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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독자의 지난 칼럼들/은강의 순례여정

2 - 13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린도전서 15:57, 간역 국한문 한글판)


어? 이게 뭐야? 왜 갑자기 이런 말이 튀어 나와?
큰 고민 없이 줄거리 파악하며 대강 읽어 왔는데, 지금 이 곳에 이 문장이 왜 있는 것인지는 얼른 감이 안 잡힌다. 앞 내용 하고 이 문장 하고, 연결이 좀 이상하다. 어째 이거 삼천포 같은데.. 음.. 곤란하네..

가만, 성경을 읽는 무슨 특별한 방법 같은 게 따로 있나 혹시?
그런 거야?

그렇지만 그럴 리는 없을 거다. 그런 게 있다면 알려 줬겠지. 이러저러하게 읽으세요, 했겠지.
그는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고린도전서 15장을 꼭 한 번 읽어 보세요 했을 뿐이다. 그러니까 보통 책 읽듯 하면 될 거다.

그런데 무슨 책? 그러고 보니 책도 책 나름인데?
교과서? 소설?
공부하듯 읽어? 이야기책 읽듯 해?  

이해 안 되는 부분이 문제네. 공부하듯 그때 그때 이해를 하고 넘어가야 하나 소설이나 영화 보듯 대강 넘어가다 보면 아 그거였구나 어느 순간 이해가 되나. 이렇게든 저렇게든 자기 성질 대로 읽나.
혹시 수학공부처럼, 기초 모르면 진도 나가야 소용 없는 거 아냐?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秘密(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瞬息間(순식간)에 忽然(홀연)히 다 變化(변화)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者(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變化(변화)하리라
53 이 썩을 것이 不可不(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死亡(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記錄(기록)된 말씀이 應(응)하리라
55 死亡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死亡(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死亡(사망)의 쏘는 것은 罪(죄)요 罪(죄)의 權能(권능)은 律法(율법)이라
57 우리 主(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感謝(감사)하노니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兄弟(형제)들아 堅固(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恒常(항상) 主(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者(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受苦(수고)가 主(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1절부터 읽기 시작해 50절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 뒤로도, 55절 이하는 역시 읽을만 했다. 숨어 있는 깊은 뜻이야 내 몫이 아닌 거고 그럭저럭 대강의 줄거리는 파악하고 있는 줄로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얘기가 달라져 버린 거다.  


57 우리 主(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感謝(감사)하노니


다시 읽어 보지만 역시 모르겠다. 내 머리로는 이 문장은 도무지 앞 문맥과 어울리지 않는다. 
54절에서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 했다. 말을 참 어지간히 비비 틀어 꼬았지만 그래도 해독을 하자면, '이김'이 '사망'을 삼켰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사망 저 자신은 졌다. 이김이 이겼다. 같은 맥락으로 55절에 나오는 사망을 이해하려면 일종의 반어법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 자연스럽다.


55 死亡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死亡(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은 패자다, 이김한테 졌다. 그러니 별볼일 없어졌다. 별볼일 없게 된 사망 지까짓거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거를 강조하고 있는 거다. 무엇을 이겨? 못 이겨. 무엇을 쏘지? 아무 것도.


56 死亡(사망)의 쏘는 것은 罪(죄)요 罪(죄)의 權能(권능)은 律法(율법)이라


아무 것도 쏠 수 없게 된 사망이 죄를 쐈다니, 죄는 원래 나쁜 나라 소속이니까 아무 것도 아닌 것인가? 사망도 나쁜 나라 죄도 나쁜 나라, 율법은.. 율법도 나쁜 나라? 사람을 구속하고 있었으니까? 
유유상종인가.. 이거 어째.. 말이 되는 것도 같고 안 되는 것도 같고, 대충 머리 복잡해 에효 그냥 넘어가자 폼을 잡는데 그만, 57절에서 터억 걸려 버리고 만 거다.


57 우리 主(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感謝(감사)하노니


땅에서 솟았나, 하늘에서 떨어졌나.
패자가 되어 별 볼 일 없어진 사망 이야기를 실컷 하다가 왜 갑자기 예수를 무대 위로 올리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걸까.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이김을 주셨다니.
사망하고 이김하고 무슨 관곈데? 이김에게 패해 별 볼 일 없어진 사망이 어떻게 이김과 다시 연결되기에 이렇게 바로 뒤따라 나왔지? 거기에 감사까지?
57절이 56절 뒤에 대체 왜 따라 나온 거야, 내용상 연결이 안 되어 보이는데.    

