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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슈/영적싸움 도우미

부록/ 로잔운동권의 영전무용론(영적싸움도우미시리즈5)







현대 영적 전쟁관 이해는 선교학(missiology) 또는 선교신학(missional theology)과 다소의 관계가 있습니다. 
긍정적 관계와 부정적 관계가 있습니다.
여기선 후자의 관계만 다루렵니다.


성경적인 영적 전쟁관을 마치 불필요한 양 주장하는 선교학자들이 있다고 시리즈에서 앞서 이미 비친 적이 있지요.

여기, 두 가지 가능한 이유가 있을 터입니다.


    첫째는..성경적인 영적 전쟁의 개념을 잘 또는 미처 몰라서.
    둘째는..성경적인 영적 전쟁을 무시해야 할 모종의 어젠다가 있어서.


로잔(Lausanne) 운동의 경우, 주로 둘째에 해당합니다. 그들은 다양한 연구와 그 보고서를 통해 이미 영적 전쟁관에 대한 모든 노출을 거쳤고, 알 만큼 알기 떄문입니다.

로잔운동에 관해선 긴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독자가 직접 관련 자료를 찾아 보시고요.
한 가지 귀띔할 말은..로잔의 배후엔 '신교 교황' 격인 빌리 그래엄이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존 스토트 같은 사람들의 지대한 사상적/신학적 영향을 받아 왔습니다.


로잔운동은 1974년 세계복음화국제의회(ICWE)로 시작했고 이것은 '로잔 1(= one)'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 운동은 세계선교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선교사/전도자/신학자들 등 세계선교운동에 관여된 다수 인사들은 로잔의 입장을 지지하거나 수용해 왔지요.

이들은 신학적 기초와 실천적 결과 사이에 균형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보다 중요한 것은 성경 진리 자체이지요!

'로잔 1' 30년 후인 2004년 9월 29일-10월 5일, 타일란드 파타야에서 열린 2004 세계복음화 포럼에서 '새 비전, 새 심령, 새로운 소명 2'라는 두꺼운 3권 1질로 된 보고서 겸 의정서가 발표됐습니다. 이것은 30년이 지난 뒤 선교 실천자/신학자들의 한 세대가 바뀌었음을 뜻합니다.

로잔 I 이후 선교지평은 에큐메니즘과 종교다원주의, 글로벌리즘 등이 한껏 반영돼 왔을 것은 거의 당연한 이치입니다.
더욱이 이들은 스토트의 성경해석에 따라, 가는 선교, 뛰는 선교와 함께 '보내는 선교', 또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등의 개념을 중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언뜻 신본주의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실은 전통적 선교의 개념을 술에 물탄 듯, 물에 술탄 듯 희석시키는 묘한 효과가 있지요.

이와 함께 중남미 지역 현실 반영 등을 통해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르네 파딜라(중남미), 사무엘 에스코바르(스페인) 등이 이에 근거한 선교신학을 발전시켰습니다. 특히 기독론(Christology)과 선교론을 강하게 결속시키는 이론들이 자주 대두됐습니다.
물론 그런 방향은 성경적 입장에서 볼 때 늘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에스코바르 박사는 전도는 행전 시대로 돌아가 복음진리의 권능과 성령의 권능,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전도자들의 삶의 질 외에 다른 힘이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학자들이 이런 말을 하는 의도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아시아에서 우리의 주의를 끄는 선교신학자는 아짙 페르난도 박사입니다. 그는 선교신학과 기독론을 밀접하게 연결시켜, 예수님의 겸손/섬김/수난/온유/희생 등이 주님의 전도 스타일이었다고 말하면서, 그런 전도는 십자군 개념의 전쟁 스타일과 반대된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역시 우리는 알 필요가 있습니다. 

아시아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중세 서구 선교의 개념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지녀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십자군 전후시대 카톨맄 포교 형태가 늘 식민지 정복형이기가 쉬웠기 때문이지요.

그런데..현대에 와서 서구의 합리주의 '목 조르기'가 느슨해지면서 신자들이 초자연적 요소 앞에 많이 노출됩니다.
페르난도는 여기서 "소위 '영적 전쟁'이라 불리는 개념"을 상기시키면서 과거 "거칠고 억센 개별주의식 개척선교" 시대 때 십자군적 영전 개념이 적용됐었다고, 사뭇 경계합니다.

이 '거칠고 억센' 개척자들은 악한 세력에 대한 승리를 강조하면서 그들의 전쟁 개념을 기독론의 온유함과 부드러움, 섬김과 조화시키는 작업이 어려웠다고 페르난도는 지적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교사역을 반대하는 모든 인간과 초자연 세력들에게 매번 이겨야 한다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페르난도에 따르면, 그래서 과거 식민지식 선교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지구촌 남반구 사람들은 이런 십자군 식 어프로치, 전도전략의 호전적 용어와 태도 등과 함께 영적 전쟁 개념에도 자연스럽게 거부 반응을 나타내기 마련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퍽 미묘한 뉘앙스를 느끼게 됩니다.
현대선교를 논하는 이들은..분명히 성경이 말하고 따라서 성경적인(!) 영적 전쟁 개념 전체(as a whole)를 무효화시키려는 어젠다를 지니고 있음을 어렴풋이 읽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들은 엄연히 성경적인 영적 싸움의 개념조차도 과거 중세의 십자군식 어프로치, 서구의 식민정책적 선교 방식과 개념의 일환으로 몰고 가려는 기색입니다. 그래서 싸워 이겨야 하는 영적 전쟁을, 어떻게 보면 예수님처럼 온유함으로써 "싸움에 좀 져 주면 더 좋지 않느냐?"는 식의 관용주의로 해석합니다.

