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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가는(?) '합동'측



지난 해 12월 중순 한국 예장(예수교장로회) 합동 교단장인 서정배 총회장이 '주일성수와 주일예배에 대한 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62611
연말에 발표한 것으로 보아 교단산하 노회와 교회, 300만 교단 산하 성도에게 새해에 이 담화문 내용을 지켜 달라는 권면인 모양입니다. 서 총회장은 이 담화문의 목적을 "주일예배를 예배모범에 따라 드리도록..", "우리의 신앙근간을 유지하고 다음 세대에 우리의 신앙을 전해주기 위하여.."라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이 '예배모범'이란 것은..1917년 9월 1일 승동교회에서의 제6회 총회에서 옛 웨스트민스터 헌법 책을 번역하여 총회가 작정/편집/출판한 교단 헌법의 일부라고 역사적 유래를 밝혔습니다. 이 예배모범은 같은 헌법 중 '헌법적 규칙' 총 13조 중에서 교인의 의무(제2조), 교인의 권리(3조), 주일예배회(4조) 등도 결부됩니다. 헌법적 규칙 2조는 교인들이 교회의 정한 예배회/기도회와 "모든" 교회 집회에 출석해야 하고, 교인으로서 성일(聖日)을 범하면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자로 간주한다고 했답니다.

묻습니다: 목회자/사역자들은 교인으로서 교회의 정한 예배회/기도회 등 모든 교회 모임에 출석합니까? 안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목회자가 유치부/유초등부/중고등부/청년회/찬양대 연습, 주일학교 예배 등 '모든' 교회 집회에 고루 다 참석하나요? 과거 작은 개척교회 당시엔 혹 그랬을지는 몰라도 지금은 그렇게 하지도 않을 뿐더러 실은 못합니다! 그렇다면 목사는 성일을 범하고,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사람'으로 간주되는 건지? 
"말꼬리 잡는다"고 하지 몰라도, 이 옛 법은 신자의 목을 조르는 법입니다. 남은 둘째 치고 목회자나 지도자 자신이 지킬 수도 없는, 하나의 율법입니다. 

그리고 도대체 "성일을 범한다"는 게 무엇인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성일을 범하는 것이고, 범하지 않는 것입니까?
목회자는 보기와 해석에 따라 성일을 범하기도 하고 범하지 않기도 합니다. 예컨대 목회자/지도자들도 주일날 자주 외부 활동을 합니다. 일요일/주일을 앞두고, 또는 주일 당일에 비행기 타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기도 합니다. 그래야 할 때가 있기에 하는 소리입니다.

매매 활동도 합니다. 목회자든 지도자든 장로든, 주일날 자동차에 연료가 떨어지면 즉시 사 넣어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매매하지 않기 위해 차를 세워 놓고 다른 교인 차를 탄다면, 자신은 '성일'을 제대로 지키는 성자(?)일지 몰라도, 남을 대신 운전사로 일 시키는 일이지요. 안식일 저녁 유대인 가족이 어둠컴컴한 방에서 기다리면서 방문객이 들어와 전기 스위치를 대신 올려 주길 바라고 기다린다는, 철저한 율법주의 파리새 정신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가?

지도자 자신들이 지키지 않는/못하는 이런 법은..선교사가 갓 키운 초기 한국교회의 부흥에 도움이 됐는지는 모르나.. 참된 주일성수자, 참된 신자, 참된 성자들을 낳는 게 아니라..더 많은 파리새, 더 많은 율법주의자들을 낳는 위선자 제조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 나아가 순진한 성도를 억압으로 옭아매는 법입니다.
저는 묻습니다: 목회자/지도자들은 100% 이 규정을 지키냐고.
저는 말합니다: 1%라도 안 지키면 그것은 지키지 않는/못하는 거라고.

서 총회장은 이어서 성일 준수 내지 주일 성수란 것에 대해 헌법적 규칙과 예배모범을 인용,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엔 다음 조항들이 들어 있습니다.


