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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파울의 기도 묵상

파울의 기도(1)-하나님을 알자


 

에페소 1:15-19 (사역)

    이래서 나도, 여러분의 주 예수님 안에서의 믿음과 또 모든 성도를 위한 사랑에 관하여 듣고, 내 기도(들) 속에서 여러분을 기억하면서, 여러분 때문에 감사하기를 마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 크리스토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그 분을 아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길!
또한 여러분의 마음 눈을 밝혀 주셔서 그 분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또 성도 가운데 그 분의 기업의 영광의 풍요가 어떠한지, 또한 그 분의 강력한 힘의 역사에 따라 우리에게 주신 그 분의 권능의 위대함이 얼마나 엄청난지 알게 되기를! (빕니다.)



신약 성경의 사도 서신서들 중 파울 서신에는, 파울의 기도들이 몇 가지 적혀 있지요.
매우 중요한 기도들입니다!
제가 자주 드리는 말이지만, 이 기도들을 우리의 기도로 삼으면 좋습니다.

성경엔 수많은 신앙 선진들, 곧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다양한 기도가 기록돼 있습니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도, 다음과 같지요.


    노아 이후 족장들의 축복 기도
    이스라엘 지도자 모쉐의 기도 (시 91편)
    판관(사사) 데보라의 찬양 기도
    유다 족 지도자 야베즈의 기도
    유다 왕 다빋의 기도
    시편 기자들의 기도
    대언자들의 기도
    예수님의 기도


그밖에도 숱한 기도들이 성경 여기저기 널려 있지요.

이런 기도를 우리가 잘 활용하면, 여러 모로 -영적, 혼적, 육적- 3차원의 삶에 도움이 됩니다. 어떻게 활용하냐고요? 그냥 '암기'나 암송을 하자는 게 아니라..우리 자신의 기도로 삼자는 것이지요.
기도의 대상인 대명사에다 나 자신의 이름을 대입하여, 날마다 기도로 고백/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기도가 내 입과 혼을 통하여 영에 파고 듦으로써 영이 훈련받게 되며, 결국 내 영의 기도가 되어 마침내 영언(방언)으로도 발언하게 됩니다.
그럴 때, 이 기도가 하나님께 영적 비밀로 아뢰어져, 내 삶 속에 응답되고 성취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 기도의 내용이 내 삶과 주변에 이뤄진다는 뜻이지요!

성경의 중요한 기도들이 내 삶 속에서 이뤄지다니, 얼마나 익사이팅-흥분스럽습니까!

이 기도들이 성취되고 이뤄지는 이유는 단순/극명합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잠시..

이 기도들 뿐 아니라..성경에 기록된 중요하고 유익한 말씀들은 우리가 삶 속에서 수시로, 특히 기도 속에서 고백하고 선언할 때 나의 것이 될 뿐더러 내 영이 훈련받아 말씀대로의 삶의 틀이 잡히게 됩니다. 내 영을 훈련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능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생동하는 힘이 있고 어떤 양날 검보다 더 날카로워 나의 영과 혼을 찔러 나누기까지 합니다(히브리서 4:12). 영과 혼의 차원의 구분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연해진다는 뜻이지요. 이것은 우리가 영언기도를 할 때 일어나는 작용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물론이고, 많은 신자들도 이 진리를 모르며 깨닫지 못합니다.
왜일까요? 영이 어두워서죠. 정신과 혼은 맑고 슬기롭다고들 하는데 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혼이 새로워지지 못해서입니다.

다빋은 구약 시편 제23편에서 고백합니다.

    "그 분은 내 혼을 새롭게 하신다네."

여기 '혼'에 해당하는 원어 '네페쉬'는 '영'과 구분되는 낱말입니다. 한글 역은 대부분 한결같이 '영혼'이라고 번역했지만, (유대인 영역을 포함한) 영역 성경은 모두 'spirit'이 아닌 'soul'로 옮겼다는 것-유의할 사실이죠. 즉 영과 혼은 차원이 다릅니다.

