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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바울서신

[빌 1:9-11] 가장 좋은 것을 헤아려 (티엘티경배도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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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나는 이것을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통찰력으로 더욱 더욱 풍요로워져
   여러분이 가장 좋은 것들을 헤아리며
   또 순결하고 흠이 없되 크리스토의 날까지 그러하기를!
   또 예수 크리스토에 의한 의의 열매들이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 필리포 1:9-11 사역)

위의 본문 말씀은 사도 파울의 여러 기도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론 본서는 필리포의 성도들을 위한 것이므로 이 기도도 우선적으로 필리포 성도들을 위한 기도였지요.

필리포 교회는 파울이 특별히 애착을 가질 만한 교회였습니다. 행전 기록에 따르면, 필리포는 파울이 결코 잊지 못할 깊은 사연이 있는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마케도니아 환상'을 보고 맨처음 들어간 마케도니아 최대의 성이 바로 이곳이었습니다(행전 16:6-11). 파울 일행이 안식일에 기도할 곳을 찾다가 강가에 앉아 모인 여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특히 하나님 경외자(God-fearer) 뤼디아가 파울의 복음을 받아 온 가정이 침례(세례)를 받아 첫 교회를 이뤘습니다(행 16:13-15).
['하나님 경외자':이방인으로서 주/야웨님을 믿는 사람들. 로마군 백부장 코르넬리우스도 그런 사람이었다. 행 10:2]  

그후, 점술 악령이 지핀 한 여종이 파울을 여러 날 따라 다니며 괴롭힙니다. 파울이 너무 성가셔서 그 악령을 꾸짖어 내쫓자, 여종의 주인들은 점 수입거리가 끊어진 데 앙심을 품고 파울과 실라를 결박하여 관서에 끌고 가서 엉뚱한 죄목으로 참소한 뒤 옷을 찢어 벗기고 심한 태형을 가하고, 발에 착고를 채워 깊은 감옥에 가둬 버립니다(행 16:16-24)!

마케도니아 사람이 "여기 와 달라"고 부르짖는 환상을 보고 찾아 왔는데 바로 첫 도시에서 이런 대우를 받다니 참 기가 찰 노릇이지요.
그러나 파울과 실라는 전혀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한밤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니 온 죄수들이 다 그 소리를 들을 정도였습니다(행16:25. 그 이하도 참조).

이때 갑자기 큰 지진이 나, 온 감옥이 뒤흔들리고 모든 죄수들의 결박이 다 풀어져 버리는 초자연적 사태가 발생합니다. 그 바람에 놀라 깬 옥지기가 옥문들이 다 열린 것을 보고 수감자들이 다 도망간 줄만 알고 눈앞이 캄캄해져 당장 칼을 빼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순간 파울은 큰 소리로 "당신의 몸을 찌르지 마오! 우리가 다 여기 그대로 있소." 하고 말립니다.

이 소리를 들은 옥지기는 등불을 찾아 너무나 놀라 벌벌 떨며 파울과 실라 앞에 몸을 굽실대면서 둘을 데리고 옥 밖에서 말합니다. "선생님들,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겠습니까?" 이런 말은 성령의 일차적인 감화가 없이는 좀처럼 안 나오는 말이지요.

파울은 대답합니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럼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얻을 거요."

그리고는 그와 집안 사람 모두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여기 감동 받은 옥지기는 그 밤에 두 사람을 모셔다가 아까 낮에 관원들 앞에서 매 맞은 상처를 씻겨 싸매 주고 자신과 온 집안이 다 침례를 받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데리고 집으로 올라가 음식을 차려 주고 온 가족의 결신을 기뻐합니다(이상 - 행 16:34까지).

비록 억울한 매를 맞고 옥에 갇히긴 했어도 마케도니아로 온 것이 결코 헛걸음이나 불행이 아니라 큰 결실을 얻게 된 것이지요. 파울은 여기서 뤼디아와 옥지기 두 사람의 온 가정을 얻어 하나님께 돌린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아니지만 확실한 두 가정을 필리포 교회의 든든한 주춧돌과 발판으로 얻게 되니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까! 매 맞고 감옥에 갇혀 가며 세운 교회이니 얼마나 더 애착이 가겠습니까!

그렇게 세운 이 교회를 위해 파울은 본문의 이 기도로 주님께 간구한 것입니다.

이 기도는 비록 파울의 기도들 가운데 가장 짧은 것이지만, 낱말마다 구절마다 파울의 깊은 애정을 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본문 바로 앞절인 8절에서 "내가 크리스토님의 심장으로 여러분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십니다"라고 사랑을 고백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 원어에서 '심장'은 흔히 단순히 염통 뿐 아니라 내장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필리포서는 매우 중요한 계시와 수많은 교훈들이 담겨 있는 서신서들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파울은 그 무엇보다 필리포 교우들에게 기쁨을 강조했습니다. 기쁨에 관한 문구가 본서에 계속 나타나지요.
아마도 파울은 실라와 함께 과거 이곳에서 억울하게 심한 매를 맞고 쓰라린 몸으로 깊은 옥 속에 갇혀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했던 추억이 새롭고 감회가 넘칠 터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기쁨을 강조하는지 모릅니다. 필리포 교우들을 생각할 때마다 늘 기쁨이란 낱말이 떠오르고 우러나는 고백을 하게 됐나 봅니다.

그는 본서에서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혹 여러분의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자신을 관유(붓는 기름)의 제물로 바쳐도 나는 기뻐하고 여러분들과 함께 기뻐할 테니 이처럼 여러분도 기뻐하되 나와 함께 기뻐하시오." (필 2:17,18)

즉 그는 필리포 성도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끝내 바쳐도 (순교를 상징) 여전히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럼, 파울은 이렇게 달가워 하고 기뻐하는 그 성도들을 위해 과연 어떤 기도를 했을까요?  

