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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비평/음악

파가니니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나? (김삼)



파가니니에 관한 이 가벼운(?) 글은 한 독자의 이메일 질문에서 힌트를 얻어서 쓴다. 그 독자의 질문에 대한 답은 이 글 안에서 밝혀진다.


대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였던 니콜로 파가니니는 음악사에서 퍽 특이한 존재다. 여러 모로 파격적이고 파행적인 기인이다. [ 참고로, 올해는 파가니니의 죽음 170주기인 해다. ]

물론 그는 '귀재'(鬼才)라는 호칭처럼 당대에 거의 절대 추종을 불허하는 기막힌 기교의 바이올리니스트였다. 타고난 선천적 재능도 없지는 않았지만, 주로 피나는 노력과 연습의 결실이었다. 또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기구한 내력도 있다.

그랬기에 과거에 없던 독특한 '내추럴' 화음 주법, 특유의 스타카토/피치카토 주법을 구사하는 창의성을 발휘하기도 했고, 대부분 자작곡 또는 즉흥곡으로 무대를 꾸몄으며, 이전과 달리 어떤 곡이든 암보(暗譜)로 연주해 청중의 입을 벌리게 하는 등 거의 절대적으로 막강한 권위자였다.  

이토록 재능이 출중한 것과 더불어..그는 꽤 악명 높은 여성호림이(womanizer)이기도 했다. 그가 한 다음 말은 유명하다: "나는 핸섬하지 않다. 그러나 내가 바이올린을 켤 때면, 여인들이 나의 발 앞에 기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파가니니가 연주할 때면 사람들이 찬탄하다 못해 숨 막혀 기절할 정도였고, 특히 여인네 다수는 오금이 저리다 못해 속옷에 오줌을 지르거나 까무러치기 일쑤였다. 거의 어디를 가건 그에겐 돈이 따랐고, 주변엔 단순한 청중 이상의 여인들이 몰려 들었다. 파가니니는 그런 열광 분위기를 자못 즐기며 지냈다. 건강을 초월하다시피 그렇게 무리하다 보니, 한 평생 병이 떠나지 않았고, 결국 50대에 병사했다.    


파가니니는 흔히 '악마의 아들'..독일어로 '헥센존' 즉 '마녀의 소생'으로 불리기도 했다. 애칭도, 좋은 별명도 아니나, 여기엔 여러 원인이 있다.

우선 외모부터가 유령이나 요괴 같은 '음산미'가 흘러 넘쳤다(?)고 한다. 악소문에 스스로 호응하여 길고 검은 곱슬머리를 휘날린 데다 검정/진초록 연주복 정장을 즐겼고, 네 마리 검정 말들이 끄는 검정 마차를 즐겨 타고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요즘의 '고팈족' 같은 분위기다. 

연주할 때면, 큰 키에 홀쭉한 몸을 불안정하게 앞뒤로 흔들었고, 긴 코와 튀어 나온 광대뼈와는 대조적으로, 창백하고 긴 두 볼은 꺼져 들어간 데다, 쏘아 보는 안광에서는 불꽃이 튀는 듯 싶었다. 입술가엔 언제나 야릇한 냉소를 머금은 듯 했고, 두드러져 뵈는 두 어깨는 그를 "거대한 박쥐처럼" 보이게 했다. 훗날엔 치아까지 거의 다 빠져 더욱 이런 분위기를 돋웠다.  

연주 홀에 임한 어떤 사람들은 아무래도 꺼림칙해져서 '십자성호'를 그리기까지 했단다. 그러나 자못 괴기스런 이런 일화의 일부는 과장됐거나 루머일 수도 있다. 더욱이 모종의 계기로, 그에게 악감을 품은 사람들은 침소봉대한 험담을 하기 마련이었다. 


파가니니는 아주 어릴 때부터 아버지 안토니오에게 호되고 엄한 음악교습을 받았다. 어린 그가 악기를 연습할 때는 반드시 아빠가 곁에서 막대기를 들고 지켜 서서 하루 10시간 이상씩 맹훈련/강훈련을 시켰고, 약간의 실수에도 매질을 가하는 등 자주 체벌을 했다. 마치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자식을 절대 음악의 대가로 키우려 작심한 양.

게다가 니콜로는 어릴 때부터 다양한 병을 앓았다. 특히, '마르팡 증후군'(사지의 이상생장 따위가 특징인 유전성 질환) 탓에 팔다리가 길었고, 손가락이 유난히 길어서 왼손으로 현판을 거머쥐고 놀리는 폭이 남달리 자유자재로웠다. 병이 되레 도움이 된 셈이랄까.

그는 일부러 고난도를 즐겼다. 작품 '카프리치오'는 특히 연주가들에겐 극난하고 기교적인 곡들로, 파가니니 자신 연주가 가능했어도 한 번도 공식 레퍼토리로 잡아 연주한 적이 없었다. 자신이 써 놓고는 한참을 연습해야 되는 곡도 있었다. 작곡 중심보다는 언제나 테크닠으로 차고 넘치는 즉흥 연주를 즐겼다. 그렇다고 기교만 일삼은 것은 아니고, 작품들 상당수는 풍부하고 깊은 서정도 담겨 있다. 
   
