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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시편

시 51:11, 신약적으로 풀어야




시편 51:11, 신약적으로 풀어야




주님 앞에서 저를 내치지 마시고, 주님의 성령을 거두지 마소서!

                         (시편 51'11, 사역).  




시편 51'11을 있는 그대로, 구약적으로 풀려는 설교자들이 적지 않다. 

우리도 다뷔드(다윗)처럼 큰 죄를 지으면, 문자 그대로 성령이 떠나실 수 있다고 주장하곤 한다. 


그러나 신약 시대엔 죄 나름이다. 크리스토(그리스도)님을 정면 부인하는 죄가 아니라면, 또 성령님을 훼방한 용서받지 못할 죄가 아니고, 양심에 불도장 찍힌 상태가 아니라면, 성령께선 쉽게 떠나시지 않는다. 

더군다나 신약시대는 회개하기 나름이다. 물론 참된 회개를 말하는 것이지만.



다뷔드는 구약인이지, 신약인은 아니었다. 다만 선지자로서, 성령 안에서 미래를 내다본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자신이 시편을 기록한 당시와 훗날의 성령님의 활동 패러다임이 다르다는 것을 그가 영적으로 느꼈을 터이다. 


다뷔드가 이 대목을 쓸 때, 그는 자신의 선배 군주인 샤울 왕의 전철을 기억하고 있었음에 거의 틀림 없다. 샤울도 당초 왕이 되기 전에 다뷔드처럼 기름 부음을 받고 새 사람이 되었으나(슈무엘A=삼상 10'9), 하나님께 계속 불순종하고 마귀에게 마음 자리를 내 주면서 결국, 성령께선 떠나시고 악령에게 들씌워졌다(슘A 16'14). 하나님께 내침을 당하고 버림받은 나머지 악령에게 시달리다 급기야 전장에서 부상 당한 뒤 비참하게 자살했고, 자식들도 함께 쉐올(스올)로 향했다. 





다뷔드는 밭쉐봐(밧세바)와 간음 죄를 짓고는, 샤울처럼 될까 봐 심히 두려워했다. 성령이 떠나시면 자신도 샤울처럼 악령의 밥이 되어 결국 비참한 존재로 나락될까 봐 전전긍긍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뷔드의 그 참된 회개와 애통 때문에 그를 긍휼히 여기시고, 떠나시지 않았다.  


이처럼 구약인들은 하나님 면전(面前/풰니엘)에서―코람데오(Coram Deo)―두려워 떨며 살았다. 그래서 다뷔드처럼 중대한 죄를 지으면 바로 그 하나님 앞에서 내어침을 당할까 두려워 했다. 성령이 떠나실까봐서였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 영원히 버림 받음을 뜻하기에. 



설교자가 이 구절을 해석할 때 기본적으로 염두에 둘 일은 우리는 다뷔드와 달리 신약인들이며, 거듭난 신약인들 속에는 성령님이 내주(內住/indwell)하신다는 사실이다. 성령께서 교회 위에 기름을 부으신 후로, 그 분은 각 신자 속에 영구히 머물어 계신다(요복 14'16). 

다뷔드는 구약인이었기에 성령님이 사역적으로 임재했을 뿐, 내주하시지는 않았다. 

그것이 신약 시대가 구약 때와 다른, 심히 중요한 차이점의 하나이다! 


그런데도 구약인과 신약인들의 이 중요한 차이점을 설교자들이 잊어버리곤 한다. 

관점의 부족, 더 나아가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사고의 부족 탓이다.  



심지어 어떤 설교자는 이 구절을 은근히 신자들을 위협하는 데 쓰기도 한다. 죄를 지으면 성령께서 떠나시니까 "까불지 말고" 몸조심하라는 식이다. 교회(성당 및 바티칸)를 떠나면, 성령도 떠나니까...라는 식으로 천주교에서 흔히 쓰는 비슷한 논리의 하나이기도 하다. 과연 천주교를 떠나면 성령도 떠나는 것인가?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천주교를 믿지 않거나 천주교에서 개종하는 사람들도 모두 성령을 잃은 존재라는 논리가 돼 버린다! 과연 그런 논리가 진리가 될 정도로 천주교가 참된 교회였던가? 


성령이 개인에게 머물어 계시고 떠나시고의 여부는 설교자의 말에 달린 것이 아니다. 

한 신자에게서 성령이 떠나실지 여부는 성령님 자신이 아시고, 결정하시고, 실행하신다! 



자, 그렇다고 해서―성령이 영구히 내주하신다고 해서―우리는 다뷔드처럼 마구 죄를 지어도 되는가?

웬만한 죄는 다 봐 주시니까, 단지 추후 회개하기만 하면 다 되는가? 

그건 죄를 짓기 위한 적당한 빌미 또는 구실이 못 된다.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서에서 이 점에 관한 중요한 포인트와 힌트들을 제공해 주고 있다. 


"우리가 말로는 하나님과 친교한다면서 어두움 속에 살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지 진리를 실천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그 분이 빛 가운데 계시듯 우리도 빛 가운데 살면, 우리는 서로 친교하는 것이며, 그 분의 아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줄 터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자신을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그 분은 신실하고 의로우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로부터 우리를 깨끗게 해 주실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하나님을 거짓말쟁이 삼는 것이니, 그 분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않을 터입니다"(요한A서=요일 1'6~10 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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