여기서 다빋이 '돌아오다', '새롭게 하다', '회복하다', '신선하게 하다', '새 힘을 얻다'고 쓴 낱말 '슈브'는 거듭남과는 다른 낱말입니다. 영은 한 번 거듭나면-위로부터 나면- 그만이지만..혼은 거듭거듭 회복되고 신선하게, 새롭게 될 필요가 있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혼이 새 힘을 얻는 방법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라는 말이지요.


따라서 계시 말씀으로 된 이 기도들도 그런 작용을 합니다.


자..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사도 파울은 계시의 말씀으로 주어진 이 기도에서..성도들을 위하여 몇 가지를 간구합니다.


우선 그는 기도할 때 잊지 않고 감사합니다.

기도는 늘 감사와 찬양으로 시작합니다. 아무리 짧은 기도에서라도 우리는 하나님께 짧게나마 감사와 찬양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베푸신 하나님의 은총을 되새기며.
구약성경에서 감사는 으레 찬양과 동격입니다. 감사 시가 곧 찬양시입니다.
기도 역시 찬양입니다. 시편은 테힐림 곧 기도시 모음이고 동시에 찬양시 모음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에서 우리 사정만 아뢰고, 하나님께 감사나 찬양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언어도단에 가깝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어떤 은총에도 감사할 필요가 있습니다만..여기서 특히 파울이 감사하는 까닭이 뭔가요? 에페소 교회 성도의 믿음과 사랑 때문입니다!

주 예수님께 대한 에페소 성도들의 강한 신앙, 그리고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 때문이라는 겁니다.
기도할 때 우리가 이런 것을 감사합니까?
잘 않지요. 그러니, 파울에게서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한민족은..사돈이 논/밭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남 잘 되는 것, 남이 곧 잘 하는 것이 싫어지고 못마땅할 때가 잦습니다.

그런데 파울은 여기서 남의 장점, 남이 잘 하는 것을 기뻐할 뿐더러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래야만 합니다. 남의 믿음, 성도의 사랑의 소식과 뉴스를 들을 때 하나님께 감사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 감사해야 합니다!
내 이웃이 잘 될 때, 교우나 성도인 남이 특히 영적으로 잘 될 때,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질투나 시샘, 지나친 부러움을 미리 막는 예방책이기도 하지요. 더구나 목양자요 여러 교회들을 설립하고 돌봐 온 감독이요 사도인 파울은 진정 양떼들을 사랑하기에 더욱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형식적이고 입에 발린 인사가 아니지요.

여기서 우리는 이 말이 그의 단순히 인삿말일 뿐이 아니라 기도로 들어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파울은 기도(들) 속에서 에페소 교우들을 기억하여 언급한다고 했습니다.
즉 자신의 기도 속에 그들의 이름을 넣어 가며 간구한다는 뜻이지요.
그들의 믿음과 사랑 때문에 더욱 더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목양자 또는 지도자 또는 우리들의 영적 도우미들로부터 기도의 도움을 받을 때, 이왕이면 골치거리나 부정적인 제목으로 인해 염려걱정 속에서 기억되기 보다, 우리의 믿음과 사랑으로 기쁨과 긍정적인 제목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바로 에페소 교우들의 믿음과 사랑은 파울에게 그러했습니다.
[ 그렇다고 에페소 교회가 다 완전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훗날 사도 요한의 게시를 통해 에페소 교우들을 책망하십니다. 특히 첫 사랑을 잃었다고. ]

즉 에페소 교우들은 퍽 오랫동안 하나님과 성도에 대한 첫 사랑을 간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파울도 칭찬한 겁니다.


이제, 파울은 에페소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중요한 몇 가지를 간구합니다.

    첫째로, 성도가 하나님을 잘 알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지식-신지식(神知識)-은 매우 중요합니다.
대언자 호세아는 "주/야웨님을 압시다. 힘써 압시다!.."라고 촉구합니다(호세아서 6:3a).
대인관계란, 상대방을 제대로 앎으로써 비로소 제대로 시작됩니다. 
하물며 대상이 하나님인 다음이겠습니까.

우리가 아직 하나님을 채 모를 때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택하시고 건지시고 이끌어 오셨습니다만..구원 받은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제대로 알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만큼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교에 손해를 보게 됩니다.
비록 그 분은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시지만 섭섭해 하실 것은 당연합니다. 