무엇보다, 그가 완벽하게 연마한 당대 최고의 현란한 기교를 맘껏/최대한 활용해, 현판 위에서 어르는 듯, 때로는 꿈꾸는 듯, 춤추는 듯, 미쳐서 광란하는 듯한 그의 손놀림은 사람들을 언제나 황홀경 내지 마술 또는 공포 분위기로 몰아 갔다.
그러다 보니, 급기야는 그의 존재와 연주의 초인성/초자연성 여부까지 논해지고, 괴테의 파우스트처럼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먹은" 사람으로 말 도마 위에서 회자되기에 이르렀다.  

비엔나에서는, 그가 자작곡 '마녀들의 춤'(Le Streghe)을 연주할 동안 뒤에서 그의 팔을 쥐고 흔들어 주는, 붉은 두 뿔과 꼬리를 가진 악마의 모습을 "봤다"고, 실제로 파가니니 앞에서 읊는 한 참석자의 '목격담'도 있었다. 그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그렇다면 그의 신기한 연주도 별 거 없군"이란 식으로 말해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런가 하면 장난기와 유머도 있어, '일 판당고 스파놀로'(스페인 무곡)에서는 가축들의 울음소리를, 바이올린/기타를 위한 '두에토 아모로소'(둘의 사랑)에서는 연인들의 한숨과 신음소리를 묘사하기도 했다.
실로, 그는 "바이올린의 마이클 쟄슨"처럼 당대의 랔 스타 같은 존재였다.

조셒 젤리넼의 추리소설 '악마의 바이올린'은 파가니니의 스트라디바리 악기 하나를 다루고 있다. 그걸 훔쳐 연주해온 사람마다 비명에 숨져 갔다나 어쨌다나..물론 핔션에 불과하다.


생애/배경

파가니니를 바로 알려면, 번거롭긴 하지만 화려한 그의 삶의 뒤안길도 좀 알아야 한다.
그의 탁월한 연주 솜씨는 천재성보다는 주로 아동학대와 자학적 훈련의 결실이라면, 큰 과언일까? 그의 생애를 훑어 보면, 그런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낭만파 시대, 이탈리아의 바이올린/비올라/기타 주자이자 작곡가, 니콜로 파가니니(1782?-1840)는 제노아에서, 본래 카로(라 스페지아) 출신인 가족의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일종의 무역상인 내지 서기였던 아버지 안토니오는 가난했지만, 음악에 열광적이어서 만돌린 연주로 생활비를 보탰다.

니콜로는 아주 어릴 때 심한 홍역을 앓고 나서 '약골'로 자랐으나 음악 재능과 의지, 열정과 집념만은 대단했다. 아빠에게서 다섯 살 때 만돌린을 배우기 시작한 데 이어 7세 때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쉴 틈도 주지 않고 작은 실수에도 체벌을 가하는 등 엄격한 훈련 끝에 바이올린을 곧 잘 해 수많은 장학금을 받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이런 숨막히는 강압적/가학적 훈련은 훗날 화려한 명성과 아울러, 불행히도 니콜로가 비정상적인 자유와 비뚠 사회적응을 하게 되는 주 요인이 된다.


안토니오는 이내 자신의 실력이 달리자, 첫 바깥 스승으로 동네의 지오반니 세르베토를, 나중엔 그도 부족하자 당시 산 로렌조 대성당을 비롯한 제노아 성당들의 악장이었던 지아코모 코스타를 택했으나 기껏 6개월 배웠다. 또 화성학을 프란체스코 그네코에게서 배웠다.
이후 니콜로를 가르치는 스승마다 아이의 탁월한 재능에 압도되고 기가 질렸다.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한 불과 2년 안에 코스타의 주선으로 제노아 도처의 성당에 연주하러 다녔고, 여덟 살 때는 이미 첫 소나타를 작곡했다(곡은 분실됨). 아홉 살 되는 1791년엔 세르베토의 동네 극장 오케스트라 단원이 됐다. 

1794년 5월, '델레 비네 산 필리포' 성당에서 플레옐의 협주곡으로 첫 공중 연주를 성공적으로 하고 나자, 이에 고무된 안토니오는 이듬해인 95년, 아들에게 좀 더 나은 스승 문하에 둘 학비벌이를 위해 '산 아우구스티노' 극장에서 프랑스 가락 '라 카르마뇰'에 의한 기타와 바이올린을 위한 14개 변주곡을 연주하게 해, 상당액을 모금했다.

같은 해 파르마에서 니콜로의 즉석 연주를 들은 알레산드로 롤라는 자신은 가르칠 게 없다며 대뜸 자기 스승 페르디난도 파에르를 소개하려 했지만, 더 나아가 파에르의 스승인 가스파로 기레티에게 작곡/대위법을 사사하게 됐다. 전수 기간은 짧았지만, 작곡을 하게 된 중요 계기였다. 당시 니콜로의 연주 광경을 목격한 (파에르의 초년 문하생) 게르바소니는 "파가니니를 이루 다뤄 줄 만한 교사가 없다"며 "자연만이 그를 이끌 수 있었다"고 소감을 말했다.


