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그래핔은 실제상황과 같음을 의미하지 않음
하나님의 '아이러니'
-무조건적 사랑과 조건부 열린 초청
소위 '교회력'에 따라 신/구교를 막론하고 다들 '부활절'을 지키고 있다.
매년 카톨맄교가 지정해 놓는 날짜가 우리 주님의 참 부활의 그 날일 수는 없으나, 본 티엘티는 이를 계기 삼아 독생자 예수 크리스토님의 죽음을 바탕으로 인간에게 열린(open) 초청의 손을 펼치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새로운 각도에서 묵상해 보련다.
이것은 설교나 논설이 아니다. 오히려 나의 고백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잘 아다시피 초청/초대(invitation)에는 두 종류가 있다. 열린 초청과 제한적 초청이다. 전자는 와일드카드(*.*)처럼 모든 사람이 대상이므로 '불청객'이란 있을 수 없다. 반면, 후자 곧 제한적 초청에서 불청객들은 본디 초청의 대상이 아니다.
묻고 싶은 것은 과연 예수 크리스토님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초청이 열린 초청이냐, 제한적 초청이냐는 것. 나는 이에 대한 신학적 논란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 다만 성경이 말하는 것만 새롭게 되풀어 보고 싶을 뿐이다.
먼저 나는 버림 받았던 성자님의 모습을 묵상해 보고 싶다. 하나님의 초청 배면에는 버림 받은 주님의 아픔이 배여 있다는 말이다. 버림 받음! 얼마나 철저한 희생인가?
독자는 버려진 적이 있는가? 살아오면서 나도 그런 적이 몇 번 있다.
적절한 예인지는 모르나, 대학 시절 초기에 몇몇 고교 동문들을 중심한 친구들끼리 여대생들과의 '그뤂 미팅'에 끼인 적이 있다. 나로선 처음부터 부담스럽고 꺼려졌으니까 거의 완전 타의에 의해 참가한 것이었다(참가하곤 절실히 후회했지만 그럴싸한 경험이었다). '엘리트' 우등생들도 끼어 있었으니까 마냥 저질스런 만남은 아니었다.
일단 다 함께 모여, 상대 그룹장인 어느 여대생의 재치와 '끼'가 넘친 사회로 음식과 함께 서로 허물없이 "열린" 대화를 나누다가 끼리끼리 남녀 한 쌍씩을 지어 흩어지고들 있었다. 시간 되면 다시 모인다는 약속 아래.
분명 무작위(?) 짝짓기였는데, 내 눈엔 이상하게도 친구들이 다들 제 격에 맞는(?)-그룹장과 사회녀가 짝을 지었으니까(!)-짝을 끼고 어디론가 사라졌고, 내게 배정된 임시 '짝'은 서둘러 퇴장하더니 저만큼 혼자 밭둑 길을 걷고 있었다. "괜찮게" 생긴 '대딩녀'였지만 외골수파인지 뭔지 마냥 홀로 앞서 가고만 있었다. 나를 완전히 무시한 채.
난 처음엔 긴 생머리가 찰랑거리는 그녀의 뒤를 무심코 잠시 따르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머리 속이 허옇게, 횡 하니 비어 가는 것 같았다. "넌, 너는 분명 처음부터 버림 받은 거야! 깡그리.."라는 생각 뿐이었다. "애당초 너는 내 짝이 아냐"라는 그녀 식 표현이었음을 뒤늦게 간파했다. 그렇게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버린 바' 되었다.
다들 끼리끼리 미팅이 끝나고 다시 전체모임을 가질 때, 문제의 그 여자는 나를 반짝 쳐다보더니 배시시 웃는-가벼운, 너무나 가벼운-형식적인 웃음과 "미안해요"라는 단 한 마디로 모든 것을 마무리 했다. 나 역시 최악의 어색한 미소와 "괜찮아요~"라는 답말로 모든 것을 마무리했다. 물론 그녀는 나의 짝이 아니었다.
그 후로 나는 결코 소위 세속적인 남녀 '미팅' 따위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들이 뭐라든 내겐 아름다울 미 자 미팅이 아니라 미련(未練)할 미 자 미팅임을 알았기에.
어차피 세속녀였고 내 짝이 아니었으니, 무슨 "여우의 신 포도" 같은 것도 아니고 분노 감정 따위의 앙금은 없었으나, 분명히 처음부터 "버림 받은", bitter-sweet한 추억(追憶? 醜抑?)거리로 남은 한 토막이다. 물론 그녀가 여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누가 진정 버림 받았냐는 것은 딴 스토리가 될 터이다.
우리 주님은 어떠셨는가? 그 분은 버림받아도 철저히 버림받으셨다! 그야말로 깡그리 외면 당하셨다.
그 분은 우선 사역 초기에, 당신이 여태껏 자라나신 고향의 사람들에게 배척 당하고 버림 받으셨다(루카복음서=눅 4'16~30 참조).
그뿐인가? 우리 주님은 피붙이로 함께 살아온 자기 가족에게도 한때나마 백안시되고 외면 당하셨었다(요한복음서 7'1~10)!
