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묵상연구/요한복음묵상

하늘/땅 차이(요한복음묵상16)





 
요한복음서 3'10-13

   "..'그대는 이스라엘의 교사이면서 이런 것들을 알지 못하오? 
참으로, 참으로 그대에게 말하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우리가 본 것을 증언하오. 그러나 그대들은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를 않는구려. 
내가 땅엣것을 말해도 그대들이 믿지 않거든, 하물며 하늘 것을 말하면 어찌 믿겠소?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인자 밖에는 하늘로 오른 자가 없다오." 




니코데모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구중궁궐과도 같이 점점 오묘해지고 깊어집니다.
그럴수록 니코데모의 의문도 언덕을 구르는 눈덩이처럼 커져만 갑니다. 

   "어,어떻게..그,그럴 수가.." 
커다란 의문부호만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웁니다.

우리는 니코데모가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대 학자로서 이스라엘 민중의 교사였고, 종교의회인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입니다. 말하자면, 당대 최고 지성이자 권력층의 한 명이지요. 

그런 그가 이 젊은 라삐, 예슈아 하 마쉬앟(=예수 크리스토) 앞에서 그지없이, 한없이 무력해지는 듯한 자신을 느낍니다.
자괴감에 빠집니다.
맥이 풀립니다.
왜 그런지조차 의아스럽습니다. 

돌아 보면, 오늘 밤 이 분을 만나 말문을 열던 첫 순간, 상대방의 기이한 동문서답형 답변(?)부터가 황당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니코데모는 뭔가 자신의 물음으로써 대화가 풀리길 기대했지만, 이상스럽게 끌려 가고 꼬이면서(?) 계속, 완전히 오리무중에 빠져 가는 느낌입니다. 

지금껏 쌓아 온 자신의 풍부한 성경 지식과 모든 심오한 학식, 유대 민중을 이끌어 온 빛나는 경력의 드높은 상아탑이 한꺼번에 무너지고, 퇴색되고 초라해지는 감을 면치 못합니다. 
그만큼 예슈아의 거대한 진리의 벽이 자신을 가로막고 덮쳐 오는 느낌입니다.
넘으려야 도저히 넘어 갈 수 없는 거침돌처럼.  

  "왜 내가..이 젊은이 앞에서 이러는 걸까? 왜 이럴 수밖엔 없는 건가? 내가 뭔가 잘못돼 가는가? 아니면 저 사람이 뭔가 잘못돼 있는 것인가?"

니코데모 의원은, 그러나 계속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의 의문이 크면 클수록 위엄과 권위에 가득 찬 상대방의 말은 천 근 만 근 무게로 가슴을 짓누르는 듯 숨막히게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오묘해져서, 턱이 절로 내려가 입이 좀체 다물어지질 않고 한 마디도 거들거나 답변할 수 없어, 다만 마냥 듣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두 눈만 껌벅이고 있습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그러다 할 말이라곤, "어찌 그런 일이.." 라고 되뇔 뿐인 그에게, 라삐 예슈아는 기다렸다는 듯 묻습니다. 
   "그대는 이스라엘의 교사이면서 이런 것들을 알지 못하오?"

참으로, 당황스럽습니다.
지금껏 이스라엘의 스승으로 자임해 보지 않은 적이 거의/별로 없는데..응당 백성의 지도자로서 행동해 왔는데, 오늘은 '라삐'라는 말이 너무도 걸맞지 않아 뵙니다.
부끄럽다기보다 자신이 왜 현재 라삐인지조차 멍하니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사실..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듭남, 또는 위로부터 태어남에 관하여 니코데모에게 일말의 관심이 있었다면 대강이라도 알 수 있었을 터입니다. 

왜냐 하면, 고대로부터 이스라엘 지도층은 성령님을 통한 "새 사람 되기"를 체험한 사례가 있어 왔기 때문이죠. 비록 온전히 거듭나 성령님이 내주(內住/dwell-in)하시게 된 것은 신약시대인 오순절 이후이지만, 모쉐 같은 지도자들과 이스라엘 장로 70인들, 사제/대언자(선지자/예언자)/판관(사사)/성경기자들 등에게 성령의 기름부음과 영감이 임하여, 그들이 새 사람 되는 예가 있었지요.

예를 들면, 슈무엘(사무엘) 시대에 샤울은 왕이 될 준비과정으로서 하나님이 영이 임하자 ,새 마음을 받아 새 사람이 됩니다(슈무엘A=삼상 10'6,9). 과거와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샤울은 곧 교만해져 불순종함으로써 성령님이 떠나고 대신 악령이 그 속에 작용하기 시작해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마치지요.