이것은 선교나 모든 기독교 행위가 실상은 악의 세력에 대한 영적 전쟁임을 적당히 무마시키려는 의도가 로잔의 어젠다에 포함돼 있음을 시사합니다.

예수님의 온유한 이미지가 서구 선교의 호전적 이미지와 상치되므로 예수님의 이미지는 영적 전쟁과도 상치된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남동 아시아, 중남미, 아프리카 등 남반구의 타 종교들에 대한 관용이 필요하므로, "호전적"인 영적 전쟁은 포기해야 한다는 발상이지요.

이것은 영적 전쟁을 피와 몸의 싸움으로 오해하고 있거나, 짐짓 그렇게 몰아 가는 것일 수 있습니다. 
영적 전쟁을 한다고 해서 "호전적"이진 않지요.

기독교는 유일한 생명의 도리이며 절대 진리란 점에서 '종교'도 아닐 뿐더러..세계에서 가장 호전적인 종교가 있다면, 그 어느 것보다 회교나 힌두교입니다. 더욱이 자고로 '십자군적'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카톨맄교일 것입니다. 지금도 천주교는 십자군 정신을 이어 받은 '예수회', '오푸스 데이', 온갖 '기사단' 등을 통해 그들의 포교를 밀고 나가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우리의 통찰은 여기서 그쳐선 안 됩니다. 
실제로 영적 전쟁을 십자군 식으로 몰고 가려는 또 다른 쪽의 오류 세력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지요.
바로 신사도개혁운동권입니다!
우리가 이미 앞서 파악한 대로, 신사도운동권 사람들은 영적 전쟁 개념을 이용하면서도 사실 상 성경적인 영적 싸움을 뒤틀어 놓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십자군 식으로 영적 전쟁을 해야 한다고 끌고 가면서, "전진하라, 크리스천 군사들이여! 전쟁터로 향하듯"(믿는 사람들아 군병 같으니)라는 노래를 힘차게 부르면서 정복주의로 나가려는 사람들이 현대의 주권운동/신사도운동권/중보운동권/캔저스시티친교권(KCF) 사람들이기 때문이지요.

특히 이들 다수는 암암리에 카톨맄이나 유대교, 비밀집단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여기엔 '땅 밟기 식 중보/정복운동', '찌온운동'이나 소위 '성시화운동'도 개재돼 있습니다. 이들의 주변에서는 성령의 말씀의 검을 빙자한 아터 왕의 엑스캘리버(마검), 소위 '원탁회의', '기사단' 등의 호전적 이미지가 떠나지 않음을 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사도운동권 사람들만 보면, 페르난도처럼 영적 전쟁관이 오류스럽게 보일 만도 합니다.


그러나..그렇다고 해서 성경엔 영적 전쟁이 없는 겁니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영적 전쟁관조차 잘못된 겁니까?
성경에 영적 전쟁관이 있다고, 기독교가 호전적인 겁니까?
노(NO)!

로잔운동권 사람들은 스스로 의식하거나 하지 않거나 간에 성도를 무장 해제시키는 마귀 싸탄의 간계에 휘말려 든 사람들입니다.

또한 영적 전쟁은 피와 몸을 상대하고 대항하는 종교전/사상전/세계관전이 아니라..만군의 하나님과 싸탄 사이의 대결, 공중의 악령들을 상대하는 영들끼리의 싸움임을 진정 인식하지 못하는/않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또한 소위 '선교신학'을 한다는 그들이 성경 진리에 대한 인식이 제한돼 있음을 엿보여 줍니다. 참 영적 전쟁을 해 본 일이 없거나 할 필요조차 없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성경과 기독교의 영적 전쟁은 크리스토의 사랑에 전혀 배치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은 악령들에겐 적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불쌍한 인간 영혼들을 사랑하시지만, 악령들은 사랑하실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악령들은 이미 영원한 저주의 운명에 처해진 싸탄의 종자들이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영적 싸움은 이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지, 인간과 세상 종교, 정신적인 세계관을 상대로 한 게 아닙니다.

로잔운동권 사람들을 향해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대들이 오해/곡해하였소."

아울러 선교신학자들은 성경을 다시 읽고, 성경이 가르쳐 주는 영적 전쟁이 뭔지를 새로 배워야 합니다. 말과 낱말만 짐짓 '귀신', '악령'이라고 빌릴 게 아니라, 성경대로 그들과 맞서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절대/유일의 진리는 기독교의 '호전적' 이미지와는 무관한 것입니다.
그리고..미국 등의 기독교 정치보수계를 통해 반낙태전쟁, 반동성애전쟁 등을 물불을 가리지 않고 치열하게 밀고 나가는, 그야 말로 호전적인(!) 카톨맄은 기독교가 아니지요. 그건 정신적/윤리적 대결이지, 영전은 아닙니다.

낙태나 동성애가 비성경적인 것은 사실이로되, 그런 몸과 피의 싸움이 영적 전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현대의 테레사나 헨리 나웬 등 카톨맄이 포장하고 있는 '사랑'의 개념은 성경의 아가페가 아닙니다. 그건..인본주의적 사랑인 소위 '인류애'나 휴머니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은 진리와 함께 가며..
테레사, 나웬 등은 진리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런 사실과 현실을 잘 분간하고 가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