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볼 수 있는가?
예수 크리스토를 보면 된다.
아버지 품 속의 독생 성자가 하나님을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기자인 사도 요한은 점점 더 놀라운 선언들을 합니다. 어느 모로 보나 요한은 성자 예수 크리스토님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소개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1:17에서 요한은 본 복음서 최초로 '예수 크리스토'란 이름을 씁니다. 율법은 모쉐를 통해, 은총(은혜)과 진리는 예수 크리스토를 통해 왔다면서. 은총/진리는 진리/사랑이란 병존개념과 같습니다.
이 말은 율법이 은총/진리와 사뭇 대립적이면서도 서로 반대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성전의 청지기인 모쉐를 통해 은총/진리의 그림자가 앞서 소개됐고 그림자의 실체가 바로 예수 크리스토라는 것입니다.
사실 율법은 은총/진리와 무관한 건 아니지요. 율법은 은총/진리의 일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 자체가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비로소 인간다울 수 있음을 요약한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진리/은총의 그림자-'몽학훈장'(蒙學訓長. 참고: 개역한글성경 갈라티아 3:24,25)격에 불과한 반면 예수 크리스토는 그 실체이며 완성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당대 유대인들에게, 그림자에 집착할 게 아니라 실체를 붙들고 받아들여야 하는 과제를 던지고 있는 셈이지요. 아울러 복음을 받아들인 초기 교인인 요한 자신을 비롯한 소수의 유대인들, 이방인들은 이 실체를 제대로 붙든 사람들임을 반증하고 있기도 하고요.
침례/세례 요한과 예수 크리스토
요한복음만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침례/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드러매틱하게 대조 비교함으로써 예수님이 참 크리스토(메시아)시란 진리를 극대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극적 대비 효과라고 할까요. 1장에서 그는 예수님과 요한, 둘의 존재를 갖고 병립(juxtaposition)과 동시에 대조 양상을 연출합니다.
사람과 하나님의 대비, 소개자와 소개 받는 본인의 대비입니다. 유대인들이 한때나마 메시아로 혼동하려던 침례 요한은 주님의 앞길을 예비하는 도우미에 불과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친구인 페트로의 동생 안드레는 본래 침례 요한의 제자였습니다(1:35,42). 페트로/안드레 형제와 야코보/요한 형제, 필맆 등은 모두 같은 갈릴리 지방 출신이자 대부분 어부였지요. 예수님이 공 사역에 나타나시기 전까지 일찍이 이들 상당수는 침례 요한이 의로운 대언자임을 알고 그를 추종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침례 요한이 예수님보다 앞서 나타난 것은 뒤에 오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기 위함이었음을 발견합니다.
시리즈에서 전술한 바 대로 앞서(7절) 요한은 침례 요한은 빛이 아니고 참 빛인 성자님을 증거하는 반사광 같은 역할을 한다고 대비 개념으로 소개했습니다. 이 점은 예수님도 뒷받침하셨지요(요 5:35). 즉 주님 자신이 5:31~37에서 침례 요한과 자신 사이에 명징한 대비 내지 '차별화'를 하고 계십니다.
15절에서 다시 침례 요한은 예수님이 시기적으로는 뒤에 오셨으면서도 자신보다 선재하셨다고 대비시킵니다. 사실 침례 요한은 예수님의 외사촌 형이지요(루카복음서 1:36). 6개월 먼저 태어났지만 이미 태중에서부터 자신이 아기 예수의 선구자임을 느낀 사람입니다(뤀 1:41~44).
나중이면서 선재하신 분
"요한이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이분이 내가 말했던 그분입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섰으니 그분은 나 전에 계셨기 때문이라고." (15절. 사역)
요한의 이 말은 30절에서도 되풀이 됩니다. 같은 사람의 같은 말을 같은 장에서 반복하는 것은 드문 일이지요. 본 서 특히 서론 부분에서 기자가 강조하고 싶은 핵심의 하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시기적으로는 뒤에 오시면서 선재하시는 분이다..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은 달리기나 다른 경쟁에서처럼 나중인 사람이 먼저 된다는 개념과는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이 침례 요한과 '경쟁' 관계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타임 머쉰을 탄다 하더라도 나중 태어난 사람이 실제로 먼저일 수는 없지요! 타 종교에서 선재 비슷한 소위 '환생', '윤회' 개념은 철저한 비 진리입니다.
