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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파울의 기도 묵상

파울의 기도 (2)




 

또한 여러분의 마음 눈을 밝혀 주셔서 그 분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또 성도 가운데 그 분의 기업의 영광의 풍요가 어떠한지, 또한 그 분의 강력한 힘의 역사에 따라 우리에게 주신 그 분의 권능의 위대함이 얼마나 엄청난지 알게 되기를!

(에페소서 1:18,19)


지난 주에 이어.. 에페소 1:15-19에 나타난 파울의 기도의 후편으로, 같은 본문의 뒷 부분으로 파울의 기도를 묵상합니다. 


파울은 에페소 성도들의 마음눈이 밝아지길 열망하고 있습니다.
여기 '마음..'에 해당하는 낱말은 '디아노이아'(διάνοια)입니다. 이 낱말은 전치사 '디아'와 명사 '누스'(마음/심정)의 합성어로, 이해/정서/희망/생각 등의 기능을 지닌 정신의 좌소를 뜻하는 듯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각 성도의 두 개의 마음눈들(복수)은 마음의 전반적인 기능을 활성화시키는 폭넓은 안목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지요. '디아노이아'라는 낱말의 용도상으로 여기엔 영적 안목이 포함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계시의 영을 통해 영안이 열려 보게 되는, 성령의 9은사의 하나인 "영들의 분별"과는 차원이 좀 다릅니다.
 

우리의 마음눈은 밝아져야 합니다.
늘 밝아져 있든지 맑아야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지요.
이것은 세상의 온갖 영향들이 우리의 뇌리 속, 혼의 세계 내지 정신 영역을 침투해 우리를 어지럽게 하고 혼잡시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오관을 포함한 감관기능들이 받아 들이는 온갖 정보는 우리 맘 속에서 정서와 생각 등을 통해 다양한 반응과 작용을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눈이 밝거나 맑지 못하고 어둡거나 불투명하면, 아침에 졸려 눈꺼풀이 덜 열렸거나 몽롱한 안개 속처럼, 흐릿한 시각인 채로 사물과 대상을 보기가 쉽습니다. 생각조차도 투명하고 총명하지 못하기가 십상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시각장애'를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려면 당연히, 성경 말씀과 성령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요.


그런데 파울은 여기서 왜 성도의 마음눈들이 밝아지길 원합니까?

세 가지를 알 수 있기를 희구하기 때문입니다.
그 세 가지란:

  1. 그 분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2. 성도 가운데 그 분의 기업의 영광의 풍요가 어떠한지,
  3. 그 분의 강력한 힘의 역사에 따라 우리에게 주신 그 분의 권능의 엄청난 위대함..
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과 성령님의 도움으로 마음눈이 밝아지면, 위 세 가지를 알게 돼 있습니다. 이 세 가지를 "알아도 좋다"가 아니라 알아야만 합니다! 


자..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면서 품으신 바람-원(願)/소망(주: '바라다'에서 옴. '바램'은 '바래다'에서 온, 잘못된 맞춤법으로 색깔의 바램에만 쓰임)이 뭘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무엇을 기대하시고 우리를 부르셨을까요? 궁금하고도 중대한 사항이 아닐 수 없지요.

하나님이 성도를 부르신 바의 소망은 성도 전체가 공유하는 같은 부분도 있고, 개인마다 다른 부분들도 있을 터입니다. 여기 관해서는 일일이 설명하지 않고 넘어갑니다만..에페소를 비롯한 파울 서신에 고루 나타나 있지만 특히 에페소 1장 앞 부분과 4장 앞 부분을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아무튼 이것은, 우리의 마음눈이 밝아지면 알게 되는 사안입니다.

여기서 강조하고픈 중요한 진리는..하나님이 우리 각자를 부르셨고 전체 성도로서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교회 곧 '에클레시아'라는 원어 낱말 자체가 부름 받은 무리/집단을 가리킵니다. (전치사 '에크'/-로부터와 동사 '칼레오'/부르다의 합성어)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성도가 됐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선 안됩니다.
내가 잘 나서 구원 받아 성도가 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우리를 부르신 데는 뜻이 있고 기대가 있고 소망이 있으셨던 때문입니다.
마치 갓 태어난 자녀에게 부모가 한껏 기대를 갖고 희망에 부푸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엔 그 분의 후회가 없습니다(로마서 11:29). 성도를 부르신 뒤 후회를 하시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부모가 자식을 낳고 후회하는 예를 보셨나요? 악한 부모가 아니고선 그럴 수가 없지요.

예수님께서는 12 제자들을 부르시곤 아무에게도 부르셨음을 후회하신 적이 없습니다.
심지아 배반자 이스카리옽 유다까지라도, 비록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이다고 말씀하시면서도 부르셨음을 후회하시면서 돌려 보내지 않습니다.

다들 부르신 뜻이 있고 기대감이 있고 소망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제자의 배신이 당신의 죽음을 가져오기에 쓰리고 아픈 것이지만, 그래야만 구속 사역을 이루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 분의 부르심엔 소망이 곁들여져 있습니다.
흘러간 노래들 중 '희망사항'이란 게 있습니다만..하나님이 우리를 찾고 부르신 데도 '희망사항'이 딸려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눈이 열리고 밝아져 그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을 세상에서 불러 내셔서(에크+칼레오) 에클레시아를 이루게 하신 뜻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또 마음눈이 밝아져서..
성도들을 위한 주님의 기업의 영광이 얼마나 풍요로운지를 알아야 합니다. 

