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회에다 필자는, 사순절이 카톨맄 전통에서 나온 것이며 성경적 근거가 희박한 데다 주요 개혁가들이 반대하거나 금지했다는 점을 밝혔다.
성만찬의 의의를 약화
천주교 계열 전통으로 굳어져 온 사순절은 특히 성만찬(성찬예식, the Lord's Supper, Communion)의 의의를 강화시키기보다 약화시킨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엉? 무슨 소릴! 강화시키지 왜 약화시키냐?"고 으레 물을 것이다.
과연 사순절은 성만찬의 의의를 약화시키나, 강화시키나..?
구교와 신교(일각)의 전통에서..카르니발(사육제/謝肉祭)로 시작되는 '참회화요일'을 거쳐, '재의 수요일'에 시작한 사순절의 절정은 아무래도 소위 '호산나(종려)주일'로 시작하는 '수난주간'과 '성 금요일'일 것이다.
우리가 어릴 적엔 이 기간동안 으레 성만찬을 한 번 했던 것으로 추억한다. 주님의 고난의 쓰라림을 집중적으로 묵상하고 금욕하면서 수난에 '참여'하곤 하는 기간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수난일이 시작된 저녁(유대인 전통은 저녁을 하루 일과의 시작으로 삼았다), 제자들에게 위임하신 그 성만찬의 의의는..주님의 교훈과 아울러 주님께 직접 계시로 받은 사도 파울의 교훈을 한데 조화시키는 데 있다. 이 성만찬은 주님의 살을 상징하는 빵과,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성도가 나눔으로써 주님을 기념하고, 그 분의 수난과 아울러 주님과 하나로 연합되는 부활을 아울러 기린다.
그런데 천주교 전통인 사순절의 이 절정기 동안 사람들은 금욕생활의 절정을 거친다. 많은 경우, 금욕은 자학적 경지까지 이른다. 안 먹고 안 마시고 스스로를 괴롭힘으로써 주님의 수난에 참여한다고 믿는다. 그런가 하면, 몰래 혼자 또는 동료 신도들끼리 '룰'을 깨기도 하니, 그런 금욕은 의식적(儀式的)이다 못해 외식적(外飾的)이 되기도 한다.
과연 수난 참여가 그런 뜻일까?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의식적/외식적인 금욕을 가리키지 않는다. 나를 주님 앞에 굴종시키고 자아를 부인한다는 것은 나의 의지의 발동이고 선택이고 자발적인 헌신이지, 자학적 금욕이 아니다.
성경적인 자아부정은 나의 살아있는 정욕적인 인간-육아(肉我)를 죽었다고 여기는 것이다. 세상을 향한 온갖 육욕과 욕정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이 말을 오해하진 말자.
이것은 마음의 가난이지, 물적인 가난을 뜻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검소한 생활을 잊지 말자는 뜻도 아니다.
이것은 결혼/부부 생활에 필수적인 성욕을 버림을 뜻하지 않는다. 맘만 하나일 뿐, 몸은 하나 되는 게 아닌가? 아기는 어떻게 낳는가?
이것은 또 중세에 유행했고 요즘 유행하는 관상적인 '비움'과 '내려 놓음'을 뜻하지 않는다.
천주교 계열은 사순절 기간동안 수사/수녀들의 수도적 금욕/청빈생활에 근접해지길 교도들에게 요구한다. 중세 사순절 관습을 보면, 술은 물론 고기도 못 먹게 하고, 성욕을 부추기는 음식물을 피하는 특수 섭생을 통하여 성생활도 (되도록) 금하거나 줄여서, 사제/수사/수녀들의 삶을 닮길 바라고 있다. 어찌 보면, 사제계급들이 평신도를 단단히 묶어 놓는 기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의식에 사람들을 묶어 놓기, 전통의식에 스스로 포로 되기일지언정 참된 수난 참여의 길이 아니다.
오해 말라. 필자는 개인에 따라 특별기간 동안의 금식/금욕/검약 등 일시적 또는 규칙적인 자기절제의 미덕과 훈련이 나쁘거나 잘못됐다는 얘기가 결코 아니다. 또 성도의 집단 금식기도처럼 좋은 것도 드물다.
그러나 날짜를 정한 집단 금식 외에는, 어디까지나 개인에 따라 일시적/규칙적일 뿐이다. 부부 사이도 특별한 뜻이 있어 약정한 금욕 기간 외에는 다시 합방함이 주님의 뜻이다. 계속 금욕하고 분방(分房)함이 거룩한 게 아니다.
