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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시편

강가의 시인처럼(시137 묵상)




강가의 시인처럼(시137 묵상) 

-바벨론 포로기의 슬픔


 

김삼


시편 제137편

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2 그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3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4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5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6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 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7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버리라 헐어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버리라 하였나이다

8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9 네 어린 것들을 바위 위에 메어치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개정역 한글 성경에서 인용)

 


주전(BC=before Christ. 크리스토 탄생 이전) 약 586년. 

남 유다 왕국의 수도 예루샬렘이 바벨론 나라 군대 앞에 완전히 무릎을 꿇었습니다. 구약성경 왕들B(열왕기하)서 25장 기록을 보면, 유다 왕국의 마지막 임금인 제더키야(한글성경 표기: 시드기야)의 통치 제 9년에 바벨론 왕 네부칻네자르(느부갓네살)가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수도권 주변의 성에 진을 치고 약 2년 간 포위한 끝에, 예루샬렘 성 안에 양식이 끊어지고 성벽이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자 유다 왕 제더키야는 호위하는 군대를 데리고 도망가려고 시도했으나 그만 바벨론 군대에게 잡혀 바벨론 왕에게 끌려가서 심문을 당한 끝에, 왕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고 왕은 두 눈을 뽑히고 구리 사슬로 결박된 채 바벨론으로 끌려 갔습니다. 참으로 비참한 결말이었죠. 

이어서 바벨론 군대는 예루샬렘 성전과 왕궁, 모든 귀족들의 집을 불살라 버리고 예루샬렘 둘레의 성벽을 다 헐어버리고, 또 왕족들과 신하들, 귀족들과 모든 예루샬렘 시민들, 항복한 사람 등을 몽땅 바벨론 땅으로 사로잡아갔으며 가난한 평민들만 포도원지기로 남겨 두었습니다. 또 예루샬렘 성전의 구리로 된 기둥과, 금/은/구리 등 각종 금속으로 된 모든 성전 기구들을 몽땅 다 바벨론으로 가져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왕들B 24장을 보면, 이보다 몇 년전 그러니까 전왕인 예호야킴(여호야김) 시대에 이미 네부칻네자르가 쳐들어 와 왕을 굴복시켰으나, 예호야킴이 3년 후 바벨론을 배신하자 그 아들 예호야킨(=여호야긴, 코니야)이 왕위에 오른 지 불과 석 달만에 다시 바벨론이 침공해 예루샬렘을 포위한 뒤, 왕과 왕의 어머니, 신하들과 지도자들, 내시들과 함께 사로잡아가고, 성전과 왕궁의 모든 보물을 다 빼앗고, 솔로몬 당시에 만들었던 성전의 금그릇도 다 파괴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예호야킨 대신에 세운 임금이 그의 숙부인 제더키야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바벨론에게 연이어 점령 당하고 점점 멸망되어가면서도 유다 왕들이 그나마 3대째 근근히 명맥을 이어간 것은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왕들은 끝끝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또 하나님이 부리신 전승국이자 종주국인 바벨론을 배반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루샬렘을 그냥 내버려두어 몽땅 망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 후 70년간 유다 사람들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다가 나중에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가 36년간 일본의 압제 밑에서 지낸 것의 약 2배를 남의 나라에서 지낸 것입니다. 

 

또한 이보다 약 200년 전인 주전 700년대엔 북 왕국인 이스라엘도 계속 우상숭배를 하다가 비슷한 처지를 겪었습니다. 수도 쇼므론(사마리아)이 아쑤르(아시리아) 나라에 함락 당하고, 왕과 왕족들이 아쑤르 나라에 사로잡혀갔습니다. 아쑤르는 이스라엘 땅에다 타국 사람들을 데려다 놓아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혼혈족이 되어버렸습니다. 훗날 유대인(유다 사람)들이 쇼므론 후손들을 대대로 개 같이 취급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지요. 