    육신의 모든 사업 정돈
    (다른 것들은 물론?) 먹을 것까지라도 미리 준비
    하루종일 "거룩히" 지킬 것
    위급한 일 외에 모든 사무를 폐할 것
    육적 쾌락의 일을 폐할 것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것
    성경을 연구하고 묵상할 것
    예배 '전부'에 참여하기 위해 정한 시간에 일제히 회집할 것
    마지막 축복기도할 때까지 특별한 연고 없이 출입하지 말 것


일반 성도는 두고서라도, 교회 지도자들이 과연 이대로 지키고 있는 걸까요?
예를 들지요. 프로그램을 막론하고 텔레비전 시청은 육신적 쾌락의 일일까요, 아닐까요? 많은 목회자/설교자들이 주일에도 TV, 웹 동영상 시청을 합.니.다. 육적 쾌락일까요, 아닐까요? 육적 쾌락은 오관과 두뇌 속으로 즐기는 일입니다. 설혹 프로그램에 영적인 요소가 있더라도 오관과 두뇌 속으로 즐기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혹 TV 영상에 비친 설교자의 얼굴을 보며, "저 분 잘 생겼네", "저 분 목소리 좋네" 하고 느끼기만 해도 육적 감각에 의한 판단이지 이미 영적이진 않습니다.

스코틀란드 개혁가 존 녹스는 제네바의 개혁가 장 칼뱅을 방문했을 당시, 칼뱅이 주일날 스포츠인 보울링 게임을 즐기는 광경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런데 정통주의자들은 이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기보다 그랬다는 "확증이 없다"며 발뺌을 하고 부정하려 듭니다.   
오케이..뭐, 칼뱅이 했든 안 했든, 녹스가 봤든 안 봤든, 봐도 안 본 척 했든, 크게 상관 하진 않으렵니다.

오늘날 교회들을 봅시다. 주일날 야외예배를 가서 온갖 스포츠나 게임을 즐깁니까, 안 즐깁니까? 즐기지요! 주일날인데도 즐깁니다. 만약 안 즐긴다면 야외예배 가서 뭘 합니까? 그냥 바깥에서 예배하고, 점심 먹고..그냥 되돌아옵니까? 주일학교 어린이들도 그냥 그럽니까? 저는, 여태 그런 교회를 전혀 본 일이 없습니다. 한결같이 주일날 야외예배 때 먹고 친교활동-소위 리크레이션의 일환으로 게임도 즐깁니다!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주일날 먹는 건 육체의 즐거움인가요, 아닌가요? 먹는 게 괴로움인가요? 그리고 먹고 배설하는 행위는 육체와 무관한가요? 저는 평일처럼 일요일에도 먹고 나서 화장실에서 배설하면 기분이 썩 좋습디다. 이건 영적 쾌락인가요, 육적 쾌락인가요?
목회자가 주일날 제대로 "육적 쾌락의 일"을 삼가려면, 그날 하루종일(자정부터 자정까지) 금식해야 합니다! 화장실도 가지 말아야 합니다. EXACTLY! 배설도 육적 쾌락의 일부이니까. 그래서 유대인들은 고대에 정결례가 필요했던 겁니다. 그런데 요즘 유대인들도 안식일에 화장실을 다니더군요. 혹 안식일날 공중화장실에 화장지가 없으면 돈을 내고 사야 합니다. 그건 율법 위배가 아닌지.

"위급한 일 밖에는 모든 사무..를 폐하고.." 했는데, 주일날 교회가 사무를 하지 않습니까? 대부분은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주일날 당회를 합니까, 안 합니까? 당회는 사무가 아니고 '위급한' 일인가요? 주일날 공동의회/교인총회를 합니까, 안 합니까? 투표도 하고..내분이 있으면 싸움도 하지요! 제직회/집사회를 합니까, 안 합니까? 당연히 주일날 하지요. 그건 사무인가요, 아닌가요? 중대형교회는 주일날 사무를 안 보면, 교회 일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걸요. 그런 것은 모두 사무가 아니라면.. 주일날 하지 말아야 할, 거룩하지 않고 부정하고(?) 추잡한(?) 모든 사무는 뭡니까?