파가니니의 생애 배경에서 중요한 사실 하나는 이탈리아가 나폴레옹 황제의 프랑스 치하에 있었던 점.
1796년은 이탈리아가 프랑스 군에 조국의 일부를 앗긴 해다. 파가니니의 고향인 제노아를 비롯한 북부 이탈리아가 침공 당하자, 그의 가족은 시골 집으로 잠시 피신했다가 롬바르디아 일대의 마을에서 순회연주로써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1800년엔 리보르노에서 부자 공동연주회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노아로 되돌아오자, 그동안의 닦달에 질릴 대로 질렸던 니콜로는 드디어 아버지의 '우산' 밑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럴 기회는 이내 찾아왔다. 어머니의 동의와 격려를 얻어내고 아버지를 졸라댄 끝에 형의 동반 여행으로 루카 공화국에서 열리는 산 마르티노 연례 음악제에 출연한 것이다. '성십자가' 축제 때는 루카 대성당에서도 연주회를 가졌다. (이를 계기로 1801년 18세 나이로 그곳 제1 바이올린 주자로 임명됐지만, 주요 수입은 자기 연주회를 통해 벌어 들였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파가니니는 15세 때부터 전문 연주가로 뛰기는 물론, 주변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음주를 시작했고, 도박꾼/바람둥이로도 명성을 떨쳤으며, 심지어 도박판 탓에 애지중지하던 바이올린을 잡혔거나 그럴 뻔 하기도 했다(전기 작가에 따라 진술이 조금씩 다름).

상인이자 아마추어 연주가인 리보른은 그에게 '과르네리 델 제수'로 불린 명품 바이올린을 빌려 줬다가, 이 젊은 대가의 연주를 듣고 나서 기꺼이 선사했다. 파가니니는 이 명기의 영롱한 소리를 일컬어 '대포'(Il Cannone Guarnerius)라고 명명했다. '대포'는 그의 유언에 따라 현재도 제노아 시가 소장하고 있다.

화가 겸 훌륭한 아마추어 연주자인 파시니는 파가니니에 대한 기상천외한 소문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어느 날 가장 고난도의 협주곡 악보를 명품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과 함께 내밀며, "그대가 이것을 일견에 대가처럼 연주할 수 있다면, 이 악기는 그대 것이오!"라고 주문했다. 파가니니는 "정 그렇다면..아마 그것(바이올린)이랑 작별하셔야 할 걸요."라고 넌지시 다짐을 놓고는 그 자리에서 완벽하게 해 내자 악연(愕然)해진 파시니는 하릴없이 바이올린을 넘겨 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그즈음 작곡에도 한 가닥 하던 파가니니는 스베덴 출신의 어느 돈 많은 아마추어 바순(=파고토) 연주자로부터 "충분히 어려운 곡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는 고난도 곡으로 충분히 만족시킨 뒤 충분 이상의 거액을 받아 다시 도박에 탐닉한다!

'공'(公)으로 불린 그 도시의 대표급 귀족은 파가니니의 하나 뿐인 명품 악기를 탐냈다. 파가니니가 "250 나폴레온(당대 고가 화폐단위) 금화를 주셔도 안 팝니다!"라고 선언하자, 상대방은 "2,000 프랑을 주겠네"라고 해 거의 맞바꿀 뻔 했으나 끝내 넘어가진 않았다.

도박에 찌든 파가니니에게 남은 건 고작 30프랑의 돈과 보석/시계/반지/브로치 등 장신구들 뿐. 그런데도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그 날 밤 친구집 파티에 초청받아 가 다시 도박판을 벌였다. 그는 속으로 이 모두를 잃고 나면 '공'에게 바이올린을 팔아 넘기고, 그 길로 러시아 상크트 페테르부르크로 훌쩍 떠나 버릴 생각을 했다. 다행히도(?) 그 날 밤 160 프랑을 따 위기를 모면하고는, "도박꾼은 잘 절제된 사람들의 경멸의 대상"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대신, 이성 탐험이 시작됐다. 그즈음 첫 사랑(?)에 눈을 뜬 것. 한 부유한 귀족 숙녀가 그에게 접근해 오자, 토스카나(일설: 피렌체)에 있는 그녀의 저택에서 함께 지내며 밀애를 즐겼다. 파가니니는 그녀가 곧 잘 치는 기타에 처음으로 마음이 당겨 이후 3년간 총력을 기울여 연습한 끝에, 가히 그의 바이올린 버금 가는 경지에 들어섰다. 이 때 쓴 것이 기타와 바이올린을 위한 2개의 소나타. 생애 2,3번째 작품이었다.
그러나 그가 답답한 성(城) 생활을 지루해 하자, 둘의 사랑은 시들해져 갔다.