아무튼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이 시 137 편은 바벨론에 갓 포로로 잡혀간 초기를 묘사했는데, 예루샬렘 성전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느라 수금을 켜면서 음악으로 하나님을 기리던 찬양대원들[각주:1] 가운데 한 명이 과거를 회상하며 쓴 시의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는 동료들과 사로잡혀 가면서 너무나 슬프고 분하여 바벨론의 이런저런 강가에 앉아서 쉴 때마다 예루샬렘의 찌온(시온) 곧 다뷔드 성을 생각하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바벨론 사람들이 노래를 한 곡조 듣고 싶다며 성전에서 부르던 곡조를 불러 보라고 청하자, 들고 다니던 킨노르(수금/手琴)를 아예 나무 가지에다 걸어 놓아 버립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사람들이 가끔 노래방의 가라오케 앞에서 흘러간 추억의 옛 노래를 부르는 동안 박자를 맞추고 흥을 돋우듯, 바벨론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성전음악가들에게 노래를 청하니까, 이들은 너무나 원통한 나머지 악기를 걸어놓고 땅에 앉아 들은 척도 하지 않은 것이죠. 원수들 앞에서 하나님의 찬양음악을 연주하느니 차라리 내 손이 재주를 잊어버리고 또 혀가 입 천장에 붙어버리기를 바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찬양하던 절개를 꿋꿋이 지키겠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면서 마음 속으로는 예루샬렘이 멸망 당하던 때를 기억합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고 제사를 드리던 그 화려했던 솔로몬 성전이 다 헐리고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되어버렸는 데다 그 옛날 아브라함 때 피를 나눈 (에서의 자손인) 에돔 사람들은 "헐어버려요, 헐어버려! 바닥까지 싹 다 헐어버려요!" 하고 옆에서 저주를 퍼붓던 사실을 생생히 기억하면서 통분해 합니다. 주르르 눈물도 흘러내립니다. 



이 시인은 그러나 여기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하나님의 긍휼/온정과 권능으로, 원수 나라인 바벨론 왕국이 망하고 자유를 되찾을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유다를 기억하시고, 포로생활에서 돌이켜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실 그 날을 희망 속에 바라보고 있습니다. 


옛 이스라엘 선조들이 광야에서 헤매던 40년보다 30년이나 더 긴 7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유다 사람들이 바벨론에서 어떻게 지냈냐 하는 것은 구약성경 다니엘 서나 하까이(학개) 서, 제카리야(스가랴) 서 등에서 엿볼 수 있고, 70년이 지나고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다시 고국에서 조금씩 회복하며 지내던 삶은 구약 성경의 에즈라, 네헤미야 서 등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유다 나라를 그처럼 타국에서 고통 당하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이 택하신 선민인 이스라엘도 우상숭배를 계속하다가 먼저 북 왕국이 멸망 당해 버리고 유다의 직계 자손들과 벤야민 지족(지파)으로 이루어진 남쪽 왕국인 유다 사람들도 우상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반했기 때문이죠. 

유다 사람들은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쑤르에 망해 버린 것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마땅했건만, 그러지 않고 계속 꾸준히 하나님보다 우상을 더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대언자들을 통하여 그들을 경고해 오셨지만 그들은 들은 척 만 척 했습니다. 그들의 이 끈끈한(!) 우상 사랑이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한 것이지요. 



자, 이 비참한 양대 멸망 사건과 이 시인의 처신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뭘까요? 


첫째로, 우리 삶 속에서 우리의 창조주,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내버리면 택한 사람들도 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 분은 죄 가운데 살던 우리를 선택하시어 주님을 통하여 구해 주셨지만,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이 있어서..가족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내 자식을 더 사랑하고, 이성 친구를 더 사랑하고, 돈과 옷을 더 사랑하고, 세상 명예와 온갖 유행, 볼 거리나 먹거리, 환경과 이 세상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면, 우리는 끝내 버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텔레비전이나 컴퓨터/인터넽 등을 성경 말씀보다 더 사랑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의 양심에 영적인 자극과 찔림이 오고 경고가 올 때 뉘우치고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장 우위에, 최상위에 모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하면서 하나님을 점점 멀리하는 유다 나라를 경고하시다 못해 그냥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그러실 수 있습니다! 이 두려운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사실상의 우상숭배를 뉘우치지 않고 계속 곁길로 가면서 점차 "불도장 찍힌 양심"이 되어가는데도 하나님이 우리를 "강제로" 손잡아 이끌어 주시진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의 가족을 주님,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감히 그 분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경고하신 바 있습니다. 우리와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보다 더 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위를 바라보며, 위엣것을 찾으며 살아야 하는 인생입니다. 땅엣것을 내려다보거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허송세월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는 세상과 거기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경고해 줍니다[각주:2]. 우리가 세상의 잃어진 불쌍한 영혼들을 사랑해야 하지만, 세상 자체와 세상의 온갖 좋아뵈는 것들을 사랑하다간 하나님과 주님을 놓치기 쉽습니다. 


