]
- Ann Reeves Jarvis [본문으로]
- Mothers Working Day [본문으로]
- Julia Ward Howe [본문으로]
- 현 메리볼드윈대학 [본문으로]
- 훗날 어머니날 공식 사가(史家, historian)가 된다. [본문으로]
- 같은 날 오후 필라의 워너메이커 빌딩에서도 비슷한 행사를 가졌고. [본문으로]
- 예레미야애가 3:23을 원용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참으로 아침마다 새로운 것은 주/야웨님의 사랑과 신실성(=진리/미쁘심)이다. [본문으로]
- 수용인원 5000석이었으나 15,000명이 참석해 초만원을 이뤘다. 자비스는 1시간 10분 동안 연설을 했다. [본문으로]
- 하인즈 케첲 제조회사. 지금은 수 천 가지 식품을 가공하면서, 전세계 여러 국가에 지사를 둔 거대기업으로 발전했다. 독일계 하인츠 가문 출신으로 장로교인에다 YMCA 회장, 주일학교 교사연합회 회장 등을 지낸 하인즈는 오랫동안 프리메이슨 여부를 의혹 받아 왔으나 확실한 물증은 없다. 그러나 저명 프리메이슨이었던 인드류 커네기의 카네기 재단에 막대한 기금을 투입해 왔다. 또 하인즈의 후손 일부는 빌드버거 멤버이다. 하인즈의 후손과 결혼했다가 잔 케리 상원의원(전 공화당 대선후보, '해골단' 단원)과 재혼한 테레사 하인즈 케리 여사는 하인즈 가문의 주 상속자의 한 명이다. 헨리 하인즈의 유언으로 그 후손들이 피츠버그 대학교 안에 세운 하인즈 채플은 안팎의 모습이 종교다원적이다. 이상한 조각품, 비기독교적 장식물 등이 있다. 예: 스탠드 글래스의 인물들 중엔 잔 애플시드(스베덴보리 교도), 벤저민 프랭클린(메이슨), [본문으로]
- 초대 대통령. 프리메이슨 [본문으로]
- 27대 대통령. 프리메이슨. 그의 두 형제와 아버지도 메이슨이었다. [본문으로]
- 누구에게 바쳐진 헌당인가? [본문으로]
- Postmaster General, 현 우정국 총재. [본문으로]
- 26대 대통령. 프리메이슨. '테디 베어'의 원조. [본문으로]
- 스카티쉬라잍 33단. 워너메이커는 62세인 1898년 3월30일, (일정 라지 소속이 아닌) '즉석 메이슨'(mason-at-sight)이 됐다가 1900년 1월9일 펜실베이니어 젠킨타운의 프렌쉽 라지 No.400의 멤버가 됐다. 시니어워든('상임파수꾼')이었다가 이듬해 '워슆풀매스터'가 됐다. 그후 그는 펜주 그랜드라지 도서관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선임돼 자신의 돈을 써 가면서 메이슨의 역사와 가르침에 관한 도서/서신/미술품의 수집에 힘썼다. 그의 공로 덕분에 도서관은 17,000권 넘는 도서와 7,400점 넘는 미술품/유품들을 소장하게 됐다. 특히 그는 앨맄잰드리아버지니아 라지 No.22의 요청으로 1794년 화가 윌리엄 조셒 윌리엄즈가 그린, 레갈리아(메이슨 정장)를 갖춘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를 기증했다. [본문으로]
- 즉 '유피테르(주피터)의 꽃' [본문으로]
- 라틴어 caro(고기). [본문으로]
- carnation은 coronation(대관식)과 연계된다는 설이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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