1804년 귀향한 뒤로는 하루 최다 15시간씩 연습/작곡에 전념하는 한편, 15세의 카타리나 칼카뇨 양에게 개인레슨을 제공했다. [ 칼카뇨는 훗날 과감한 연주 스타일로 전국을 놀라게는 했으나 어쩐 영문인지 1816년 이후로 족적이 사라져 버린다. ] 파가니니의 연주 솜씨는 이제 가히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다.    

21세이던 1805년 중반 무렵, 파가니니는 갈고 닦은 기량과 새 작품들을 갖고 다시 고향을 일탈해 루카로 향한다. 근래 자신이 쓴 콘체르토로 한밤에 음악을 연주해 동네 수사들의 갈채를 받았다.

앞서 그해 3월엔, 루카/피옴비노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바로 아랫누이 안나 마리아 엘리자 보나파르트 바치오키 공주를 중심으로 왕국을 이뤘고, 공주 부부는 루카에 거처할 궁을 마련했다.
파가니니의 음악에 홀딱 반한 엘리자가 그녀의 개인 음악감독 겸 오페라단 지휘자로 선임하자, 파가니니는 쾌히 이에 응했고, 그녀의 남편인 펠리체 바치오키 공은 별도로 파가니니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다. 엘리자는 또 파가니니에게 당시의 헌병대장 급인 화려한 의전 의상을 하사했다. 

감격한 파가니니는 한껏 재주를 피우느라 바이올린의 제2,3현을 제거하고, 1,4현만의 '대화'를 위한 곡을 쓰기도 했다.
그 동기와 전개는 이렇다:

   한 매력적인 여성이 음악회에 꽤 정기적으로 참석하곤 해, 파가니니는 자신이 그녀의 동경의 대상이 된 줄로 상상했다. 암암리에 사실확인이 돼 서로의 정염이 타오르자, 파가니니는 그녀에게 다음 음악회 때 서로의 관계를 암시하는 음악을 소개하겠다고 약속했고, 궁정엔 '사랑의 씬'이란 타이틀로 예고했다.
궁정의 호기심이 절정에 달했을 때, 정작 나타난 그의 손에 쥔 바이올린의 현은 두 줄 뿐이었다. 제1현은 젊은 아가씨의 감정을, 제4현은 열정적인 남성 연인의 언어를 대변했다. 곡엔 희열/분노/행복/고통/화해/절정..등이 담겼다.

연주는 청중의 호기심을 대만족시킬 만큼 성공적이었다.
공주는 극찬하면서 말했다:
    "그대는 방금 불가능을 해 냈어요! 그럼, 한 줄만으로도 그대 역량엔 족하지 않을까?"

파가니니는 이 도전을 흔쾌히 받아들여 차기 연주회 때 그러마고 약속했다. 몇 주 후인 8월 25일, 그는 청중이 가득한 궁정에서 '나폴레옹'이란 제목을 단 군대식 소나타를 단 한 줄-G 선상에서 연주했다. 결과는 기대 밖의 열광적인 갈채였다.

1807년 엘리자가 토스카나 대공작부인이 되어 피렌체로 떠나자 파가니니도 따라갔지만, 따분한 궁중 생활과 규율에 지친 그는 이듬해 여름 휴가를 얻어 여행을 떠났다가 1809년 말 궁정을 아주 떠나, 다시 개인 연주여행을 다닌다. 레고른/파르마/제노아와 에밀리아 모라나에서 주로 지내며 개인 연주 생활에 몰두했다.
이 때까지 그는 유렆에 전반적으로 알려지진 않았다.

7년전 열광적으로 환영해 주던 레고른 사람들은 이전처럼 대해 주지 않고 분위기가 서늘했다. 그러나 첫 음악회에서 벌어진 잇딴 해프닝이 그를 다시 추켜줬다.
우선 그의 발꿈치가 못에 찔려 절름거리며 나타나자 청중이 웃었다. 콘체르토를 연주하려는 순간 보면대 책상 위의 촛불들이 넘어지자 또 다시 웃음이 터졌다. 독주 부분을 몇 마디 연주하던 끝에 줄 하나가 나가 버리자 청중이 어이쿠!란 표정으로 웃으면서 안쓰러워 했다. 그러나 나머지 세 줄로만 하는 연주에 표정이 찬탄으로 바뀌었다.
사실 그는 이전에 세 줄로만 하는 연습에 익어 있었기에 일부 비평가들은 인기를 노린 장난이라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그즈음 토리노에서 연주회를 갖던 중 처음으로 장염이 발발해, 두고두고 건강의 적신호로 작용하게 된다.

1810년쯤엔 페라라에서 연주회를 갖던 중, 출연 예정된 성악가가 빠지는 등 우여곡절 끝에 일부 청중이 야유하자, 그들을 질책하면서 이에 대한 응수로서 온갖 동물소리를 흉내낸 묘사음악을 즉흥 연주하면서 당나귀를 흉내내자, (거기서는 '멍청이'를 뜻하는 이 소리에) 격분한 일부 주민들에게 자칫 몰매를 맞을 뻔-맞았으면 당연히 죽었을 법-했다. 그는 두 번 다시 페라라에 나타나지 않았다.