그렇게 선재하신 분이 역사상 딱 한 분 계신데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성자님은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셨기 때문이지요. 본서 초두에 소개됐던 로고스 개념처럼 이 점은 특히 요한복음에서 자주 조명됩니다. 성자님이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셨다고 자증하신 부분이 그 한 예지요(요 8:58). 예수 크리스토는 태초에 선재하신 분, 곧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요한은 그런 주님을 구주/스승으로 모신 감격을 요한서신A(요일) 1:1~3에서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요한'이란 이름은 구약 시대 히브리명 '요하난'(구약에서 27회 나타남. 예: 왕들B=왕하 25:23)과 같은 이름으로 주/야웨님께 은총을 받은 사람, 야웨님은 은총을 주시는 분 등 정도의 뜻입니다. 침례 요한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 이름으로 성령님께 직접 명명 받았습니다(뤀1:13, 비교> 59~63절).
그런가 하면 예수님의 히브리식 이름 예슈아는 광야시대-카나안 정복시대를 이끈 지도자 예슈아 장군처럼 '구원자'란 뜻입니다(예슈아=여호수아 1:1). 이런 맥락에서 예수 크리스토가 나타내시는 하나님은 은총이시며 아울러 구원자이심을 앞서 소개한 사람이 침례 요한이었다면, 사도들 가운데서도 가장 뒤에 남아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끝까지 소개한 사람이 사도 요한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토와 '광야의 소리'
19~27절은 침례 요한이 자신은 크리스토(=메시아)가 아닌, 참 크리스토의 선구자인 '광야의 소리'임을 증언함으로써 또 다시 대비를 이루는 장면입니다.
베타니에서 침례를 주던 그에게 나아와 질문을 던지는 사제/레비인들에게 요한은 자신이 크리스토도, 엘리야도, '그 대언자'도 아니라고 하면서 일찍이 대언자 이사야가 예언했던 "주님의 길을 곧게 하라고 빈들에서 외치는 소리"(이 40:3)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자신이 엘리야/대언자가 "아니다"고 한 것은 거짓말이라기보다 겸손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과 복음서 기자들은 공히 침례 요한이 바로 당대의 엘리야 역할을 한 사람임을 명언해 주지요(마11:14, 17:10~13. 맑 9:11~13. 뤀 1:17. 비교> 말라키 4:5).
사실 침례 요한은 모든 율법과 대언자들의 대미를 장식하는 장엄한 최후의 대언자였습니다. 그가 여인이 낳은 사람들 중 가장 큰/위대한 이유도 바로 임마누엘이자 성자님이신 메시아의 길을 예비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 해도 요한은 한 인간이었기에 율법을 완성할 길은 없었습니다. 율법을 완성하시고 율법 시대를 영원히 종식하러 오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물 침례와 성령 침례
침례 요한은 또 자신은 물로, 예수님은 성령으로 침례를 준다고 다시 대비시킵니다(26,33절). 성령침례를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 뿐이지요(34절)!
역사적으로는, 예수님이 제자들 즉 믿는 모든 자들에게 성령 침례를 주신 것은 수 년 후 오순절 성령강림 당시였습니다. 그때 성령님이 온전히 지상에 임하셨기에 이후부터 말세 끝까지 성령님은 하늘 보좌 앞에 계실 뿐더러 지상에서 신자들(참 교회) 속에 늘 계십니다.
[여기서 잠시..물침례, 성령침례의 개념을 좀 설명하지요.]
침례교/오순절교 등의 존재 때문에 한국에서는 '침례'와 '세례', 두 용어가 은근히 대립해 왔지만 사실 다른 언어권에서는 'baptism' 등으로 통일돼 있습니다. 마치 한국 신교의 '하나님'과 천주교/성공회의 '하느님'이 대비되는 현상과 비슷합니다.
물론 침례의 원어 '밮티스마' 속에 씻음 즉 '세례'의 개념이 없진 않습니다. 그러나 "물 속에 잠긴다"는 개념이 앞서며 더 무겁습니다. 동사인 '밮티조'도 '씻는다'는 개념보다 잠긴다는 뜻이 더 강합니다. '세례'는 한글 성경 초기 번역자들이 카톨맄을 그대로 본받아 옮긴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젠 재고할 때가 됐을 법도 합니다만 한글 성경들은 대부분 '세례'로 일관한 가운데 거의 전혀 반영되지 않고 있지요. 단지 전통 교회세가 강해서일까요? 그렇다고 '침세례'나 '세침례'로 하기도 그렇고.
필자는 장로교인이지만, 한국 천주교에서 비롯된 '세례'가 보다 더 성경적인 '침례'에 자리를 물려줘야 한다고 봅니다.