혹시 고린도전서 15장은 액자식 구성?
흠, 말 된다. 바울은 논리적인 사람이랬으니 자신이 쓰는 글의 강한 효과를 노려 구성의 묘미를 살렸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처음 두 절쯤과 마지막 두 절 정도가 액자가 될 가능성이 많다.
57절부터 액자라면, 즉 56절과 57절이 계속 이어지는 내용이 아니라면 별 문제는 없어 보인다. 56절에서 이야기는 일단 끝나고, 57절 이하가 전체를 마무리하는 역할이라면.

57절 이하는 과연 액자인가.

다시 읽는다. 처음부터 차분히 전체적 흐름을 염두에 두어 읽어 본다.
56절에서 이야기는 끝나는가, 57절은 화제가 전환되면서 전체를 마무리하는 역할인가.
여러 번 반복해서 흐름을 찾아본다... 그런데, 아니다... 15장의 첫 두 절 정도는 혹시 액자식 구성에 어울릴 수도 있겠지만 뒤 두 절은 아무래도.. 아니다...
읽을수록 57절은 액자로 읽히지 않는다. 이건 앞 절을 바로 받아 정리하는 역할로 보인다. 전체를 하나의 맥락으로 이해해야 하는 거다. 화제는 57절에서 바뀌지 않는 모양이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이김을 받았단다. 쉽게 말해 이긴다는 거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한테 직접 준 건 아니고 예수로 말미암아, 즉 예수가 있었기에 받았단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 덕에 이기게 되는 거다. 그래서 예수를 보내준 하나님께 감사한다. (음.. 그러고 보니.. 예수를 향한 감사 인사는 없네.)  

이걸 어떻게 앞 절과 관련지어 생각해야 할까?
55, 56절은 57절과 내용상 어울리지 않는다. 앞 두 절이 빠지든지 57절이 빠지든지 해야 전체적으로 의미가 부드럽게 이어진다. 그렇지만 빠져야 어울리는 거라면 이렇게 멀쩡하게 들어 앉아 있을 리가 없지. 인류 최고의 저서라는 성경이 아니냐.

내가 잘못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56절이었는지 몰라. 56절은 구렁이 담 넘듯 어물쩡 넘어 갈 문장이 아닌 지도 몰라.  
57절 이하가 액자라면 56절은 구성상 주제문이 되어야 맞다. 거기에서 이야기가 일단 끝나니까. 우습게 취급하면 안 되는 거였다.  
액자가 아니라 해도, 논리적으로 짚어보면 중요한 부분이었다. 57절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자면 56절은 흑싸리 껍데기가 아닌 거다.

너무 쉽게 내 멋대로 이해해버렸나 보다.
그는, 성경을 읽을 때는 전체 맥락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했다.
어느 글이든 글이란 건, 맥락이 이상하면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한다.

어물쩍 귀찮아서 그냥 넘어가려 했던 56절을 그냥 두어서는 안 될 모양이다. 확인이 필요하다.  
어법에도 맞지 않는 이상한 문장을 재삼 확인까지 해야 하다니, 이거 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참. 
에라, 그냥 넘어가 버릴까. 통과?


56 死亡(사망)의 쏘는 것은 罪(죄)요 罪(죄)의 權能(권능)은 律法(율법)이라


다시 읽어 보니, 알 거 같던 것들도 다 모를 거 같아진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고 죄의 권능은 율법?
막연하게는 알 듯 해 넘어가려 한 거였건만 막상 파고 드니 흐릿하다.

사망의 쏘는 것. 죄의 권능.
뜻이 정확히 잡히지 않으니 어법에 맞지 않는 격조사가 유난히 거슬린다. 
자, 마음 다잡고 다시 보자.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秘密(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瞬息間(순식간)에 忽然(홀연)히 다 變化(변화)하리니


그래 좋아, 여기까진 무슨 말인지 그럭저럭 알겠다.
바울이 비밀을 알려준 거다. 마지막 나팔 소리가 들리면 모든 것이 변한단다. 마지막 나팔 소리가 언제 왜 들리게 되는 것인지야 모르겠지만 문장의 의미는 그렇다.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者(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變化(변화)하리라


이건 일종의 상징인가?
죽은 사람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
썩지 않으면 안 죽지.. 그럼 영원히 안 죽어?
아무튼 깊은 뜻이야 내버려 두고, 문장은 파악이 된다. 변화의 내용이 설명되어 있다.


53 이 썩을 것이 不可不(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으으.. 뜰에 콩깍지 깐 콩깍지인가 안 깐 콩깍지인가.. 다시 똑똑히 읽다 보니 이게 웬 뜰에 콩깍지냐.
썩을 것 썩지 아니할 것 죽을 것 죽지 아니할 것 썩을 것 썩지 아니함 죽을 것 죽지 아니함.. 아아.. 돌겠다.
계속 읽어지지가 않는다. 짜증이 난다. 정말 무슨 문장이 이러냐.
깐 콩깍지 안 깐 콩깍지나 간장공장 공장장 장공장장 공공장장이 차라리 낫다. 콩깍지나 공장장은 하도 많이 갖고 놀아 입에나 붙었지.