한국 교회 다수가 선교사들에게 배운 대로 주일날 매매행위를 해선 안된다는 원칙이지만, 미국교회들 다수는 주일날 서점을 열고 성경책/설교테잎/커피..등을 사고 팝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그런 미국교회의 목회자를 위대한 명사로 초청하고 환영하지요. 요상한 요지경이 아닌가요?
그런 교회 서점은 주일 매매행위니까 한국교회에선 "안 된다"고 할지 몰라도 주일날 교회 첫 방문자가 성경책이 없어 당황스러울 때 무척 편리합니다! 혹 무료제공하는 커피가 없더라도 교회서점에서 훈훈한 커피 한 잔을 사 마실 수 있을 때, 그 교회가 그리도 좋아집니다. 오늘날 수많은 한인교회들도 교회 지하층에다 음료자판기를 설치해 놨습니다. 그건 주일 매매행위인가요, 아닌가요?

저는 일요 매매 행위의 유/무 여부보다는 목적이 뭔지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일요 매매 행위가 불가하다면, [주일=구약 율법시대 안식일], [교회법=율법], 오늘날 [교회당=구약성전]이라는 공식이 가능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당은 구약성전이 아니지요! 교회법은 정작 현대의 또다른 율법이었나요? 주일이 구약 율법시대의 안식일과 같습니까? 그럼 유대교랑 안식일교와 뭐가 다릅니까? 요일만 다른가요?
주일을 중시하고 거룩하게 기념하는 것은 매일 일을 하던 주중에 하루 안식의 뜻도 있지만, 무엇보다 주님의 부활 때문입니다. 법 준수가 중요해서가 아니지요! 주일은 법 준수를 위한 날이 아닙니다. 마음 모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우러러 보니까 중시하고 모여서 경배도 하는 겁니다.
법과 규칙이 우리의 우러름의 대상이 아니지요!
 
예배 '전부'에 참석해야 한다는데..딴 사람들은 둘째 치고, 목회자들이 예배 '전부'에 참석합니까? 못 하거나 안 한다면 교인들에게 요구할 수 없지요. 목회자/지도자/사역자/직분자들이 다 참여해야 교인들에게도 요구할 수 있는 겁니다.

    "각기 좌석에 앉아 단정하고, 엄숙한 태도와 공경하는 마음으로 예배하고, 귓속말이나 출입하는 자에게 인사나 곁눈질이나 졸음이나 웃거나 그밖에 모든 합당치 못한 행동을 일체 하지 말고, 어린이들은 부모가 데리고 있는 것이 좋고, 한 가족이 하나님의 집에 같이 모여 앉는 것이 가장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좋은 뜻이라고 생각하지만, 얼마나 정성을 들여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기고 받드는지 -곧 각자의 태도에 달렸다고 봅니다. 지도자/목회자/사역자 자신들이 자주 움직이고 귓속말을 하고, 졸고, 웃고 "합당치 않은" 행동을 할 때는 교인들도 당연히 모방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행동엔 어느 정도 자유가 있는 법입니다. 몸을 꼿꼿이 세우고 꼼짝 않고 앉아 있는 사람만 경건한 게 아니지요. 출입하는 교우에게 인사나 곁눈질이 안 된다..성경에 어디 그런 구절이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박수까지 하면서.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린이나 자녀들은 예배 앞 부분엔 함께 있는 게 바람직하더라도, 나머지는 주일학교나 학생회, 너서리(영아원)에서 따로 예배하는 게 보통이고요. 뭡니까, 이거..케케 묵은 내용들 아닌가요?

    "우리는 주일을 헌법적 규칙을 따라 거룩히 지켜야 합니다."

그럼 갓 믿어 도무지 헌법적 규칙을 모르는 사람들은 어떻게 주일을 지킬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그러니 교회를 외면하지요. 술 냄새가 풀풀 풍기는 주정뱅이, 담배연기 냄새를 흘리며 다니는 사람들이라도 교회엔 나올 수 있고, 주일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주일은 우선 성경에 따라 지키도록 힘써야지요. 나머지는 교파나 교단에 따라 어느 정도 규정이 있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더라도 꼭 유대교인들이 탈무드나 율법서에다 규약을 만들 듯 그렇게 정해서야 바람직하지가 않지요.