1812년말(또는 이듬해 초)엔 당시 피렌체의 엘리자 궁정에서 다시 임무 복귀를 하려다 일대 변수가 발생한다. 화려한 저녁음악회에 이어 무도회가 진행됐는데, 제복 아닌 이브닝 드레스 차림으로 바꿔 입으라는 공주의 명령에 불응해 다시 그곳을 떠나 버린 것. 공주는 온갖 사탕발림으로 그를 진정시키려 했으나 그는 내친 김에 자유를 위해 영구히 고용직 신세를 벗어났다.  

1813년. 밀라노의 라 스칼라와 테아트로 카르카노에서 데뷔하면서 유렆 연주 기회의 대박이 터진다. 그 해 봄 '마녀의 춤'을 작곡한 뒤 그 저주인지 염증으로 몇 달 앓은 뒤인 10월 20일 첫 연주를 마치자 이탈리아와 독일 언론을 통해 온 유렆에 알려지게 된다.

그즈음 그는 성악가 안토니아 비안키와 만나 이후 이탈리아 전국을 다니며 조인트 음악회를 갖는다. 그런 한편 1814년엔 고향 제노아로 돌아와 만난 소녀 안졸리나 카반나와 '불장난'을 하다 둘이서 파르마로 떠난다. 카반나가 임신을 하자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미성년자 유혹 등 혐의를 받아 열흘간 투옥되기도 한다. 

이후 그는 계속 도시로 다니며 방랑 연주생활을 하다가 볼로냐에서 마리나 반티를 만나 결혼을 시도하면서, 작곡가 지오아키노 로씨니(1818는 여름), 성악가 이사벨라 콜브란 등을 만난다. 1821년 1월엔 나폴리에서 로마로 돌아와 오페라 '마틸드 드 샤브랑'의 지휘를 맡았다. 로씨니는 이때부터 평생 그의 친구가 된다. [ 친구 가운데는 1833년에 만난 프랑스 작곡가 엨토르 베를리오즈도 있는데, 파가니니는 그를 '베토벤의 환생'이라고 부르며, 거액의 재정지원도 했다. ]  

이에 앞서 1817년경 그는 로마에서 오스트리아 총리 메테르니히 백작을 만나 비엔나로 초청 받았으나 건강 악화로 어려움을 겪는다. 1822년엔 거기서 매독에 걸려, 이후 나름 처방으로 수은과 아편 등을 '치료제'로 쓴 결과, 심각한 심리적/육체적 문제를 안게 된다.
 
한편 1820년엔 대표작인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24개 카프리치오를 썼다. 이 곡의 완주는 독주가의 박사학위와도 같다. 그중 13번 곡(Bb 장조)은 '악마의 웃음'이라는 별명을 지닐 만큼 복잡한 곡이다.
 
앞서 밀라노 체로노비오에서 머물다 만난 여류 성악가 안토니아 비안키와는 1824년 로맨팈한 관계가 시작돼, 1825년 로마로 가서 여러 홀에서 연주회를 가졌고 다시 나폴리를 거쳐 그해 7월 하순 팔레르모에서 둘 사이의 외동아들(아킬레스 키루스 알렉산데르)을 낳는다.


1827년 이후 30년대 무렵은 파가니니의 황금기였다. 교황 레오12세로부터 '황금박차' 기사 훈장을 받는가 하면, 28년 8월 메테르니히에게 재초청 받아 비엔나 주요 극장에서 연주를 하면서 전국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의 이름을 딴 의상 패션 등이 유행하고, 심지어 담배곽/지팡이에까지 그의 초상/흉상이 새겨졌다. 비엔나 정부로부터는 '성 살바토르' 대형 금메달을, 황제로부터는 '황실악단의 대가' 호칭을 하사받았다. 그즈음 나폴레옹도 그를 '대가실내음악인'으로 지명한 바 있다.

비안키와는 그 해 4월 비엔나에서 공식 결별했지만, 아들 아킬레스는 아버지가 죽기까지 함께 했다. 파가니니가 사후 조국에 묻힐 수 있은 데는 아들이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파가니니는 한층 "뜨던" 시절, 역시 당대 유렆의 대가였던 경쟁 바이올린 주자들 -프랑스의 라퐁, 폴란드의 리핀스키와 함께 독주/합주 등으로 겨루면서 팽팽한 한 판 대결을 했다. 장단점이 있었지만, 대체로 이탈리아 청중은 파가니니의 손을 들어줬다. 

1829년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연주를 하면서 젊은 쇼팽도 만났고, 그 해 11월 독일에 도착 뮌헨에서 3회 음악회를 가졌으며, 슈만 부부를 비롯한 여러 음악계 대가들을 만나 교제했다. 프러시아 왕은 그를 '궁정 마에스트로'로 지명했다. 