여기서 그냥 멈춰?
독학 때려치고 메일을 보내?

그렇지만 한국어인데, 외국어도 아니고 외계어도 아닌 내 모국어인데.
모국어를 해독 못해 물어 보다니 자존심이 있지. 내포된 뜻까지야 모른다해도 최소한 문장 자체는 이해를 해야지.
자존심을 지키자, 고지가 바로 저기일지 모르는데 예서 말 수는 없다.
자, 다시 도전.

지금 화두는 '변화'다.
나팔 소리가 나면 변화가 일어난단다. 그런데 어떻게 변하느냐, 바로 그 말을 하고 있다.  

썩을 것이 불가불.. 부득이.. 어쩌는 수 없이 그렇게 된다는 거네..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안 썩는 것을 입겠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안 죽는 것을 입고..

변화의 내용인즉 썩을 게 안 썩고 죽을 게 안 죽는다는 말로 이해된다. 그런데 그 말을 이렇게 복잡하게 하냐?
그냥 안 썩고 안 죽는다 그러면 탈 나나? 게다가 썩는 거나 죽는 거나 오십 보 백 보 아닌가? 반복을 통한 강조?
뭐 그거야 그걸 수 있지만, 어쨌든 이렇게 말을 좀 꼬아서 이해하기 어렵게 하면 권위가 더 서나? 내가 단번에 알아들으면 바울은 자존심이 상하나?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뜰에 콩깍지.. 일부러는 아닌데 한 번 난 콩깍지 생각이 가실 줄을 모른다.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깐 콩깍지 안 깐 콩깍지..


54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


앗, 여기다.
콩깍지가 드디어 끝나고 사망이 나왔다.
사망 얘기다. 내 두통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이김이 사망을 언젠가 삼킬 거라는 것인지 이미 삼켰다는 것인지, 시제는 모르겠지만 뜻은 알겠다.


54 ...記錄(기록)된 말씀이 應(응)하리라


참 말도 어렵게도 한다.
그 상황에 맞는 말이 이미 기록되어 있다는 말이겠지.

이거, 자꾸 읽어 나갈수록 좀 한심해진다.
이렇게 여러 번씩 집중해서 읽고 궁리해야 겨우 무슨 말인지를 안다면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다.
바울이 역설한 '사랑'이 내게도 있다면 좋을 텐데. 그렇다면 이렇게 열 내며 팔팔거리지 않고, 끈기있게 참으면서 온유한 마음가짐으로 읽을 수 있을 텐데.

각설하고,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가 되었으니, 즉 이김이 사망을 꿀꺽 삼켜 버렸으니, 그렇다면 사망은 사망했겠다.


55 死亡(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死亡(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끼약, 하늘 향해 비명이라도 질러 볼까.
격조사를 나는 진작에 포기했건만, 놈이 나를 놔 주지 않는구나.

너의 이기는 것, 너의 쏘는 것.
이건 소유격 조사의 탈을 쓴 다른 격조사다. 어법으로 볼 때 주격이거나 목적격이겠지만 이 놈은 주격이겠지. 바울은 목적격에는 '을'을 사용하고 있다. 게다가 이 소유격 조사는 다른 곳에서도 이미 여러 번 주격으로 쓰인 전과가 있다.

사망아 네가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나쁜 나라이니,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을 것이므로 일종의 반어법으로 이해했었다. 나쁜 나라라도 살아 있다면 힘이 셀 수 있지만 이김한테 잡아 먹히는 순간 능력을 상실할 거 아닌가. 그러니 이제 아무런 힘이 없는 사망은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걸로 이해했었다.     


56 死亡(사망)의 쏘는 것은 罪(죄)요 罪(죄)의 權能(권능)은 律法(율법)이라


후.. 드디어 나왔다.
그냥 연결해서 읽어야 하는 거였나.  
56절은 결국 55절의 대답이었나.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사망아 니가 무엇을 쏘지? 죄를 쏘는데요.
이렇게 연결이 되는 거였나. 수사법으로 치자면 단순한 문답법이던가. 

이런.. 망할, 실망이다.
이렇게 단순했다니. 앞에서 묻고 금방 뒤에서 답해 주는 평면적 구조였다니.
이거였나. 이거 영.. 할 말이 없다. 

바울이야 뭐, 사실 무죄다. 아무 말 안 했다.
말 그대로 자승자박, 내 손 내가 묶고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쳤다. 소위 '오버'를  한 거다.  
격조사로 이미 심사가 꼬여 있어, 머리가 단순한 쪽으로 움직이지 않은 거다.