그뿐인가? 그 분이 끔찍히도 사랑하셔서 믿음으로 나아오는 사람마다 고쳐 주시고, 수 천 명을 두 번이나 떡과 생선으로 배불리 먹여 주실 정도로 일일이 챙기시고 돌보셨으며, 불과 얼마 전엔 나귀 타고 '호산나!'로 찬양까지 받으신 바로 자기 백성에게 '바라바스'라는 불한당 대신 버림 받아 이방인에게 재판을 받으셔야 했었다.
그뿐인가? 그분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에게도 몇 단계에 걸쳐 차례로 버림받으신다(예: 요복 6'66). 스스로 택하셔서 3년 동안 데리고 다니시며 가르치시고 먹이시며 아끼신 사랑하는 제자들이 막판에 스승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졌다! "주님은 크리스토님!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드님!"이라고 외친 가장 믿음직스럽게 행동하던 '바우'(바위)라는 이름의 제자까지도.
물론 주님은 이를 미리 내다보셨다. 그중 하나는 욕심에 팔려 끝내 배신할 것도 아셨다. 그런데도 그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얼마나 처절하게도 역설적인가!
그뿐인가. 심지어는 "이는 내 사랑하는 이, 내 기뻐하는 아들"이라고 해 주시던 아버님께도 버림받으셨다! 아버지께마저도! 그래서 "하나님, 하나님, 왜 저를 버리십니까?!"라고 절규하셨다.
오~! 어째 이런 일이???
메시아의 이런 버림받음은 이미 오래 전 예언된 대로였다. 자기 백성들에게 외면 당할 것이 예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 예언들을 성취하시려고 그 철저한 버림에 몸소 응하셨고, 스스로 버림을 당하셨다는 얘기다. 헉, 얼마나 놀라운 아이러니인가?!
독자는 믿어지는가? "설마?"라며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고픈가? 구약성경 예샤야후(이사야)서 53'3을 보라. 그밖에도 다음 예언 성구들을 읽어 보라.
찬양노래모음(시편) 22'1,6~8, 109'25, 예샤 49'7; 제카리아(스가랴)서 13'7
그리고는 신약성경에서 다음을 보라:
마태복음 26'21~25, 31-34, 45~50, 56b, 69~75; 27'26~31; 39~44,46
마르코스(마가)복음(맑) 8'31; 9'12; 10'33,34; 14'27,50~52; 66~72
요복 6'67~71
우리 가운데 누가 자신이 버려질 줄을 알고 일부러 버려지는가? (나도 아까 그 '미팅' 때 그렇게 꼴 보기 좋게 버려질 줄은 미처 몰랐다) 물론 세상 살다 보면 그런 경우가 아주 없지도 않겠지만 몇 사람, 몇 케이스가 있겠는가.
더 나아가 주님은 버림받으신 나머지 저주를 받으셨다! 나는 그 '미팅'에서 그 '대딩녀'에게 저주받았단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저주까지 받으셨다.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이었다. 카톨맄교 사제들과 수녀들, 신도들 기타 일부 사람들은 십자가를 영광 삼아, 또는 자랑삼아, 멋과 장식용으로 달고 다니지만, 스타우로스(σταυρός, stauros)는 당초 영광의 상징이 아니었다! 단죄와 형벌과 학대와 수치와 모욕과 저주와 포기와 마감의 상징이었다. 한 마디로 모든 나쁜 것의 절정이었다! 저주 받아 매달려 죽는 그 나무 위에서는 모든 게 끝이었다. 십자가의 '희생'이라는 말은 사실 당대의 십자가 개념 자체로는 걸맞지 않은 고상한 수식어이다. 당대엔 그냥 [십자가=저주]였다.
그런 끔찍한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자기 백성이 받아야 할 모든 저주와 형벌을 고스란히 대신 받으셨다(예샤 53'6,8,12). 그 모든 것들을 한 몸에 뒤집어쓰고, 몽땅 지시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귀한 한 목숨을 앗기우셨다.
도대체 왜 그러셨나? 주님은 왜, 왜 그러셔야만 했나? 왜 버림 받고 학대 받고 저주 받으셨나?
하나님의 무한한, 무조건적인 사랑 때문이었다! 이것을 그리스어로는 아가페(ἀγάπη)라고 한다. 이 사랑은 오직 예호봐(여호와) 하나님의 것이다. 다른 신에게는 이 사랑이 없다.
일부 진보적인 신학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흔히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한다. 하나뿐인 아들을 땅에 내려보내어 죽게 한 것은 '도살신학'이라며, "신의 사랑"에 배치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신을 생각해 주는 듯한 기특하고 가상스런 발상이 아니라, 우리 대신 죽으셔야 했던 크리스토님의 대속(代贖)을 부정하려는 시도일 뿐이다.
노예를 사기 위해선 속전을 내야 한다. 인류는 범죄를 한 이후 죄와 마귀의 노예가 되어 있다.
피는 피를 부른다. 피 흘림이 없이는 진정한 속(贖)함도 사(赦)함도 없다. 세상에서도 남의 피를 많이 흘린 사람은 사형을 하지 않는가.
