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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비평/교회력과 교회명절

우리는 절기지킴이들?




여러분은 날과 달과 해와 (특정) 절기들을 삼가 지킵니다.
두렵기는, 내가 여러분을 위해 여태 애써 온 것이 헛되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갈라티아 4:10,11 사역)  

캡틴

저 개인으로나 교회로나 가정으로나 '성탄절'이라는 전통을 부분적으로 조금씩 탈피한 지가 어언 몇 년째 돼 옵니다.
가장 문제시되던 크리스마스추리 장식은 여러 해 전 중단했고(?) 카드 보내기는 지난 해로 마감했습니다. '성탄축하예배'란 것도 2년 전 졸업하다시피 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이 절기를 마침내 대범히 초탈하게 됐음을 한 켠으로 기쁘게 생각하며 성탄의 참 주인공이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무슨 독특한 긍지를 느껴서가 아닙니다. 쉬운 말로 잘 났다고 요란하게 나팔 불고 개인을 프로퍼갠더 할 성질도 아닙니다. 그냥 이 계절을, 성경묵상과 함께 조용히 지내고 싶습니다.

이러기 위해선 식구들 특히 아이들이, 신나는 캐럴이랑 이벤트랑 '성탄절'에 얽힌 지난날의 많은 아기자기한 추억거리들을 이 전통절기 개념과 함께 마음 한 구석에 영영 묻어야 하는, 나름의 남다른 슬픔이 없지 않았지요. 그렇다고 일부러 '고생'을 사서 하는 건 아닙니다. 그만큼이라도 전통에서 해방되어 마음이 가볍습니다.
몇몇 믿음의 벗들이 알게 모르게 같은 뜻을 나눠 왔다는 사실에 적지 않은 위로와 기쁨을 맛봅니다.  

이슈가 이슈인지라 사랑하는 사람들과 서로 '엇박'이 되거나 많은 오해도 받을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혹시 안식일교 교인이 아니냐, '여호와의 증인'이 아니냐, 제임스성경(KJV) 유일주의자는 아니냐..? 등의 물음도 독자에게 있을지 모릅니다. (저는 현재 소위 '대 교단'에 소속된 현직 장로교 목사입니다.)
특히 장기불황 속을 어렵사리 부대껴 오면서 성탄절 대목철을 겨냥해 온 기업인 성도들에게 미안한 마음입니다. 계절을 늘 의식하며 움직여야 하는 꽃꽂이 사역자 같은 분들에겐 더구나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생각보다 성경과 하나님의 심정을 먼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아, 무슨 소리냐..성탄절은 이미 지나갔는데..뒤늦게 원님 행차 뒤 나팔이냐? 하실 분도 계실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 잠시 멈추고 깊이 생각해 봅시다.

지난 날을 회상해 보면..
12월 26일 아침만 되면, 그 좋던 날이 어느 새 지나갔다는 허전한 생각과 표정 속에서 아쉽다 못해..일말의 기분과 정서라도 좀 더 지탱해 보려고 연말의 바쁜 일상 속에서도 새해초 또는 정월말까지 내내 추리를 놔 두고 오색등을 밝혀 놓던 것..지금도 대개는 그러리라 봅니다만. 이걸 성탄정서교통정리라고 해야 하나요..아무튼 그랬습니다.

"뜻은 대강 알겠는데..하려면 혼자나 조용히 해라" 하실 지도 모릅니다.
저는 독자들의 정서 내지 서정을 말살하려고 나선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성경을 믿고 그 진리를 참되고 유일한 것으로 믿는 우리들이라면..비단 주님의 탄생 뿐 아니라 그분의 삶과 섬김의 사역, 아픔과 죽음, 되사심과 오르심 등을 날마다 순간마다 기념하고 다시오심을 날마다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 교회들과 교계를 둘러 보면, 가시적인 교회는 너무나 절기 중심, 의식(儀式) 마인드를 갖고 있습니다. 새해 초부터 연중 내내 이런저런 교회명절들과 시즌물(物)들을 꼬박꼬박 지킵니다. 교파에 따라선 '교회력'이라는 것을 철저히 준수하기도 합니다.

