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리 크리스천들이 자주 합리적이지 못한 데 대해 답답하고 개탄스러워지곤 한다. 내가 합리주의자이거나 만사의 합리화를 즐긴다거나 또는 나 자신 비합리적인 구석이 없어서가 아니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합리적일 수 있고 또 그것이 타당하며, 노력하면 얼마든지 더 합리적일 수 있는데도 그러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부작용들과 슬픔이 비롯한다. 우리의 주변 삶 속에서 쉬운 예들을 들어 보련다.
삶이 의미있기 위해서는 절대 가치의 진리가 있어야 한다. 상대적 가치로 가득한 삶은 살아 갈 별 의미성이 없다. 그래서 절대 진리요 하늘의 계시인 말씀이 필요했고, 구전이든 자전(字傳)이든 성경이 일찍부터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는 상대적 가치로 충일(充溢)해 간다. 절대 진리를 거부하다 보니 세계적으로 자살자가 늘고 있고, 소중한 생명인 새싹들이 쓰레기처럼 마구 내버려지는 낙태가 기하급수로 늘고 있다. 이러니 돈/권력/성도덕 문란등 기타 부패상은 말 할 나위 없겠다. 영국의 사망건수의 4분의 1은 낙태로 인한 것이란다. 이 모두가 상황윤리적인 도덕상대주의 탓이 아니겠는가.
세상의 소위 '종교'라고 하는 것들도 이런 흐름에 편승하지, 세상보다 더 낫지는 못하다. 예를 들면, '알라'를 유일신으로 모셨다는 둥 나름의 절대 가치를 주장하는 회교 과격파는 크리스천, 유대교도 등 (자신들이 보기에) '이교도'인 사람들의 생명을 파리 목숨처럼 여겨 자살폭탄 따위로 무더기로 날려 보낸다. 그럴수록 그들은 미래의 낙원에서 얻는 보상과 쾌락이 많다고들 굳게 믿는다.
사람이 생명을 일단 앗기면, 이 땅에서는 기회가 사라진다. 그 다음은 내세와 생명, 심판의 부활이 기다린다. 그래서 남의 목숨이든 내 목숨이든, 아기 목숨이든 어른 목숨이든 더 없이 아깝고 소중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불교에서는 날파리나 짐승의 목숨도 사람 목숨처럼 귀하게 여긴다. 뭔가 비합리적이고, 잘못돼 있다. 그런데도 기독교 비교종교학이나 관상영성, 떠오름영성 같은 것들이 진리와 종교의 비절대화, 상대화를 부추겨왔다.
거기 비하면, 우리가 믿는 절대 진리인 성경과 기독교는 매우 합리적이다. 우리 하나님은 몰지각한 신이 아니라 창조주이시고, 우리 인간의 자유의지와 권리를 인정해 주시니 만사 합리적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상이 그럴수록 우리는 우리가 붙잡고 있는 성경 진리의 소중함을 더 느끼게 된다. 그것은 탄탄한 바위요 든든한 닻이다.
그런데 이처럼 우리가 절대 진리로 붙들고 있는 성경 말씀을 우리는 절대 신뢰하는가? 절대 신이신 하나님의 절대 계시인 이 말씀을 절대 신봉하느냐는 것이다. 독자나 필자가 알고 보면, 그렇지 못하다. 대다수의 크리스천들은 성경을 절반쯤 또는 부분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요, 현실이다.
필자의 많은 지인들과 친구들은 대부분 크리스천들이며, 다수는 목회자들이다. 솔직한 얘기로, 그들의 대부분이 성경을 3분의 2나 절반쯤 믿는다는 진실을 자주 발견한다. 그들이 의식하려거나 시인하지 않으려는 공공연한 비밀의 문제이지만 말이다. 이런 현상은 놀랍지만 그렇다고 깜짝 놀랄 일은 아니다. 필자 자신도 성경 교훈을 알면서도 맘과 몸이 약하여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많음을 스스로 자주 느낀다. 그래서 그 약한 부분을 "벌충"하려다 보니 절대자이신 성령님을 의존하게 된다. 필자가 기도 가운데 가장 많이 하는 기도가 영언(방언)이다. 자랑이 아니라, 내 영이 하나님 아버지께 비밀을 아뢰는 확실한 기도(코린토A서=고전 14'2)이고, 신앙선배인 사도 파울(바울)(코A 14'18)을 본받게 되기 때문이다.