    "주일예배는 예배모범을 따라 하나님께 예배해야 합니다. 오늘날 주일 예배가 많이 혼란하고 무질서하게 행해지고 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을 위하여 다양한 예배를 말하며, 전통적 예배의식을 전면 부정하고, 어떠한 형식에도 메이지 않아야 하고, 의복은 편안하게 하고, 일주일에 어느 한 날 예배시간에 참석하고 헌금만 하면 된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경배는 우선 성경대로여야 합니다. 교단 '예배모범'을 따라 경배해야 한다는 구절이 성경 어디에 있으며..그 교단법을 모르는 사람은 신자일 수가 없습니까? 오늘날 경배가 많이 혼잡해 진 건 사실입니다만..어차피 경배행위도 현대화 돼 가면서 다양성은 있지 않나요?
전통적 예배 형식은 본래가 성경의 경배 요소를 부정하고 있지 않나요? 한 번 봅시다. 사도 파울이 살던 초기교회 시대 경배 요소가 어떘는지.
    찬송시/가르침/계시/영언(방언)/영언통역/영적노래..(코린토A 14:26)

소위 '예배모범'이라는 게 위의 요소를 얼마나 실천하고 있나요? '예배모범'이 성경에 주로 근거하고 있나요, 신학과 전통에 주로 근거하고 있나요? 후자이죠! 그런데 왜 예배모범이란 형식에 묶여야 합니까? 물론 질서야 있어야지요. 그러나 그 질서는, 우선적으로 영적 질서여야 합니다. 성령님이 계신 곳엔 자유가 있다는 말씀이 지켜지는 한에서의 질서입니다(코A 14:33,40).

저도 경배 때의 의복은 좋은 것을 입자는 주의이지마는 의복을 강제화한다는 거, 어렵습니다. 성경 말씀에 따르면, 교회에 나오는 사람을 옷차림과 외양과 외모를 갖고 판단하거나 차별하지 말아야 합니다(야코보 2:1-13). 반듯하고 그럴싸한 외양으로 통일하려면, 결국 시간을 두고 자발적으로 훈련하는 거 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교회는 결코 외양을 갖고 차별할 순 없는 노릇입니다. 걸인을 내쫓는 교회가 교회입니까?! 그건 소셜그룹이죠.
도대체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교회 교인들의 의복은 어떻게 입어야 한다는 것인지요. '합동 교인복'이라도 있는 겁니까?

    "주일날 교회에 성경 찬송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게 하는 것도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가슴에 품고 다니게 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도록 해야 합니다."

각자 성경찬송가책을 갖고 다닌다면 더 좋지요. 그러나 당장 그 날 필요한, 없는 사람에겐 교회가 빌려 주거나 제공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성경책을 가슴에 품고 다녀야만 더 소중하게 생각되는 게 아니라 말씀을 마음 속에다 담을 수 있어야지요. 요즘 성경찬송가 합본책을 과연 '가슴'에 품고 다니는 목회자나 지도자가 얼마나 있는지 궁금합니다. 성경책은 가슴에 품고 다니든, 옆구리에 끼고 다니든, 가방에 넣어 갖고 다니든, 차 좌석 곁에 끼우고 가든 그 말씀을 속에 넣어 담지 못하면, 소용 없는 겁니다.

    "주일 예배회에 찬송은 무시되고 설렘과 흥분을 불러 일으키는 저속한 리듬 음악인 현대복음송을 열광적으로 부르고 감정적인 흥기가 고조되어 박수치고 춤추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찬송가가 전반적으로 무시되는 현상은 저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그러나 현행 찬송가책 내용이라고 해서 다 거룩하고 다 바람직한 건 아니지요. 찬송작가들 가운데는 프리메이슨도 있고, 천주교 사제들도 있으며, 불건전하고 비성경적인 중세 신비가/관상가들도 있고, 심지어 이교적 사고방식을 지녔던 작가들도 없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늘'(천주교 '성탄절'인 12월 25일) 아기 예수님이 나셨다고, '오늘'(천주교식 '부활절') 되사셨다는 찬송가 가사들은 성경에는 없는 내용입니다.

