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육신
"또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았는데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으로서 은총과 진리가 가득했다."(요복 1:14 사역)
요한복음은 4복음서들 중 유일하게 주님의 성육신 개념을 명언합니다.
위 본문 전반절에 나타난 개념을 성육신(the Incarnation)이라고 하지요.
[여기서 incarnation이란 용어를 뉴에이지/힌두교/불교의 윤회적 환생 즉 소위 'reincarnation'과 혼동하면 안됩니다! 성육신은 오로지 성자이신 주님께만 해당되는 개념입니다.]
로고스(말씀)이신 하나님 곧 성자님이 하늘에서 내려 오셔서 몸을 입은 인간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시며 살아 계셨다는 말이지요. 또한 죽음과 부활 후 승천하여 하나님/인간으로 하늘에 계십니다.
성육신은 '도성인신'이라고도 부릅니다. 하나님의 인간과의 교차점/합일점이므로 대단히 중요한 교리입니다. 또한 순수한 영이신 성자님이 예수 크리스토라는 인간의 혼과 몸까지 취하여 지니게 되신 사건입니다.
아울러 영인 로고스가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는 것은 온 하늘과 우주 역사에 전무후무한 일대 사건이요 신비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하늘에서 지니셨던 자신의 것을 일시 비우셔야 했습니다. 즉 하늘서부터 주님은 일시적이나마 자신의 소중하고 엄청난 것을 희생하고 오신 것입니다.
[일각의 '수육'(受肉)이라는 한자 용어는 적절하지 못합니다. 주님은 인간(마리아)에게서 수동적으로 몸을 "받으신" 게 아니라 말씀이 스스로 능동적으로 몸을 취하셨기에 수육 개념은 논리적/성경적/교리적으로 걸맞지 않습니다. '육화'란 용어도 단순히 "몸으로 변함"이란 뜻이어서 다소 모자라는 뉘앙스입니다.]
여기 로고스는 결코 추상적 관념이 아닙니다. 신격적이고 행동적/능동적이며 권능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로고스로써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면서 하나님이 뜻하시는 일을 이루시는 분 곧 성자님이라는 것이지요. 로고스는 아울러 성령님과 함께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2000년전 이전 과거의 로고스는 말씀과 성삼위의 한 신격으로서의 성자님이셨을 뿐입니다. 성육신 이전의 성자님은 하나님의 형상이시기에 구약시대에 때때로 지상에 나타나셨지만 인간이 보기에 편하도록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을 뿐 인간의 몸을 입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아브라함의 집에서 식사도 하셨지만 당시는 아직 참 인간은 아니셨습니다(창세기 18장, 요복 8:56~58 참조).
미쯔라임(=에집트) 출국 때와 광야 시대에도 계속 함께 하셔서 이스라엘 앞에서 몸소 이끄셨지만, 역시 인간은 아니셨습니다(출 13:21).
그러나 때가 차매(되니), 다윋의 왕손으로 오셔서 여인의 몸을 빌어 아기로 태어나십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셨기에 남자의 씨를 받으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대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왜냐하면, 한 아기가 우리에게 태어나시고
한 아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바 되기 때문이어라.
주권이 그의 어깨 위에 있고 그의 이름이 불리리:
기묘!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아버지! 평화의 군주!"(이사야 9:6 사역)
하늘서 스스로를 비우심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주님은 이렇게 땅에 성육신하시기 위하여, 하늘에서 비우고 오신 것이 있다는 진리입니다. 주님은 스스로/자신을 비우셨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형체(모르페)이시지만 하나님과의 동등성을 붙잡을 무엇(대상)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 오히려 스스로를 비워 종의 형체(모르페)를 취하셔서 사람 같은 모습(호모이오마티)이 되셨고 / 사람의 형태(스케마)로 발견되시고 자기를 낮추셨으며.."(필리 2:6~8a 사역)
이 구절은 교리와 신학 상 퍽 민감한 부분입니다. 먼저 독자들이 알아 두어야 할 것은 여기서 (6, 7절의) 핵심어인 두 낱말이 원문에서 똑 같은 단어 '모르페' 라는 사실. 그러나 대다수 번역성경들이 똑 같은 두 낱말을 서로 다르게 옮겼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상당한 혼동을 자아내기 마련입니다.
과연 그것이 사도 파울의 원 의도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번역들이 옮길 말을 추정/선별했다고 봐야 합니다.
과연 주님이 스스로를 비우셨음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이 점에 대한 해답을 찾기 전 먼저 창세기에서 태초 인간의 본래 모습을 살펴 봐야 한다고 봅니다. 예수님이 입으신 인간의 모습은 어떤 것이냐..
그분의 형상, 인간의 형상
성삼위 하나님은 인간 창조 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 참조: 창 1:27, 5:1, )
하나님의 형상은 곧 성자님이셨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이 땅의 사람들을 방문하실 때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곤 하셨습니다. 그 분이 곧 성삼위 하나님을 대리하신 성자님이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자님은 성육신 하셔서 땅에 오실 때 당신께서 지으신 인간과 같은 모습, 인간의 형태, 더구나 종의 형체를 입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외부와 표면 즉 몸만 인간을 닮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로 인간의 지정의, 인간의 오관과 감각, 인간의 속성, 심지어 마귀의 모든 유혹을 받을 수도 있는 잠재성까지 고루 갖추시되, 단(!), 하나님이시란 의식, 성자님이심을 한 시도 잊지 않으셨고, 사람에게서 태어나시지 않았기에 죄가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하늘에서 누리시던 영광을 기억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아들 즉 성자이시므로 모든 면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하셨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이 사람으로 나시면서 (스스로) 모종의 미완 상태로 시작하셨다고 밝힙니다. 좀 의아스러우시겠지만..이것은 예수님이 태초 인간보다 못하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다음 구절을 잘 보십시오.