그건 자기 죄값 탓이지만, 주님은 천 번 만 번 죽어 마땅한 온 인류를 위해, 바로 너와 나를 위해(!) 대신 사형 당하셔야했다. 왜 우리가 죽어 마땅하냐고? 우리가 태어난 이후 밤낮 평생 짓는 죄가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고백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필사적 범죄의 진상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뒤에야 비로소 몸 저리게 깨달아진다. 내가 과거에 지은 모든 죄가 주마등처럼 내 눈 앞에 펼쳐질 때, 나는 "오, 주님! 나는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이 흉악한 나를 위해 몸소 죽으시다니!"라고 처절히 절규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느낌은 예수님을 믿고 구주로 받아들인 뒤에야 진정으로 깨달아진다.
더욱이 인간은 본래 아담/하와 때 불사(不死)의 몸으로 지어졌으나, 에덴에서 둘의 범죄 이후 온 인류는 필사의 몸이 되었다. 이 필사의 경지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방도는 모든 율법과 의를 완전히 이루신 누군가가 대신 죽었다가 죽음을 이기고 되살아나는 길 밖에 없었다. 이 진리는 그 분을 믿어야만 제대로 깨달아진다.
결국 그런 분은 하나님의 아드님 밖엔 있을 수가 없었다. 사실 성자 하나님이 인류의 구속을 위해 대신 죽으신다는 하늘에서의 '협약'은 온누리와 우주의 창조에 앞서 아득한 태초 이전에 이루어졌다. 이것을 교의적/신학적으로는 '구속언약'이라고 한다. 성경은 이를 극명히 알려 주고 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먼 미래를 훤히 내다보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인간으로 오신 주님께 이 수난은 너무나 버거웠다. 그래서 주님은 사형수로 체포되시기 하루 전, 겥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아버지,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소서'라고 세 번 간곡히 애소하시다가 마침내 굳게 결단하시고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고백하셨다. 그렇게 기도하시는 동안 땀 속에 피가 스며 핏방울 같이 떨어졌다.
그리하여 온 인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나님은 정녕 그 분을 외면하셨다. 완전히 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으로서는 죄를 한 치 한 가닥이라도 용납하실 수 없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을 '잔혹한 신'이라고 표현하지만, 잔혹한 사람들에게 보내셔서 죽게 하신 것이지, 신화 속의 신처럼 직접 죽이신 것이 아니다! 그리고 죄를 적당히 봐 주는 세속적인 신들이 참 신일 리가 없다. 그건 세속인들이 바라는 포용과 관용의 신일지언정 거룩하고 참된 신이 아니다.
그 하나님은 바로 너와 나의 죄를 위해 자신과 다름 없는 아드님을 희생시키시고 다시 살리셨다!
문제는..거룩하신 하나님과 그 아드님이 아니라, 바로 너와 나이다!
문제는.. 너와 네가 그 진리를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냐는 것이다!
문제는.. 너와 네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되살아나신 그 분을 믿느냐는 것이다!
문제는.. 너와 네가 우리를 위해 흘리신 그 분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씻으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가 죽어 마땅했던 죄값과 피값을 치르신 진실을 믿느냐는 것이다!
문제는.. 너와 네가 그 분을 내 구주, 주인 곧 주님으로 받아 모시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인류를 사랑하시기에 하나뿐인 아드님을 보내셔서 대신 죽게 하신 무조건적 사랑 곧 아가페로 우리를 초청하고 계신다.
초청 내용은 바로 위의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영원한 삶(영생)과 천국과 그 지복을 누리게 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이 초청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믿거나 말거나.
그러나.. 무조건적 사랑으로 열려 있긴 하지만,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 집안이 구원을 얻을 것이오."라는 조건부 초청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믿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불청객이다!
"불청객이든 아니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죽어 보면 비로소 그 결과를 알게 된다. 죽음 후엔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어서야 그것을 알기까지는 너무 늦고, 내 한 목숨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제발 자기 목숨을 싸게 여기지 말자.
자기 영혼에 책임을 지자.
나의 영혼을 소중히 여기자.
반드시 구원받아야 할, 너무도 귀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내 아들 예수 크리스토만 믿어다오. 그럼, 네 죄를 묻지 않고 너와 화목하련다. 이것은 너를 위한 내 사랑과 내 진실의 최선이다"며 기다리고 계신다.
안 믿어진다고? 신약성경 코린토B(고후)서 8'19(참고: 구약 시편 32'3)을 읽어 보라.
독자여!
이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들이자!
아드님을 우리에게 기꺼이 주신 그 분의 무한한 사랑에 응하자!
너무 늦지 않게, 지금 그렇게 하자!
그러지 않는다면, 너와 내가 구원 받을 길은 영원히 없다. 믿든 말든.
이 진리와 사실을 나중에 깨닫겠다면, 너무 늦을 수 있다.
너와 내가 뒤늦게 죽은 뒤에야 깨달으면 무슨 소용인가?
일단 죽은 뒤에는 믿으려도 믿을 길이 없다.
영원한 심판 뿐이다.
바로 지금 예수님께 나아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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