한 가지, 우리가 성경에서 놀라는 점은 예수님을 직접 따르던 12 사도들과 70인들을 비롯한 그 어떤 제자/사도들보다 훨씬 더 많은 신약 계시가 파울에게 주님에 의하여 직접 주어졌다는 것이다. 파울의 계시는 [어떤 의미에서] 복음서보다 더 중시된다(복음서가 불필요하다는 뜻이 결코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 달라). 복음서의 내용을 보면 복음은 율법처럼 유대인들에게 우선적으로 주어졌지만, 이방인들을 포함한 교회시대에 꼭 필요한 말씀들이 파울 서신서에서 주로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로 파울 서신서의 윤리적인 교훈들은 현대 교회에서 많이 참고가 되어도, 정작 우리 삶에 더 긴요한 계시들은 교회/신자 가운데서 이행되지 않는다는 것은 더 놀라운 점이다.
사실 우리가 익숙하다는 복음서의 내용조차도 수많은 성도들과 지도자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실천하지 않는다. 그 한 가지가 신유와 악령 구축(驅逐) 사역이다. 예수님은 지상에 계실 때 말씀 전파와 함께 그 분의 메시아 사역의 일환으로서(마태복음서 8'16,17, 루카복음서=눅 4'18,19) 늘 이 두 가지 사역을 늘 실천하셨고, 사도들도 그대로 훈련받아 실행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그런 건 예수님이나 사도들의 일일 뿐 나랑 무관하다"며 이 핑계 저 핑계로 그런 사역을 하지 않는다. 병원과 정신병원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냐는 식이다. 결국 성경은 끼고 있으면서, 말씀으로 치유받을 수 있다고 성경이 약속해 놓은 것을 포함한 절대 진리인 언약(covenant/testament)을 부분적으로 안 믿는다는 결론이다.
우리가 복음을 믿는다고는 하나, 복음이 약속해 놓은 수많은 것들을 부분적으로만 누리고 있거나, 또는 제대로 누리고 있다고들 착각하기 쉽다. 많은 신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천국 입장권은 떼어 놓은 당상이니 이젠 됐다"면서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하고, 그 이상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냥 찬양과 성경공부, 교회봉사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들 생각한다. 엄연한 현실이 아닐까? 물론 다 해야 할 일들이지만, 그 이상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최초 교인들은 누구나 영언을 했다(행전 2'4). 그것이 성령님의 패턴이다. 이것은 주님의 예언대로였고(맑 16'17a), 교회시대 초기에 보여 주신 절대 진리이기에, 이 진리를 빼 먹고도 "성경적"이라고 상상하기가 어렵다. 파울은 당대 교우들뿐 아니라 오가는 모든 세대의 교우들에게(그렇다!) 영적인 것들을 사모하라(코A 12'31; 14'1)고 했지만, 현대의 우리 주변에서 그러는 신자를 얼마나 보는가? 일례로, 교회 안의 영언자들을 혹 용납은 하더라도 속으로는 힐난/질시하고 더 나아가 공격하는 예가 대부분이다. 과거, 새벽기도 때 열심히 하는 영언자들에게 "당신네 집에서나 하시오"라는 퉁명스런 핀잔이 얼마나 잦았는가! 말은 성경을 믿는다면서 절대 진리(코A 14'39b)를 안 믿는다는 얘기다. "모든 영언은 사라졌다"면서 그런 건 절대진리가 아니라 상대적일 뿐"이라고 주장한다면 그야말로 더 해 줄 말이 없어지지만.
우리가 시인하건 않건, 이것은 비합리적이다. 왜냐고? 우리는 세상에서 성경 말씀만으로 승리하긴 어렵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파울을 통하여 영언 등 은사를 통해 세상에서 승리하도록 교회와 신자들에게 권능을 주셨기 때문이다. 과거에 때가 악했다면 지금은 몇 배나 더 악하며, 과거에 능력과 은사가 필요했다면 지금은 몇 배나 더 필요한 것이 합리적인 결론이다. 그런데 다수의 신자들은 현대엔 성경이 있으니까 과거에 초기 성도들이 누렸던 권능/은사/신유..그런 것들은 이젠 더 "불필요하다"고들 생각하거나 은연 중 주장한다. 그러다 약해질 때, 맥 없이 자빠지고 만다.