1831년 영국-아일랜드 여행 때는, 자기 반주자의 딸인 샬렅 왙슨 양과 사랑에 빠져 1832년 비밀리에 프랑스로 건너갔다. 1834년까지 파리에 머물 동안 폐결핵 치료를 받았는데, 비교적 결과가 좋았으나 이후 감기/우울증 등 건강 문제로 자주 연주회를 연기하곤 했다. 그러나 그는 파리 근교 불로뉴에서 아버지에게 둘의 관계를 들켜 귀국해야 했다.

1834년 9월 제노아로 돌아간 그는 그동안의 연주 수입으로 파르마 근교 시골에 가조나 별장을 마련했고, 제노아 시장으로부터 특별 주조한 황금 메달을 수여 받기도 했다. 그는 작곡과 주법에 관한 책을 펴 냈고, 카밀로 시보리(바이올리니스트), 게타노 치안델리(첼리스트) 등 제자를 길러냈지만, 둘은 훗날 성공했는데도 별로 고마워 하지 않았다.

1835년 11월 그는 나폴레옹의 둘째 비(妃)이자 당시 파르마(등 3 공령의) 영주인 마리 루이제 대공작 부인(전 프랑스 황후, 오스트리아 프란치스 1세의 딸. 나폴레옹2세의 어머니)에게 그곳 두칼극장 연주위원회 위원으로 초청받아 파르마 음악감독으로 있으면서, 궁정 오케스트라 재편성을 맡아 막강한 권한 행사를 할 수도 있었으나, 연주자 및 궁정 측과 뜻이 맞지 않아 이듬해 그 곳을 떠난다.
그러나 당시 '슈발리에 드 생 조르주'(성 조지 기사단) 단원 영예를 얻었다.

이어서 토리노에서는 아들 아킬레스를 공식 호적에 올려 합법화했다.

1836년엔 파리로 돌아와 이듬해 11월 '카지노 파가니니'를 개설했으나 이내 망해 버리고 관련 소송에까지 패해, 자신의 악기를 포함한 일부 소유물을 경매 처분했다. 그러나 1837년 작성한 유언장에서는 2백만 프랑에 해당하는 상당량의 유산을 남겨 두 누이와 (아킬레스의 어머니) 비안키 등 유족들에게 분배하게 했다. 앞서 언급했듯, 자신의 남은 명품 악기 과르네리는 제노아시에 기증했다. 
 
1838년 크리스마스엔 의사들의 권유로 남부의 마르세이유로 떠나 잠시 머물다 니스로 옮겨갔는데, 지병인 후두결핵이 도져 베르네 발라뤀 등으로 휴양을 다니면서 연주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즈음 그는 목청을 거의 잃었다.

1840년엔 잠시 고향에 들른 뒤 다시 니스로 휴양을 떠났다가 거기서 내출혈로 영면한다(5월 27일). 죽기 얼마 전 그는 종부성사가 아직 이르다고 오판, 지역 교구의 사제를 거절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유족은 그의 시신을 제노아에서 천주교식으로 매장하려 했으나 거부당했고, 교황에게 호소하여 결국 제노아로 운구하기까지 무려 4-5년이 걸렸다. 그의 시신이 머물던 근처 마을에선 한 밤에 흐느끼는 듯 의문의 바이올린 소리가 났다는 루머가 나돌았다.
아들 아킬레스는 아버지의 장례식을 파르마 스테카타 성당에서 '생 조르주 기사' 명의로 치렀다가 나중 다시 빌라 가조나로 옮겨 마을 성당에서 재차 장례를 치렀다. 그후 1876년에야 파르마의 성당 공동묘원에 정식 매장됐다.

파가니니처럼 다양한 음악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 사람도 드물다. 프란츠 슈베르트는 그를 신비스럽게 봤고, 로씨니는 처음 대했을 때 소름이 끼쳤으며, 마이어비어는 한 번만 듣고는 성이 차지 않아 다음 연주회까지 따라다녔다. 베를리오즈는 그의 독자적 경지를 높이 샀고, 프란츠 리스트는 자신도 피아노로 그런 경지를 이루기로 결심하고 실천한다.  
프란츠 레하르는 파가니니에 관한 실화/루머/핔션 등을 뒤섞은 오페레타-'파가니니'를 작곡해 후세까지 연주되고 있다. 

이처럼 파가니니의 삶은..초기의 가학적인 억눌림과 예술 발견, 갇혔던 소년기로부터의 일탈과 함께 비뚤어진 '자유' 추구에 의한 청년기의 도박과 여성 편력, 열광하는 사회에 대한 개성적 반응과 특이한 쇼맨슆 등으로 점철돼 있다. 
 
과연 마귀에게 영혼을 판 삶이었을까?


영혼을 팔아치운 파가니니

단언컨대..누구나 영혼을 판다. 누구에게 팔리냐가 문제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 분의 십자가 대속의 피의 대가로 구속(救贖) 받고 구원을 얻는다. 그래서 기쁘게 그 분의 종이 된다. 이 혜택을 고의로 끝내 사양/거부하는 나머지 사람들은 자동으로 마귀에게 영혼이 팔려 영원히 그의 노예가 된다.