그밖에도 수많은 지도자들이 성령님께 감화를 받아 사람이 변화하는 과정을 겪곤 했습니다. 그러므로, 니코데모가 정말 성경에 밝다면 과거 이런 변화 과정 사례를 충분히 익히 알고 있어야 했건만, 그것과 주님의 말씀을 서로 연결시키지 못한 모양입니다. 

또한 메시아가 나타나 사람들이 변화 받고 새로운 백성이 될 것을 구약의 대언자들이 다양하게 예언한 데 대해서도 그는 미처 깨닫지를 못했습니다(예:  이르미야=예렘 31'33,34; 32'38-41, 에제키엘=에스겔 11'16-20; 36'25-27; 37'1-10,14, 39'29, 다니엘 12'2,3, 호세아 14'5-7, 요엘 2'28,29, 미카 6'7, 제파니아=스바냐 3'17, 말라키 3'1-3). 

왜냐하면, 니코데모 역시 일반 유대 민중처럼 정치성 메시아를 추구해 왔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므로  "그대는..이런 것들을 알지 못하오?"라는 주님의 물음에 아무 대답도 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은 그의 정곡을 찌르신 것입니다. 

그러나 니코데모를 비롯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이처럼 모르는 것을 아는 듯 가르치고 논하는 무지를 범하는 동안, 주님께서는 언제나 성령으로 아시는 것과 보신 것을 증언해 오셨습니다. 주님께서 모르시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지금 니코데모의 마음 속까지 꿰뚫어 보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런데도 유대 지도자들은 늘 아는 체를 하면서 교만하여, 자신들은 모르되 예수님이 아시는 그것을 알려고 들지를 않습니다. 주님의 증언을 도무지 받아 들이지를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은 "나자렡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냐?"라는 흥흥 코웃음을 치며 주님을 속으로 깊이 업신여길 뿐더러, 외식과 겉모습으로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면서, 비진리를 진리보다 더 사랑했기 때문이죠.

그들은 주님이 땅엣것을 말씀하셔도 쉽게 받아 들이지 않았기에, 하늘 것을 당연히 믿을 리가 없었습니다. 비진리로 충일(充溢)해지면, 진리가 들어갈 구석이 없어지죠. 
그래서 주님과 그들의 차이는 하늘과 땅 사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이제 정말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인자 밖에는 하늘로 오른 자가 없다오."

   
무슨 뜻입니까? 
지금껏 아무도 가장 높은 셋째 하늘에 올라간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오직 하나님의 아들 곧 성자(聖子)님 자신 뿐입니다. 
이것은 우선 예수님이 성자님이시라는 뜻이며..
둘째로는, 그 분은 이미 구약 시대 때 하늘-땅 사이를 오르내리시며 아브라함, 야콥, 모쉐..같은 성도들을 만나시고 계시를 주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참고: 요한복음서  ). 이에 관한 더 상세한 것은 필자의 글 '예수 승천은 딱 한 번?'을 읽어보기를 독자에게 권합니다. 

셋째로는, 구약 성도들이 가 있던 낙원 곧 '아브라함의 품'은 주님의 죽음-부활 전까지는 영옥(퓔라케)에서 구릉너머 건너 편에 있었다는 얘기가 될 수 있습니다(참고: 마태복음서 27'52,53; 루카복음=눅 16'22,26; 페트로A서=벧전 3'19,20). 


주님은 아울러 영원 전부터 하나님으로서 선재하셨음을 여기서 입증하고 계십니다. 한 마디로 니코데모에게, 그와 지금 대화를 나누고 계신 분이 곧 성자 하나님이심을 은근히 암시하고 계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니코데모가 얼마나 깨달았는지는 의문입니다만. 

니코데모가 대화를 나누는 상대는 다름 아니라, 영원 전부터 살아계신 성자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얼마나 가슴 벅차고 놀랍고도 두려운 사실인지요!

여러 세기 전 천사들을 거느리고 아브라함을 직접 방문하셔서 대화를 나누시던 그 하나님은(창세기 18장 참조)..아브라함의 수 십 대 후손의 한 명에 불과한 니코데모와도 이 한 밤, 그 분이 지으신 별빛 아래 대화를 나누고 계신다는 말이지요. 할렐루야!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신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거듭난 성령의 사람은 실로, 세상이 알지 못할, 바람 같은 사람들입니다. 

언젠가 니코데모도 그런 사람이 됐을 것이라고 우리는 상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