비록 그분은 아드님이셨지만, 고난으로부터 순종을 배우셔서 완전해지신 후, 그분께 순종하는 모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히브리서 5:8,9)
히브리서 기자는 사람이 되신 주님이 고난으로 순종을 배워 완전해지셨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시기 전, 미완 상태였다고 봐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성경은 인간 예수님이 처음부터 슬기가 가득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분 역시 우리처럼 성장/성숙하셔야 했습니다.
또 예수님은 슬기와 키가 더욱 늘면서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받는 사랑도 그러했습니다.(루카 2:52 사역)
다음으로, 예수님은 사람이셨기에 우리와 똑 같이 마귀에게 모든 유혹을 받고도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히 2:18, 4:15, 마태 4:1~11 참조).
그리고..주님은 땅에 계실 당시 때때로 천사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마태 4:11, 루카 22:43). 이것은 구원의 상속자들인 우리들을 위해 천사들이 섬기미로 활약하는 것과 같습니다(히1:14). "하나님이시니까 당연히 천사들의 보좌를 받으시는 거 아니냐?" 고 또 물을지 모르겠군요.
더욱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성자님이 땅에서 권능을 행하실 수 있었음은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셨기에 라기보다 성령께서 도우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밝힙니다.
'하나님이 나자렡 예수님을 성령과 권능으로 기름 부으시자 그분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하셨고 마귀에게 억눌린 모두를 고쳐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행전 10:38)
자..그렇다면 우리의 논리로는 좀 헷갈릴 수 없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으로 오신 분이면 꼭 성령과 권능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선한 일을 하실 수 있었고 억눌린 자들을 고쳐 주실 수 있었냐는 것이지요. "그야 성삼위일체시니까 당연하지 않냐"고 할지 모르지만.
무엇을 비우셨는가?
여기서 다시 필리포 2:6~8a의 위 본론 으로 돌아가..
과연 성자님은 하늘을 떠나실 때 무엇을 비우고 오셨을까요?
그분은 우선 하나님과의 동등성을 일시 비우셨습니다. 이 말은 온전한 신성을 일시 비우셨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케노시스주의'라고 말하겠지요. 사실 케노시스는 '비움'이란 뜻이니만큼 말 자체는 성경 그대로입니다.
만약 카톨맄과 신교 (대다수) 신학자들의 말대로 예수님이 땅에 계실 때 아버지와 다름 없는 충만한 신성을 유지하셨다면..처음부터 어떤 미완도 아닌 완전 상태이셨을 터이고 스스로 하나님이시기에 위와 같은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셨을 수 있습니다.
만약 성자님이 땅에서도 충만한 하나님의 신성을 지탱하신 채 고난을 받으셨다면, 그 고난은 인간인 우리들에게 별 의미가 없습니다. 온전히 인간이신 희생물, 화목제물의 대속의 피를 통하여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죄값을 치른 구속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히브리서 기자는 극명하게 해설해 줍니다(히 4:17).
신학자들의 말대로 주님이 하늘에서와 같은 충만한 하나님의 신성으로서 땅에서 온갖 일을 하셨다면, 과연 성자님이 하늘에서 무엇을 비우셨는지 아연해집니다. 신학자들에게 묻습니다. 성자님이 하늘에다 비우고 오신 것은 과연/도대체 무엇입니까?
성경은 분명히 밝힙니다.
예수님은 땅에서 성령의 권능과 슬기의 기름부음을 통하여,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 의하여 사역하실 수 있었다고.
이것은 주님이 땅에 계실 때 "하나님이 아니셨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이시지만, 성육신하여 지상에 계실 때만은 [일시적으로 완전한 신성은 비우셨기에] 하나님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니시고, 여전히 하나님과 하나이심과 성자님이심을 "의식"하셨을 뿐, 우리와 다름 없는 인간이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을 우리는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1. 성자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이시다
2. 단, 스스로를 비우고 땅에 오시면서 성육신하여 사람이 되셨다
3. 성장/성숙하신 뒤 성령의 기름부음과 권능을 받아 사역하시고
4. 죽으시고 부활하신 뒤 신령체를 입으셔서
5. 영으로서 혼과 몸을 지니신 채 현재 하늘에 계시는 유일한 분이시다.
6. 성자님은 현재도 하나님이자 사람이시다.
7. 하나님/사람으로서 다시 오신다.
이렇게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성육신의 진상은 그렇습니다.
'성경묵상연구 > 요한복음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원자와 광야의 소리 (요한복음묵상6) (0) | 2008.03.11 |
---|---|
독생자의 영광 (요한복음묵상5) (0) | 2008.02.29 |
요한복음묵상4 임마누엘 (0) | 2008.02.24 |
두 반응 (요한복음묵상2) (0) | 2008.02.15 |
세 가지 선언 (요한복음묵상1) (14) | 2008.0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