그러나 카톨맄교는 사제/수사/수녀들처럼 금욕하는 것을 가장 거룩한 경지로 여긴다. 더 많은 종신서원자, 독신자/독신녀들이 생기길 바라고들 있다. 그 결과는..초서나 보카치오가 즐겨 고발한 중세 수도원의 성 타락이요, 우리가 보는 미국과 요즘 브라질 성당들의 성추행 폭발 등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사 마르틴 루터가 수녀 카타리네 폰 보라와 결혼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간추리건대, 필자의 말은..절기를 지켜 가며 율법적으로 행하는 전통적/의식적인 금욕 관행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절기 지킴은 구약시대로 끝났다.
초기교회 성도들은 모일 때마다 빵 떼기 등 애찬을 즐기면서 서로 주님의 만찬도 나눴다((행전 2'42,46, 20'7, 코린토A=고전 10'16). 천주교 계열처럼 사제가 나눠 주는 면병과 포도주를 받아 먹은 게 아니다. 성도마다 왕족 같은 사제인데(페트로A=벧전 2'9), 우리가 왜 구약시대처럼 특수 계층인 사제들의 이끔을 다시 받아야 한다는 말인가? 우리의 시계바늘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는 건지?
주님의 만찬은..애찬처럼 함께 빵을 떼며 함께 포도주를 나눠 마시면 되는 것이다(마태복음서 26'17-29). 단, 주님의 말씀대로 그 분의 살과 피를 기념하면서 먹지, 배를 채우려고 배불리 먹지 않도록 해야 한다(코A 11'23-34). 그런 예가 드물지만. 배불리 먹기는 집에서 하면 된다.
따라서 어떤 '사제'나 진행자/인도자의 지엄하게 찡그린 표정과 빵/잔 높이 쳐들기 같은 과장된 제스처를 포함한 모노드라마 '쇼' 같은 게 필요 없다. 그냥 단순히 순수하게 말씀대로 기념하면 되는 것이다.
옛날 우리 어릴 적 수난주간 절정에 했던 그 성만찬은 한 마디로 '자기 괴롭히기' 비슷한 것이었다. 여기저기 쿨적쿨적대는 울음소리도 감사와 감격보다는 주님의 아픔을 좀 이해하고 그 아픔을 느껴 보고 함께 나눠 보기 위한, 그런 자학적 감정몰입 같은 성격이었다. 물론 감사 감격하여 우는 사람들도 없진 않았겠지만. "얼마나 아프셨나..?"에 뇌리를 집중하고 명상한다.
성경을 보면, 주님의 수난에 참여하기는 그런 감정 몰입적 금욕, '쥐어 짜내기' 식 의식집중 내지 침잠 보다는 내 십자가 지기, 주님 뜻 따르기, 자기 부인, 주님과의 연합의 의의가 더 크다고 하겠다.
그런데 천주교회력에 따라, 연중 한 때 40일 동안 하는 사순절 금욕/명상을 통해 사람들은 이런 성만찬의 참 의의를 다지기보다 흐트러 놓는다고 생각된다. 더구나 천주교 고유의 '화체설'이나 미사 때마다 사제라는 특수층이 시행하는 '성체성사'는 여러 모로 비성경적이다.
그래서, 사순절 동안의 금욕과 생각의 묵상을 통한 '수난 참여'라는 의식은 성만찬의 참된 의의를 감소시킨다.
자기 체벌/체형의 금욕
중세 수사들은 금욕을 위한 자학적 자기 체벌을 하나의 수련으로 여겼다. 초기의 안토니우스(=안토니)를 비롯한 광야수사들로부터 현재의 수사/수녀들, '예수회', '오푸스데이' 멤버까지 그래왔다. 중세 '성화'란 것들을 보면, 안토니우스는 온갖 악령들과의 '투쟁'에 시달린 모습으로 그려져 있고(아니, 예수 이름으로 물리치면 될 것을!), 히에로니무스(=제롬) 등 수사들에 관한 전기적 그림을 보면, 거의 반라가 되어 채찍으로 자신을 "다스리는" 영웅적(?) 금욕생활을 하나의 모범으로 그렸다.
[ 우리는 흔히 "자신을 채찍질 한다"는 말을 쓰는데..사실 채찍질은 '주마가편'이란 말처럼 동물에게 쓰는 것이지, 본디 사람에게 쓰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든 남에게든. 사람에게 채찍질 하기는 과거 노예들이나 중죄수들에게 쓰던 고문 내지 극형이었다. 인권을 중시하는 현대엔 그런 중형이 쓰이지도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받으신 채찍형은 노예나 동물에게 적합했던 극형이었다. ]
이를테면, 아마도 자위 욕구 같은 욕정이 치밀 때마다 가학하여 몰아낸 형국인 듯 하다. 그러다 못 견디면, 수도원이나 성당 안에서 남녀노소 심지어 동성 간에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다는 게 중세로부터 현대의 역사가 말해 주는 '뒷 얘기'다. 전통과 율법이 의와 거룩을 이루지 못함을 입증해 주는 단적인 보기들이다.