현대 복음송가와 경배찬송가 다수는 합동측 수많은 교회에서도 현재 불리고 있고, 다수는 건전합니다. 일부는 성경가사로 돼 있어 오히려 웬만한 찬송가 가사 보다 더 성경적입니다. 단지 찬송가가 아니라고 해서 단죄하는 발상은 문제가 있습니다.
복음송이나 경배찬양이 "저속한 리듬 음악"이라면..찬송가에 당대의 통속 음악을 사용한 것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찬송가 속의 숱한 미국 복음찬가들이 당대의 통속 음악 형태인 사실은 아십니까? 심지어 바흐의 코랄도 세속 멜로디가 있었던 건 아닌지요? '하늘 가는 밝은 길이',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등 찬송가의 숱한 가락이 세속 음악이던 진상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오늘은 하나님 여호와께 예배하는 성일이므로 울지 말라고 하였습니다(느 8:9).

교회에서 감격해서 울고, 통회 자복하는 것도 죄인가요?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며 기도하신 주님은 어찌 되는 겁니까? 그건 경배가 아닌 겁니까?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오로지 전통예배가 곧 영적 경배라고 생각하시나요? 전통 예배에 성령의 권능과 기름부음이 움직이고 넘칩니까? 오히려 주보 순서라는 격식에 매이고 굳어져서 성령님의 감화를 약화하거나 소멸시키진 않나요? 

    "설교 중이나 특별찬양이 있은 후에 박수를 쳐서 그런 사람을 기리는 행위와 예배를 마친 후에 ‘영광의 박수’라고 하여 사람에게 박수를 하듯 하나님께 박수를 올려드린다고 하여 박수를 치는 것은 성경과 예배모범에 없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것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이의 없습니다. 그러나 예배 도중에라도 2, 4박 계열 리듬이 흥겨워 치는 박수는 가능하며 따라서 허용돼야 한다고 봅니다.

    "예배의 핵심은 언제나 설교입니다."

강단이 높은 칼뱅주의 교회나 전통예배의 구성상 그렇게 보일지는 몰라도, 경배의 '핵심'이 꼭 설교가의 설교는 아닙니다. 경배의 핵심은 그날 그날 하나님이 선택하실 문제라고 봅니다. 설교가의 설교 없이도 성경낭독과 감사찬양만으로 아름답고 훌륭한 경배를 얼마든지 봤습니다. 관건은 성령님의 역사의 여부입니다.  

    "십자가의 보혈과 구속의 도리, 복음의 핵심, 죄를 책망하는 회개, 성도들의 고난과 인내, 성별, 사탄과의 영적전투 등을 전하지 않고, 세상적이고 세속적인 이야기들을 많이 하고, '아멘'이나 '할렐루야'를 많이 강요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동시에 성경의 다른 부분-권능/은사 등도 전하고 강조해야지요. 아멘, 할렐루야를 강요함은 백 번 잘못입니다만, 얼마든지 강조할 순 있겠지요. 강요와 강조는 다른 것입니다.

    "주일예배회에 묵도가 없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고 축도가 없는 것도 잘못입니다. 예배모범에 주일 예배회는 종용히 묵도로 예배를 시작하라고 했고, 축도로 폐할 것을 말씀했습니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고 했습니다(신 32:7). "

묵도라는 게 대체 뭔가요? 성경에 어디 묵도라는 게 있습니까? 속으로 기도했거나 묵상이란 건 있지요. 그러나 '묵도'라는 것, 분명히 외부에서 신교에 몰래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는 요소입니다. 성경은 "경배 때마다의 묵도"를 전혀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요즘의 묵도는 관상(觀想) 영성적인 냄새가 다분한 요소이기도 합니다. 합동측에도 관상영성이 폭넓게 보급돼 온 것으로 압니다만..천주교적이고 비성경적이지요. 

'축도'라는 것은 경배에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습니다. 있으면 더 좋겠지요. 그러나 있더라도, 신학교 졸업한 목사만 하는 게 아니라 장로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초기교회 인사들 중 '축도맨'이 따로 없었다는 거.
신명기 32:7을 그런 데다 인용한다니 할 말이 없군요.

    "‘참회의 기도’는 ‘회개의 기도’로 바꾸어야 합니다. 의미는 비슷하지만 참회는 불교에서 많이 쓰는 용어로 과거의 죄를 깨닫고 뉘우치며, 부처·보살 등 앞에서 고백하고 용서를 비는 것이요.."

그렇다면, '참회록'이란 용어도 없애야겠군요. '예배'/'기도'도 본래 한자로는 불교용어가 아니던가요? 그렇게 본다면 '경배'와 '간구'가 낫겠지요. 그리고 '성가대'란 용어는 천주교에서 왔으니 고쳐야 한다면 '성가'도 고쳐야 합니다. 

