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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극적인 자화상 (김삼)




드라마로부터 자유롭기
- 예술은 진리가 아니다


그리스 등 이교 국가엔 고대부터 공연예술로서의 드라마가 있었지만, 이스라엘/유대엔 그런 것이 없었다.
성경엔 '드라마'라는 게 없다. 모두 역사적 사실과 진실 그대로일 뿐.

성경에서 드라마에 가장 가까운 시추에이션의 하나라면, 아마도 고대 판관(사사) 기데온의 아들 요탐이 쉐켐 사람들에게 들려 준 '가시나무 왕' 스토리(판관들=삿 9'7-15 참조)일 것이다. 그러나 나무들을 의인화한  이 비유는 분명 성령님의 영감에 의했지, 꾸며낸 드라마도 시나리오도 아니다. 
4복음서에 흔한 예수님의 온갖 비유들도 있는 그대로가 진리다. 비유를 극화(dramatize) 할 수 있는지는 모르나, 비유 자체는 드라마가 아니다. 창세기의 앞 부분은 창조의 '설화'도 '신화'도 아니며..심지어 성경에 자주 나오는 꿈 얘기들도 '개꿈'이나 예술 또는 드라마가 아닌 진리였다.


반면, 고대 이교국들의 상황은 그렇지 않다. 
신화, 영웅전 등과 직결된 고대의 드라마엔 언제나 사람들이 꾸며낸 신화나 꿈/환상 또는 현실의 카피, 사람들이 믿고 싶어 하고, 남에게 믿게 하고 싶은 가상실제가 존재했다. 거기엔 권선징악/인과응보 등 가볍고 기초적인 윤리와 세속 교훈들도 없지 않았지만, 그럴 듯한 가정/가상/가설, 사회에 대한 반영과 풍자, 더 나아가 황당무계/허무맹랑한 허위와 조작 등이 있었다.
연극의 고전적/대표적 장르인 가면극이 바로 그 전형적인 본보기다. 나타난 얼굴과 속 얼굴이 달랐다. 인격(person)이란 말의 어원인 '페르소나'가 가면에서 왔다.  

고대에 흔한 희극과 비극의 존재는 꾸며진 상황과 장면들을 통해 인간의 감정이입을 자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드라마는 작가와 연출자, 배우들이 각기 파트를 맡아 미리 짜여진 가상실제 속에서 자신의 감정 몰입을 통하여 관객/시청자의 감정을 사로잡아 건전한(?) 또는 불건전한 의미의 '노예' 상태로 끌고 가는 일종의 manipulation이다.

여기서 전제론적으로 우리가 짚고 넘어 가야 할 것은, 있는 현실/사실/진실을 있는 대로 최대한 표현한 휴먼 드라마라고 해도 그게 곧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진실/현실 감각을 한껏 발휘하고 현장감을 듬뿍 담은 리앨리티 쇼라고 해도 진리의 지름길이 아니다.
가령, 옷을 다 벗은 남녀가 있는 그대로 얽히는 포르노 속 상황은, 설령 어느 부부의 성애를 묘사했다고 해도 순수하고 참된 사랑의 진리가 아니라, 차원 낮은 애욕과 육체의 말초감각, 끝 없는 탐심의 도발/도착/변태 등의 현장이고 허상이다. 그것이 가져 오는 결과는 환멸과 자학, 더 나아가 자멸일 뿐이다. 


포르노와 드라마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 강력한 중독성이다. 아이들이 즐기는 비디오게임도 그렇다. 요즘의 비디오 게임은 가히 신종합예술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

한국 사람들과 해외 한인들 대다수가 탐닉하는 텔레비전 드라마에는 주기적인 초강력 중독 성향이 따른다. 수 천 만 한겨레가 모두들 '광팬'이 되어 그것에 빠져 들기 시작하면, 한 없이 빠져 들다 나중엔 빠져 나오기 힘들다 못해 거의 불가능해진다. 재미를 찾다 찾다 재미의 뿌리를 뽑기(?)까지 "들이파게" 된다.
그나마 한국에서는 정기적으로 제 때 보고 지나가지만, 해외에선 녹화/재생된 비디오 파일을 얼싸 안고 밤을 "패다"시피 한다. 밤 늦게 아니 새벽까지 파수 보듯 장시간 화면 워칭을 하고 나면, 눈자위가 시뻘겋게 충혈되고 광산에서 방금 기어 나온 광부들처럼 눈이 퀭~해진다. 보고 또 보고 자꾸만 보게 된다.

각 방송국을 위한 드라마 작가들과 연출가들은 희노애락의 경지에서 관객의 눈물과 폭소를 자아내는 "죽여 주는" 스토리를 엮어, "죽이는" 출연진을 모시고, "끝내 주는" 명장면들을 도출해 내느라 죽을 힘과 공을 들인다. 결국..작가/연출/제작진은 온 나라, 온 사회를 다 함께 "죽여 주는" 위대한 상상력 아니 살상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이다. 