막달라 마리아 같은 (중세 '성화' 속) 신앙 '위인'들은 으레 두골 하나씩을 끼고 있거나 곁에 두고 있다. 죽음을 늘 염두에 두면서 속절 없는 무상함을 묵상하자는 것인지? 중세인들은 그럼으로써 크리스토나 사도들을 "본" 받고 더욱 높은 경지의 신비로 나아갈 수 "있을" 줄로 믿었다.
천주교가 사순절에 추구하는 금욕이나 '경건'이란 것이 대체로 그런 수준이라고 보면 과히 틀리지 않다. 그런데 신교 인사 다수는 생각도 없이 그런 전통에 스스로 목을 맨다. 간이나 쓸개는 도대체 어디다 두고 있는 건지?
이런 극단의 형국들은..성경적인 수난 참여와 자기 부정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성령님의 권능을 활용하지 못한 탓이다.
호산나(종려)주일? 수난주간? 성금요일? 부활절?
이런 절기들이 어디서 나온 것인가? 그리고 왜 매년 우리가 꼬박꼬박 이런 절기들을 지키고 있는가? 왜 지켜야 하는가? 혹여 "그것도 몰라? 그야 당연히 성경에서 나온 것이지!"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자, 우리..말을 하려면, 올곧고 바른 말만 하자. 밑바탕 없고 어정쩡한 말은 삼가자.
종려주일이 정말 성경에서 나온 건가? 사도들/장로들, 초기 교인들이 언제 '종려주일'이라는 것을 지켰는가? 그들이 언제 특정일들을 '수난주간', '세족목요일', '성금요일', '부활절'이라고 제정하여 매년 지킨 흔적이라도 있는가? 행전이나 서신서 어디에 그런 기록이 있는지?
필자는 눈 씻고 봐도 성경에서 그런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다.
이는 모두, 사도나 초기 성도가 아닌 후기 인사들과 천주교의 창작품들이다!
사도 파울은 절기 준수가 자신의 가르침이 헛될 수 있을 중요한 단초로 보고 경계했다(갈라티아서 4'10). 그것은 약하고 천한 것으로 되돌아가는 초등학문이다. 파울도 우리가 사람에 따라 한 날을 중시하여 경건하게 지키는 것은 나름 도움이 된다고 했다(로마서 14'5). 그러나 율법적/의식적인 집단전통으로 만들어 절기 준수는 어디까지나 구약적 발상이요 율법에 스스로 예속되는 소치다(갈 4'9).
따라서 이런 것들은 우리가 천주교를 향해 당연히 거부했어야 할 일이다(콜로새 2'16)! 적어도 일부 개혁가들은 그랬다.
우리가 참회일, 재의 수요일, 사순절, 호산나 주일, 수난 주간, 세족 목요일, 성금요일, 부활절을 지킴은 신약적인 의의가 전혀 없다. 모두 구약 절기를 지킴과 전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이런 관행이 바람직하고 옳다면..우리는 구약시대로 되돌아가 유월절로부터 오순절까지 레비기에 나타난 모든 명절을 모두 고루 지켜야 옳을 것이다. (실제로, 찌온주의에 물들어 그런 구약 명절들을 지키는 인사들도 요즘 흔하다. 역시 시계바늘 거꾸로 돌리기다.)
그리고 천주교 교회력에 따라 천주교의 모든 절기들을 지키는 게 더 바람직할지 모른다.
그러나..이 모두가 초기교회서 영구적 관행으로서 지켰다는 사례나 전통으로서 마땅히 지키라고 한 교훈을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할 수 없다.
매년 부활절 날짜는 천주교식 교회력에 따라 국제적으로 정해지며 거기에 따라 사순절 전후의 다른 절기들도 정해지고 지켜진다. 왜 우리가 매년 천주교를 따르며 그 의식력에 구속 받는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것이 국제 교계 관례라고 해서, 엄연히 성경에 없는데도 우리가 매년 매번 따라줘야 하는가? 언제까지?? 주님 오실 날까지???
