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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과 검증/뉴에이지영성

크리스천과 요가는 물과 기름

출처: Denver Post


크리스천-요가 '관련' 논쟁은 끝도 없을 거 같군요. 미디어마다 한 번씩 써 먹는 모양입니다.  
가장 최근, 미국 콜로라도 언론인 덴버 포스트도 '수많은 요가수행자들, 영성 발견..'이라는 기사를 띄웠습니다. 

내용을 보니, 지나 킬펠러(36)라는 여성은 요가가 "운동 이상의 것"이라며 자신의 "영적 생활의 큼직한 일부"라고 생각한답니다. 카톨맄교 출신이지만 이젠 무종교인으로서 요가 교사의 가르침을 받아 요가로 시간을 보낸다네요. 요가 수행이 "성당서 하던 것(종교생활)과 같다"며 이젠 "더 편안하고 진솔한 방법으로" 한답니다.


이런 얘기는 점점 더 흔해져 가는데, 루키 요가 학습자는 요가 자세('아사나')를 여러 시간 취한 뒤 "영적 깨달음"을 얻곤 한답니다.
과연 몸 자세가 영성을 갖다 줄까요? 그런 깨달음은 어떤 깨달음일까요?

요가는 분명히, 본디부터 몸동작/고행/명상 따위가 복합되어 있는 힌두교 관행입니다. 


이 언론은 아울러 앨 몰러 남침례교신학대학교/대학원(SBS) 총장이 지난 해, 신자들이 요가를 멀리 하지 않으면 기독교에서 떠나버릴 수도 있다고 경고한 사실을 상기시키네요. 
시애틀 마즈힐 교회의 마크 드리스콜 목사도 "요가는 악령적"이라고 경종을 울렸답니다. 드리스콜은 이전의 떠오름(이머징) 성향에서 보수적으로 회귀한 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런가 하면, 정작 힌두교 도사들 쪽에서는 힌두교와 요가의 분리를 우려한답니다. 
쉬탈 샤 힌두미국재단(HAF) 대표는 "요가의 힌두교 뿌리가 자주 흐릿해진다"면서 "하나의 수치"라고 말합니다. HAF는 그래서 최근 '요가 되찾기' 프로그램을 개설, 요가 수행자들에게 요가 운동과 힌두교와의 연계성을 되새겨 준다네요.

놀랍지 않은가요? 이런데도 일부 신자들이 요가를 힌두교와 무관한 순수 신체훈련이라고만 보려는 사실이요. 

샤는 또 말합니다:

"요가 자세의 일부 명칭을 보면, 힌두교 신의 이름도 있다. 춤꾼의 포즈-나타라자사나는 쉬바 신의 이름을 딴 것이다. 아사나에만도 힌두교신의 이름들이 또렷하다"고.


사실 성경적으로 말하면, 힌두교 신들이란 곧 다 악령/귀신들을 가리키죠. 이래도 신자들은 요가 수행이 두렵지 않은지..?

일부 요가 수행자들은, 아사나를 하다 보면 경전이나 교리가 없는 독특한 영성을 불러 오게 된답니다. 덴버의 요가 교사인 빌리 포토크닉씨는 이것을 "매우 유기적(organic)"이라고 자평합니다. 

   "매트 위에서 '죽어'갈 때 더 깨어 있는 겁니다. 제대로 본질로 들어가는 셈이죠."

포토크닉은 종교 교리가 아닌 영성을 자신의 요가 클래스에 접목시켜 수강자들을 끌어 들입니다. 뉴에이지의 면모를 극명히 보여 주는 대목이죠.

미쉬건 주 야구선수 출신인, 포토크닉의 수강생, 제이슨 심코스(재정관리사)는 요가가 "영성 이해에 도움"이 됐답니다. "회복 중인 체육인"이라고 자임하는 그는 요가가 우선적으로 몸에 중점을 두면서, "회중석에 앉아서나 한 성구를 읽어서는 좀체 오지 않는 방식을 통해, 영성 탐구에 도움을 받는다"고 했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에게, 요가의 영적인 면모는 도전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요가 도중엔 맘도 생각도 전혀 없다. 이것은 고통을 향한 하나의 도전이다. 사실 그대로인 것에 순응하는 것이 그 영적인 면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있는 곳이 곧 나다! 고통스럽지만 난 괜찮다."