호세아는 "내 백성은 지식이 없어 망하누나!.."라고 탄식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 바 있지요. 무슨 지식일까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지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모든 지식의 바탕입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 잠언 기자는 "주/야웨님을 두려워 섬김이 슬기의 시작! 거룩하신 분을 앎이 통찰력이다"라고 말합니다. 참 통찰력은 그 분을 앎으로써 시작되고 완성됩니다.

    - 대언자 예샤야후(이사야)는 메시아에 관한 그의 예언에서 "..물이 바다를 덮듯 주/야웨님을 아는 지식이 세상에 가득하리!"라고 노래합니다.

    - 하나님은 또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자랑하는 사람은 이것을 자랑하거라: 곧 나를 이해하고 아는 것, 나 주/야웨는 사랑과 정의와 의를 땅에 행하는 이인 줄을 깨닫는 것이다. 내가 이런 일들을 달가워하기 떄문이다"라고.
헛된 것을 자랑하기보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을 [겸손히(!)] 자랑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뜻이죠.


자, 그러니..하나님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알되, 힘쓰고 애써서 바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대체 그 분을 바로 아는 길이 무엇이며 어디 있습니까?
파울이 답해 주지요:
주 예수 크리스토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로부터 오는 지혜와 계시의 영이라고.

지혜와 계시의 영?
예! 성령님이지요.
하나님을 아는 길은 바로 성령님을 통해섭니다.
그 분은 슬기와 계시의 영이시기 때문이죠.
셋째 하늘, 하나님의 보좌 앞에 계신 일곱(7) 영의 하나가 곧 지혜의 영, 계시의 영입니다. 7은 완전을 뜻하지요. 성령께서는 일곱 영으로써 완전합니다. 

우리는 단언할 수 있습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 곧 성령님이 아니고는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없다고.

수많은 사람들, 수많은 신자들이 잘못된 방법으로 하나님/신을 알려고 합니다.
그릇된 방법으로 신을 찾고 갈구합니다.
대표적인 예로..관상가들(contemplative)을 볼 수 있지요. 그들은 오착된 방법을 참된 길로 혼동/착각하고, 자꾸만 제 뜻대로, 그 방법으로만 하나님/신을 찾으려고들 합니다.

하지만..불행히도 그것은 출구 없는 터널입니다. 시작도 종착도 어둠일 뿐입니다.
그들의 방법은 세속적, 마귀적이기 때문이지요. 세상은 성령을 볼 수도 알 수도 없습니다(요한복음서 14:17).

그러나 우리는 그 분을 압니다. 그 분을 속에 모시고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과거엔 종으로서 주인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였으나, 이제는 종이 아닌 자녀로서 그 분을 알고, 그 분의 일을 압니다. 그 분의 계획을 압니다. 성령님을 통하여! (요복 15:15).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종'이라고 부르시지 않고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성령님을 통해 이제 하나님을 아는 우리는 주님의 친구입니다!


자, 되뇌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알되, 바로 알아야 합니다.
바로 알기 위해선 바른 방법을 찾아 터득해야 합니다.
그 방법은 오직 지혜와 계시의 영인 성령님을 통해섭니다.

왜 그럴까요?

진리의 성령님은 우리를 모든 진리로 이끄시기 때문이지요(요복 16:13).
모든 진리!
심지어 미래의 일을 우리에게 알리시기도 합니다.
성령께서는 주 예수 크리스토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되, 주님의 것으로 알리십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있는 모든 것은 곧 예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통하여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할렐루야! 이 얼마나 놀랍고 행복하고 황홀한 진리입니까?
성령께서 아버지의 모든 것, 예수님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나타내신다는 사실..

그래서 주님은 그 날에는-성령님이 오신 후로는- 우리가 주님께 아무 것도 묻지 않게 된다고 말씀하셨지요! 다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여쭙고 아뢰면 되는 겁니다. 


자, 또..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데 성령님이 필요합니까?