이거, 위험하죠! 정말 위험합니다. 

하나님과 주님을 잊어버리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위험보다 더 위험한 상황입니다. 

주님은 창고 속에다 먹거리를 잔뜩 쌓아두고 배를 두드려 가며 혼자 잘 먹고 잘 살려던 한 부자에게 하나님께서 "이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 밤 네 영혼을 되찾을 테니 그럼 네 것이 다 뉘 것이 될까?"라고 물으셨다는 무시무시한 훈계의 이야기를 들려 주셨지요. [각주:3]   


 

우리 크리스천이 이 어리석은 부자처럼 되어선 안 됩니다. 

하나님보다 내 입과 배를 더 높여선 안 됩니다. 

우리는 마땅히 내 모든 것들보다 하나님을 더 중요시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심지어 내 목숨보다 더 주님을 사랑해야만 합니다.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텔레비전이나 컴퓨터에 탐닉하고 세상 즐거움에 도취하느라 하나님을 잊어버려선 안 되겠지요. 주말 연속극이나 개그 쇼, 또는 친구와의 문자 대화에 푹 빠져 있다가 기도도 전혀 하지 않거나 주일날 경배(예배)시간에 상투적으로 늑장부리며 지각하는 것-이런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 못 됩니다. 하나님을 힘과 정성과 목숨을 다해 사랑하는 태도가 아니죠. 

찬양대나 주일학교를 들쭉날쭉하며 매 주일 지각하거나 자주 결석하는 행동도 하나님을 목숨처럼 사랑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이런 위험한 매너리즘에서 우리는 벗어나야 합니다. 


잃어진 영혼을 전도하여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을 전혀 지키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는 삶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크리스토님을 부끄러워 하면 주님도 우리를 "부끄러워" 하실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그것은 결국, 내 체면이나 낯을 주님보다, 잃어진 영혼보다 더 아끼고 사랑하는 행동입니다. 

 

이 모두가 우상숭배와 다름없는 행동입니다.

우리는 마치 점점 끓는 솥 안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서서히 죽어가는 개구리처럼 살아선 안 됩니다. 죄와 쾌락, 향락에 면역이 되고 마비가 되어 살아선 안 되겠습니다.  


마귀는 택한 성도인 우리라도 삼키려고 호시탐탐 노리며, 사자처럼 으르렁거립니다.

때로는 최고의 황홀한 미소를 지으며 빛나는 천사처럼 다가옵니다.   

또 우리 보기에 온갖 "좋은" 것들을 보여 주고 갖다 주어 우리를 온통 녹이려고 합니다. 

우리를 마비시키고 무장해제 하려고 듭니다. 

이런 마귀의 '플래시보' 효과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마치 요나를 삼킨 큰 물고기가 그 위액으로 요나를 녹이려 하듯, 이 세상은 우리를 에워싸고 우리를 녹이려 듭니다. 거대한 용광로처럼 우리를 용해시켜 버리려고 합니다.  


깨어납시다! 일어납시다!

주님이 사르디스(사데) 교회에 경고하신 것처럼 우리는 지금 당장 일깨어야만 합니다(요계 3'2,3). 얼마 남지 않은 죽어가는 목숨이라도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서 도둑 같이 임하실 수 있습니다. 그 분의 재림이 임박합니다. 


이처럼, 우상 앞에 절하는 적극적인 우상숭배만 우상숭배인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내 모든 것보다 더, 힘써 사랑하지 않는 것도 소극적인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을 내 삶의 최우위에 모시되, 마음과 힘을 다해 목숨을 다해 그 분을 사랑합시다!  



둘째로, 이 시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뭔가요?

그것은 이 시인이 강변에 앉아 옛 찌온을 추억하듯, 우리는 하나님을 앗차 하고 잊어버릴 때마다 돌이켜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던 첫사랑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요계 2'4,5). '초심'을 잃지 말고, 그 시절로 언제나/수시로-날마다, 때마다 시마다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통한 속에 눈물을 머금듯, 우리도 주님을 잊어버리거나 그 분을 섬기기에 게을리 한 데 대해 아픔과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아무래도 늘 말씀 묵상과 기도에 치심해야겠지요.  

주님께서는 소 아시아 7 교회 중 에페소 교회에게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하고 회개하여 첫 행위를 가져라"고 하셨습니다(요계 2'5b). 