사망이 이기고 쏘는 것이, 그러니까 아무 것도 없는 게 아니라 있다는 얘기가 되는 거다. 사망은 죄를 쏜다.
말은 된다. 사망이 죄를 쏜다. 주어 목적어 서술어의 나열, 말은 된다. 간단한 문장이다.   

말은 되는데 무슨 뜻이지? 사망이 죄를 쏘면 어떻게 되나?
총이든 화살이든 무어로든 쏘면 맞는 거고, 맞은 것은 피해를 입게 되어 있다. 죽거나 최소한 상처라도 입어야 맞다. 그러니 사망한테 맞은 죄는 죽거나 다치거나 하게 된다.

사망 저도 죽는 주제에 죄를 죽여? 혼자 죽기 억울해서 동반죽음을 하나? 물귀신 작전?
죄를 죽인다면 좋은 나란데, 사망은 그럼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좋은 나라 역할을 하는 건가?

그런데 또 그렇게 사망한테 당하는 죄의 권능은 율법이란다.
죄의 권능이 율법이라니, 진짜 머리에 쥐난다..


권능 : 1. 권세와 능력을 아울러 이르는 말.
         2. [법률] 권리를 주장하고 행사할 수 있는 능력.


머리에 쥐 나니 쥐약을 먹어볼까 고양이를 찾으러 밖으로 나가 볼까, 홧팅, 기분 전환 삼아 인터넷 사전이나 찾아 봤다.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바른 독해의 기본일지니.

찾기를 잘 했다.
권능하면 보통 권세와 능력을 생각하는데, 호오, 법률적 의미가 따로 있었다.
율법이라는 어휘도 다분히 법률적이니 여기서 권능은 법률적 의미로 해석하는 게 맞을 것 같다. 권리를 주장하고 행사할 수 있는 능력. '권세와 능력'이라는 뜻 보다 문맥에 더 어울린다.

죄의 권능은 율법? 이게 또 문제네.
죄의 권능이라면, 죄가 권능을 소유했다는 말인가 죄에게 권능을 행사한다는 말인가.
죄'의' 권능이라고 되어있으니 형식적으로는 죄가 권능을 가졌다는 표현이지만 소유격 조사를 어떻게 믿는담.
죄가 율법에 대해 권능을 가진다? 좀 이상하다. 죄가 율법에 대해 권리를 주장하고 행사하다니,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 알면 실소를 금치 못하시겠군. 
율법이 죄에 대해 그 권리를 주장하고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좀 더 논리적이겠다.
유대문화는 율법 때문에 죄인이 양산되었다고 그가 말했었다. 그러니까 율법이 죄를 결정하는 거다.  


아아아.. 그렇구나..
끄덕끄덕.. 그렇구나..
끄떡끄떡.. 그으렇구나..

이건 어쩌면 하나의 연결 고리인가 보다.
이김에서 사망으로 다시 죄로 그리고 율법으로 이어지는 고리.

이김-사망-죄-율법.

이김이 사망을 죽이는데(?!) 사망이 죽으면서 혼자 안 죽고 죄와 함께 죽는다. 역시 사망은 물귀신이다. 그 죽은 죄에 대한 권리 행사권을 율법이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죄가 사라졌으니 율법에게는 권한을 행사할 대상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그럼 이제 율법은 뭘 하지?
할 일이 없네?
역할이 사라졌는데 존재 가치가 있나?  

그런 거였나.
예수의 희생으로 인간은 자유로워졌다고 그는 여러 번 말했었다. 물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사망이 죄를 없앴고, 죄가 없으니 율법의 존재 기반이 사라진 것인가.


57 우리 主(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感謝(감사)하노니


그 연결 고리의 맨 앞에 놓인 이김을 하나님이 주셨다. 쉽게 말해, 이기게 해 주었다, 예수를 통하여. 그래서 감사한다.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兄弟(형제)들아 堅固(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恒常(항상) 主(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者(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受苦(수고)가 主(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문장은 여전히 복잡하지만 이제 문맥은 이해가 된다.
모든 글의 결론들이 대개 그렇듯, 잘 하란다. 흔들리지 말고 힘도 쓰고, 그것이 헛된 수고가 아니라는 것은 안단다. 쓰는 '나'만 아는 건지 듣는 '너희'도 안다는 건지, 좀 애매한 감이 있지만 이 정도는 그냥 넘어가 주자.

이제야 겨우 큰 무리 없이 연결이 되어 보인다.
내 이해가 제대로 된 것인지 자신은 없지만,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최소한 문맥이 통하지 않는 곳은 없지 싶다. 


후우.. 성경 읽는 거 만만하지 않다.  
카프카의 아포리즘보다, 성경이 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