성령님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들까지도 통찰하시기 때문이지요(코린토A=고전 2:10)! 그래서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하여 이런 신비와 지식들을 우리에게 계시-열어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고, 때로는 개인에게 은사를 통하여 알려 주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분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우리(!)를 위하여 마련하신 모든 것들은 사람들이 눈으로 볼 수도 없었고 귀로 들을 수도 없고 마음으로 생각할 수도 없는 것들이었습니다(코A 2:9).
과연 야웨 이레-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앞서 마련하시는 분이 아닐 수 없지요!

그런데 성령님을 통하여 그 모든 것을 알리셨고 알려 주신다는 말입니다. 
놀랍지 않나요?

파울은 계속 말합니다:

    "사람의 일을 사람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오? 그처럼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밖에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을 받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영을 받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것들을 깨달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코A 2:12).  
관상가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세상의 영을 받았기에 맨날 성경과 성령의 소리가 아닌, 헛소리만 합니다.
그럴 듯 하게 들리고 보이지만, 영이 다릅니다.

그들은 색다른 것을 자기네만 깨달은 것처럼 행세하고 주위에다 돈을 받고 팔아 먹기까지 하지만, 실은 자신도 모르는 것들에 속았거나 알면서도 일부러 그 영에게 속아 주면서 신의 '깊은 것'을 통찰한 양, 파고 듭니다. 실은 악령/친숙령들이 알려주는 터무니 없는 엉터리 지식들이지요. 그들이 뭔가 "안다"고 자랑하는 것은, 놀라운 지식이 아니라..실은 자신들도 모르는 것들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기도수련..실은, 세상의 '마음수련'과도 같습니다.
세상의 영입니다. 성령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속지 마세요. 엉터리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길은 오직 성령과 그 분이 기록하신 성경 말씀 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성령님을 모시고 이 성령님께 배우기만 하면..기도할 때도 그 분의 뜻대로 간구하게 됩니다.
그런지 안 그런지 한 번 봅시다.

    "..성령님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우십니다.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모르지만, 오직 성령께서 [말로는 안 되는 신음](=곧 영언/방언기도를 가리킴)으로 우리를 위하여 몸소 간구하십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 성령님의 생각을 아시는데..이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이지요." (로마서 8:26,27)

어떻습니까..그런가요, 안 그런가요?

여기.."말로는 안 되는 신음"이란, 곧 영언기도를 뜻한다고 제가 거듭 되뇌어 온 바 있지요.
이 진리를 아는 것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일부입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냐? 헐..모든 게 다 방언이래! 웃기시네~."라고 비웃는 사람들도 없진 않을 터입니다. 영언혐오자들 내지 영언기피자들이지요.

그러나..어디 그런지 안 그런지 우리 한 번 볼까요?

    "영언을 말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 말합니다. 아무도 그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는 그의 영 속에서 신비(=비밀)들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코A 14:2)

신자가 영언을 할 동안, 성령께서 그의 영과 함께 영적 비밀을 하나님께 아뢴다는 거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통찰하시는 성령께서 영언을 통하여, 우리를 위하여 모든 아뢸 바를 바로 아뢸 것은 자명한 이치죠. 시쳇말로 '당근'입니다!

우리의 혼, 두뇌와 정신으로는 하나님께 마땅히 아뢸 바를 잘 모릅니다!
파울이 그렇게 말했으니 모른다고 하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그런데도 "안다"고 자부하다 못해 자랑까지 하는 관상가들은 정말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들이지요!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의 뜻을 알고, 그 분에게 마땅히 아뢸 바를 알아야 합니다. 
그 분의 뜻에는 선하신 뜻, 기뻐하시는(=허용하신) 뜻, 온전하신 뜻이 있으니,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롬 12:2). 그러기 위해 우리는 '관상기도' 따위-시대의 풍조-를 따르거나 본받지 말고, 오직 말씀으로 마음이 새롭게/신선하게 되어 변화를 받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하다 보니, 흥분했는지(?) 말이 좀 길어졌는데요.
파울의 이 기도의 나머지는 다음 주로 미루기로 하지요.



우리 주님 예수 크리스토의 은총과
하나님 아버지의 가 없는 사랑과
성령님의 지식과 계시의 영이
티엘티 성도에게 가득하길~!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필자는..외래어 발음을 원음에 가깝게 하자는 생각입니다.
독자들의 양해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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