여기 '기업'(基業)이란 말은 상속/상속물과도 같은 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입양아'들로서, 그 분의 맏아들인 예수 크리스토의 형제들로서 물려 받은 상속물의 내용이 얼마나 차고 넘치나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파울이 예수님께 직접 받은 계시 내용들의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입양된 그 분의 입양아들이지만, '서자'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복음/은총의 법칙에 따라 합법적인 친자녀로서 그 분의 재산을 누립니다. 오 할렐루야!


같은 성도라도..대체로 생각이 많이 다른, "이상한" 교우들이 흔합니다.
예를 들면, 돈 얘기나 재산 얘기만 나왔다면, '인상'을 찌푸리며 불편해 하고 기독교를 마치 돈만 밝히는 지저분하고 더러운 종교로 매도하려는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요즘 교계엔 퍽 많지요.
그들은 복과 십일조 얘기 등을 모두 추잡한 '기복주의'로 몰아 가곤 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순수복음'이란, 어렴풋이 복이나 돈과는 아예 전혀 무관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크리스토 안에서 기업/상속물을 주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크리스토 안에서!
"크리스토 안에서"란 말은 파울 서신, 특히 에페소서에서 가장 자주 나타나는 말입니다.

단적으로, 하나님이 크리스토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게 너무나 많다는 거지요.

그러므로 '성탄시즌'에 맨날 아기예수 축하 얘기와 낭만 무드에 젖어 캐럴과 선물만 나누고 즐길 게 아니라..예수께서 왜 사람으로 오셨는지 그 궁극적인 목적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 글 '메시아는 왜 오셨나?'도 참조해 보시길)

물론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러 오셨지만, 
과연 예수님은 우리의 영만 구원하시고는 나머지는 거의 아무 것도 없는 걸까요?

성경 전권이..죄의 대속과 영의 구원만 달랑 말하고 끝납디까?
만약 그렇다면, 성경의 나머지 모든 약속은 "속 빈 강정"에 가깝게 들리고 맙니다.

성경은 구원과 영생을 가장 중시하지만..성경에 그것만 있는 건 아닙니다.
주님은 양떼에게 생명을 주시되..더 풍성히 주려고 오셨습니다. 
생명만 아니라 곱빼기 삶입니다.

그런데도 영의 구원 이상을 찾거나 구하면 모두 더러운 '기복주의'로 매도하는 사람들이 요즘 많다는 겁니다. 마치 영의 구원만 오직, 유일하게 깨끗한 것인 양.

그런 착각은..소위 수사적 '청빈'을 강조하는 카톨맄 수도원 종교에 불과합니다. 
그나마 카톨맄의 청빈이란 것조차도 참된 구원관이 결여된 상태에서 이뤄지는 고행적 금욕주의 개념이지요. 주님은 그런 거짓 경건을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성경에서는 가난이 '미덕'은 아닙니다.
가난이 미덕인 체 하는 카톨맄 사람들도 고위급은 부자요 귀족들이며..바티칸은 그들을 위한 축재의 창고와도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크리스토 안에서 누리는 복과 상속물은 한 마디로 영/혼/육/물-모든 차원의 좋은 것들입니다! 이걸 못 믿으면 그보다 더 큰 불행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으레 예수 믿으면 모두 병도 없고 가난도 없는 부자들이 되어 잘 먹고 잘 산다는 것인가? 라고 꼭 묻곤 하지요.

저는 예수 믿으면 부자가 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으며 그렇게 믿지도 않습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풍요란 축재나 거부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모자람이 없는 삶이 풍요한 삶입니다.
성도의 가난과 질병과 육적인 연약함은 성경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죠

되뇌지만,
예수 크리스토를 통하여-크리스토 안에서 누리는 "아브라함의 복"이란, 영/혼/육/물의 모든 좋은 것이 포함됩니다. 달랑 "영(靈)만의" 좋은 것이 아닙니다.
갈라티아 3장에 기록된 내용이 그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마음눈이 밝아져 알게 되고 믿는다면,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아브라함의 복이 뭔지, 그것을 다 누리려고 적극 나설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전통 신자들이 그러지 않는 것은..여태 마음눈이 어두워서 모르거나, 알아도 쉽사리 믿기지 않거나, 믿겨도 실천하지 않아서 누리지 못하는 것일 터입니다.  


그러나 마음눈이 밝아져 크리스토 상속물의 엄청난 내용을 알고 믿는 사람들은 그런 내용들을 성경에서 찾아 적극 선포/고백/선언함으로써 내용대로 청구/획득할 것입니다. 
그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성경이 영의 구원과 영생 뿐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말하고 있다는 진리를 알고 믿는 사람은 슬기롭고 복됩니다! 크리스토의 기업/상속물이란 그런 것입니다.

구원과 영생의 약속의 확보는 갓 거듭난 사람의 시작이고 출발일 뿐입니다.
그나마 거듭남의 확신이 없는 사람은 시작도 못한 상태에 불과하고요.

 

너무 길어져 나머지는 다음 기회에..


티엘티 모든 성도는
마음 눈이 밝아져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과
크리스토 안에서의 상속물을 꺠닫게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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