'절기지킴이'라면, 우리네가 단연코 카톨맄을 따라가지 못하죠. 
율리우스력 대신 그레고리우스력으로 세계를 제패하다시피 한(?) 그네들은 '성탄절' 시즌으로부터 일년을 시작하는 교회력에다 온갖 '성인'들의 축일까지 포함시켜 신도들을 의식적/정신적으로 강훈련 내지 맹훈련을 시킵니다. 수호천사들만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해 '수호성인'들의 날까지 고루 제정해서 꼬박꼬박 지켜 줍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 교회가 유지되지 못하나 봅니다.  

신교도 그렇게는 하지 않지만 깍듯한 '절기지킴이'라는 데는 마찬가지입니다. 교파에 따라서 차이는 있을 망정 해마다 신년주일로부터 시작, 카톨맄 교회력에 따라 현현절..종려주일, 고난주일, 부활주일, 성령강림주일 등을 해마다 지킵니다.  
이를테면 신/구/정교를 막론하고 세계 모든 교회가 카톨맄(또는 정교회) 교회력에 따라 일년을 시작하고 매듭 지으며 돌아 간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제도적 교회의 사역자/'사제'들과 대다수의 신도들은 매년 교회력에 맞춰 일년을 쪼개고 짜고 지키고 수행/처리해 나아가는 삶의 편력을 유지합니다. 그들의 신앙생활을 비롯한 일생이 그렇게 지나갑니다. 알고 보면, 이것은 저마다 다른 종교력을 가진 유대교/회교 등도 그렇게 합니다.

세속인이나 일반인들도 태양력/태음력에 따라 모든 삶과 일상의 과정을 맞춰 나갑니다. 물론 계절의 변화 흐름에 기초한 그런 달력들은 사뭇 과학적이지요.
여기서 제가 하려는 말은..카톨맄이 12월 25일 '성탄절'에다 초점을 맞춰 놓고 제정한 교회력 중심의 생활은 신앙생활이기보다는 종교생활에 더 가깝다는 것입니다.
 
이런 교계의 모습은 성경에 나타난 초기 신약교회와는 다른 모습들이지요. 현실 교회는 사뭇 구약적입니다. 말로는 "복음! 복음!", "복음주의!"를 외치면서도 율법을 채 이탈하지 못한 채 입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네 현실교회는 순전한 구약교회도, 온전한 신약교회도 아닌 어중간한 입장입니다. 아직도 성경적인 모습이 못 된다는 뜻이지요.

성경을 곰곰히 묵상해 보면, 행전에 나타난 일시-과도기 시절을 빼 놓고는 성도나 사도들,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력'이나 절기준수 마인드를 지탱한 흔적이 보이질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절기준수 정신이나 의식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사도 파울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꼬박꼬박 지켜나감을 "세상의 초등학문"이라며 삼가라고 교훈했지요(갈라티아 4:3,9,10). 파울의 이 말에 따르면, 특히나 온갖 명절과 절기를 어김없이 지켜 온 카톨맄/정교회.. 등은 대표적인 '초딩' 급 교회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성육신과 고난, 부활, 성령강림 사건들이 그들의 삶에 그렇게도 중요하겠건만..놀랍게도 초기교회가 탄신일/고난절/부활절/성령강림절을 매년 꼬박꼬박 지키며 기념했다는 흔적이 없습니다. 그들의 삶과 존재의 뿌리였다시피 했던 유대 명절들도 성경기자들이 의식은 했지만, 철따라 율법적으로 준수했다는 족적도 없습니다. 사라진 할례 전통과 함께 절기준수 의식도 뒷전으로 물려 버린 셈입니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제자들과 함께 예루샬렘 성으로 행렬 지어 들어오시자 사람들이 옷을 깔고 어린이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호산나!.." 외친 사실이 분명하건만, 초기교회가 매년 '종려주일'이란 것을 꼬박꼬박 지키고 그날 종려가지를 흔들며 기념했다는 기록이 행전과 사도서신서엔 없습니다. 
 