한 사이트에서 장난(?) 삼아 "악마에게 영혼을 팔겠냐?"고 물어 여론조사를 했단다. 그 결과가 이랬다.

    - 노! 그만큼 원하는 게 있지만, 달성하면 내 능력과 노력 때문일 뿐이다 (26.56%).
    - 예스! 영원히 저주 받더라도 바라는 걸 갖고 싶다 (17.19%)
    - 그러곤 싶지만 그런 딜이 두렵다 (10.94%).
    - 안될 거야 있나? 내 영혼은 이미 저주 받았으니 그런 유혹적인 오퍼를 거절할 리야(12.50%).
    - 아니. 내 영혼을 망칠 만큼 나를 설득할 그런 바람이나 소원은 없다 (32.81%)

볼프강 괴테는 필생의 대작 파우스트의 주인공을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아먹은 사람으로 그렸지만, 주인공 못지 않게 작가 자신이 싸탄에게 영혼을 판 사람이었다! 괴테는 잘 알려진 프리메이슨이었다.
  
꽃미남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결혼도 했지만 나중엔 동성애자였는데, 괴테의 '파우스트'를 패러디해 역시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자신의 미모를 최대한 활용하다 망해 간 남자에 관한 소설-'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썼다. 와일드의 이 소설은 2009년 영화화 됐다.

작곡가/연주가들 중에도 실제로 악마에게 영혼을 판 사람이 많지만, 특히 라큰롤 가수들이 그렇다. 랔 가수들 상당수는 몰래 멕시코 사막 같은 데서 루키페르(루시퍼/싸탄)에게 짐승 제사를 바쳐 '영감'을 얻은 '넘'들이다.  


음악인들이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이유는 주로, 악마의 음악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8세기 전반기 이탈리아 작곡가이면서 당대 유렆의 주된 바이올린 주자였던 주제페 타르티니는 표면상 파두아에 있는 성 안토니 성당의 독창자 겸 악장이었지만, 꿈결에 싸탄의 영감을 받았다. 그는 1713년 어느 날 밤 꿈에서, 악마에게 자기 바이올린을 주면서 계약을 맺은 뒤 마왕의 굉장한 연주를 들었단다. 싸탄이 직접 바이올린을 켜는 소리를 듣자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라고 믿었고, 즉시 깨어나 악보에 옮기려 했지만 잘 되질 않자, 대신 '악마의 트릴'(일명 '마귀 소나타')이라는 곡을 냈다.
훗날 이 스토리에 감화 받아 세자르 푸니가 쓴 음악에다 다르튀르 생레옹이 각색/안무한 발레무언극-'악마의 바이올린'이 1849년 파리에서 초연되기도 했다.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는 '대머리 산의 하룻밤'에다 마녀들의 강신제를 그렸다. 그 절정은 싸탄의 승리와 지배이지만, 러시아 정교회의 거부감 탓에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가 먼동 트는 끝 부분에다 종소리를 삽입, 편곡했다.  

칼 오르프는 (악령 공포영화 '오멘'의 사운드트랰으로도 쓰인) 대표작 '카르미나 부라나'에다 싸탄의 영감을 불어 넣었다. 오르프는 아내에게 작곡 당시 여러 번 꿈 속에서 악령들을 봤다고 고백했다. [ 그런데도 필자의 친구 선교사는 이 음악이 "참으로 아름답다"니 도무지 모를 일이다.]

프리메이슨리와 ('새교회'의 실제 교주) 엠마누엘 스베덴보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은 영국 시인/화가 윌리엄 블레이크는 모든 참된 시는 "마귀의 작품"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그런 블레이크가 명 '기독교 화가'로 불리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싸탄은 왜 이럴까? 왜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특한 영감을 못 주어 안달일까? 그 자신이 하늘 음악인으로 행세하다 타락하여 쫓겨난 탓이다. 그는 음악으로써 영원히 인류를 버려 놓기로 작심했다. 온갖 타락한 음악이 그래서 나온다.

그런가 하면, 파가니니의 어릴 적 어느 날, 어머니 테레사의 예언적(?)인 꿈 얘기를 듣고 미래에 대한 확신에 차게 됐다.

    "내 아들아. 너는 위대한 음악가가 될 것이다. 아름답고 광명한 한 천사가 간밤에 내게 나타나 말했단다: '그대가 소원을 말하면 성취될 거요.' 내가 대답했지. 네가 모든 바이올리니스트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주자가 되게 해 달라고. 그랬더니 천사가 내 소원의 성취를 약속했어."

이런 소원을 들어 주고 약속해 주고 성취해 준(?) 이 천사가 거룩한 천사 맞을까..아니면 광명한 천사 시늉을 한 마귀일까? 아무튼 어머니 테레사는 1828년 7월 21일에 보낸 편지에서도 "매일 지존자께 널 위해 기도한다"고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가니니는 사실상 명실공히 마귀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아 넘긴 사람이다. 그는 어릴 적 아버지에게 예술인의 길을 강요 당한 불쌍한 배경의 사람이기도 했지만, 커서는 스스로 속을 짓을 많이 했다.

