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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LT 토론광장

[토론발제] 거듭난 성도에게도 아직 죄성이 남아 있는가 (들풀)



이미 일부 댓글에서 비친 내용입니다만, 정식 토론의제로 내 놓습니다.

폭 넓은 의견 교환이 있기를..그래서 성경 진리에 더 근접하는 효과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거듭난 성도에게도 아직 죄성이 남아 있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성도의 정체성과도 관련되는 심각한 것으로서, 무엇보다도 성도의 성화와 직결되는 문제이다. 이 문제를 명확하게 파악하지 않고서는 성화에 대한 근본 개념 자체가 흔들리는 결과를 낳게 되기에 신중하게 숙고해 보고자 한다.

아마도 모든 성도들이 동의하는 바는, 사람이 거듭나면 그 사람의 영은 다시 살아나게 되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에게 죄성이 남아 있는가 아닌가를 묻게 되면 많이 혼란스러워 하는가 하면, 또 로마서 7장 말씀을 들어서 그 사람에게도 여전히 죄성이 남아 있다고 대답한다.

먼저 자연인의 상태를 살펴 보자. 자연인은 아담의 죄의 결과-원죄-를 물려받은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에 영이 죽은 상태로 죄성에 물들어 태어나게 된다. 따라서 자연인은 죄를 범하고자 하는 성향만을 갖고 있기에 생각하는 모든 것이 악하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다 (렘 17:9, 시 51:5).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사도 바울은 선포하고 있다 (롬 3:10).

그러나 이제는 한 의가 세상에 나타나서 자연인에게 생명을 줄 수 있게 되었는데 바로 우리 주님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다 (롬 3:21). 이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고후 5:17) 또한 새 사람이 된다 (엡 4:24). 

이 새로운 피조물이 과연 어떠한 존재인지 올바르게 이해해야 성도의 정체성이 바로 잡히고 거듭난 후의 삶, 거듭난 후의 과정을 올바르게 이어갈 수 있게 되기에, 이것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고린도후서 5:17 말씀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했고,

골 3:9~10 말씀은 “...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고 했으며,

요 3:3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말씀들이 거듭남 또는 성도에 대해서 공통적으로 묘사하는 바는, 바로 전인적인 변화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고 말씀하셨지 “사람의 영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고 말씀하셨던 게 아니다. 모든 말씀이 다 전인적인 존재로서의 사람에 대한 말씀이다.

그런데 로마서 7장이나  갈라디아서 5:17 말씀을 보면 마치 거듭난  성도에게는 여전히 죄성이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이기에 상기한 말씀들과 뭔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갈라디아서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로마서 7:20~23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그래서 이 모든 말씀들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은, 거듭난 성도는 두 가지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 또는 거듭난 성도라도 여전히 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이 결론이 올바른 것인가? 만약 올바르다면 왜 한편으로는 거듭난 사람을 전인적으로 변화된 새로운 피조물로 새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는가?


이에 대해 필자는 전통적인 설명과는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린다.

거듭난 성도는 한 마음, 한 성품, 한 인격만을 갖는다. 바로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 뿐이다. 그래서 성도 안에는 죄성은 없다. 여기에서 “안에는”이란 말에 요점이 있다. 성도의 마음이 두 가지로 나누어져 있거나 두 성품으로 나누어져 있을 수가 없다. 이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다. 정신분열증 환자일 뿐이다.

성도는 전인적으로 거듭난 사람이기에 오직 단일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또 온 몸과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긴다. 성도가 어찌 한 우물에서 단물과 쓴물을 동시에 내겠는가?

그러나 거듭나기 전의 죄성이 거듭난 후에도 성도의 몸에 “죄의 습성”으로 진드기처럼 붙어 있다. 성도는 단일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기에 죄를 범할 수가 없지만, 몸에는 죄의 습성이 진드기처럼 달라붙어 있어 이 습성에 따라 죄를 범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이렇게 죄성과 “죄의 습성”을 구분하는 이유가 있다. 죄성은 sinful nature 로서 마음과 관련이 있는 용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것은 본질상 죄를 범하려는 성향을 마음에 가지고 있다는 의미라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죄의 습성은 이제 더는, 마음과 관련된 용어가 아니다. 이 습성은 과거의 죄성에 대한 기억과 습관화된 이성적/지성적/감성적 작용에 기인한다. 하지만 마음과는 무관하다. 이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도는 연약한 육체, 그리고 마음과는 무관하기에 몸에 달라붙게 되는 죄의 습성으로 인해서 죄를 쉽게 범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사탄마귀의 유혹이라도 부가되면 성도라 할지라도 죄를 범하는 것이 얼마나 쉽겠는가! 이것을 담배나 알콜중독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거듭나기 전의 죄인을 담배에 수십 년 간 중독되거나 알콜에 중독된 사람으로 비유할 수 있다. 이 사람이 어느날 굳은 결심으로 담배나 술을 끊겠다고 마음먹고 실행에 옮겼다 할지라도 그 습성과 중독은 여전히 몸에 남아있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범하는 죄는 성도와는 무관하다. 성도가 의지적으로 범하는 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의지는 마음의 지배를 받는다. 의지는 “선택하는 능력”을 일컫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이 선하면 의지도 항상 선하다. 