삶 속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더라도 재미에 혹하여 빠져 들다 보니, 언제나 그들에게 호응하여 호흡을 맞춰 주고 발 맞춰 주는 관객/시청자들은 저녁마다 밤마다 드라마마다 몰입해 "죽도록" 즐기는 나머지, 더불어 함께, 나날이 더욱 더 죽어 간다. 더욱 빨리. 시력도 약화되고 몸 전체가 자연히 빨리 늙어간다. 사실 아닌가?  

온 오관과 감각 가운데 주로 시각과 청각만 화면 속의 가상실제에 총집중하여 고도로 활용/남용되다 보니, 다른 모든 감각이 둔화되고, 기억력도 급속히 쇠퇴해 가고, 게으름과 운동부족을 자초한다. 또 가상계와 현실계의 구분이 모호해져 명민했던 정신력도 퇴화하고, 젊은 시절의 순발력과 운동신경도 덜(dull)하게 둔화된다. 옛날 아랫목에 앉아 장죽으로 문고리를 열고 칵~! 하고 마당에다 가래침을 내뱉던 게으른 양반들을 탓할 게 못 된다.

그 뿐인가? 주인공들과의 감정이입이 '제대로' 되어, 자신이 주인공과 혼연일체가 되는 '합일/일치 경험', '착각 현상'이 일어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데자뷔(기시체험), 프레스크뷔, 자메뷔 등의 현상을 일으키고 만다. 화면과 공상 속에서 남의 '신발'을 신어 보다 못해 이윽고 남이 되어, 내가 남인지 남이 나인지 구분이 안 갈 수도 있다.

혹여 그렇게까지는 안 되더라도, 카피캩이 되어 주인공을 적극 닮으려 한다. 누구나 드라마 주인공처럼 얼짱/몸짱/옷짱/춤짱..갈고 닦는 '끼', 살을 깎고 다듬는 성형수술 등을 통해 화려한 배역 출연자가 되려고 한다. 자연히 잘 나고 "잘 빠진" 또는 작가와 감독이 잘 뜻한 대로 잘 해 내는 가상실제 주인공들이 역할모범(role models)이 된다. 배역을 잘 소화해 상도 타고 돈도 잘 버는 연예인들이 앞장 서는 사회 명사가 되고..스탠다드가 되기도 한다. 
그들을 닮으려 힘쓰고 애쓰지 않는 사람들은 때로 '찌질이'로 매도된다.
[ 요즘은 교회 목회자/설교자들도 '짱'이어야 "잘 나간"다. 겉짱이 아니면, 하다 못해 '말짱'이어야지, 안 그러면 볼 장 다 보고 만다. '영짱'만 갖곤 웬만해선 안 먹혀 든다. "잘 나가지" 못하는 필자도 그래서 시쳇말로 "찌질한" 목사가 아닌가 싶다. ]
 
그러다 보니, 이젠 사회 도덕까지 은근히 '길라잡이' 구실을 해 나가면서 동성애 따위도 "정상적"인 애정과 사랑으로 몰고 간다. 또, 가족 중심 드라마는 대강 그렇더라도, 요즘 영화엔 쌍소리와 욕설이 난무하다 못해 충만하다. 그런 걸 안 들으면 되레 귀가 근질근질할 정도로 면역화 돼 간다. 

이런 현대 드라마 상황은 특히 어린 자녀들에게 크나큰 해악이다!  


드라마가 재미는 있다. 재미 있으라고 만든 걸 인정한다. 거의 매 회, 매 장면마다 재미 있다.
문제는 작가와 제작자, 방송사다. 작가들은 본질적으로 독자들의 시간과 마음을 뺏는 사람들이다. 주인공이라는 잘 나고 잘 나가는 남녀들과 들러리를 선 엑스트라를 통해 사람들을 요리조리 요리하고 조리한다. 흥미를 자아내려니 세상에서 있을 만한 최악과 적당선의 적정 선(善) 사이를 아스라하게 오르내리는 희노애락의 롤러코스터에 관객들을 강제로 태워 나른다.

거의 심장마비 수준에 다다르다시피 숨막히고 폭발할 듯한 감정 조종을 통해 스트레스를 자아내거나 '카타르시스'를 해 주고, 배역들에게 열광하거나 또는 증오하게끔, 리얼한 가상실제 효과를 최대화 해 관객을 황홀경과 환각의 경지로까지 몰고 간다. 장시간 영화를 보고 나오면, 가슴이 울렁울렁, 팔다리가 후들후들, 머리가 어질어질한 현상과 같다. 
궁극적으로는 시청률을 높이고 경쟁 효과를 누리는, 목적 있는 조종이다. 