그는, 20대인 1805-1807년 사이에 이탈리아 프리메이슨리에 가입했다. 당시 이탈리아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휘하의 프랑스 군대에 정복 당한 뒤 우선 (앞서 1733년에 조직된) 33단으로 최고위로 삼은 스코티시 라이트 계열의 프랑스 그랜드라지인 '프랑스 대동방단'(그랑 오리앙 드 프랑스)이 이탈리아 주둔 프랑스군 중심으로 이뤄진 지부에 의해, 이탈리아 판 대동방단, '그란데 오리엔테 디탈리아'가 생겨나, 피렌체/나폴리/토리노/크레모나/밀라노 등 주변 도시국가로 로지아(영어의 로지/라지 즉 메이슨 지부)가 빠르게 번져 나갔다.

1804년엔 나폴리 왕국에 주제페 레키가 그랜드매스터인 '나폴리 이탈리아군 대동방단' 지부가 생겨났다. 1805년 3월 5일엔 밀라노에 프랑스 출신 33단들에 의해 첫 이탈리아 최고회가 생겨났고 유제느 보아르네 왕자(나폴레옹의 장남/양자)가 최고사령관으로 선출됐다. 이어서 6월 20일엔 역시 밀라노에 이탈리아 그랜드라지가 형성됐다.    

흥미롭게도 '나폴레옹'이라는 이름 자체에 '나폴리'가 들어있다. 1805년엔 이탈리아 왕국 '건국'과 함께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겸임 왕으로, 1806년엔 그의 동생 조셒 보나파르트가 나폴리 왕국 왕으로 앉혀졌고, 2년 후엔 막내누이 카롤린과 조아힘 무라트 부부를 여왕/부군으로 각각 임명했다.

'불멸의 영웅' 나폴레옹은 그들에게 왕이자 주신이었고 이탈리아 프리메이슨들의 형제요 대부-영원한(?) 그랜드 매스터였다. 당시 밀라노의 레알 궁(팔라조 레알레) 보좌실에는 나폴레옹이 유피테르(주피터/제우스)로 묘사됐고, 주위엔 광 나는 별, '영원'을 상징하는 꼬리를 문 뱀 '우로보로스', 콤파스, 스핑스크 돌 큐브 등 전형적인 메이슨 상징물들이 놓여 있었다.      

그즈음(1806-1808년 사이) 북부 이탈리아엔 이미 30여 로지아들이 있었고, '레알레 나폴레오네', 나폴레옹의 후처의 이름을 딴 '레알레 조세피나' 등의 명명도 했다. 
파가니니가 정확하게 어느 시점에 어느 로지아에 가입했는지는 쉽게 알 수 없지만, 철학가 지안 도메니코, 로마노시, 문인 빈센조 몬티와 비슷한 때 입단했다. 1820년 9월엔 나폴리에 '대동방단 스코티쉬 라잍'이 결성됐다.
이 와중에 로마 교황 피우스 7세는 메이슨 단원들을 재차 출교 처분하기도 했다(1821년 9월 13일).  


이탈리아 문서에 따른 한 가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은 파가니니가 1808년 12월 27일 프랑스 대동방단과 이탈리아 대동방단의 단합을 공식 축하하는 주요 메이슨 행사에서 메이슨 찬가를 포함한 '기둥들의 화음'을 손수 지휘/연주했다는 것이다(여기서 '기둥들'은 물론 메이슨 신전의 기둥들을 뜻한다. 기둥들은 메이슨 철학/이상의 표상이기도 하지만, 고대 에짚트 신화에선 남신 오시리스의 상실된 성기를 상징했다.). 당시 메이슨 F. 란체티가 현장을 목격, 사실 증언을 했다.

파가니니가 메이슨리에 가입한 주 요인은, 그가 나폴레옹의 누이이자 프랑스령 이탈리아 로카 왕국의 여왕이었던 (전술한) '엘리자' 보나파르트 바치오키 공주의 수하에서 궁중 연주가로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나폴레옹은 "겸허히 자신을 낮춘" 로마 교황 피우스 7세와 협력 관계였고, 한때 그를 "크리스토 안에서 친애하는 아들"로 부르기도 했다니, 지나던 개가 다 웃을 일이다. 피우스 7세는 훗날 나폴레옹과 반목, 프랑스 군대에 체포되기도 했다. 종교 황제가 세속 황제에게 '피 본' 수욕의 시즌이었다.

프리메이슨들은 명백히 루키페르에게 영혼을 팔아 넘긴 사람들이다. 이 사실을 그들 자신이 잘 안다. 단지 기독교에 몸 담고 있다고 해서 자기 영혼을 안전하게(?) 크리스토와 루키페르 양쪽에 팔아 넘겼을 수 있다고 자족하는 메이슨들(특히 '성전기사단'/KT)은 "위대한 착각"을 하고 있음이다. 자고로, 양다리 걸친 사람들은 지진이 나면 가랑이를 조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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