렉시콘(고전어사전)에 따르면, 동사 '밮티조'는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1) 거듭 담그다, 잠그다. (선박이 가라앉듯) 잠기다
2) 적시거나 잠가 씻다. 물로 씻다. 자신을 씻다
3) 압도하다
밮티조는 비슷한 동사, '밮토'(잠그다)와도 직결돼 있습니다. 주전 2세기(200 B.C.) 무렵 그리스 시인/철학자 니칸데르가 쓴 식물 절임(pickles) 조리법이 있습니다. 절임을 하려면 먼저 끓는 물에 살짝 잠궜다(밮토)가 다시 초를 섞은 물에 담가 두어야(밮티조) 한다고 썼습니다. 둘 다 액체 속에 야채를 잠근다는 뜻이지만 앞 쪽은 임시성, 뒤 쪽은 영구성이 있지요. 전자는 다소 임시적인 변화, 후자는 영구적 변화를 가져 옵니다.
침례보다 세례가 더 "옳다"고 주장하는 한국의 이런저런 전통 교단 사람들은 대체로 번거롭게 물 속에 잠기기보다 카톨맄 사제들처럼 물뿌림으로 대강 하는 의식을 중시합니다. 이것은 바쁜 도시 생활에서 편리한 점이 있고 상징성이 강한 반면, 침례의 실제적 강조점을 다소 약화/결여시키는 약점이 있습니다. 물뿌림 세례는 잠수 침례가 어려웠던 고대 박해 시대 카타콤이나 카파토키아 동굴 속 같은 상황에서 임시적으로 필요했던 약식으로 보입니다.
알고 보면, 물뿌림이나 낙수는 고대 구약 제사 때의 물뿌림과 더 개념이 통하지요(민 19:20).
성경의 침례는 단지 죄를 씻을 뿐 아니라 크리스토와 함께 죽음 당해 매장됐다가 되살아남으로써 연합된다는 의미성이 있습니다(로마서 6:3~5, 콜로새 2:12, 페트로A 3:21).
어떤 의미에서 고대 아람 나라의 나아만 국방장관이 엘리샤의 지시를 받아 요르단 강에서 일곱 번 잠겨 목욕한 것이 침례의 전형처럼 보입니다(왕들B=왕하 5:14).
또 이스라엘 선조가 미쯔라임 출국 당시 모쉐를 따라 홍해를 건넌 것은 구름과 바다 아래 침례를 받은 것으로 비유됐지요(코린토A 10:1,2).
예수님도 요르단 강변에 '물뿌림'을 받으러 나오신 게 아니라 강물 속에 잠겼다가 나오셨기에 "물에서 올라오셨다"고 표현됩니다(마태 3:16).
그런데도 현재까지 대다수 한글 성경이 침례의 수침(水沈) 개념이 배제된 채 일방적으로 '세례'로만 표시된 것은 그만큼 초기 카톨맄 영향이 커서인가요? 침례조나 강물가가 필요한 침례가 번거로워선가요, 아니면 전통교회 아닌 '복음주의권'인 침례교/오순절교가 싫어선가요?
그리고 성령침례는 더더구나 잠금을 의미합니다. 물론 성령님이 임하시면 죄의 정화 작업도 하시므로 성령세례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마 3:11,12). 그러나 물침례와 마찬가지로 성령침례는 영을 깊이 잠그는 작용을 합니다. 영어로는 성령침례가 성령충만 즉 '가득 채우심'(infilling, filling with the Spirit)으로 표현되기도 하지요.
성령침례는 방언과 직결
예수님이 약속하신 대로 오순절에 첫 성령침례를 받은 120 제자들은 전원 방언을 했습니다. 이것은 120 제자들에게만 주어진 특혜가 아닙니다. 이미 오순절 얼마 전 예수님이 예고하신 대로 모든 신자들에게 약속된 것이죠(마르쿠스복음서 16:17 참조). 따라서 성령침례를 받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방언을 하도록, 또 할 수 있게 돼 있습니다.
이것을 반대하는 지론들도 몇 가지 있죠. 크게 셋으로 간추리면..
방언/은사 영구중단설(일명 종료설)
오순절 당일 방언은 '외국어'였다는 설
방언은 은사이므로 누구나 받는 것은 아니라는 설..
등입니다. 이 셋은 모두 전혀 사실이 아닐 뿐더러 성경으로 입증되지 못합니다. [ 티엘티에 등록된 필자의 여러 글에서 이를 반증한 바 있으니 참조하기 바람.]
그러나 여기서도 간단히 반증해 봅니다.
- '중단'설:
'영구 중단'됐다면 언제 중단됐다는 말인지? 기록계시 완성/종료 교리(물론 옳지만)에 따라 구약이 완성된 때인지? 신약 최종 기자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끝내고 손에서 펜을 딱 놓은 순간인지? 아니면 신약성경이 단 권으로 묶인 때인지, 신/구약 합본이 공식 인쇄된 때인지? 신/구약이 히브리어/그리스어 아닌 첫 외국어로 완역된 땐지?