아이러닠하게도 거기 빠지다 보면, 정서조종은 돼도, 개인의 독립적인 감정조절이 제대로 안 될 수 있다. 정서생활과 감정조절의 표준이 시나리오의 무드, 배역의 표현 수위에 따르다 보니 거기 복종하기 때문이다! 대상에 뇌쇄(惱殺)되다 못해 거기 뇌쇄(牢鎖)된다.


그런 무드에 무르익어 충실히 세뇌된 관객들은 우연히 길가에서라도 잘난 드라마 주인공을 만나면, "와우~ 아무개 오빠, 짱이야!"..또는 통로 같은 데서 '악역'들을 볼 경우 대뜸 삿대질을 하거나 팔을 걷어 붙이며, "저런 죽일 넘의 시키! 저런 건 쌍코피를 터뜨려야.."가 절로 터져 나온다. 악역으로 나온 배우들은 괜스레 밉살맞게 보여, 스튜디오나 촬영현장 밖에선 아무래도 눈치가 뵈고 몸을 사리게 된다. 자업자득이라고나 할까.
드라마 감정이입이 확실히 잘될수록 그런 성공적인(?) 결과를 낳으니 아이러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웃겨 주고 울려 주고 조종해 주는 사람들을 진리 자체로 여기고, 존재와 삶의 길 정도로 받아 들이는 경향이 다분하다. 심리학과 상담학도 이와 직결된다. 한 때 우울증과 무력증, '저작무능증'에 빠졌던, 낭만파 후기의 러시아 작곡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가 피아노협주곡 2번을 성공적으로 쓸 수 있었던 결정적인 동기가 됐다(?)는 심리학자/최면술사 니콜라이 달(Dahl) 박사를 열렬히 존숭하여 이 작품을 헌정했듯. 


"진실스러"워도 참 진리가 아닌 헛 리앨리티 정서가 우리의 인생 자체를 더욱 역으로 가상실제화 하고 시나리오화 하여, 점점 사회와 세상을 감각이 무딘 불감증의, 이상향(理想鄕) 아닌 사악한 이상향(異常嚮)으로 변질시켜 간다. 그렇게 볼 때, 이 작가들과 연출/제작진, 제작업자들은 비록 돈 벌어 밥 먹으려는 '짓거리'일지언정 사실상 시청자들을 "물 먹이는" 사람들이다. 

미국의 사복경관(undercover)들이나 정보수사대는 위장잠복 하거나, 일부러 범인과의 허위 접선/공모를 통해 역으로 범인을 때려 잡거나 극비 사항을 캐내는 '위장공모수사'를 잘 한다. 그런 수법은 도덕성 여부가 모호한 탓에 자주 사회의 문제거리로 회자되기도 한다. 관객을 몰아경에서 "때려 잡는" 드라마 상황과 뭔가 비스무리하지 않은가. 

이래저래 우리는 '바보 상자'의 화면 워칭 밖엔 별 다른 걸 제대로 못 하는 '안방 밥통', '리빙룸의 바보'들이 돼 간다. 그리고 모두들 화려한 '공연공화국' 국민들이 돼 가고, 국제적인 '한류열풍'을 일으켜 돈과 인기도 챙긴다. 
거기에다 화상도가 "끝내 주는" 최신 테크의 신제품 텔레비전과 모니터가 해와 달과 날이 다르게 개발돼 나와, 더욱 이런 '안방 앉은뱅이' 생활을 부채질한다.

돈과 오락이 참된 쾌락을 대신한다.  
인생이 통째로 엔터테인먼트로 '규격화' 돼 가는 모습이다. 


이런 소리를 읽는/듣는 독자의 기분이야 안 좋겠지만, 뭐, 필자도 과히 기분이 안 좋다. 그런데도 자타가 부인 못 할 적나라한 현실 아닌가?

그렇게 볼 때, 드라마 중독이 주초나 마약중독과 뭐가 그리 다른가? 성격만 좀 다를 뿐 정도는 대동소이하다.

극(劇)은 극(克/剋=이김)이 아닌 극(棘/隙=가시와 틈)을 낳다 못해 극(極) 곧 끝을 낳는다.  


좀 더 나아가..현대 교회와 성도의 자화상을 보자.

텔레비전 드라마 워칭에 몰입하는 목회자를 종종 보곤 한다. 구태여 개인을 모독할 생각이 아니라..필자 자신도 포함해 우리로서 반추해 보련다. 설교자가 자신이 애시청하는 '18번' 드라마를 매 회 빼 놓지 않고 꼬박꼬박 챙겨 본다. 예배 도입부의 찬양이 지나고, 다음 경배 순서 직전까지 당회장실에서 TV 화면을 "지키는" 목회자도 없지 않단다.
심지어는 연장선상(?)에서 그 날 메시지의 '예화'로 삼기도 한다. [ > 필자도 가끔 그랬음을 자인한다. ]

급기야는, 드라마 속 가상실제 상황이 진리로 매도/착각/추정된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목회자와 교우들 사이에 정겨운 공감대가 형성되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식으로, 함께 드라마 중독을 공동합리화 하게 된다.