육적/정신적인 도전을 깨닫는 게 영성이고 종교라는 말일까요?
마음도 생각도 전혀 없는 '무아경'이 곧 구원일까요? 이것은 관상영성의 '제로점'과 매우 유사합니다. 사실은 근본적으로 같습니다. 관상영성은 동양의 명상과 다를 바 없으니까요. 토머스 머튼, 헨리 나웬, 토머스 키팅, 리처드 로어, 리처드 포스터..등 관상가들 모두가 종교혼합성을 보입니다.  
사실 그대로인 것에 순응하는 게 곧 영성일까요?

성경에 따르면, 이 모두가 허상에 불과합니다. 


요가 스튜디오들의 스펙트럼도 영적 뿌리인 힌두교의 분파에 따라 다양하답니다. 
어떤 곳은 운동을 강조하고 어떤 곳은 홍보 관련 의식(儀式)에 참여하도록 힌두교 사원에 초청, 동인도의 춤사위와 노래, 명상과 읖조리기 등을 코끼리 신(神) '가네쉬' 등 '신들' 앞에서 한답니다. 


여성 스와미(=힌두 리더) 크리파난다는 "양면을 다 본다"며 "물론 절대로 이 놀라운 전통의 뿌리를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하려고 힌두교인이 될 필요는 없다"고 합니다. 크리파난다도 포토크닉처럼 설교조로 하지 않지만, 깊이 "영적"이랍니다. 


크리파난다는 말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되도록 깊은 (영성의) 맛을 보게 하려고 존재한다. 비록 영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도 좋은 강사 밑에서 하다 보면 영성이 생동하게 된다. 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뉴욬시의 요가 강사 태러 스타일즈. 
패션 모델 출신이자 '슬림 캄 섹시 요가'(=날씬하고 차분하고 섹시한 요가)의 저자로, 이 방면의 여류 명사가 된 그는 자신이 요가를 영성에서 분리시킨다고 다른 요기(요가수행자)들에게 "조롱" 당했다고 밝혔습니다. 

지난 달, 요가 운영정책에 관한 학자, 운동가들과의 '원탁토의'에서 당했다는 것입니다. 스타일즈는 사람들 앞에서 챈팅(읊조리기)을 할 필요를 못 느낀다며 "사람들이 날 괴짜로 생각하고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스타일즈는 자신이 요가 교육에서 영적으로 깊은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발견한다고 밝힙니다.

요가 자세를 취하는 것 자체가 사람을 자아와 '연결'(connect)시켜 준다는 것입니다.  

   "설파(설교)는 사람들에게 전혀 먹혀 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요가를 할 때 비로소 상냥한 개인이 되기 시작하고 변덕스러움도 덜해진다."


과연 이럴까요?
힌두교와 요가가 말하는 '영성'은 사실, 영성이 아니지요. 음악요법 등 다른 모든 심리/명상 요법처럼 심성에 그칩니다. 그런 것들은 영적일 수가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람의 영은 속사람으로서, 오직 예수 크리스토님을 믿음으로써 거듭나면 비로소 영이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죄인의 영은 누구나 죽어 있습니다. 죄인들에게서 참 영적인 생동성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심령이 하나님의 말씀에 부딪쳐야 비로소 생동한다는 말입니다.  

지상의 모든 영성은 심성에 그칩니다. 소위 내치(내적치유)도 최면술처럼 심적 변화, 심성 도야에 그칩니다. 
   
성령님만이 사람을 진정 영적으로 만듭니다. 오순절 이후 초기교회의 엄청난 원동력과 권능이 성령으로부터 왔습니다. 
행전과 서신서에 따라 초기교인들을 본받을 때 비로소 우리는 영적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밖에 어떤 길도 방법도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성령님 이외의, 성령님 밖에서 접하는 모든 영적/자연적 존재는 어둠의 세력인 악령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그렇다면 요가의 영도 마찬가지겠지요. 요가의 모든 몸 동작은 뱀의 움직임과도 같으며 실은 뱀이 똬리를 틀듯 꼬리뼈 부분에 머물다가 '7 차크라'를 거쳐 등뼈를 타고 올라 뇌 속의 번갯불 같은 번쩍임에 이른다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쿤달리니'가 곧 "뱀심(蛇力)"이라는 뜻입니다. 


 
오직 성령님만이 사람을 진정 영적으로 변화시키십니다. 
 
그리고..
빛과 어둠이 어떻게 서로 사귀며, 
크리스토님과 벨리알이 어떻게 서로 조화될 수 있나요(코린토B서=고후 6'14-17)?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떻게 일치되나요?
될 수 없지요! 

성도여, 착각하지 맙시다.
하나님과 크리스토님을 사랑한다면, 요가를 멀리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