성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성도의 몸에 달라붙어 있는 죄의 습성이 성도를 몰아가기 때문에 성도라도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이렇게 범죄한 죄 자체에 대한 책임은 없다. 하지만 죄의 습성에 자신을 내어 준 책임은 있다. 왜냐면 성도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힘입어 의지적으로 죄를 이길 수 있으나 그가 그것을 발휘하지 못하고 또는 발휘하지 않고서 죄의 습성에 패배했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에 또 다른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만일 죄의 습성에 자신을 내어 준 책임을 통감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자신을 내어준다면 언젠가 죄의 습성이 다시 자신을 삼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번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다시는 죄의 습성을 켤코 이겨낼 수 없기에 영원히 다시는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로마서 7:20 말씀 중의 “... 내 안에/속에 거하는 죄”로 인해서 성도에겐 여전히 죄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안에/속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엔”은 영어로 하면 “in” 뿐만 아니라 “on, with, by, of... ”의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이다.
이 구절에서는 죄성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로 인해서 “in, 안에/속에”로 번역되었으나 얼마든지 “on”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다. 필자의 견해대로 한다면 “on”으로 번역되어, “내게 거하는 죄”로 하는 게 더 정확하다. 즉, 내 안에 본질적으로 거하는 죄라는 의미가 되어서는 안 되고, 내 본질/마음과는 무관하게 내게 붙어 있는 죄라는 의미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또한 로마서 7:22 말씀의 속사람이라 함은 고후 5:17 말씀의 새로운 피조물을 의미하고 이는 결국 전인적으로 새로워진 성도를 의미한다.

이제 성도의 몸이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말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데, 성도의 몸이 여전히 옛 사람의 몸이거나 여전히 죄성으로 가득한 몸이라면 어떻게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될 수 있겠는가? 새 술이 헌 부대에 담아졌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또한 거듭난 성도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가지면, 성화에 대한 관점이 바뀌게 된다. 전통적인 견해를 따르게 되면, 성도 안에도 죄성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에 성도가 죄를 범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죄를 범하고자 하는 성향이 여전히 성도 안에 있는데 성도가 어떻게 죄 짓는 것을 피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죄를 범할 때마다 자신 안에 있는 죄성이 죄를 범한 것이니 자신 안에 있는 죄성을 억누르지 못한 죄책감과 함께 두 성품/인격/(결론적으로는) 마음의 싸움을 보아야 하고 마치 단일하지 못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더 중대한 죄책감을 갖게 된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를 갖게 되면, 성도가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와는 무관한 “죄의 습성”이 죄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능력에 힘입어서, 새로운 피조물인 내가 “죄의 습성”이 범죄하는 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성도는 죄를 범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의 습성”이 죄를 범한다면 이것은 성도를 통해서 나타나는 죄이기에 성도는 반드시 “죄의 습성”을 이겨내서 죄가 성도를 통해서 나타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성도는 전인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므로 의의 병기로 사용되어야 하지 결코 죄를 나타내는 통로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성도는 죄를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전하게 성도 자신 안에서 이루어졌다. 완전히 주어졌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이 능력을 온전하게 사용하기만 한다면 성도는 죄를 완전히 이겨낼 수 있다.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이렇게 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이는 이제 막 거듭난 성도는 갓 태어난 어린 아이와 같아서 이러한 능력을 사용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점 성장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 능력을 통해 죄를 이겨내고 오직 의의 병기로만 사용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성화의 과정이다. 이 과정이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어서 사도 바울같은 분도 스스로를 곤고한 사람이라고 고백할 정도이지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며 꼭 이겨내야 하는 과정이다.

성도의 진짜 정체성은 전인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다. 죄를 범할 수도 없는 존재로 변화된 것이다. 다만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에는 그 육체에 달라 붙어 있는 “죄의 습성”이 때때로 성도를 통해서 죄로 드러난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성도는 죄를 완전히 이겨낼 수 있는 존재이며, 그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주어졌음을 알고 죄를 적극적으로 이겨내야 한다.

거듭난 성도의 전인적인 상태에 대해서 지금까지 전통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던 필자는 “하나님처럼 완전하라”(마 5:48)고 하신 말씀이나 “완전한 자는 자기 선생과 같으리라”(눅 6:40)는 말씀을 보면서 어떻게 이게 가능하겠으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불가능한 명령을 주셨나 하고 생각하였다. 성도라 할지라도 죄성을 가지고 있으면 아무리 죄성을 억누른다고 해도 죄성이 있는 건 사실이니 완전해질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거듭난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인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견해를 갖게 되면 하나님의 이 명령이 불가능한 명령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성도의 몸에 붙어 있는 죄의 습성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의 능력으로 완전히 버려버리면 완전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즉, 자기를 죄의 습성에 결코 내어주지 않으면 제자가 선생처럼 완전해진 것이고 하나님처럼 완전해진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거듭난 성도에게 죄성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말 보다는 거듭난 성도에게도 거듭나기 전의 죄의 습성이 그의 몸에 남아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하며, 거듭난 성도의 상태를 이렇게 이해해야 올바르게 성장하며 죄와 악에 적극적으로 대항할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