먼저 그는 필리포 성도들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통찰력으로 날로 점점 더욱 풍요로워지기를 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하나의 맹목적인 행위로 생각합니다. 사랑만 있으면 다른 것은 다 필요 없는 양 생각합니다. 그런 것을 가장 순수한 사랑, 최고의 사랑, 아가페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야말로 맹목적 사랑에 불과하지요. 그런 것을 아가페 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파울은 여기서 분명히. 사랑은 지식과 모든 통찰력으로 풍요로워질 것으로 확신하고 성도들에게 그렇게 되기를 빕니다. 이 '지식'이란 게 뭘까요? 바로 진리입니다! 사랑과 늘 함께 가는 진리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럼 통찰력은 뭘까요? 슬기입니다. 지식이 진리 자체를 아는 것이라면, 통찰력은 진리를 헤아려 붙드는 기능을 뜻합니다. 아울러 진리를 아는 지식을 유용하게 발휘하는 채널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대한 지식과 통찰력으로 더 풍요롭게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파울은 성도들이 가장 좋은 것, 최선의 것을 헤아려 취할 것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기 파울이 쓴 문구에 나온 동사 원형 '도키마조'(분별하다/검증하다)와 목적어 '타 디아페론타'(가장 좋은 것, 뛰어난 것)는 어의상 서로 공통점이 있습니다. 디아페론타 자체의 동사형인 '디아페로'가 역시 검증하다/가리다/헤아리다는 뜻을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 두 낱말이 결합하여 이중강조법이 된 셈입니다.
그만큼 분별과 검증이 중요하다는 뜻이겠지요!

우리 성도는 삶 속에서 가장 좋은 것, 최상의 것, 최선의 것을 헤아리며 살아가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유형적/물질적인 값어치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영적으로 가장 고상한 것을 헤아려 추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플로리다 부흥 강사 타드 벤틀리의 이적에 탐닉하는 나머지, 예수님을 믿기 전도 아니고 믿은 뒤에 새긴 그의 흉칙한 문신까지 고상한(?) 목적 때문에 아름답고 선한 것으로 봐 주려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크리스천의 진선미의 표준이 아니지요. 신자의 진선미는 가장 고상한 것이어야 하며 그 표준은 다름 아닌, 바로 본서에 나타나 있습니다(필 4:7-9 참조)!

벤틀리는 신사도운동에 관여되면서 어느 모로든 주권운동과 비밀집단에 연루되지 않을 수 없을 터입니다. 그의 주변에 다양하고 괴이한 영들이 출현하는 것은 결코 그가 순결하지도 고상하지도 않음을 보여줍니다. 어둠의 라큰롤과 할리 데이비스(모터사이클) 등을 즐기고 사랑하는 그는 가장 고상한 것을 추구하거나 헤아리며 살아가는 형의 사람이 아닙니다. 불행한 일이지요.  

아무튼 이 말씀의 표준에 따라 우리는 가장 고상한 것을 취사 선택하며 살아 가야 합니다.

그래야 하는 까닭이 뭘까요? 본 10절의 뒷 부분에서 밝혀집니다.

즉 그래야만 순결하여 흠 없이 크리스토의 날까지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가장 좋은 것, 최선의 것, 가장 고상한 것을 헤아려 찾는 고상한 헤아림은 자연스럽게 순결을 추가하게 합니다. 순결은 허물 없이, 나무랄 데 없이 크리스토의 날에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조건이 됩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 주님 앞에 흠 없이, 주름 잡힌 것 없이, 책 잡힐 것 없이 어엿이 나서는 순간을 우리의 최고 이상으로 삼아야 합니다(에페소 5:27 참고). 
그러기 위해 저와 여러분이 함께 힘씁시다!

아다시피, 파울은 테살로니카 교우들을 위해서도 그들의 영/혼/몸이 주님의 날까지 온전히 보존되기를 기원하기도 했습니다(테살로니카A 5:23). 고상한 것을 추구하고 순결하여 흠이 없기를 바라는 성도, 영/혼/몸이 보존되기를 원하는 성도는 몸에 구멍을 내어 고리를 달거나 바늘로 피를 내어가며 무늬를 새겨 넣는 짓거리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과거 믿기 전에 그랬던 사람은 부끄러운 맘으로 근신하며 지낼 것입니다. 문신 따위를 자랑거리로 삼지도 않게 됩니다. 그런 행위는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 난 격과 다를 바가 별로 없지요.

그 다음으로 파울은 성도들에게, 주님에 의하여 맺어지는 의의 열매가 가득하기를,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빌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자들 삶의 궁극적인 지향점이고 목적입니다.

여기 우리가 눈여겨 볼 사실은 우리 자신으로서는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예수 크리스토로 말미암아 맺어진다는 것입니다. 

수난 전날 밤 마르쿠스 요한의 다락방에서 말씀하신 주님의 포도나무 비유엔 이같은 말씀이 들어 있지요(요한복음 15장 참조).

     "내 안에 머물어요, 나도 그대들 안에 머물 테니.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저절로 열매 맺을 수 없는 것처럼 그대들도 내 안에 머물지 않으면 그러할 거요.
나는 포도나무, 그대들은 가지요. 사람이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요. 나를 떠나서는 그대들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소!"


우리가 주님 안에 있어야 열매를 많이 맺는 까닭은..주님은 말씀이시고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이어 말씀하십니다.

    "그대들이 내 안에 머물고 나의 말이 그대들 속에 머물면 무엇이든 원하는 바를 구하오. 그럼, 그대로 이뤄질 테니!"

주님의 진리 가운데서
의의 열매를 가득 맺는
티엘티 독자들이 되시길
전능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