성경전서의 존재가 권능의 필요성을 약화시킨다는 성구라도 있는가? 그런 '불필요성'이 옳은 것이라면, 성령님은 성경만 쓰시고 말 일이지, 왜 땅에 내려 오셨는가?? 그렇지 않은가?
마르코스(마가)복음서 16장 17,18절을 보면, 주님께서는 신자의 전도 생활에 필수적인 무기들을 소개하신다. 예수님의 초강력 이름으로 악령구축, 영언, 뱀과 독극물로부터의 해독, 신유 등을 할 수 있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그러나 신자들은 이 말씀을 자기와는 먼 얘기처럼 다룬다. 우리 주변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그런 데 사용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보는가?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케이스라곤 그냥 기도 끝머리에나 습관적으로 붙이는 정도일 뿐이다. 그나마 예수의 이름을 부끄러워 하면서 기도 끝에도 안 붙이는 명색만의 신자들도 많다. 특히 미국 크리스천 정치인들이 그렇다. 교회/신자들에게 주신 "예수"라는 이름의 무한한(그렇다!) 권위/권세/권능(예: 요한복음서 14'13,14; 15'16b; 16'23, 맑 16'17,18, 에페소서 1'18-23 특히 21b, 필리포서 2'9-11)을 이해하지도, 믿지도 않는 것이다. 그냥 추상적 개념으로 느끼거나, 다른 어떤 위대한(?) 신자들이 따를 말씀이라거나 그냥 자신과는 멀디 먼 딴 세계의 얘기 정도로 생각한다. 필자도 과거에 그랬다.
이런 것이 비합리적인데도, 그들은-비록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오히려 성경말씀을 모두 순종하고 적용하는 것이 현대에 더 비합리적이라고들 느끼곤 한다.
예수님의 이름이나 보혈의 권능처럼, 파울의 중요한 계시인 에페소서 6'11-18에 나타난 하나님의 완전무장(구역: '전신갑주'=온몸갑옷. 이 무기들은 통념상의 6가지가 아니라 실제로 7가지다)도 영적인 초강력 무기이다. 그런데 이 무기를 제대로 이해하고 가르치는 지도자나 제대로 배운 신자들을 필자는 좀체 만나보지 못한다. 이 7가지 무기-진리의 허리띠, 의의 가슴판, 평화의 예비된 복음의 군화,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하나님의 말씀), 모든 기도와 간구-를 살펴 보면, 현실 속에서 우리가 얼마든지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요소들이고, 이 무기를 통한 승리도 물론 가능하다!
이 무기 중 마지막-일곱째인 모든 기도에는 영언이 포함된다. 해당 구절(18a) 원문 "프로슈코마이 엔 판티 카이로 엔 프뉴마티" 곧 "언제나(모든 때에) 성령님 안에서 기도하면서"라고 한 부분은 일반(모국어) 기도로는 거의 불가능하므로 분명히 영언기도를 가리킨다. 파울은 언제나 영언으로 기도했고(코A 14'18), 물론 모국어로도 기도했으며(14'15a), 아울러 모든 성도들이 자신을 본받아 그러길 바랐다(14'5a). 우리가 믿든 안 믿든 그랬다.
되뇌지만, 영언은 영적인 초강력 무기다! 그러나 이 진리대로 믿고 행하는 성도는 미안하지만 드물다. 동료 교인들에게 물어 보라. 이런 무기들-하나님의 완전무장-을 얼마나 이해하고 사용하는지들. 이해도나 사용률이 거의 0%에 가까울 것이다. 더 나아가 그런 현상이 100% 정상으로 합리화되고 있다. 다수가 우위인 민주주의 원칙에 의해서 말이다.
이것은 분명 성경 말씀과 현실 사이의 괴리현상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성경 말씀대로 잘 살고 있다고 믿고들 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어 한다.