    "아고야~, 재미난다! 근데 음..드라마들 이거 맨날 일케 봐도 될까? 이런 시간에 성경을 보면 꽤 많이 읽을 텐데.." 
  
    "에이..괜찮아! 우리 목사님도 꼬박꼬박 보신다잖아, 뭐."


신자 부부 사이에 얼마든지 있을 만한 대화 한 토막이다.
사회 드라마 연출가/출연자들과 관객 사이의 감정이입이 신자 집안, 교회 속에까지 깊숙이 전염되는 케이스의 현장이다. 그래서, 웬만한 죄책감/죄의식도 유야무야 되고 말며, 결국 드라마가 진리화 된다. 여차하면 상황윤리가 발생하고 발전한다. 
세속 드라마가 시나브로 교회의 거룩한 메시지의 일부가 되어..바야흐로 성도의 영 곧 지성소의 영역까지 넘보게(?) 된다. 목회자는 자연히..드라마 시청의 앞잡이, '꼬시미', 드라마 속 '진리'의 전달자/리더가 된다. 이러다 보니..교회 경배실의 강단/무대와 찬양대석 등은 오늘날 교회당이 드라마 속 최신 유행을 실천하는 본거지 구실을 하는 데 철저히 기여하지 않나 싶다. 교회당 안팎에도 초미니, 수퍼 미니의 물결이 넘실거리니 말이다. 
 

하지만 보고 듣기에 즐겁다고..다 아름답고 선하지는 않다.
이래서 다른 모든 미적인 감상물/대상물처럼, 드라마 감상에도 절제가 필요하고, 정신적으로는 개인/자신을 위한 아웉사이더/인사이더 시추에이션 설정이 필요하다. 성경 진리에만 인사이더, 나머지 모든 것엔 아웉사이더로.  


드라마는 책들 속에서도 어떤 뼈대/틀 또는 부분/상황으로 나타난다. 또 영화나 상황미술 같은 데도 포함돼 있고, 음악 및 종합예술의 장르인 오페라/오페레타/칸타타/오라토리오 등에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생상의 '동물의 사육제' 등도 비슷한 틀이며, 비슷한 결과를 낳는다. 이들 장르에 진리가 포함된다면, 진리의 흉내요 카피일 뿐이다.


들머리에서 비친 대로..성경에서 가상실제적 상황은 모두 진리를 암시하고 시사하는 비유일 뿐이다. 그런데 모두가 성령님의 감화였다. 그런데도 성경을 드라마에 억지 적용하려 들거나 연계시키려는 노력이 많았다. '성극'이라는 것을 비롯해. 마치 실제를 가상실제화 하려는 듯 안간힘을 쓴다.
[ 딴 소리이겠지만
또 전술한 대로, 그리스 연극용어 '페르소나'에서 비롯된 '인격'이라는 말을 하나님께도 적용하려고들 한다. 하나님께 대하여 구태여 쓰려면, 인격 아닌 신격이어야 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지,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을 닮는가? 신 아닌 인간이 원본인가, 카피인가? ] 

예술은 예술일 뿐 진리가 아니다. 종합예술을 포함한 모든 예술이 그렇다. 그것은 인간의 미감각을 최대한 자극하지만, 그뿐이다. 예술 자체가 결코 선하거나 거룩하지 않다. 얼마든지 악한 예술이 존재한다.
단지 성령님의 영감 안에서 선과 거룩을 추구하는 예술인이 기름부음을 받고 거룩하여서, 선하고 거룩한 감동을 끼치는 작품을 만들 순 있다. 

예술 속엔 진리를 반영하는 흐릿한 거울이나 유리의 파편 같은 역할은 있어도, 그 자체가 진리는 아니다.

우리는 항성도, 등대도, 광원도 아니다. 우리는 해가 아니며..햇빛을 비추는 작은 달 정도의 존재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무대나 화면 등을 통해 해나 큰별('스타') 노릇을 하려고 든다. 큰별 같은 모습은 우리가 나중에 될 이상이지 (궁창의 뭇별처럼..), 현세와 현재의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선/미의 표준은 뭔가? 필리포서 4'8을 다양한 번역판으로 읽어 보라. 그 중 어느 한 부분이 빠져도 진/선/미일 수 없다.

우리의 이런 극적(劇的)인 자화상을 극적(克的)인 자화상으로 바꾸자.
드라마로부터 '일탈'하는 자유를 희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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