어느 때부터 중단됐다는 것인지를 말해 줄 사람이 누구인가?
중단설을 뒷받침하는 성구는 단 한 절도 찾아 볼 수 없다! 더욱이 오순절 당일 행전 2장에서 페트로가 인용한 대언자 요엘의 말세 예언(행 2:16~21)은 당대만 아니라 지구촌이 멸망할 때까지의 말세다. 방언/은사를 포함한 성령님의 모든 것은 말세의 끝까지 효력이 있다는 뜻이다. 이 점을 중단론자들은 무시하고 있다.
- '외국어'설:
하나님은 바벨탑에서 지상언어를 흩으신 분이시다. 오직 성령님 안에서 참된 언어통일을 이룰 수 있음을 후대에 방언으로 보여 주셨다. 초자연적이신 하나님이 인간 언어를 하늘에서 다시 내려 주신다는 상상을 우리는 하기가 어렵다. 그것은 인간의 얄팍한 희망사항일 뿐이다. 만약 사실이라면 천국에서도 계속 지상언어를 사용해야 논리적이다. 그렇다면 천국의 언어문화는 바벨탑 이후와 같다는 뜻인지..?
행전 2장 해당 부분을 그리스어 원문으로 읽어 봐도 분명히 외국어설은 잘못이다. 오순절 축제에 모여 든 해외 유대계 방문객들은 120 성도가 하는 (요즘도 보는) 보통 방언을 자기네 말로 알아 들었다고 돼 있다. 즉 술취한 듯 주절주절 하는 방언이 그들 귀에는 모국어로 들렸다는 게 그리스어 원문의 뜻이다. 애매모호한 게 아니라 극명한 사실이다.
- 방언은 '은사'이며 따라서 일부 특정인들을 위한 것이란 설:
사도 파울은 코린토 12, 14장에서 분명히 서로 대비되는 두 가지 방언으로 나눠 말한다. 하나는 개인의 영이 하나님께 비밀을 아뢰는 방언, 하나는 다불과(많더라도) 3명이 순서를 따라 회중 앞에서 하는 방언을 반드시 통역으로 풀이하여 모든 교우들이 듣게 하는 공개적 방언이다.
전자는 상향적, 후자는 하향적이다. 전자는 성령침례의 표징으로 나타나는 사적인 기도방언, 후자는 교회에 교훈을 주는 형태의 공적인 은사방언이다. 그러나 전자도 합심기도와 공동감사, 신령한 노래 등의 형태로서는 역시 회중 가운데서 쓰인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대명(지상명령/최후위임)의 일부로서 모든 신자를 위한 방언을 하리라고 예언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 대로 행전에서 성령침례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방언을 했거나 할 수 있었음을 우리는 거듭거듭 발견합니다
행 8:15~19 유대인들이 평소 천시해온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은 사건에서 쉬몬은 사람들이 성령 받는 광경을 "보았"음. 즉 방언하는 광경을 눈으로 목격하고 자신도 그 능력을 탐했음.
행 9:15~17 이때 파울이 방언을 했기에 나중까지 방언을 그 누구보다 많이 하고 있었음. 비교> 코린토A 14:18a.
행 10:45,46. 11:15,16 코르넬리우스 일가 전원이 방언을 함(예언은 이차적). 페트로는 방언을 곧 성령침례와 거의 동일시 함.
행 19:1~7 에페소 교우들 전원이 방언을 함
코린토A 14:5 파울은 분명히 모든 교우들이 방언을 하기를 원했음. 그 이유: 18a절 참조.
이상 각 성령침례/방언 사례들은 시기상으로 서로 간격이 수 년 내지 수십년입니다. 그렇다면 '중단론'이 가당합니까? 그리고 교회사(교회역사) 속에는 방언 사건이 수많이 나타납니다. 20세기초 오순절운동 때만 나타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 이런 점에 관해 글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성령침례와 방언의 관계에 대한 독자들의 질문 댓글을 언제라도 환영합니다. 물론 그밖의 딴 이슈에 관한 질문도 언제나 가능하고요. ]
'성경묵상연구 > 요한복음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첫 이적 첫 영광 (요한복음묵상8) (0) | 2008.04.11 |
---|---|
"와 보라" (요한복음묵상7) (3) | 2008.04.01 |
독생자의 영광 (요한복음묵상5) (0) | 2008.02.29 |
요한복음묵상4 임마누엘 (0) | 2008.02.24 |
성육신 (요한복음묵상3) (12) | 2008.0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