초기교회가 기념한 것이 단 하나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주님의 만찬 뿐입니다. "나를 기념하라"고 주님이 몸소 지시하셨기 때문이지요. 그것도 특정일에 한 게 아니라 수시로-가능하면 날마다-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대다수 사역자나 신자들이 '교회력'에 따라 절기를 지켜 나가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기 쉬웁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뒷받침할 성경적 바탕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신교는 카톨맄의 구약적인 의식주의적/제도주의적/율법주의적 교회력에 종속된 모습을 아직도 탈피하고 있지 못한 셈입니다.
결국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게 되나요..? 하지만 참 교회의 뿌리는 천만에(!)..로마가 아닙니다. 우리의 뿌리는 하늘 예루샬렘입니다.

이런 말들은..성경에 예언과 성취로써 명시된 주님의 성탄/삶/사역/고난/죽음/부활/승천과 성령강림까지도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주님이 "나를 기념하라"고 지시하신 주님의 만찬을 통해 주님의 이 모두를 날마다 매 순간 묵상하고 기릴 수 있다는 뜻에서 하는 말이지요. 진정한 의미에서 그럴 때에 우리는 비로소 다시 오실 주님을 더욱 뜻 깊게 사모하며 기다릴 수 있게 될 터입니다.

이것은 자녀들, 젊은이들이 해마다 성탄절 전통을 꼬박꼬박 지킨다고 해서 예수님의 재림을 더 사모하고 기다리게 되진 않는 걸로 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가장 모범적인 세계 성탄절지킴이들의 차세대 대다수가 예수님의 재림은커녕 역사적인 탄생조차도 이젠 믿지 않게 됐다는 슬픈 얘기들이 이를 입증해 주지요. [관련 글, "'성탄절'의 슬픔" 참조]
 
물론 이런 돌변적 개혁은 하루아침에 다 이뤄질 일도 아니며 그렇게 생각도, 강요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메네 메네 테켈 (우)파르신"(셈을 거듭해 저울에 달고 나눴다: 다니엘 5:5,24-28)이라고 경고하신 하나님의 심경처럼 제도와 전통보다는 성경진리 쪽에 더 무게를 둘 때 비진리로부터의 올바른 나뉨(분별/聖別)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이젠..카톨맄처럼 오랜 세월 뿌리 깊이 고착된 우리의 절기준수 마인드를 재고해 볼 때입니다. 절기가 아니면 교회가 안 된다는 제도교회의 잠재의식이 오히려 참된 교회의 전진을 가로막고 있는 게 아닌지 곰곰히 따져 볼 때입니다.
교회와 사역자, 신도가 '절기지킴이'로 충실히 머무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하는 이상 우리는 구약인의 범주를 벗어나 참된 복음지킴이로 서기가 어렵습니다.

교회예산 집행/유지에 부심하는 교역자들은 "그 많은 절기헌금들은 다 어디 가라고 그런 소릴 함부로 하는 거냐?"고 물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카톨맄 교회력에 맞춘 '절기헌금'보다는 성경대로 연보와 십일조를 회복하고, 모일 때마다 수시로 (교회가 아닌) 하나님께 감사하고 바칠 사람들은 바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저의 딴 글에서도 강조했지만, 십일조는 여전히 유효한 영구적인 초율법적 법칙입니다.]

"그건 성경적인 이상일 뿐 현실에다 맞춰야지 모든 걸 다 이상에 맞출 순 없잖냐?"고 할 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성경적인 이상과 실천의 사이는 골을 멀찌감치 넓혀 둘수록 좋은 건지 되묻고 싶습니다. 성경적 이상과 교회적 현실의 사잇폭을 좁혀 가야 성경적이 아닌지요?

정치행정/경제/사회..모든 것들이 '세계화'라는 미명 아래 마치 도랑물처럼 소용돌이처럼 카톨맄 쪽으로 기울어 가는 이때에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경계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젠 참된 교회의 참된 '홀로서기'가 필요한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