    "주일 예배회에 신앙고백을 하지 않는 것은 잘못입니다. 초대교회 시대부터 모든 교회는 공예배 때 사도신경을 신앙으로 고백해오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사도들의 신앙고백이요, 동시에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사도신경은 기독교의 근본 진리를 요약한 기독교의 핵심 교리입니다. 그리고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은 기존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모름지기 성도의 바른 신앙고백은, 성경말씀 그대로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구를 고백하거나 선언하지 않으면서 신조나 달달 외우는 게 무슨 바람직한 고백이겠습니까? 
사도신경'이란 것은 본래 '크레도'(내가 믿노라)로 시작되는 로마시대 천주교에서 온 교리확신서로..천주교 교리 중심으로 마련됐습니다.

사도들이 그런 것을 작성했다는 증거가 성경에 없을 뿐더러, 많은 부분이 빠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성삼위일체를 믿는다는 직접적인 고백도 없고, 주님의 탄생과 고난 사이에 사역에 관한 일언반구도 없어 주님의 3년 지상사역을 완전 무시해 버렸지요! 또 하늘에 오르셔서 현재 하고 계신 일(하늘 대사제로서의 중재)에 관해선 생략해 버렸습니다. 마리아와 '성인', 사제들의 '중재'란 것도 믿는 천주교로서는 '딱'이겠지만. 
이건 신앙고백이라기보다 교리진술서에 더 가까운 겁니다. 이런 것을 고백하느니, 성경 말씀 그대로를 수시로 신앙고백하는 게 더 낫습니다. 성경은 교리를 능가하니까요!

    "예배 때 워십댄스, 현대무용, 뮤지컬, 힙합(hip-hop) 등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에 '춤추며'라는 말씀은 구원의 감격을 몸과 영혼에 넘치는 충만한 기쁨으로 기뻐하는 외적 표현일 뿐 구약시대 성전 예배나 회당 예배, 신약시대의 예배, 그리고 기독교 역사 2천 년 동안의 정통교회 예배의식에서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많은 몸사역, 현대 워싶댄스엔 확실히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예배모범을 만든 장본인인 우리 선조들도 가끔 한복차림으로 강단에서 신나고 우아하게 춤을 췄다고 하네요. 주일학생들의 무용은 물론이고요. 그렇다면 되는 겁니까, 전혀 안 되는 겁니까? 규범이 분명해야지요.

구약에 춤 경배 사례가 없다니, 다빋은 하나님 앞에서 정성으로 춤을 췄다는데..뭔 거짓말을?? 서 총회장이 지금 다빋을 단죄하는 겁니까? 그리고 성막이 있던 쉴로에서의 유대인 절기춤도 있었지요(판관들=삿 21:21). 춤 자체를 갖고 단죄하긴 어려울 듯 합니다. 그러나 아무튼 신약성경에 경배춤 사례가 없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의 춤이나 천국에서의 춤은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법의 준수는 그 나라의 문화의 측도(測度)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같이 지키기로 하고 제정한 교회법을 준수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측도(測度)가 되는 것입니다."

교인들에게 법 준수를 강조하기 전, 지도자부터 준수하는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옛날 왕국들처럼 지도자가 망가지면 교회가 망가지기 쉬운 법입니다. 그 무엇보다 지도자는 우선적으로 성경의 하늘법을 준수해야겠지요! 강단 위에 자주 나서는 지도자부터 몸조심과 말조심을 해야겠지요. 지상 하늘나라 문화의 척도는 지도자의 양심입니다.

매번 교단 총회장 선거에서부터 부패/부정 비리가 사라져야 합니다. 그래야 교인들에게도 법 준수를 강조할 수 있겠지요. 윗 물이 맑아야 아랫 물도..선후 순위가 그렇습니다. "그들의 말은 듣되 행실은 본받지 말라"는 주님 말씀이 교단 지도자들에게 해당하지 않는다는 법은 없겠지요.  

지금은 많이 변화되는 시대입니다. 이 변화의 시대에 성경 말씀을 더욱 붙들어야 참 생존이 가능힙니다. 교단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임을 신자들에게 강조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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