지난 몇 년간, 나는 신교가 이렇게까지 성경보다는 매년 천주교 전통에 충실한 데 대해 커다란 물음표를 품어 왔다. 우리는 왜 아직도 성경 아닌 천주교 전통에 예속돼 있는가? 왜 천주교 명절이 우리의 것이어야 하는가? 그들이 만들어 놓은 특정날짜의 '부활절'과 '성탄절'에 우리가 함께 움직여 주고 즐겨 주고 장단 맞춰 주고 함께 어리얼싸 도래춤을 춰줘야 하는가?
로마 천주교가 신교의 엄마이고 젖줄인가?
천만에! 우리의 모교회는 하늘 예루샬렘일 뿐이다. 우리의 어머니라면 성경 말씀이고 성령님일 뿐이다. (성령님이 여성이란 의미는 아니다.) 천주교회를 어머니교회로 여기는 사람들은 앞으로 언젠가는 마리아도 '어머니'/여신,('성4위일체'의 제4위)으로 받들 날이 올지 모른다. 천주교가 그런 방향을 추구해 가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천주교를 부정하면, 교회의 뿌리를 통째로 부정하는 양 여기는 신교 '신학자'나 '역사가'들이 흔하다. 자기정체성 혼동 현상이랄까.
성경이 말하는 바 우리가 수시로 기념해야 할 전통적 관행이란 성만찬 밖엔 없다. 그것은 침례(세례)와 함께 교회의 아름답고 은혜로운 경배의식의 일부이다. 이와 함께 교회는 마땅히 다양한 은사들의 활용, 신유와 악령 내쫓기, 빈민/고아/과부 돌봄 사역도 해야 하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과 사도들, 초기교회가 맨날 하던 사역이 그런 것이다.
교회는 걸인/주정뱅이/마약중독자/성매매자/동성애자/성전환자 등도 기꺼이 사랑으로 받아들여 거듭나게 해 주는 곳이어야 한다! 그들도 다 죄인이다. 우리도 거듭나기 전엔 그들과 대동소이했다. 그러나 그런 사역을 꺼리다 못해 추하게 심지어 추악하게 보는 게 오늘날 교회 풍토다. 화려한 명절/절기 지킴이는 될지언정.
교회는 야코보의 교훈대로 목회자들을 비롯한 장로들은 환자 교우들을 기름 부어 병 고침의 은총을 누리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사제/목사/장로들은 그런 섬김이보다는 명예와 특수 '파워', 또는 돈 많고 신력(信歷) 끈이 긴(?), 계급사회의 일원들이 되어 있다.
바른 교회는..전통과 명절이나 꼬박꼬박 지키고, 교우들이 피땀 흘려 바친 헌금이라는 막대한 예산을 들여 행사나 거창하게 치르는 프로그램 장이 아니다.
죄인들이 몰려 들고 변화 받아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는 곳이어야 한다.
교회는 전통과 절기지킴이가 아니라 주님의 고난을 기념하되, 그 살과 피를 기념하는 곳이어야 한다.
늘 하는 말이지만, 교회는 성경이 가는 곳까지만 가고 멈추는 데서 멈춰야 올바른 교회이다.
사순절 묵상과 관상
천주교 계열은 물론, 신교에서도 사순절을 위한 특별 명상집, 묵상모음을 내놓곤 한다. 거기 적힌 명상문들을 그 자체가 성경구절이라도 되는 양 깊이 묵상하고 천주교의 미사 경문이나 의식문처럼 낭송하기도 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일종의 간증 같은 개인의 나름 해설이다. 그런 것들이 훗날 'QT'나 '디보션'으로 발전했다.
이런 명상 방식은 주로 천주교의 '렉치오 디비나' 관행에서 왔다. 물론 사역자들이나 신학자들의 생각들을 간추린 것과도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요즘 묵상 다수는 관상(觀想) 영성을 시사하거나 강요하는 내용들이 흔하다.
사실은 관상 영성 대부분은 사순절 전통에서 비롯됐다. 관상 자체가 수사들에게서 비롯된 영성 관행인 데다 사순절의 금욕 및 묵상 관행과 상통하기 때문이다.
수도원적 청빈 사상이나 금욕 관행처럼 관상이나 관상기도, 향심기도 등은 성경적인 뿌리가 없는 비성경적적 영성훈련이다. 모두 천주교에서 유래된 것이다.
관상이 있는 곳에는 으레 예외 없이 종교다원주의가 있다.
현금에 관상이 세계 교계에 만연하고 있음은 장차 뉴에이지 중심의 세계 종교 단일화의 기미처럼 보인다.
하나님은 주님 오시기까지 평생 사순절을 잘 지켰다고 내세에 '사순절 지킴이 특별상'이라는 시상을 따로 하시지 않는다.
사순절이 성경적 신자들 또는 신교의 사순절(死殉節)이 되지 않기를 열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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