알고 보면, 이것은 이만저만 비합리적인 게 아니다. 왜냐 하면 아까도 비쳤듯 성경전서가 없던 시대인 과거에 세상이 악했다면, 지금은 훨씬 더 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신자들은 성경을 읽고 듣는 것만으로도 이 악의 요소가 모두 자동퇴치 되는 양 굳게 아니면 막연히 믿고 있다. 아니면 하나님이 다 절대주권으로 직접 손 봐 주시고 지켜 주시고 만사 해결해 주신다고들 믿고 있다. 정말 그렇다면, 파울은 이런 무기를 소개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애당초 성령께서는 그런 계시를 파울에게 주지도 않으셨을 터이다. 얼마나 비합리적인가!?
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지만..비합리성을 지적하려다 보니 교회의 실생활에 더 가까운 사례를 들어 보련다.
전에도 종종 언급했지만, 오늘날 특히 한국과 해외 한인 교계의 중소형교회에서 문제시 되는 것 한 가지가 강단(교회무대?) 위의 드럼 키트(드럼셋)이다. 드럼 키트의 강단 위 설치는 문제가 되든 안 되든 이미 대다수 교회의 기정 현실이니 이제 와서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작은 실내에서, 드럼 키트 주위에 투명방음벽 설치는커녕 오히려 맨 둘레에다 마이크를 하나 또는 둘 씩 설치해서 교인들의 귀가 째지도록, 멍멍해지도록 확성(소리를 확대함)하는 것이다.
드럼 키트의 굉음은 데시블이 높고(90~150dB. 90은 조용한 환경에서 시끄럽게 느껴지는 수준) 매우 파워풀하기 때문에 사람의 귀청과 뇌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며, 계속 반복될 경우 결국 청각장애를 가져 온다. 이래서 스피커의 소리 투사 방향 쪽에 습관적으로 가깝게 앉는 교인들 대다수가 청각장애에 걸려 있는데도 교회나 본인은 모른다. 그런데도 이 굉음의 드럼 키트를 "신나게", 특히 찬양경배음악의 절정/준절정 부근에서 미친 듯 광적으로 갈겨대는 주자/타자가 대부분이다! 물론 드럼 주자들 스스로가 사실상의 청각장애증 환자들인 경우가 많다. 대다수가 연주 때 귀마개(헤드폰)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교인들 대다수가 이 진실을 모르고 드럼 주자를 잘 한다고, 열심이라고 칭찬이나 할망정 거의 전혀 개의치 않을 정도로-그만큼 교회가 비합리적이다. 내 말이 틀렸다고 생각되면, 음향 전문가에게 한 번 물어 보기 바란다. 드럼 키트 주변에는 반드시 투명방음벽이 필요하며, 중소형 교회처럼 비좁은 공간에서는 절대로 그렇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얼마나 비합리적인지의 적은 사례일 뿐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 핑계, 저 핑계로 얼마나 자신들을 합리화하는가? 필자가 틀렸는가..?
나는 성령의 은혜를 덧입기 전인 과거엔 몰랐던 것들을 뒤늦게야 깨닫고 나서 성경이 너무나도 합리적인 데 대해 놀라곤 한다. 성경에서 정말 신비적인 요소들을 제외한 나머지 많은 부분들은 매우 상식적이고 논리적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들을 쉽게 생각하지 않고 난해한 것으로 미리 속단하고 불가능한 것처럼 치부해버린다. 성경 말씀을 사랑한다면서도 성경의 많은 교훈과 약속들은 우리에게 기꺼이 순종할 대상이기보다 일종의 부담처럼 되어 있다.
가령 친구가 악령이 씌웠다고 해 보자. 과연 그를 도와 주겠다고 나서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악령을 물리치려는 노력을 하는가, 아니면 피하는가? "어이쿠, 귀신론은 이단이라던데..." 하면서 적극 피하는가? 능력 있다는 남에게 떠맡기는가? 아니면 "정신병원에 입원해 보라"고 주제 넘게 권하는가? 신자로서 내게 당연히 주어진 예수의 이름과 권능은 어디다 써 먹는가?
마귀가 크리스천들에게서 가장 원하는 바는 영적인 것, 초자연적 권능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이다. 어떤 신자들은 그런 관심사들을 "다 시끄럽다"며, 영적/초자연적인 것들로부터 초탈한 것이 바람직하고 가장 성경적인 양 아예 "초탈"하여 산다. 이 역시 비합리적이다. 또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솔직히 우리 자신의 비합리성을 시인하자. 그리고 탈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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