우리가 이 경고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주님은 우리에게서 그 분의 빛난 등대(한글 성경의 '촛대')를 옮겨 버리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남는 게 뭘까요? 칠흑 같은 어둠 뿐이겠지요..헐~!



셋째로 우리가 이 시편에서 얻는 교훈은, 시인이 원수들 앞에서 찌온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며 절개를 지켰듯, 우리도 세상 앞에 노래를 해선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신자들이 멋모르고 세상의 적들 앞에서 '찌온의 노래'를 함부로 불러제끼곤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불러 바쳐야 할 찬양을 마귀 세상을 향해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 찬탄하고 온갖 찬사를 보내면서도 하나님께 찬양 드리길 아까워 한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한다면, 크리스천으로서 세상이 좋아하고 세상 사람들이나 즐길 행동을 취하는 셈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정욕 때문에 요녀 데릴라에게 속아서 머리털을 밀리우고 두 눈알을 뽑힌 채 적국인 풸레쉩(블레셋)의 주민들 앞에서 재주를 부리며 어릿광대 노릇을 하던 쉼숀(삼손)처럼 말입니다(참고: 판관기=삿 16장).  


하나님께만 바쳐야 할 찬미의 예물은 하나님께만 바쳐야 옳습니다.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할 영광과 기쁨을 세상이나 세상 사람들에게 돌려선 안 됩니다. 헤로드 왕처럼 하나님의 찬미와 영광을 가로채는 자들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행전 13'21~23). 

크리스천이 세상 것들을 향해 감탄하고 갈채하고 있으면, 당연히 하나님은 질투하십니다.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 주어봤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더러운 세상에다 거룩한 찌온 노래를 뿌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에 복음의 씨를 뿌리는 작업만은 지속해야 합니다.


 

끝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최후에 원수 갚아 주실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보복과 응징은 하나님의 심판에 달려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의 철천지 원수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그 졸개들인 악령들과 세상 사람들을 시켜 우리들을 괴롭힙니다. 마귀와 악령들이야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적해야겠지만, 세상의 잃어진 영혼에게 우리는 직접 원수를 갚아선 안 됩니다! 세상의 일반인들, 비신자들이라면 모를까, 신자인 우리들은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아무리 괴롭히고 혐오하고 저주해도, 우리는 맞서서 그들에게 대항해선 안 됩니다. 

율법과 '푸림'(Purim)의 정신을 의존하는 유대인들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직접 원수 갚기를 기대하지만, 주님께선 우리에게 오히려 원수를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고 하십니다. 그리함으로써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올려 놓은 듯 뜨뜻하게 만들라고 하십니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달린 문제입니다. 우리가 직접 갚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그 분을 잡으러 겥세마네 동산에 쳐들어 온 원수들을 향해 제자 페트로(베드로)가 검을 빼어 그중 말쿠스(말고)의 한 쪽 귀를 잘라 버리자, 페트로에게 "네 검을 도로 집어넣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니까, 순교자들의 영들이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의 피를 갚아 주지 않으시길 언제까지 하려 하십니까?"고 억울함을 호소합니다(요계 6'10).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면서 "아직은 잠깐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그 형제들도 그들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채워지기까지"라고 답하셨습니다.   

정해진 순교자들의 숫자가 다 채워지기까지 하나님은 심판과 응징을 유보하고 계시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다림 기간동안 우리는 더 많은 영혼들을 건져내어 크리스토님께 이끌어야 할 터입니다. 설령 그러다가 우리가 목숨을 잃어도 말입니다. 주님의 복음 때문에 우리의 목숨을 잃더라도 나중 부활로써 되찾을 것이며, 옛 순교자들처럼 주님께 흰 두루마기와 영원한 상급을 받고 영생 복락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는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원수에게 직접 보복을 하려고 나서거나 원한을 속에다 "꿍쳐 놓고" 끙끙 앓을 필요가 없습니다. 되레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의 잃어진 영혼 찾기에 더 골몰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 자신도 독자들 모두와 함께 그러기를.. 아멘. 

 

이 시 137편 말씀이 오늘을 사는 우리를 다잡아 주는 교훈이 되길 바랍니다.  

 

 

 

  1. 구약에서 '노래하는 사람'(또는 가창자)들로 불렸다. 이들과 궁중 세속음악인들인 '노래하는 남녀'(가수들)와는 엄격히 구분돼야 한다. [본문으로]
  2. 요한A서(요일) 2'15~17 [본문으로]
  3. 루카복음서(눅) 12'16~2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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